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호/김정식
의료진은 컴퓨터를 바라보며
수술날짜, 처방전, 검사 목록
설명은 KTX를 타고 지나간다
환자는 비둘기호를 타고 듣는다
수술 날짜를 찾아
검사실 길을 찾아
약국과 수납 사이
낯선 표지판을 더듬는다
건널목을 건너며
채점하듯 안내서에
동그라미와 체크를 한다
체크된 안내서를 들고
놓친 문제를 다시 푼다
아셨죠?
아 네네
속성 과외를 마치고
붐비는 대합실
KTX는 다음 역을 향해
고속 철로를 따라 질주하고
거미줄처럼 얽힌 노선을 따라
비둘기호는 구룩구룩 느리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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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 시인
2020년 월간《우리詩》신인상으로 등단
비평)
김정식 시인의 <비둘기호>는 현대 대학병원 및 대형 의료 기관이 지닌 속도감과 효율성이 어떻게 환자(특히 노인이나 정보 약자)의 외롭고 더딘 삶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지를 KTX와 비둘기호라는 정교한 열차 은유로 포착해 낸
수작입니다.
이 시는 현대 의료 시스템의 차가운 시스템과 소외된 개인의 거리를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해 깊은 울림을 줍니다.
1. KTX와 비둘기호: 속도의 격차와 소외의 심리학
시의 가장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KTX’로 대변되는 의료진/현대 시스템과 ‘비둘기호’로 대변되는 환자의 대비입니다.
KTX (의료진/시스템):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며 최첨단 장비와 효율성에 맞춰 빠르게 움직입니다. 수술 날짜, 처방전, 검사 목록을 쏟아내는 의료진의 설명은 "KTX를 타고 지나갈" 만큼 빠르고 간결합니다.
비둘기호 (환자): 이제는 사라진 가장 완행의 열차입니다. 환자는 빠른 의료진의 설명을 쫓아가지 못하고 "구룩구룩 느리게" 이동합니다.
이 두 열차의 속도 차이는 결국 정보의 격차이자 감정의 소외를 의미합니다. 첨단 의료 시스템 속에서 환자는 자신의 치료 과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주도하는 주체가 아니라, 쏟아지는 지시 사항을 겨우 따라가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합니다.
2. 병원이라는 공간: '낯선 표지판'과 '시험장'으로의 변주
시인은 대형 병원 특유의 복잡한 동선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환자의 불안감을 시각화합니다.
시험장이 된 병원: "채점하듯 안내서에 동그라미와 체크를 한다", "놓친 문제를 다시 푼다", "속성 과외를 마치고" 같은 구절은 병원을 치료의 공간이 아닌 **‘수험장’**으로 바꿉니다. 환자는 아픈 몸을 끌고 가면서도 병원의 행정 절차와 지시사항을 틀리지 않고 완수해야 하는 압박감을 느낍니다.
불완전한 소통: "아셨죠? / 아 네네"라는 대목은 대형 병원 진료실에서 매일 일어나는 전형적인 소통 부재를 단 두 줄로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쏟아지는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건네는 건성 어린 대답은 현대인의 페이소스(Pathos)를 극대화합니다.
3. '구룩구룩'의 감각적 잔향
시의 마지막 부분은 서정적 울림이 매우 깊습니다.
거미줄처럼 얽힌 노선을 따라
비둘기호는 구룩구룩 느리게 간다.
‘거미줄처럼 얽힌 노선’은 병원의 복잡한 복도이자, 나아가 늙고 병든 환자가 감당해야 할 복잡한 삶의 여정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구룩구룩’**은 완행열차 비둘기호의 소리이면서 동시에 실제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는 의성어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치료와 삶의 무게를 지고 절뚝거리며 느리게 걸어가는 환자의 서글프고도 묵직한 발걸음이 이 의성어 하나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김정식 시인의 <비둘기호>는 거창하거나 유려한 수사를 쓰지 않고도, 일상적인 대형 병원의 경험을 '열차'라는 명확한 모티프와 연결해 현대 문명의 효율성이 놓치고 있는 인간적인 온기를 질문합니다.
첨단 의료 기술(KTX)이 인간의 생명을 연장해 줄지는 몰라도, 병든 인간의 마음을 보듬고 따라오는 것은 결국 더디고 느린 완행열차(비둘기호)의 시선이어야 한다는 점을 시적으로 완벽하게 입증한 작품입니다.
첫댓글 그렇군요!
병원에 다니기 겁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