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박철웅>수필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실종신고 사진이 붙어 있는 곳에 눈길이 머물렀다. 확대되어 붙어 있는 사진은 다름 아닌 조그마한 애완견 강아지 사진이다.
과거의 실종 사진은 어린아이 사진과 실종자의 특징을 기록한 내용이 함께 붙어 있었다. 요즘은 주인만이 알아보는 반려견의 사진을 찍어서 중앙에 붙여 놓는 것을 본다.
채널을 누르다 보니 개들을 위한 방송 채널이 따로 있음을 알았다. 며칠 전 뉴스에서 반려견의 보험료를 설명하고 수술해야 할 경우 수술비가 사람 못지않게 비용이 든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지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새로운 시대의 풍속도(風俗圖)를 알게 된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도, 누구 하나 나와서 보는 사람도 없고, 강아지만 꼬리를 흔들고 뛰면서 좋다고 반겨 준다고 한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들에 신뢰받아야 하고 의지해야 하지만, 가장의 힘없고 소외당하는 서글픈 이야기를 반증하는 거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든다.
환갑이 넘은 또래의 친구들 핸드폰 속에 있는 사진을 보면, 반려견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 얼굴이 밝은 표정이라 의아하게 느낄 정도다.
여러 가지 스쳐 가는 생각 중에 사람은 왜 마음이 통하는 반려자와 같은 친구가 되기가 어려운가를 자문자답을 해본다. 현대사회에서 친구의 중요성이 희석되는 게, 어떤 말이나 감정의 이해관계가 얽힘이 싫고, 구속에 얽매이기 싫은 자유스러움의 갈망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말로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하지만 자기만의 편견이나 자기 기준에 치우친 생각은 아닌지 나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할 때다.
같은 말을 나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이 반려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이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의 표현이 보장 되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이 일련의 현상이 마음의 소통과 행복 충족감으로 와 닿을지 외부적으로 외로움과 고독의 표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인생의 동반자가 가족이고 친구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찬 생각을 해본다.
인간은 성실성을 말하고 살지만 말한 것을 이루는 성실성은 극기에 가까운 노력으로 이루어지거나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인간의 설 자리는 잃어만 감을 피부로 느끼게 될 터다. 인간이 로봇이나 반려견에 의지하는 자유로움과 편리함 속에서도 우리 실존적 존재력의 가치를 염두 해 가면서 미래를 발전시키고 계획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 오감의 감성도 황무지에서 싹을 틔울 수만 있다면 열매 맺는 식물원과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수 있는 정원을 만들 수 있지는 않을까. 그 아늑한 공간 안에서 인간과 인간이 반려의 친구가 되고 반려견이 인간 안에서 보호받는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