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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반백년 전(1967년) 10월 27일,
우리 부부는 신혼여행을 포기했다.
서민에게 외국은 꿈에서라도 불가능했고 멀리 잡으면 제주도가 되고 길게 잡아야
2~3박으로 온양 또는 유성의 온천을 다녀오는 정도였지만.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복합적인 이유로 생략했던 것인데, 어느새에
50년 세월이 갔다.
금슬이야 어떠하던 장기 예금으로 치면 꽤 많아졌을 원리금이다.
그래서 10년이 한해처럼 달콤했던,1년이 10년같이 지겨웠건, 50년을 5일로 압축
하고 따로의 세월도 그렇게 하여 7박에 8일을 여정으로 금혼여행을 계획했다.
딸에게만 살짝 일렀다.
외화(外華) 아닌 내실있는 선물을 찾아보라고.
난생 처음인 부탁인데 두 딸이 정한 듯 하여 송금했다.
아내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놀라도록 하는 이벤트(event)성이라 극비(?)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하마터면, 필명이 오 헨리(O. Henry)인 윌리엄 시드니 포터(W. Sydney Porter/
1862~1910/미국)의 크리스머스 선물이 김가네의 금혼선물로 번안될 뻔 했으니.
내 지갑 사정에 맞는 선물을 준비하는 중인 딸들에게 아내는 자기의 금목걸이를
풀어주며 영감에게 줄 선물을 만들라고 했다는 것.
각기 따로 밀명을 받은 딸들은 부모를 감쪽같이 속이고 준비한 것이다.
큰 딸의 집에서 두 딸이 마련한 길 떠나기 전야제에서 아내의 목에는 업그레이드
된 목걸이가 걸리고, 내 손목에는 체인 팔찌가 차이고.
짧기는 해도 큰 딸이 주선,주도한 다낭(베트남)여행은 부모의 금혼여행을 연계한
프로그램이었음을 알고 있으며 아내의 몸 상태를 살펴보는 기회였다.
아내의 몸이 감당할 수 있다면 하루에 10리를 못간다 해도 100일쯤 장기 여정에
들고 싶지만 이것이야 말로 헛된 꿈이다.
2015년에 반년의 까미노에서 돌아올 때 그렸던 그림이 중형버스를 하우스카(ho
use car)로개조하여 아내와 함께 맥시멈 2년간 전국을 순회하는 것이었다.
전국이 232개 시군구니까 각 3일씩 묵게 되는데 지역따라 조금씩 조정하면 된다.
귀국하여 즉시 차량 물색에 들어갔으나 이것도 호사다마?
아내의 체력과 적응력에 대한 큰 딸의 회의와 관계 없이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아내가 교통사고라는 마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외적인 마가 없다 해도 나빠진 내 시력 때문에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고.
(운전을 할 수 없으니까)
마지막 선택으로 작은 딸의 협조를 받아 7박 8일의 차량여정을 그렸다.
차를 타고 달리면 주마간산격도 될 수 없다 해도 내가 걸었던 서-남-동 길(메뉴)
주변이라도 순회하는. (서쪽은 대부분 길이 없으며 있다 해도 2발만 허용하니까)
내가 존경하는 두 분 은사중 한 분의 함자로 정한 길이다.
사계(斯界)의 개척자에 다름아닌 분.
내가 간조때 걸었던 해변길이 만조에 의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 처럼 당시에는
애써 길(학문)을 열어도 어느 불순세력에 의해 짓밟히고 왜곡됨으로서 늘 고독할
수 밖에 없던 분의 함자다.
첫날(10월 27일)
인천 청라지구(큰 딸 집)를 떠난 우리(부부와 운전을 맡은 작은 딸)는 서해대교의
행담도휴게소에서 첫 휴식을 취했다.
시화방조제와 남양만은 얼씬도 못했고 마주보는 평택과 당진 간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아산만도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내가 걸었음은 물론 1급 차로지역인데도 주말(금)의 차량증가를 이유로 운전자가
기피했으니 참아야 할 험로 8일이 난감하게 보여왔다.
생략을 거듭했으나 그럴 수 없는 새만금방조제.
땅덩어리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여의도의 140배, 뉴욕 맨하탄의 5배, 파리의 4배,
바르쎌로나의 3배, 서울특별시의 3분의 2나 된다는 땅인데 어찌 외면하겠는가.
보고 또 봐도 더 보고 싶고 볼 수록 먹지 않아도 포만감을 갖게 하는 땅이다.
남의 나라를 강탈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땅인데 내 일행은 왜 뿌듯
함을 느끼지 못할까.
34km나 달리면서도 쉬면서 자상히, 요리조리 살펴보고 싶은 맘이 왜 일지 않을까.
새만금 외에도 뭍을 만들 바다는 서해와 남해에 대대손손 일거리로 무궁무진하다.
이 방조제의 남단인 부안땅에는 내가 그냥 갈 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될 집이 있다.
2012년에 서-남-동 길을 걸을 때 인연 맺은 집(메뉴 '서-남-동 길' (11) '곰소항
관광기사식당' 참조)이다.
그러나, 곰소항(부안군 진서면) 부근의 그 집을 어렵사리 찾았건만 폐업했단다.
옛 전화번호는 공번 또는 불통이고.
곧 저녁노을이 시작될 시간이기 때문인지 운전자는 포기를 바라지만 주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가게에 들러 묻기를 거듭했다.
운전사의 불만이 팽배해 갔지만 포기하지 않은데에 대한 보상인가.
한 가게 주인에게 묻는 중에 모여있는 또래의 여인들 중 하나가 참견했다.
왜 찾느냐고.
연유를 들은 그녀는 비로소 경계심(?)을 풀은 듯 내가 찾는 여인이 자기 친구라며
자기네도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이란다.(그네도 친구의 폐업사실을 모르고 온듯)
마늘심는 중이라는 밭까지 골목들을 한참 누비고 가서 만나, 그 때 일을 회상하는
얘기를 나누고, 선물을 건네주고 돌아나와 다운타운의 식당으로 갔다.
나는 좀처럼 시장기를 느끼지 못한다.
공동생활에서 내가 식사를 제의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누군가 선도하지 않으면 아마 내 일행은 종일 굶게 될 것이다.
여정 첫 날인 오늘부터 그랬다.
종일 간식거리로 때우고 첫 외식이 저녁식사였으니까.
50년을 한 식탁에서 식사했음에도 아내가 게장 마니아인 줄 몰랐다.
젖갈 유명세가 크게 붙어있는 곰소항에서 먹은 게장백반이 첫 식사시간의 지연에
대한 불만은 잠재운 듯 하지만 식사문제는 시한폭탄에 다름아니겠다.
더 큰 폭탄은 잠자리일 것이다.
첫날은 불만이 아직 쌓이지 않은 상태라 패스(pass)했지만.
40대딸이라 해도 금혼여행 길의 부모와 함께라면 평생(평생이라해도 몇년이 남았
겠는가)이 아닌 7일쯤은 감수할만 하련만 참을성이 워낙 부족한 모녀라.
행담도휴게소(위)와 새만금방조제(아래)
(신시도와 무녀도의 연육교가 완공되었음에도 입구에서 진입을 막고 있다.
연육교로 말미암은 이점보다 단점에 초점을 맞춘 섬주민들의 항의를 소탐대실로 보지 말고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새만금방조제의 배수갑문인 신시대교)
(새만금방조제 준공기념 조형물/아래 그림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게장백반식당(위)과 숙소(아래/삐딱한 와인 잔)
둘째 날(10월 28일)
마음 어디에 자리잡고 있던 짐을 벗었거나 빚 갚은 후의 홀가분한 기분이라 할까.
딸의 불만과 달리 편한 밤이었다.
우리가 일박한 펜션은 지네가 득실거린다 해서 지네산이라 불린다는 산의 한자락.
백제 30대 무왕(武王/600~641) 34년(633년)에 승려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
했다는 1400년 고찰, 내소사(來蘇寺) 입구에 자리한 메이플 스토리(Maple Story
/단풍이야기?).
아직은 묘목수준이지만 정원 단풍나무들이 성장하면 환경에 걸맞는 이름이겠다.
칠흙 밤이었기 때문에 느끼지 못했는데 순박한 이미지인 주인내외의 친절과 호의,
아침의 산뜻하고 상쾌한 공기와 주변 환경이 딸의 불만을 깨끗이 몰아냈는가.
다행히도 명랑한 출발을 하게 되었다.
안식일(토요일 예배)을 고집하는 것 외에는 교리가 다른 모녀.
여행중이라는 이유로 예배를 생략하는 모와 여행중에도 예배참석을 고집하는 딸.
여정에 들기 전부터 설왕설래했지만 칼자루(운전대)가 딸의 손에 있지 않은가.
전북의 마지막인 고창을 생략하고 교회가 있다는 전남의 영광으로 직행했다.
변산~고창 사이도 볼거리가 많은 해변이라 두 발로는 꼬박 하루거리 곰소만인데.
딸이 교회에 간 영광읍의 대기 1시간에도 아내의 부족한 참을성이 노출되었다.
우리를 위해 있는 우리의 시간이라 마음 먹기 달렸건만 왜 긍정적이지 못하는지.
하마터면, 시체실에 안치되어 있을 뻔 했던(교통사고로) 영광종합병원과 도심의
거리를 나혼자 살피고 온 것이 부화가 치밀도록 독단적인 행동이었던가.
함께 걷는 것을 나도 바라지만 걷기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는데.
명품 드라이브 코스인 노을길(백수해안)에 들려면 법성포 초입을 거쳐야 한다.
굴비라면 단연코 법성포 굴비라 할 만큼 법성포는 굴비의 메카다.(메뉴'서-남-동
길' (14) '굴비의 지존 법성포 굴비' 참조)
그래서 굴비정식을 계획하고 법성포 중심지로 가기는 했으나 이 식사계획을 취소
하고 한 두름(20마리)을 택배(선물) 위탁한 후 법성포를 떠났다.
취소를 전원일치 합의한 이유는 식당들의 BA(Business Administration/경영)다.
4인 이상의 메뉴 외에는 없기 때문에 1~3인이라도 최소 4인상을 받아야 한다니.
우리의 비판이 먹혀들 리 없고 그들의 방식에 변화 없이도 여전히 호황이겠지만,
그래서 더 이해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소비자와 외식문화다.
고객(孤客)은 고객(顧客)이 아니라 고객(苦客)이 되는 현실이 어느때쯤 개선될지.
이베리아반도의 까미노(Camino)가 내게 가장 편한 길인 이유 중 하나가 고객(顧
客) 대접을 받는데 고객(孤客)이 문제 되기는 커녕 되레 좋은 조건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노을길만은 다소 위태로운 구간 외에는 안온하고 낭만적인 해안길이다.
서로 법성포를 경유하던 홍농읍과 백수읍을 직결하는 영광대교 위로 달리고 있는
차량들이 아스라이 보일 정도로 수면에서 높은 사장교가 신설되어 있다.
전번에 걸을 때는 공사중이었기 때문에 홍농에서 야영하고 법성포를 경유했는데,
590m 다리의 개통으로 차로도 30분이상 걸리던 길이 10분이내로 단축되었단다.
백수해안 노을길이 내게는 4번째인데도 경이적 변화와 발전에 탄성이 절로 나오
는데 이 모녀의 감성은 왜 무딜까.
피리를 불어도 왜 춤 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어찌하여 가슴을 치지 않을까.(성서)
복막념으로 객사할 뻔 했던 석구미해수찜(백수읍) 지역은 아예 접근을 하지 않았
으며 과속 차량에 받혀서 불귀객이 되려다 만 함평길은 내 맘속에 있을 뿐이었다.
운전자의 관심은 오직 밤의 잠자리요 아내는 잠에 빠지는 것이니 이 여정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함평을 스쳐가는 지방도의 노변에서 산 모시송편(영광특산물)을 차내의 간식으로
하여 땅끝까지 내비(navigator) 따라 가는 차에 타고 있을 뿐인 나.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땅끝마을의 근해 도서를 왕래하는 여객선부두.
주말의 저녁노을이 시작되려는 때, 뭍을 떠나 어느 섬으로 가는 사람들과 차들을
태우고 싣고 출항하는 배에 손을 흐들어 주었다.
이 시간에 이 땅끝에서 작별할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배웅이라도 나온 듯이.
숙소를 찾아가기는 아직 여유가 있는 시간이라 나는 옛봉수대가 복원되어 있으며
지금은 전망대까지 있는 해발155m 갈두산에 올라보고 싶었다.
한사코 걷기 싫어하는 모녀는, 교통약자를 위해 설치했다지만 건강인이 더 많이
이용하는 모노레일카를 타면 되니까 내 제의에 응하리라 생각했는데 no.가 왔다.
잠자리로 해변의 펜션을 선택했으나 주말이기 때문인지 만원사례.
전에 완도로 이어지는 해안도로(77번)를 걸을 때 눈에 담아뒀던 해변의 숙소들이
곳곳에 있으나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으려 하지 않았다.
서남해안에서는 2발과 4발이 함께 이용하는 유일한 길이며 명픔 경관 구간인데도.
내친김에 싱싱한 회를 먹고 아침에 완도타워에 올라볼 요량으로 완도항까지 갔다.
1월의 한라산등산을 위해 완도~제주 선편을 자주 이용했으므로 익숙한 곳이다.
그러나 잠자리 구하는 일이 예상 외로 난제가 될 줄이야.
완도대교의 개통으로 뭍으로는 해남과 강진의 끝이며 제주행 선편이 있을 뿐인
섬에서 묵는 여객이 왜 이리 많을까.
원하는 펜션은 많이 멀리 있고, 괜찮다 싶은 모텔들은 풀(full)이고, 딸의 심기가
저기압으로 급강하하고.
만복(滿腹)으로 국면이 전환되기를 기대하며 횟집으로 갔다.
분위기를 선호하는 딸에게는 내키지 않을 허름한 집이다.
그러나, 외관과 달리 인기있는 집인 듯 늑장부렸더라면 회마저 먹지 못할 뻔 했다.
아내가 게장 마니아인 것을 처음 안 것 처럼 딸이 회 도락가인 것도 처음 알았다.
회로 만복이 된 딸이 기압골을 벗어남으로서 식당주인이 소개한 길 건너의 숙소도
OK.
그러나 겨우 한밤 묵을 방에 이처럼 시달리기를 5번이나 더 해야 한다?
살얼음판이며 본말이 전도된 여정. <계 속>
첫댓글 보기 좋습니다. 그리고 금혼식 축하합니다. 노래에나 있는 단어인데...이루셨으니 만복입니다. 2018년도 건강하시기 기원합니다.
늙은이는 추억을 먹고 산다잖아요. 먹거리가 될 만한 추억이 있는 것이 다행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