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음환은 신강에 유배된 후 역사탐유록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것에 따르면 9월 22일 그는 참내하여 서태후나 광서제를 만나고 있다. 서태후 훈정이 공포된 다음날이다. 황제는 영대에 유폐되게 되었으므로, 같은 날 끌려나와 서태후 옆에 앉혀진 것 같다. 서태후는 발 안쪽에 있고 광서제는 구둘 쪽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서태후는 군기 대신인 류수항에게 캉 유웨이 일당을 체포하는 유시를 작성시키고 있었다. 류수항은 이것을 광서제에게 제출했다. 광서제는 이것을 서태후에게 전달한다. 서태후는 다 읽고나서 광서제에게 넘겨주었다. 「황제, 그 취지를 지지하고 군기 제신을 바라보며 한동안 주저하다가 비로소 말을 내리다」라고 장음환은 쓰고 있다.
이때의 광서제 심정은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가 신임한 사람들을 체포하는 상부 지시를 자기 손으로 집행 기관에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잠시 주저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광경을 보아야 했던 장음환도 괴로웠을 것이다.
다음 9월 23일, 오전 8시경 제독 숭례가 장교를 파견해 왔다. 제독의 관청까지 동행을 요구하는 것이다. 실은 이것은 어제 그도 목격한 그 유시가 집행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시의 종이가 전달되는 광경을 보았으나 그 내용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 속에는 그의 이름도 있었던 것이다. 아직 조반을 먹지 않았으므로 그는 장교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식사를 했다. 그리고 가자고하니 그 장교가 「안에 들어가 부인과 이별인사를 하고 오십시요」하고 말했다. 「나 비로소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자기의 신념에 충실했던 결과이므로, 그는 각오하고 구태여 부인에게 이별을 고하지 않았다. 제독의 관청에 가서도 간부급은 누구도 나와 있지 않았다. 하루종일 그는 기다려야 했다. 오래 걸릴 것 같자 사람을 보내어 고리 상자를 갖고 오게 했다고 한다.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고, 그는 그곳에서 하루밤을 지냈다. 그리고 다음날, 9월 24일 비로소 형부로 인도된 것이다. 형부의 감옥에서 이틀을 지냈지만, 그동안 심문 같은 것은 없었다.
9월 28일, 「비차출결(備車出決)」(처형을 위한 차를 준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듣고, 그는 옥졸에게 몇 사람이 남느냐고 물었다. 옥졸은 두 사람이 남는다고 대답했다. 그 두 사람은 누군가 하고 물은 즉, 양심수와 강광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아 나도 그만이로구나」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다.
24일에 형부로 인도되었을 때 장음환은 자기 외에 담사동, 임욱, 양예, 유광제, 서치정, 양심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강광인이 투옥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8명이다. 6대의 차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 그리하여 문을 닫고 조용히 기다리다.」 그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15분도 못되어 6명이 끌이어 나갔다. 옥졸이 말한 인원수는 맞았지만 남게 된 사람의 이름은 틀렸다. 처형되지 않은 것은 장음환과 서치정이었던 것이다. 처형된 6명은 후에 「무술 6군자」로 불리었다.
담사동은 백일 유신의 종반이 되어 간신히 호남에서 상경했다. 병도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을 것이다. 원세개 설득이라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았으나 이것은 잘 되지가 않았다. 원세개의 일기 속에는 영록에게 말한 것은 21일이 된 후라고 했으나, 거짓의 의심이 짙다. 그 전날에도 영록을 만나고 있었다. 서태후의 훈정이 결정된 후, 즉 변법파가 실패한 후 담사동에게 들은 얘기를 영록에게 고한 것으로 되면 자기 탓이 아닌 것으로 된다.
변법파 사람들은 원세개의 밀고로써 계획이 실패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득 역할을 했던 담사동은 이것에 책임을 느끼고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게는 탈출의 기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