수필의 사다리 타고 오르기
- 수필 쓰는 법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모든 문학 장르의 글에 주제가 있지만, 특히 수필은 주제가 생명적이다. 한마디로 수필은 주제적 양식이다. 재제를 통해 주제를 구체화해서 형상화하는 데 수필창작의 비밀이 있다. 주제의식의 구체화란 선택된 소재에 대한 자기 해석의 한 방법으로써, 제재를 개인적인 경험으로 자기화하는 관점이다. 주제와 구성 그리고 상상은 문학의 3요소다. 특히 수필은 주제와 제재를 기본 요소로 하기 때문에 주제의 구체화는 매우 중요하다. 주제란 한마디로 글의 중심사상이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가의 요지요, 주안점이다. 흔히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쓴다느니, 무형식의 글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붓 가는 대로 쓰고 형식이 없다고 해도 일관된 주제가 있어야 한다. 일관된 주제가 있으면 그 글은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이 아니다. 주제의식이 내면화되어 있느냐 외면화되어 있느냐의 차이에 따라 수필이 되기도, 잡문이 되기도 한다.
책을 읽고 되새김질을 하게 되는 문제를 우리는 ‘주제’라고 한다. 수필에서 주제는 제재를 통해 우러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주제는 유령처럼 책에서 탈출하여 독자의 마음이나 머릿속에 계속 살아간다. 수필은 주제와 재제 중심의 문학이다. 재제에 주제가 담긴다. 유추에 의한 주제와 재제의 관계, 주제는 재제에 의해 견인된다. 주제는 이야기의 뼈대가 되는 동시에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요, 맥락이 된다. 옆길로 나가다가도 주제를 바로 찾거나 세우면 그 글은 다시 바른 궤도로 돌아오기 마련이며 중간에서 막히지 않고 술술 풀려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주제는 문장의 정점이요, 목적지며 일관성과 통일성을 생명으로 한다. 일관성과 통일성은 수미가 서로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머리와 꼬리가 맞지 않으면 그 글은 제대로 된 글이 아닌 것이다. 처음에 ‘검다’고 했으면 계속 ‘검다’는 줄거리를 잡아야 하고, ‘아니다’면 계속 ‘아니다’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예를 들어 보겠다. 입춘이 지난 어느 햇볕 다사로운 날 공간이 넉넉한 카니발을 타고 문우 몇 사람과 따뜻한 남쪽 마을 남해에 가서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해변로를 따라 산책을 하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횟집에서 싱싱한 회도 먹고, 유람선을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자. 이를 소재로 한 편의 수필을 쓸 경우, 주제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그냥 출발에서부터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을 재미있게 리얼하게 쓴다면 그것은 보고서나 기행문은 될지언정 수필이란 문학작품은 되지 않는다. 남해 여행의 과정이 하나의 수필이 되려면, 여정과 여정마다에서 느낀 점을 추출하여 그 중 무엇을 중심사상으로 의미화하여 글을 전개할 것인가. 그 중심이 곧 주제가 된다. 남해 여행은 수필가에게 있어 소재며, 현실이며, 결과다. 먼저, 부산에서 남해까지 갔다오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뇌리에 잡히는 느낌이나 사건을 골라 본다.
1) 한양 프라자 앞에서 느낀 신록의 환희
2) 고속도로를 지나는 과정에서 본 함정 단속 경찰에 대한 불쾌감
3) 가게 일 때문에 못 가지만 마중 나온 문우와의 우정
4) 따뜻한 남쪽, 남해의 아름다운 바다와 서정
5) 회를 먹으면서 생각해 본 살생과 죄의식
6) 귀로의 차 안에서 느끼는 봄나들이의 즐거움
7) 몇 년 전에 가본 모습과 달라진 어촌의 쓸쓸한 풍경을
한일어업 협정과 결부시켜 본 일
8) 노량 대교에서 탄 유람선을 통해 비로소 느낀 청정바다의 절규
이상의 몇 가지 사실적 경험을 토대로 작품화함에 있어 주제를 설정한다면 ‘봄나들이’나 ‘ ’남해 서정‘ 등 포괄적인 주제를 설정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좀더 인상적인 경이로움을 나타낸다면 열거된 몇 가지 주안점 중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 낙점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수필가의 주관, 인생관, 가치관에 따르겠지만, 그때 그때의 심경이나 기분에 좌우되기도 한다. 동일한 소재라도 그것을 추리고 얽어매는 시각과 각도에 따라 내용이나 주제가 달라질 수도 있다. 주제는 한 가지만 고집할 수 없고 때에 따라서는 복합적일 수 있지만 가능하면 한 가지로 압축하여 구체화를 이루는 게 글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위해 좋다. 또 주제는 앞의 예와 같이 세분화할 수 있고, 포괄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포괄적인 주제는 관념적, 추상적으로 흐를 수 있는 반면에 세부적 주제는 구체적, 실제적임으로 가능하면 세부적 주제를 택하는 게 좋다. 더 쉬운 예를 들면 ‘봄’이라는 제재로 수필을 쓸 때, 주제의식의 구체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생’, ‘희망’, ‘사향’, ‘회고’, ‘출발’ ‘청춘’ 등 유사한 사상이 인접 내통함으로써 주제가 분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의식의 구체화는 ‘소생’이면 ‘소생’, ‘희망’이면 ‘희망’ 어디까지나 어느 하나로 집약되고 응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자아도취에 빠져 주제를 넘고 줏대를 벗어나는 행위란 술에 취한 사람의 제자리걸음 화법 못지않게 나쁘다. 혼잣말이 길어지면 긴장이 풀린다. 어떤 한 작품의 일관된 시각을 ‘주제’라고 한다면, 어떤 한 작가의 모든 또는 대부분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시각을 우리는 그 작가의 철학이나 사상 또는 세계라 한다. 여기에서의 ‘세계’는 다른 말로 작가가 지향하는 ‘가치관’이나 ‘세계관’ 그리고 작가가 전달하려는 ‘의미’와도 같은 개념이다. 문학은 작가의 개인적인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에 만인의 진리를 반영하려는 철학과 달라서, 김정화와 세계와 송명화의 세계와 일치해야 할 필요성을 독자는 요구하지 않는다. 작가 개인의 삶과 경험이 그가 엮어낸 대부분의 작품에서 나름대로 일관성을 갖추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한 작가의 ‘세계’는 그 작가가 쓴 모든 작품을 줄지어 엮어놓은 기나긴 한 권의 책이라 이해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