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그리고 이승만
우장춘 박사가 왜 아직도 ‘씨 없는 수박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가 없다.
씨 없는 수박은 ‘기하라 히토시’ 라는 일본인 농학 박사가 처음 만들었고 단지 그걸 우 박사가 한국에 들고 왔을 뿐이라고 한다. (박은봉의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참조)
우장춘 박사는 일제와 6.25 한국전쟁으로 폐허된 한반도를 먹고 살만한 땅으로 바꿔 놓은 구국의 위인이다.
그러나 이런 우박사의 출생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우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은 친일부대 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하기도 했는데 아관파천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일본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일본에서 일본 여자 ‘사카이 나카’ 와 결혼해 사내 아이 둘을 낳았는데 장남이 바로 우장춘이다.
우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은 어린 장춘이 5살 되던 무렵 대한제국이 보낸 자객에 의해 일본에서 살해되고 만다. 이때부터 우장춘 가족은 일본에서 떠돌이 집시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되는데 조선 땅에서는 배신자에 역적의 가족, 일본에선 이용가치가 없는 인물이다 보니 남은 가족들의 살림살이는 안 봐도 뻔한 일. 졸지에 과부가 된 우장춘의 어머니 일본인 사카이는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나머지 어린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겨 버린다.
고아원에서 엄청난 따돌림을 당하는 어린 우장춘은 비뚤어지기는커녕 기어코 훌륭한 사람이 되어 너희들에게 복수하겠다라는 일념뿐이었다고 한다.
우장춘의 어머니도 매우 야무진 여성이었나 보다. 기어코 돈을 벌어 장춘을 집으로 다시 데리고 돌아온다. 그리고 대학까지 공부시킨다.
그것도 명문 동경제국대학을,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를 졸업한 장춘은 일본 농림성에 취업해 혁혁한 업적을 쌓으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던 1937년 어느 날 우장춘은 근무지 농업성에서 일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된다. 견디다 못해 아는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스나기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업적을 남기는 논문과 공문에는 고집스럽게도 자신의 한국 성 인 ‘우’를 사용했다.
우장춘에게 일본은 혹독한 굶주림과 차별과 폭력의 나라였다.
일본에서 이민자가 얻을 수 없는 엄청 높은 지위를 얻긴 했으나 그건 순전히 장춘이 잘 나서 그리 된 거고 아버지를 포함한 자신의 가족을 짓밟았던 제국주의 일본은 우장춘에게는 영원히 함께하지 못할 적국일뿐이었다.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 매달리는 그에게 조국 조선은 오히려 역적의 아들로 낙인찍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조선은 그에게 뿌리였던 것이다.
농업성에서 해임된 그는 지방의 농장장으로 재취업 연구에만 몰두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육종학계 최고의 권위자라는 명예를 뒤로 한 채 일본 이민자 역사에 빛나는 태양으로만 만족하며 지낸 것이었다.
그러나 우장춘의 운명은 정해진 사명이 따로 있는 듯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이, 대한민국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해방된 조국은 1947년 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당시 일본에서 이름께나 날린
실력자 우장춘을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찾았다.
가칭 ‘한국농업과학연구소’라는 단체를 만들어 놓고 그에게 책임자 자리를 제공했다.
당시 우장춘의 가족에게 ‘이적료’로 1백만 엔 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우장춘은 이미 골수 깊은 민족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조국 조선에서는 죄인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거금의 정착금까지 쥐어 주니 말이다. 무척이나 감격 그는 이 돈을 모두 한국에 심을 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렸다.
지금의 동래 원예고등학교 자리에서 우장춘의 한국생활은 시작됐다.
당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우장춘은 면재해 준다고 하는데도 기어코 자원입대를 하고 말았다. 이후 전쟁으로 나라는 만신창이이고 부산은 피난민들로 엉망인 상황에서 우장춘은 오직 먹거리를 위한 우량종자개발에 전력투구했다. 종자개발에 주력한 우장춘은 최단 시간 내에 배추, 무, 고추, 오이,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 모두 20여종의 품종 종자를 개발하는데 성공 심지어 한해 두 번 수확하는 이모작 벼 품종까지 개발했다.
뿐만 아니라 우장춘이 손을 댄 우량종자 가운데는 외국 종자를 능가하는 품종이 있었는데 바로 제주 감귤이었다.
이 제주감귤의 종자개발과 생산으로 말미암아 제주도 과수농민들의 삶은 물론 우리 국민의 건강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이 감귤은 제주와 남해안 일대에 생산지를 구축 본격적인 감귤재배를 하도록 장려하기도 했다.
강원도 감자가 특정 바이러스에 취약 한번 창궐하면 전멸하는 원인을 발견 종자를 변형시킨 새 품종을 개발하기도 했다.
또한 ‘페튜니아’라는 화초를 개발 우리나라 원예 산업을 일으켜 세웠고 일본에 역수출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이처럼 우장춘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시켜 준 게 아니라 경제와 산업기반의 창출까지 닦아주는 등 그야말로 낙후된 농업의 기초를 확실하게 다진 인물이었다.
처음 우리말도 서툰 가운데 조국애라는 하나만 가지고 온 그는 조국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일에 대한 집념은 그가 말년에 십이지장 궤양으로 병원에 입원 했을 당시 실험 중이던
일식이수(一植二收)의 벼를 비닐봉투에 넣어 링거병과 함께 머리맡에 걸어 넣고 관찰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우장춘을 아주 우습게 여겼다.
당시 권력자들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여기에 유창한 일어만 하고 우리말은 잘 못하는 우장춘을 밉게 보았다.
사실 우장춘은 읽기, 쓰기, 듣기 등의 한글에는 매우 능통했으나 말하기는 매우 서툴렀다. 그래서 정부는 아예 대놓고 구박하고 모욕을 줬다.
심지어 공개석상에서 일본말만 지껄이면서 무슨 애국 하냐고 망신을 준 정치인도 있었다한다.
세계적인 유전석학이 그의 조국에서 심한 모멸감에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일본에 있는 어머니가 유명을 달리했는데 이승만 정권은 출국을 금지시켰다. 또 그이 딸이 결혼을 하는데도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평소 바른말을 곧잘 하던 우장춘이 이데올르기 문제에 관해 입바른 소리를 한 모양인데 이게 화근이 되어 결국 이승만 조차 ‘사상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출국을 금지시켜 버린 것이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 못한 우장춘.
자식으로서 아비로서 가슴 찢어지는 고통이었지만 우장춘은 끝까지 사랑하는 그의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마지막 생을 바쳤다.
1959년 죽는 순간까지 우수한 벼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던 그는 죽기 하루 전 정부로부터 문화포장 훈장을 준다고 하자 “조국이 날 인정했구만, 좀 일찍 주지...”라고 했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은 우장춘을 철저히 이용만 해 먹었다.
그들은 우장춘의 업적을 기록에 남기는 것조차 소홀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구국의 영웅이자 만능 천재 과학자이면서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에 대해 너무도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고 없는 지금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터넷에서 암만 검색을 하고 서점에서 도서 검색을 해 보아도 우장춘에 관한 콘텐츠는 코흘리개 애들 교과서 한 귀퉁이에 실릴 정도의 분량밖에 나오지 않고 있다.
........................................................................................................................
注: 본 이야기는 청테푸(제정우)집 근처 매일 나가는 동네 목욕탕의 한 원로로부터 우장춘에 관한 얘기를 사흘에 걸쳐 듣고서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첫댓글 청태푸님..새로운 우장춘에 대한 인식..뜻밖이예요..
그리고 전해듣고 정리하신 능력 탁월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읽고 저도 깜작놀랬습니다. 저의 집이 남산동이라 자주 우장춘도로를 지나가거든요.
단지 육종박사, 씨없는 수박박사로만 알았는데...앞으로 저도 아는척 하고 다녀야겠습니다. 덕분에 좋은 정보, 지식 늘었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앞으로도 좋은 자료 많이많이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