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시 문화관광협회 주관으로 충무공 김시민 장군(천안출신)의 전적지 진주성을 돌아보는 역사 문화탐방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대첩은 참으로 위대한 전승인 반면, 그 이듬해 발발했던 계사년 전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처절한 전투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뜻깊은 유적지인데다, 왜장을 끌어안고 자살했다는 의기 논개로 유명한 촉석루와,남강에 등불을 띄워 군사적 신호와 전술, 그리고 가족간의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쓰였다는 유등(流燈)의 전래이야기가 있는 역사의 현장을 한번 돌아보았기에 그 내용을 간추려 올려볼께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동상입니다.(*충무공이란 무신들에게 주어졌던 최고의 영예로운 시호로써, 고려조에선 2명,조선조에선 9명의 충무공이 나왔으며 그중 대표적인 분들이 성웅 이순신을 비롯해서 김시민, 남이, 정충신등의 장군들임)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 장군은 3800여명의 수성군과 왜군 2만여명의 대적에서 대승을 거두어 진주성 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기록되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 일어난 계사년 전투는 왜군 10만병력에 아군은 군,관.민 을 합하여 7만5천이었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고, 7만이 넘는 군관민 역시 몰살당하는 처절한 전투를 치뤘다고 하네요.
이 당시 의병중에는 전라도 출신들이 대거 참여했었다고 하니 우리 선조중 희생을 치룬분도 계시지 않았을까,,,?
ㅡ문화 해설사도 한컷 ㅡ
그녀는 화향(花香)십리,주향(酒香)백리,인향(人香) 천리를 설하며
자신의 향기를 뿜어내고자 열정을 쏟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그 추억 오래도록 간직할수 있다면~
때마침 남강 유등놀이 축제 행사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밤이면 오색찬연한 불빛으로 볼만한 장관이 펼쳐진다고 하는데 볼수없었던게 좀 아쉽더군요...
건너편 작은 돌이 논개가 적장을 끌어안고 투신했다는 의암(義岩)이라 하네요
건너가기도 쉽지않고 한평 남짓한 그런곳으로 어떻게 적장을 유인했는지...?
암튼 그랬다고 하니 믿어야겠지요,...
의암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 여인은 어떤 상념에 젖어 있을까?
<의암 사적비에 새겨진 詩>
이 바위 아닌들 어찌 죽을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이곳 진주에는 논개말고도 산홍이라는 기생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100년전 이지홍이라는 벼슬아치가 미색으로 소문난 산홍을 처음만나
첫눈에 반하여 자신의 큰재산을 주겠다고 회유하며 첩이 되어달라고 간청했대요.
산홍은 그 간청을 거절하고 술상을 뒤엎은 뒤 자결하고 말았다는군요.
ㅡ진주 국립박물관입니다.ㅡ
아레 사진은 임진왜란 당시부터 있었다는 나무들입니다. (수령 600년)
아마도 이 나무들은 억울하고 비통했던 사실들을 다 간직하고 있겠지요...?
ㅡ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 최고회의 위원장시절 호국사에서 모시던 유공장군들을 별도로 창렬사를 지어 모시도록 했다함ㅡ
거대한 릉ㅡ이건 왕릉이 아니라 귀무덤 이랍니다.
일본 교토에 가면 이총(耳塚)과 비총(鼻塚)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이총은 귀무덤이고 비총은 코무덤이지요.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은 우리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잘라서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다니 천인공노할 일입니다.
이 귀무덤은 진주성내에 있는게 아니고 삼천포로 빠지는 중간 사천에 있습니다.
선진성의 간판은 우리가 식사를 했던 식당이구요.
일본 교토(京都)시 동부 시치조(七條)지역에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조선인 12만 6천여명의 귀와 코를 베어다
묻어놓은 귀무덤(耳塚)과 그무덤을 지키고 있는 義人 시미즈 시로(淸水四郞)씨다
시미즈씨(95세)는 어떠한 댓가도 받지않고 일생동안 이무덤을 돌보며
"과거 일본인들의 잘못을 반성하기위해" 매일같이 청소와 벌초를 하며 이곳을 지켜나가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