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다 봤다 하하하하 더 볼만한 종이로는 무엇이 있을까 뭐 아무튼 요즘은 나오는 것들이 다 욕바가지다 그냥 쓰레기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현대사회에서 ‘나’를 정의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내가 소유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지 물건이나 돈만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뤄온 업적, 내가 견지하고 있는 인간 관계, 나의 지식, 나의 목표. 이렇게 내가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걸 바탕으로 내가 누군지에 대해 생각하는 건 이 시대의 표준적인 사고방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언제나 이렇게 살아왔던 건 아닙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를 중심으로 자아를 사고하는 습관이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함께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과연 소유를 거치지 않고 나의 존재를 느끼는 게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 『구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번쯤 해 보셨을 겁니다. 이 질문은 언어로 제기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살면서 불현듯 공허함을 느끼고, 과연 그 공허함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지, 채우는 게 가능한 건지 무언의 질문을 품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소설입니다. 주인공 로캉탱은 언젠가부터 자꾸만 일상을 살아가다가 모든 일상의 논리가 무의미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무의미로부터 다시금 삶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합니다. 남들로부터 요구된 삶의 논리가 아닌, 자신의 삶의 모험을 꿈꾸게 됩니다. 주어진 사실로서의 삶이 아닌 모험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입니다.
마르틴 부버, 『나와 너』
나는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도 합니다. 가족이 없었다면, 친구가 없었다면, 내게 온정을 배풀어준 그 누군가가 없었다면, 지금 나의 삶은 결코 이렇게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부버는 두 가지 삶의 태도를 구별합니다. 첫째는, 주변의 여러 존재를 그저 나와 상관없는 사물로서 대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둘째는, 주변의 존재를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너’로서 대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주변을 사물처럼 대하면 결국 나도 사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반면 주변을 나의 맞은 편에 놓인 대화 상대, 즉 ‘너’로서 대하면, 나 역시 그의 맞은편에 놓인 ‘너’가 됩니다. ‘나’는 ‘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부버는 이 논지를 자신만의 아름다운 언어로 펼쳐냅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인간은 시간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시간에 관한 가장 흔한 관념은 시간이 나와는 일단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시간이라는 커다란 장이 먼저 존재하고, 나는 그 안에 작은 부분을 차지하며 존재하는 것이죠. 하지만 레비나스는 이와 아주 다른 주장을 제시합니다. 그는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만 갇힌 채 남아 있지 않고, 자신 바깥의 세계로 나아가는 그 과정 자체가 시간의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봅니다. 술에 많이 취하거나, 정신을 거의 잃은 채 나 스스로 안에만 갇혀 비몽사몽할 때, 우리는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평소 잘 의식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시간 안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데에는 주변 세계와의 연결이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물리학적인 시간 이해에서 벗어나,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조금 더 풍부한 생각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앙리 베르그송, 『웃음』
웃음은 자아의 행복한 순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여러 불행에 의연하게 대처하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베르그송은 웃음은 생명적인 것과 대비된 기계적인 것에 기초한다는 독특한 주장을 펼칩니다. 인간은 생명체로서 고유의 자연스러움을 간직한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끔씩은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벗어나 기계적이고 딱딱한 행동이나 사고를 하게 되기도 합니다. 베르그송은 웃음은 인간의 삶에서 기계적인 것이 지나치게 크게 세력을 확대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평생 아주 많은 시간을 웃으며 보냅니다. 웃음에 대해 한번 철학적 이해를 시도해 보는 건, 삶의 디테일에 조금 더 세세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한병철, 『서사의 위기』
이야기는 인간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하고,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병철은 현대 사회에 이르러, 이야기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야기는 충분히 긴 호흡 안에서 여러 요소들을 통합하는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짧은 정보만을 접하며 순간적 만족을 얻는 삶의 패턴이 보편화되다 보니, 이야기가 생겨나기 전에 모든 순간이 금방금방 스쳐 지나가 버립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삶의 통합적인 의미를 찾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입니다. 과연 저자의 생각이 옳은지, 또한 만약 옳다면, 어떻게 하면 이 현대 사회 안에서 조금 더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살아갈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 『모든 사람은 혼자다』
요즘 ‘자기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나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노력에 앞서 ‘나다움’이라는 것 자체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부아르는 ‘과연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 내가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을 찾고 그것을 추구해 나가면, 그 과정의 끝에 이르러 만족을 얻을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 끝에서 과연 우리는 좋은 의미를 발견할까요? 보부아르는 어쩌면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건, 의미를 발견하는 최종적 순간보다 의미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 그 핵심이 자리한 것이 아닐까 하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어쩌면 이 책에서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메시지를 획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메시지를 삶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하나의 표지판 정도로 받아들이는 태도일 테니까요.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규칙, 계획, 질서. 이런 것들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최대의 강점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때로는 이런 고정적인 틀이 삶의 에너지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니체는 규칙적인 것을 넘어서는 불규칙적인 힘, 생명체 고유의 역동적인 에너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학습하는 온갖 틀들은 우리가 더 자유롭게, 더 창조적으로, 더 자신감 있게 행동하지 못 하도록 억누를 때가 있습니다. 니체는 이 책에서, 예술 같은 특수한 계기를 통해 내 안에 숨겨진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꼭 예술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이 책에 나타난 도전적인 철학적 언어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작동하여 우리 일상에 잠든 도전적 에너지를 깨워낼 겁니다.
.... 라고 이충녕이가 강요를 하는데 음 글쎄요 절반 찬성에 절반은 무효 ㅋ 역시 나님은 후하군
첫댓글 니이체? 죽었어 다들 죽었어. 지금은 작가가 없어. 다들 죽었어.
이충녕이가 부르짖는 바로 그 "대중"이란 낱말의 다원적이며 동시각적인 재정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앞선다만
ㅎ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당연히 들지 않으면 뭐야 삼천포에 가서 헛짓거리 하는 거지
댓글만 읽어봐도 한심 자체야
저 친구가 뭔 소리 하려는 건지 1도 모르는 중생의 관망지월 동문서답이 수천 개 에휴 ㅎ
대충~ 대충~ 살아가는 대충~ 인간이 대중이다.
벌써 40~50년 전에 읽은 종이쪼가리들이야
저런 말 들으려는 대중이 있을까 과연 싶다.
....음?? 그냥 대중이 형 생각이....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