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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일본 최대 경제 일간지 일본경제신문에 입사했다가 1987년에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1992년 미국 휴스턴 같은 신문 특파원을 지내다가 2001~2005년까지 서울 지국장을 역임하고 2011년 퇴사할 때까지 30년간 경제 전문기자로 활약했던 타마키 타다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는 한국과 일본 경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법무법인 광장의 고문으로 활동 중인데요.. 그 분의 저서중 베스트셀러가 된『한국경제, 돈의 배반이 시작된다(부제:잃어버린 20년이 던지는 경고)』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국경제가 요동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경제정책의 불안속에서 정치리더쉽이 상실되었다고 판단하고 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갈 곳 없는 돈은 부동산 시장에 몰리고 있으나 폭락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고 저출산 고령화로 생산인구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기업 실적 악화로 고용 불안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에서 한국경제에 대한 평가입니다. 제목에서도 나왔듯이 이 책에서는 “한국경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돈의 배반이 시작된다”라며 한국경제가 안팎으로 빨간불이 켜졌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1,500조원의 가계부채는 시한폭탄처럼 위협을 가하고 있고, 저성장 기조는 이미 만성화되어 경제성장률은 2015년 말부터 이미 0%대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사실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라고 이 책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경제전문가들은 저성장 장기불황의 고통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닥쳐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현재의 한국경제가 IMF보다 더 심각한 불황의 늪에 빠져 있다고 판단하고 한국경제의 해법을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20년’ 동안의 실패와 고통의 경험, 극복의 노하우에서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일본이 20년이란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일본의 기업들은 어떠한 위기에 처했으며,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소개함으로써 한국 기업들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이 책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경제성장을 믿고 경제회복을 믿고 돈이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돈이 우리를 배반하는 상황을 경험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동산에서 잡히시던 일을 말씀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이 말씀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거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계획대로 살지 않고 자기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인지, 어떻게 살지 않는 것이 바른 제자의 삶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고 정말 예수님을 섬기는 제자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속임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8절입니다.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긴 가장 직접적인 죄악의 행위자는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들키지 않게 위해 끝까지 위장을 했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상황속에서도 그는 예수님에게 안부를 전하며 인사를 하는 척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인사하며 존경하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예수님을 적에게 노출시키는 역할을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식이나 거짓말로 우리의 상황을 넘기려는 유혹을 받는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생활속에서 거짓말을 요구받을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화로 나 찾으면 없다고 해줘요.”라고 바로 옆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해야하는 부탁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해 그 분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없는 정말 난처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안 계십니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지금은 통화하시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말하지 못할 경우도 있고 당장 상황을 모면하거나 눈앞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기 위해서 치르는 값보다 거짓말을 함으로써 치르는 값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직장과 생활의 터전에서 정직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첫째로 성경적인 윤리 의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의 많은 내용들이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 관념이나 ‘어떻게 하지?’하며 당황하지 말고, 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하겠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하게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속임수와 거짓으로 가득하지만 신앙인들은 이런 세상속에서도 정직함과 진실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잠언 13장 5절입니다.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에 이르느니라”
서울의 어느 큰 교회의 목사님들이 목회자수련회를 갔습니다. 어느 날 그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순두부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버스 한대로 그 식당에 내려 간판을 보니 ‘원조 할머니 순두부집’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원조 집에 왔다는 기대와 기쁨으로 순두부 정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원조 할머니 순두부라 정말 맛이 있다”고 감탄했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로 등산을 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등산을 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바로 옆 집 간판이 ‘시조 순두부 할매집’이 있었고 건너편 식당 간판은 ‘원조 종가 순두부집’이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원조 순두부 할머니집’이라는 간판의 식당이 있었던 것을 보았냐”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목사님들이 서로 쓴 웃음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 어느 분이 이런 얘기를 했다네요. “웬 원조가 이렇게 많아?” 이 시대에 우리들의 윤리의식이 이렇습니다. 우리의 내면속에서 의도치않게 우리는 이런 문화적인 상황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정말 눈가리고 아웅하고 속임수로 사람들에게 우리를 치장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마태복음 5장 37절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옳은 일을 옳다고 하고 아닌 일은 아니라고 하고 잘못을 하면 용서를 빌고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잘못한 일을 옳다고 하거나 옳은 일임에도 어떤 편에서서 잘못이라고 지적한다면 그것은 정말 악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교에서 같은 학과 친구들 4명이 어느 따뜻한 봄 날 강의를 빼먹고 놀러 갔다고 합니다. 다음 날 그들은 해당과목 교수님에게 변명을 했습니다. 네 명이 함께 타고 오던 자동차의 타이어에 펑크가 나 수업시간에 올 수 없어서 결석할 수밖에 없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은 그러냐며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들은 지난 시간에 퀴즈를 풀지 못했네. 그러니 지금이라도 펜과 종이를 꺼내 퀴즈를 풀어보게나” 네 명의 학생들은 펜과 종이를 준비하고 교수님의 질문을 기다렸습니다. 교수님이 질문을 합니다. “다음 질문의 답을 쓰시오. 첫 번째 질문, 어제 타고오던 자동차의 네 바퀴중 어느 타이어에 펑크가 났습니까?” 그러자 그 학생들은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고 결국 모든 것이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거짓말로 학생들의 인격이 드러났고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며 죄지은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죄악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습니다. 속임수와 거짓은 만천하에 언젠가 다 들통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진실을 따라 살아가야합니다. 예수님은 절대 속임수나 거짓으로 상황을 이겨내시지 않고 진리이신 그 분은 진리만을 위해서 모든 상황에서 철저하게 정직과 정의로만 사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참됨으로 항상 진실의 자리에 서기를 바랍니다. 가룟유다처럼 속임수로 살고 거짓으로 치장하며 살아가다보면 예수님을 배반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참 진리를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둘째로, 욱하는 성질, 즉 자기 성질대로 살아갑니다.
누가복음 22장 50, 51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뜻과 갈 길을 방해하는 인물중에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 잡혀서 죽으실 것을 알고 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가룟 유다도 필요했고 베드로도 필요했습니다. 그 들이 막든 안막든 이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실 계획과 진행과정에서 완벽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죄를 짓든 짓지 않든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위해 그 길이 준비되어져 있었고 그 길을 걸어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차근차근 준비하셨다가 이제 때가 되어 잡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룟 유다도, 베드로도 죄악에 동참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구원의 길이 진행될 것임에도 결국은 가룟 유다의 성격과 성질상, 베드로의 성격과 성질상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일과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칼로 막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들의 기질이, 그들의 성격이, 그들의 인간적인 사고들이 예수님의 구원의 길에 활용이 되었지만 죄를 짓는 활용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일이나 배반하는 일에 우리의 기질, 우리의 성격, 우리의 가치관과 사고능력이 사용이 됩니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의 기질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데 사용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성격이나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나의 모든 것을 쓰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쓰기를 기도해야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베드로는 우리가 잘 알듯이 다혈질의 기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격이 워낙 급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이런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오늘 본문에 하게 됩니다.
로널드 에프론 박사는 돌발성 분노, 잠재적 분노, 생존성 분노, 체념성 분노, 수치심에서 비롯된 분노, 버림받음에서 비롯된 분노등과 같이 욱하는 성질을 6가지로 분류합니다. 이렇게 욱하는 성질의 원인이 다양하기에 그 해결책도 다양하게 접근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느긋함이 없고 조급한 사람, 당장 눈앞에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하기에 바쁜 사람, 자기 성질대로 반응하고 소리 질러야 속이 시원한 사람,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은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큰 상처를 입고, 하나님이 그리는 큰 그림을 볼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욱하는 사람입니다. 욱하는 성질은 ‘성질’ 이 아니라 성화되지 못한 ‘성품’입니다. 욱하는 성질을 ‘기질’ 탓이라고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뒤 끝은 없다”고 스스로를 치켜세워도 안됩니다. “혈액형” 탓을 해도 안 됩니다. 욱하는 성질은 성화되지 못한 죄성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잠언 16장 32절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성경에서도 욱하는 성질을 고쳐서 바뀐 예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인 요한은 ‘우뢰의 아들’ 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욱하는 성품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서 온유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욱하는 성질과 다혈질적인 성격이 많이 등장하지만 예수님의 승천이후 마가의 다락방의 성령세례이후에는 변화된 성품으로 사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젊은 시절 처음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제 2차 전도여행시까지는 욱하는 모습이 성경에 등장하고 있지만 노년에는 품고 이해하는 정말 사랑의 사도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욱하는 성질을 죽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기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 을 달라는 기도에 앞서, “성령의 열매” 즉 예수님의 성품을 닮고 싶다는 기도를 드리고, 주님의 성품을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 마음을 잘 다스리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잠언 4장 23절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영적 싸움이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하고 욱하는 마음으로 분을 내었다고 할지라도 그 분을 계속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성품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27절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성품이 보잘 것 없으면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욱하는 성격,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기 쉬운 성격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품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며 주님의 뜻을 이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셋째로, 권력에 집착합니다. 세상적 욕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52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오늘 본문에 등장한 대제사장들과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 장로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예수님을 비난하고 비방하고 죽일 기회를 찾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 와서 이제 구체적으로 준비해왔던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하며 가룟유다를 매수하여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마치 강도를 잡듯이 예수님 자신을 잡기 위해 무기를 들고 찾아왔냐며 이들을 책망하십니다. 결국 이들은 어떻게든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자신의 종교적인 권위를 지키고 그들의 권력과 재산을 유지하려는 욕망으로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것입니다. 이들은 종교인이라고 하지만 세상에서 누린 권력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가져다주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부각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이 빼앗길 것이라는 고민이 있던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께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열매맺는 사람들을 비유로 하시는 말씀중의 한 부분입니다. 씨앗이 돌밭에 떨어진 것, 씨앗이 가시떨기밭에 떨어진 것, 씨앗이 좋은 밭에 떨어진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시떨기에 떨어진 사람들은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 장로들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집착과 유혹에 빠져있으면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세상에 매인 끈을 끊으려고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수도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나중을 위해 얼마간을 남겨서 숨겨두었다고 합니다. 그가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은 그의 내면을 간파하고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대가 진정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마을로 내려가, 고기를 조금 사서 그대의 벗은 몸에 달아매고 다시 이 곳으로 오게나.”
그는 스승의 지시대로 자기의 몸에 고기를 달고 산길을 되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몸에 달린 고기에서 냄새가 주위로 흩어지면서 냄새를 맡은 들개와 새들이 그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는 들개들과 새들에게 대항하며 도망쳤으나 그것들은 끝까지 따라붙었습니다. 아무리 대항하며 도망쳐도 소용없었습니다. 들개들과 새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그는 많은 상처를 입었고 사력을 다해 도망치느라 힘이 빠졌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들개와 새들이 자신에게 덤비는 이유가 자신 몸에 달려 있는 고기인것을 깨닫고 그 고기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짐승들은 이 사람에게 달려들지 않았고 자신의 몸을 지키며 편안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스승에게 돌아와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보였고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버렸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자기의 돈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마귀가 이처럼 공격을 한다네. 모든 것을 완전히 벗어버린 진정한 빈 몸이 되게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권력, 세상의 돈, 세상의 지식등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신앙의 걸림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돈, 권력, 명예, 가족, 지식, 건강... 여러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지는 집착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결국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많은 염려와 걱정, 집착과 욕망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제대로된 신앙생활도 할 수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제자, 참된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했다면 그래서 주님안에서 완전한 쉼을 얻고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이제 더 이상 세상적인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가지고 있는 기득권과 재산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로만 갈 때 참된 평안이 있음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잡히시던 그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예수님의 뜻에 반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었는 지, 혹은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나섰지만 예수님의 뜻과는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었는 지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혹은 정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신앙으로 인해 평안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가치관처럼 속임수를 부리고 거짓으로 우리의 삶을 포장하는 그런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질대로 살면서 화내고 욕하고 싸우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권력과 재산등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지켜내겠다는 집착으로 인해 이웃을 해롭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잔꾀를 부리고 거짓말을 쉽게 하고 사기치며 화내고 욕하고 싸우고 끈질기게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정직과 성실로 행하며 진실됨으로 사람을 대하며 가진 것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실 은혜를 기대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간본성대로만 살아서 정말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가운데 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져주셔서 인품과 성격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