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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
박은조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였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_시60:1
회복은 모든 사람들의 소원입니다. 사람은 원래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이후로 우리는 늘 목마르고 배고프고 외로운 존재로 살아왔습니다.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면 인간은 계속해서 그런 가여운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존귀한 인간도, 행복한 가정도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_서문에서
| 신앙의 회복 | … 신앙,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 이사야 42:1-4) |
“우리가 출발선을 제대로 떠났으면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상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출발하지 않았으면 문제가 생긴다. 무릎이 깨지고 뒹굴면서 결승점에 1등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아무런 상을 받을 수가 없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은 결승점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법이 아닌 '불법'을 행했다고 지적하고 계신다. 그들이 행한 것이 진리를 따라 행한 것이 아니었고, 주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결승점에서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제대로 출발했는지 '상한 갈대'(사42:3)라는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_인간은 상처 받은 상한 갈대일 뿐이다.
이사야 42:1-4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꺾이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마12:9-21절 사건에서 인용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그 사람을 치료하신 후, 이 사건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메시아의 역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사야 시대
의 갈대는 먹을 수도 없었고, 팔수도 없는 쓸모없는 식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갈대가 자라고 있는 땅은 척박해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농사꾼들은 갈대를 보면 저주받은 식물로, 그 땅은 저주받은 땅으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가장 볼품없고 가치 없는 식물인 갈대, 게다가 그마저 상해 있는 갈대를 꺾지 않을 분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멀리서 보면 갈대는 멋있고 꼿꼿하게 서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목이 벌레를 먹어 상해 있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곧 부러지고 말 것이며, 태풍이 몰아치지 않아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잔잔한 바람에도 곧 부러지고 말 거이다. 이것이 바로 상한 갈대의 모습인 것이다. 이 상한 갈대는 바로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원을 공급받으며 살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겠다고 선언을 하면서 인간은 상한 갈대가 된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상한 갈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나쁜 환경에 있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이 낙원에서 범죄한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 최초의 범죄는 완벽한 조건의 낙원에서 있었다. 결국 인간 자체가 문제지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경보다 인간을 먼저 고치시는 것이다.
_연약함과 약속 사이에 있는 인간
그런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실 분,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은 단순히 육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을 고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 상한 갈대를 고치신 이야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에 불과한 우리를 고치시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 ”아내를 또는 남편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기를 날마다 사모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이니까 시도해 보긴 했는데 잘 안 되어서 지쳐있는 상황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이런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아예 포기하고 살지는 않는가? 신앙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원수 사랑은커녕 배우자 사랑도 제대로 못하는 자들임을 발견한다. 나 자신의 비천함과 연약함을 볼 때 그런 엄청난 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므로 우리가 내 삶 속에서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다. 나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믿음이Viewer 시작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믿음을 선택하는 자를 신앙인이라고 한다.
_출발선에 제대로 서 있는가?
하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실 때, “예, 알겠습니다. 그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아 보겠습니다”라고 응답한다면 그는 출발선에 제대로 서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가 그런 생각으로 신앙 생활을 한다면, 평생 열심히 수양을 하고, 선행을 베풀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살았다고 해도, 결승점에 이르렀을 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신앙의 길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산다. 금식도 해보고, 철야도 해보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 꼴 보기 싫은 인간은 여전히 꼴 보기가 싫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런 일은 연약한 인간들이 사는 상한 이 땅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고 그들을 냉소적으로 본다. “누군 왕년에 그렇게 안 해 봤나?” 라며 빈정댄다. 이런 어중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타협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건 이미 신앙생활이 아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나는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데, 나는 도저히 배우자를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신앙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렇게 이루어질 것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난 못해” 라고 결정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내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출발할 때 우리는 제대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포기한 사람에게는 열매가 없다. 열매가 있다면 자신의 열매뿐이다. 자신의 판단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버리고,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일만 따라 간다면 그건 자신의 주관을 따라가는 것이지, 이미 신앙생활이 아니다. 하나님의 열매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냉소적이 된다. 냉소적인 사람은 복음에 대한 열정을 서서히 잃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열정을 갉아먹는 것이다. 열정이 없고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니까 타협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는다. 다만 적당히 타협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_회복 … 네 손을 내밀라Viewer
교회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여러분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잘 따르고 있는가? 머리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즉각 움직이며 반응하는 몸이 건강한 몸이다. 이 건강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열정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그 열정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림이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명하신 그림이다.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손을 내밀었더니 손이 펴졌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상한 손, 움직이지 않는 손을 내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주님을 신뢰하고 손을 내밀면 우리의 손이 회복될 것이다. 어디가 상해 있는가? 가정에서 남편 노릇, 아내 노릇을 해보려고 해도 신경이 죽어버린 손처럼 움직여지지 않는가? 주님을 향해 손을 내밀어라. 주님께서 여러분을 고치실 것이다. 일을 한 번 제대로 해보고 싶은데 손발이, 머리가 움직이지 않는가? 주님께 여러분의 상한 마음을 가지고 나아오라. 주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신 것처럼 여러분들을 고치실 것이다.
_신앙의 회복,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우리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자녀들 또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나아가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많다. 건강도 있어야 하고, 지혜도 있어야 하고, 전문 지식도 습득해야 할 것이며, 인간관계도 잘 맺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회복되면,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삶을 일구어 갈 수가 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의 뛰어난 검술로도, 지도자와 뛰어난 군사 전력으로도 얻은 게 아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이 전투를 이겼다고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고 죄의 노예 된 연약함을 극복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이스라엘이 어둠의 땅 애굽의 노예였던 것처럼, 우리도 죄의 노예였던 것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고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가도, 죄의 노예근성은 끈덕지게 우리에게 붙어있다. 나는 상한 갈대일 뿐이지만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고 설 때 죄의 노예 된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싸움의 최선봉에 교회가 있다. 교회는 돈을 가지고 이런 전투를 하는 곳이 아니다. 세상의 지위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전투를 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오늘도 이루어질 거라고 믿는 사람, 비록 상한 갈대지만,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싸워서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원하신다. 이 믿음을 가지고 출발하면, 부족한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이 시대의 여호수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을 기대하신다. 제대로 출발했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에서 신앙의 회복은 시작된다.
| 기초의 회복 | …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가?
| 요한복음 2:1-11 |
“500원을 주고 사면 500원짜리라고 한다. 만원을 주고 사면 만 원짜리라고 한다. 우리는 얼마짜리인가? 우리의 몸값을 위해서 지불된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다. 우리는 10억짜리도, 20억짜리도 아닌 예수님 짜리다.”Viewer
_허드렛물이 향기로운 포도주로
요2:1-11절에는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야기가 소개된다. 요한은 이 사건을 가리켜 '표적'(신호sign + 기적 miracle)이라고 말한다.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6절)…유대인의 집 입구에는 손발을 씻거나 옷에 뿌리거나 또는 그릇을 담글 때 정결 예법에 따라 사용되는 허드렛물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허드렛물을 가지고 향기롭고 비싸고 맛있는 포도주를 만들었다. 정결예법을 위해 한 번 사용된 후 시궁창에 버려지는 이 물은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을 상징한다. 모든 인간들은 열심히 일한 후 그 수고가 끝나면 어딘지 모르는 영원한 시궁창으로 던져진다. 인간의 운명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허드렛물과 같은 인간들을 향기로운 포도주로 변화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향기로운 포도주와 같은 삶을 살기 원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이나 사랑이나 명예를 더 가지면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은 주로 무엇인가를 더 '소유'(having)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200년 전에 살던 귀족보다 물질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Viewer고 있다. 오늘의 보통 사람도 옛 귀족보다 분명히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누리는 문명의 혜택도 크다. 옛날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착했던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 인간이 누리는 혜택이 많을수록 인간성은 더 황폐해가고 있다. 돈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과 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답, 향기로운 포도주와 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소원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문제가 단순히 '소유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돈이건, 사랑이건, 지위건, 건강이건 간에 사람의 문제는 소유의 문제 위에 더 중요한 문제, 즉, '존재(being)의 문제가 있음을 가르친다. 소유의 문제가 항상 심각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그 위에 존재의 문제가 더 중요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소유를 갖더라도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향기로운 포도주와 같은 삶을 살수가 없는 것이다.
_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존재
모두 향기로운 삶을 원하는 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죄'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신 자연을 인간이 잘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인간에게 하나님의 성품까지 주셨다.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청지기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대리인으로 세움 받은 인간에게 동산에 있는 것은 다 먹어도 좋다고 하셨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금하셨다. 인간은 이 나무를 볼 때마다 자신에게 명령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했고,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이 나무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나무였고, 인간의 본분을 깨닫게 해주는 나무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말씀 안에서 살도록 만드셨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간은 참 자유를 얻는 것이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바로 그 진리를 일깨워주는 축복의 나무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존재인 것을 아는 것이 선善이다. 그걸 모르면 악이다.
_예수님, 변화의 기초
예수님은 죄 없이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는데, 가장 마지막에 남긴 말씀은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이다(요19:30).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시면서 “테텔레스타이”(값을 다 치렀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를 자기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서 가장 고귀한 자신의 생명으로 몸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그 결과, 더 이상 사탄의 어두운 세력이 우리를 짓누르지 못하게 되었다.
주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것과, 우리의 삶을 향기로운Viewer 포도주와 같이 변화시킬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을 받으며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자리에 오는 것을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라고도 표현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주님의 생명이 내 인격과 삶 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아무리 결심해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삶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일 때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인격에 들어오신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도우시고 함께 하신다. 이분의 도움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만이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를 모른 채 내가 내 삶의 주인 노릇하고 살아온 죄를 벗어버리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씻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_예수님 짜리 귀한 몸
우리의 몸값을 위해서 지불된 것은 창조주 예수님의 생명이다. 우리 몸값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지불한 것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이요 그분의 생명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사람은 천하보다 크신 예수님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다. 보배이신 예수님을 가슴에 품은 우리는 존귀한 자들이다. 그런 우리를 세상은 멸시할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우리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자존감을 가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다. 인간은 죄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며 여전히 오늘날에도 이 문제로 고통 받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여전히, 아직도 예수님이 필요하다. 죄는 뿌리가 워낙 깊어서 사람의 능력이나 세상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짜리 존재들이다. 허드렛물처럼 보잘 것 없었던 우리들이었지만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내 속에 모시므로 향기로운 포도주와 같은 존재가 된다. 예수님을 믿은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포도주 맛이 나지 않는가?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한 사람이면 발효가 시작된 것이다. 이직까지 포도주 맛이 좀 텁텁할지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 속에 선한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사명의 회복 | …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삶
| 에베소서 2:10, 창1:26-28 |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지으시고 대리인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형상을 나누어 주셨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라고 인식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자신에 대한 인식이 그 사람의 삶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한다. 부모가 자Viewer식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소중한 유산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한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든지 부자이든지, 유식하든지 무식하든지, 우리 부모한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경험하고 자란 사람은 인생을 자신 있게 살 수 있는 준비가 상당 부분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이 가졌고 많이 배웠어도 자식에게 이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면 그 자식은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기가 쉽다.
_하나님의 아이콘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한다. 우리는 창1:26-28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는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그 형상은 외모가 아닌 하나님의 성품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지음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의력을 가지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또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떠나서는 존귀할 수가 없다. 하나님보다 인간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_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을 회복하라
하나님은 짐승들에게는 주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을 왜 인간들에게 주셨을까? 엡10:2절에 따르면 그것은 “선한 일을 위해서”이다. '선한'이란 단어는 '좋은'이라고도 번역된다. 사람들은 보기에 좋으면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기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느낌이 좋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감정이 좋다고 느낀다고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다. 또 사람들은 많이 가지면 좋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오늘도 이 땅의 인류는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다. 그러나 좋은 걸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하다. 성경에는 “좋다, 선하다”라는 말이 무려619번이 나온다. 창세기 1:10,18,25,31절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좋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5일 동안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셨고,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고 “심히 좋았다”라고 하셨다. 사람이든 피조물이든 하나님께서 두고자 하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좋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리인으로 만드신 목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비록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름답게 가꾸기 원하신다. 그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세상을 이름답게 가꾸고 섬기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인 것을 열방에 알리기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민으로 택하여 주신 특권은 알고 있었지만 부여하신 책임은 몰랐다. 섬겨야 할 이방인들을 “지옥 땔감”이라고 경멸하면서, 그들을 섬겨야 할 책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목적을 잃어버린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한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대신해서 새 이스라엘을 세우셨으니 그들이 12제자를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왜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었는지,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에 부르셨는지 그 이유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하면 성도와 교회가 많아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선한 것이 없는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사람들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청소하고 치유하는 일을 위해서 나서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직장으로 보내시고, 이곳 저것에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_생활에서 발견하는 소명
하나님의 대리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리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을 맡기시려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대리인의 역할은 가정뿐 아니라 교회에서 적용되어야 한다. 직업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로 부름 받았든지 성도의 일은 돈을 벌면서 하는 직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부도 하나님의 일이다. 은퇴하신 분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건강을 가지고 무언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벌이가 되는 일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이 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일을 위해 우리에게 일을 부탁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마지막 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큰 일을 하다 왔느냐를 묻지 않으실 것이다. 얼마나 많은 돈을 저축해 놓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주께서 맡겨주신 일을, 얼마나 주님의 의도를 따라 행하였느냐를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_회복, 생활의 혁명이 일어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아야 할 그 삶을 사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세상이 그만큼 죄로 얼룩져 있으며, 우리가 연약하여 실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쉽게 낙심하고 지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공급하시고, 가야 할 길을 보여주시고, 피할 길을 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을 수 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억하면서 낙심치 않고 이 길을 가야 한다. 어렵다고 그만두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우리 모두의 자리가 회복되기를 바란다. 가정과 교회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우리 민족이 회복되는 복을 주께서 주시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의 가정과 교회 공동체가 아름답고 건강하게 회복될 때 이 민족은 복을 받을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삶으로써 이 땅과 사람들을 회복케 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 생활의 회복 | … 환경을 이기는 삶으로 변화되기
| 베드로 후서 1:1-11 |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겠습니까, 아니면 환경을 변화시키며 지배하는 자로 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것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_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살았던 지하공동묘지에서 그들은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던 서기 313년 까지 거의 280년 이상을 이곳에서 살았다. 1854년 이후 카타콤이 본격적으로 발굴되었으며 그때 이후 발견된 로마의 카타콤은 모두 120개이며, 지하동굴의 총 연장은 900km에 이른다. 이 지하 동굴에 묻힌 시신이 200만 구라고 한다. 예수님 당시 로마 인구가 100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인 것이다. 이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Viewer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집도 버리고, 재산도 포기하고, 정치적인 사회활동도 박탈당한 채 박해를 피해 지하공동묘지로 숨어들었고, 그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박해 속에서도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고 로마에 대한 분노로 가슴이 가득 채워져 있지도 않았다. 로마를 위해 기도하면서, 로마까지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묵묵히 주의 때를 기다리며 산 것이다. 역사가들은 인류 역사상 최강의 나라가 로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로마는 그리스도인의 사랑 앞에 무너졌다. 기독교인이 된 콘스탄틴 황제가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승리였고, 믿음의 승리였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환경에 짓눌리는 자가 아니라, 환경을 이기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서 그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글을 쓰게 하셨다. 이 편지를 읽으며 그들은 환경을 넘어서는 신앙인으로 자라간 것이다. 베드로의 편지 속에서 우리는 어떤 환경도 뛰어 넘으며 변화시키기까지 하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핍박에 짓눌려 환경을 이기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부부가 행복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쉽지 않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삶으로 양육하는 것은 힘들도 어려운 문제이며, 직장에서 유혹을 이기고 타협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문제이다. 보배로운 믿음이 마스터키처럼 인생의 모든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예수님께서 날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참으로 보배로운 지식이며 큰 은총을 입은 자들이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 우리가 우리의 환경을 이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베드로 당시 성도들의 환경은, 거대한 로마제국이 교회를 짓밟는 고통 속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 한국에 있는 우리의 환경은 로마의 성도들과는 달리 안일함, 풍요함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상황은 다르지만 환경을 이겨야 한다는 공통점은 동일하다. 교회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고난과 핍박의 한경 속에서 정금같이 아름다운 교회가 탄생하는 반면, 풍요와 사치와 유혹과 싸우는 환경 속에서 교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자주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풍요로운 환경과 싸우는 것이 고난의 환경과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믿음 위에 덕을 더하고, 그 위에 지식을, 그 위에 절제를, 그 위에 인내를, 그 위에 경건을, 그 위에 형제우애를, 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한다(벧후1:5-7). 믿음 위에 하나님께서 이 일곱 가지를 더하고 보충하고 공급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것들을 공급받고 보충 받으면 어떤 환경이든 뛰어 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Viewer 좌절하지 않으며, 부요 속에서 안일에 빠지지도 않는, 환경을 넘어서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_먼저 삶을 목적을 알라
먼저 믿음 위에 덕을 공급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어떤 이가 덕스러운 사람일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왜 인간으로 창조되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는지, 왜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 그 목적을 알고 있는가? 이 목적을 알 때 보배로운 믿음이 방향을 잡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 부모의 책임일 수도 잇고, 나 자신의 책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마10:29).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불행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과 아픔까지도 선하게 쓰셔서 모든 이에 목적이 있게 만드시는 것이다.
나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님이 파산을 하고 하루아침에 크고 좋은 집에서 고향 마을의 어느 변두리 창고 같은 곳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발병, 가난, 죽음으로 이어졌다. 한때는 무능한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고, 하나님에 대한 불평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중에서도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불신 가정에서 교회를 꾸준히 나갔던 것은 크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갈등과 번민 속에서 보낸 청소년 시기였지만, 그 시간들이 지금 생각하면 인생을 배우고 연약한 사람들의 아픔을 배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지금의 나를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나를 훈련시키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감사할 뿐이다. 나의 눈물과 아픈 과거까지 사용하시는 주님을 찬양할 뿐이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사물 사건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불평의 대상이었던 것이 감사의 제목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덕을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이 덕은 지식을 공급 받을 때 얻게 된다.
_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모든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지식은 올바른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 없는 지식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지 못하고 사람을 해치는 지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 다른 지식이 있을 때, 그 지식은 사람을 복되게 하는 지식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정보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먼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신 사랑을 성경은 절절히 전하고 있다. 우리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시고, 우리를 자녀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신부라고도 말씀하셨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정보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이 지식을 가지고 나를 보면, 그리고 나의 상처를 보고 현실의 문제를 보면, 많은 것이 다르게 보인다. 내 삶의 목적이 따로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내 고통까지도 목적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 왔어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식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바로 절제를 통해서이다.
_절제가 참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 절제하려면 인내의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좀 더 알고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절제가 꼭 필요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종류만 다를 뿐 절제해야 할 것들이 있다. 절제하지 않으면 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을 놓치게 된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놓치고 당장 재미있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뺏기게 된다. 절제하지 못하면 예배에 빠지게 되고, 훈련 받을 시간을 놓치게 된다. 돌아보아야 할 사람을 병원에, 외로움 속에 방치Viewer하게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 앞에 차분하게 앉을 시간을 갖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일도 제대로 못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한 절제에 인내를 공급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절제 대상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절제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절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절제도 쉽게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긴급한 방법으로 도움을 주시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인내를 공급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절제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인간은 약하고 유혹은 강하기 때문에 인내의 강한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인내의 용사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인내는 조금 애를 쓴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노력을 요구한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능력을 받아야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절제할 수가 있다. 여러분이 절제할 것은 무엇인가? 언젠가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해결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포기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를 악물고 주님의 뜻을 따르리라고 결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인내할 수 있게 해주는가?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인내하게 하는 것은 경건이다. 그래서 인내에 경건을 공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_인내의 훈련은 경건으로부터
경건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 경건이 있을 때 우리는 잘 인내할 수 있다. 우리는 경건의 훈련을 잘 쌓아야 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마음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갖는 것이 바로 경건의 훈련인 것이다. 작은 일 하나에서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삶의 태도를 훈련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인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며, 이러한 훈련이 안 되어 있으면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된다. 인내의 훈련이야말로 경건으로부터 시작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Viewer리의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가정과 교회를 주셨다.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함께 있으면서 서로 격려하고 경건한 삶을 위한 도움을 입도록 하나님께서 가정과 교회를 주셨다.
_십자가를 들 것인가 몽둥이를 들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경건에 형제우애를 공급하라고 말씀하신다. 경건과 형제사랑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어떤 사람이 경건한 성도인지 점검해 보려고 하면 무엇보다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해보면 된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요약하시면서, 두 마디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한 마디로는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뵙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는 축제의 예배에서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경건이란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고, 삶의 자리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변 사람에 대해 관심이 적다면 경건의 질이 그만큼 떨어지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경건이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형제나 자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할 때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는 자가 아니고, 찌르는 자가 되는Viewer 것을 교회 안에서 흔히 보게 된다. 십자가를 든 사람과 몽둥이를 든 사람의 차이는 간단하다. 십자가를 든 사람은 섬기려고 애쓰지만, 몽둥이를 든 사람은 이 사람 저 사람을 때려주고 싶어 못 견딘다. 주변 사람들에 대해 섬기려는 마음이 많다면,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만큼 많이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제자라면 형제자매를 마땅히 사랑할 것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 얼마나 큰 것인가? 그 특권은 반드시 섬김의 책임으로 나타나야 한다.
_모든 것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에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공급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이 아가페를 공급받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 깨닫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 깨달은 만큼만 가지고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환경을 이겨내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계석해서 공급받아야 우리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날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처음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의 위기의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또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이 사랑이 공급되는 것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공급받는 데서 건강한 신앙이 시작되고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을 때 우리는 형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게 되고, 경건을 통해서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간다. 인내를 배울 때 절제하는 성도가 되고, 절제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가며 하나님과 친밀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친밀하게 되면 우리는 덕을 공급받아 우리 삶의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미와 목적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보배로운 믿음 위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그리고 사랑을 보충 받아 환경을 이기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회복이 있기를 바란다.
| 기도의 회복 | … 하나님께 배달되는 기도를 하라
| 에베소서 6:18-20, 느헤미야 1:1-11 |
“우리는 하나님께서 응답할 수밖에 없는 기도,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기도했기 때문에, 나의 소원이 아닌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_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구하는가?
느헤미야는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했다. 자신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구했던 것이다. 우리가 처음 기도할 때는 이런 기도를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게 되면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로 부르신 우리를 통해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기도하게 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시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술 맡은 관원으로서 출세한 사람이었으며, 왕의 곁에서 자문을 하며 왕이 침소에 들 때까지 하루 종일 같이 움직이는 핵심 인물이었다. 이런 권력을 누리고 있던 느헤미야는 더 높은 권력을 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이스라엘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기도하면서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놀랍게 응답 받았던 것이다. 느헤미야가 조국을 바라보며 가지고 있던 그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했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70년이 지난 후 다시 이스라엘을 돌려보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하여 스룹바벨과 에스라 등을 앞장세워서 이스라엘 백성을 고국으로 돌려 보내셨다. 그런데 새 이스라엘 건설이 적들의 반대와 훼방으로 지연되고 있었다.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다.
_하나님께 배달되는 기도를 하는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는 일들이 많다. 개인, 가정, 교회, 나라 그리고 세계 안에는 하나님께서 속히 원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기도 제목으로 삼으면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하신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고 계신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과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Viewer서 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볼 때, 내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25,33) 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구하면 놀랍게 응답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날마다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일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못하면서 하는 기도는, 오르티즈 목사님의 표현처럼, 하나님께 배달되지 않을 뿐더러 능력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지난 수년 동안 북한 땅에서 굶주려 죽은 사람이 300만이 넘고, 탈북하여 중국 땅을 떠돌아 다니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북한인들이 30만 명을 넘는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아프리카와 동남 아시아와 세계 곳곳에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런 땅, 이런 사람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어떻겠는가? “어떻게 하면 저 백성들을 먹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들을 치료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들이 좀 더 행복하게 살도록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시지 않겠는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분주하게 살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관심은 연약한 사람들과 피 흘리는 땅을 향하고 계신다. 교회 안에 능력 있는 기도가 회복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서 안타깝게 여기시는 일을 나의 일로 여기고 기도하는 일을 회복하지 못하면 세상은 희망이 없다. 하나님께서 오직 교회에만 이런 무기를 주셨기 때문이다.
_하나님의 언약과 자비를 의지하고 기도하라
다니엘이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70년 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을 끝낼 것이라는 언약을 주신 것을 발견한다(단9:1-2).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발견하고는, 그 언약을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이 언약은 다니엘로 하여금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알 때, 그 언약에 근거해서 약속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다. 이런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된다. 느헤미야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기도했던 사람이다 (느1:5).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한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신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약속이 그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의 말씀을 받았을 때, 불가능하다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해 성령충만과 성령의 권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느1:5). 우리가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는 자격이 없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자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로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다.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는 것은 오직 그분의 자비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의 기도를 무력화 Viewer시키기 위해 반대 전략을 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하고 기도하게 하는 대신 우리 자신의 행함과 공로를 가지고 나아가도록 부추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바른 신앙의 태도인 것처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_이것이 하나님께 배달되는 기도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병든 자를 치료하셨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다. 우리의 육체에 관심을 가지셨다. 인간의 존재를 이야기 할 때 영과 육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총체적인 구원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전도할 때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사람의 육체의 평안도 함께 도모해야 한다. 육과 영이 모두 평안해야 한다. 그래서 영육이 주님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렇게 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응답할 수 밖에 없는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여야 하며,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기도여야 한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틀림없이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걸 발견하고, 그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육체적 아픔이나 배고픔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외로움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긍휼의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알고 기도할 때 응답 받는 기도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가 회복되길 소망한다.
| 비전의 회복 | … 잊혀진 꿈 다시 찾기
| 고린도전서 2:1-5) |
“우리에게는 많은 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대부분 최종의 꿈이 아니고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일시적인 꿈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전해지고, 그 생명으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좋은 꿈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목숨을 걸고라도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서 꼭 이루어야겠다는 꿈이 있는가? 그 꿈이 이루어지면 자신도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질 꿈인가? 현재 우리가 가진 꿈이 있다면 바울과 비교해보면서 그 꿈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지 생각해보자.
_바울의 꿈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바울을 싣고 간 배는 유럽을 실었다고 말했다. 바울의 가르침이 유럽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가졌던 꿈은 유럽 이상이었다. 온 세상을 바꾸어 놓으려는 꿈을 가지고 숨가쁘게 달려갔던 바울의 꿈을 추적해보자. 사도바울은 아덴(그리스 아테네)에서 전도 했다(행16:17절 이하). 그 당시 아덴은 철학의 거장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의 거장들이 살았던 철학의 도시요, 지식인들과 예술Viewer인들의 도시였다.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나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이라는 유명한 율법 선생 밑에서 율법학자로 바리새인을 훈련을 받았다. 바울은 잘 훈련된 학자였고, 여러 가지 면에서 남다른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바울은 아덴에서 설교를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아덴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 조롱하며 거부했다.
바울은 아덴의 실패 후 고린도에 내려가 1년 6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행18:11).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고, 교회가 생겨났다. 아덴에서 거절당했던 그 십자가를 고린도에서 바로 전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 걸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바르게 전해지느냐, 전해지지 않느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만 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죄의 고통에서 건져내는 사건이었다. 바울 사도가 꿈꾸었던 것도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들이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바로 이 꿈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되게 하겠다는 꿈을 가질 때 여러분의 꿈은 업데이트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인가? 수 많은 여러분의 꿈과 계획 속에 예수님을 전하는 꿈도 포함되어 있는가? 예수님을 전하는 꿈을 단기적인 여러분의 꿈 리스트에 넣지 마라. 예수님을 전하는 꿈은 그 무엇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소망하는 작은 꿈들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작은 소망들은 더 큰 목적을 향한 수단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유일하면서도 최종적이며 가장 중요한 꿈이 되어야 한다.
_삶의 목적의 회복
우리의 일과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삶의 꼭대기에 계신 분이다. 그 아래에 우리의 삶이 놓여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먹고 마신다. 그러나 오늘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인간이 예수님을 떠났기 때문임을 알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시급하게 전해져야 함을 아는 사람이면, 그가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인류의 희망이요 대안임을 알고, 예수님을 Viewer전하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아는 사람이면, 그가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꿈과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바울 사도처럼 살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먼저 사도 바울의 꿈을 나의 꿈으로 품자. 하나님께서 그 꿈 때문에 바울과 동행하시고 그 꿈 때문에 바울에게 복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남은 생애에 이 꿈과 함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풍족하게 누리자. 우리에게는 많은 꿈들이 있지만, 이것들은 대부분 최종의 꿈이 아니고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한시적인 꿈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전해지고, 그 생명으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중요한 꿈이다. 이 꿈이 회복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관계의 회복 | …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조카입니까?
| 에베소서 1: 1-14 |
“자식과 조카의 차이는 크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받은, 그분의 자식들이다. 그러나 정작 자식들이 아니고 조카처럼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저씨가 아니고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나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들, 딸로 부르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우리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신다. 우리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할 때 '친밀함'을 강조하시며, 하나님께서 목자이시고 우리를 양이라 할 때는 '인도하심'을 강조하신다. 그분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이라 할 때 우리는 주님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일꾼'이 되는 것이다. 엡1:5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입양한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친자식이었으나 범죄 이후 인간은 아버지의 집을 나간 자식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와서 자녀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얼마나 이 소중한 특권을 누리고 사는가? 이 특권을 누리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자녀가 아닌 조카처럼, 우리의 아버지가 아닌 아저씨처럼 모시고 사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아직도 고아원 시절의 습관을 다 버리지 못한 약점을 이용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그 특권을 누리면서 당당하게 살면 사탄의 나라가 위축되기 때문이다.
_아버지를 닮아가는 삶의 회복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이유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엡1:4)이라고 말씀한다. 거룩해진다는 말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말이고, 거룩(구별, 떼어 냄)은 도덕적 개념(거짓말을 하지 않고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에 있던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하시는 것이고,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을 빛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있다가 죽음으로 옮겨 가버린 인간들을 다시 생명의 자리로 가져다 놓는 것을 거룩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을 노예의 자리에서 자유인의 자리로,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빈곤의 자리에서 풍요의 자리로 구별해 옮겨온 사건이다. 거룩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첫 열매시며 우리의 모범이시다. 예수님 안에는 어둠이 없고 빛이 있다. 예수님에게는 매임이 없고 자유가 있으며,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들기 원하신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분의 꿈을 나의 꿈으로 삼는다는 것이며 그분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을 좀 더 소유하거나 멋있는 사람을 만나는데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갖는 최고의 관Viewer심은 거룩이다. 혹시 우리가 당장의 필요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귀한 것들을 놓치고 살고 있는지 늘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장차 건강과 거룩을 함께 이루어가도록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혹시 건강이 좋지 않아도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해지기보다 몸이 건강해지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자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면 복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더 원한다. 우리가 거룩을 우리 삶의 가장 큰 목표로 삼을 때 행복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놓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붙들었다면 우리는 성공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 아버지를 닮은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갖는 가장 큰 사랑이다.
_자녀에게 약속된 것들
또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다른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기쁨을 약속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참으로 기쁨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는(성령)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엡1:14).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배우자, 땅, 산업 등을 기업이라고 표현한다. 엡1:5절과 엡1:11절을 비교해 보면 기업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 기쁘신 뜻대로/우리를 예정하사/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우리가 예정을 입어/그(예수님) 안에서/기업이 되었으니”(11절).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이 다 기업이다. 이 모든 기업을 통칭하는 말이 자녀, 즉 상속자라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주시는 기쁨을 이 땅에서 완전히 누리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집에 가서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Viewer보증이 되사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을 미리 누리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이 기쁨을 이 땅에서 맛보며 산다면, 이 땅의 고통과 외로움이 있어도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않는 당당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을 얼마나 가자고 있느냐, 얼마나 좋은 집에서 사느냐, 얼마나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고,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가느냐, 얼마나 아버지를 닮은 자식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최대 관심사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곧 우리의 행복과 기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식들에게 주시는 이 기쁨을 바라보면서, 조카가 아닌 자녀의 관계를 회복할 때 우리의 삶은 새로워질 것이다.
| 중심의 회복 | …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라
| 에베소서 3:10-11, 17|
“우리의 주인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삼고 맡아 주신다. 우리의 염려가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은 주인으로서 그리고 완벽한 운전사로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실 것이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3:10-11). 인간의 어떤 사상이나 노력으로도 낙원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로 낙원을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각종 지혜를 주셨다. 교회가 각종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을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들이 알게 된다고 하신다. 하늘의 영적인 존재들, 즉 천사와 악한 영들까지 성도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지혜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된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우리의 주로 모시게 될 때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 하시게 된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삶을 신앙생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고, 주인으로서 자신과 함께 영원히 사실 분으로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예수님께서 잠깐 머물렀다가 가시는 분처럼 생각하며 관계를 맺는 사람이 있다. 참된 지혜는 예수님을 주인처럼 모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 삶에 오셔서 정착하시고 영원히 함께 사시면서 주인 노릇하실 분이다.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면 우리는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 노릇하시도록 할 수 있을까? 물질과 염려의 영역에서 생각해 보자.
_물질영역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만약 물질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이 운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 삶은 성공한 인생이다. 돈이 그만큼 우리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1/6, 예수님 비유의 1/3이 돈과 관련되어 있다. 돈이 우리 삶에 차지하는 비중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돈 이야기로 시작해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리스도인이 돈을 벌고 쓰는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운전하시는 대로 따른다면, 신앙생활의 절반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벌 때도 주님의 뜻을 따라, 돈을 쓸 때도 주님의 뜻을 따르면 자신과 모두에게 복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물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건강이든 자식이든 무엇이든지 간에Viewer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을 통해 잘 배워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 자식이 하나님의 자식이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늘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운전에 맡겨야 할 것이다.
_왜 십일조인가?
십일조는 우리의 소유에 대해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이다. 최초의 십일조는 율법을 주시기 500년 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아브람은 그돌라오멜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의 제사장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람을 축복할 때, 자신이 전쟁에서 얻은 소득의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린다. 자신이 얻은 것은,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첫 십일조의 의미이다. 복음주의 교회가 오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전통을 따라 드리는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바른 태도는Viewer, 자기 수입의 최소 10%를 헌금해서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교하고, 구제하며, 장학도 하고, 교회운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말라기에 기록된 저주가 있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소득의 10% 정도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다. 십일조만 드리면, 나머지는 내 돈이니까 스스로 알아서 쓰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사실은 십 분의 구도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십 분의 일을 교회 공동체에 드린 후 나머지 십 분의 구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쓰는지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십일조는 십 분의 일에 관한 얘기가 아니고 우리의 소유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_염려 영역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큰 걱정이든 작은 걱정이든 모두 가지고 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된 후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많은 염려가 사라지지만, 예수님을 믿는데도 병이, 가난이, 그리고 갈등도 찾아온다. 우리의 염려는 무덤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염려거리를 없애주기보다 염려를 이기는 자가 되게 해주신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분은 우리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삼고 맡아 주신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 삶의 운전자로 모시고 살면 그분이 염려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염려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우리의 염려의 대부분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염려를 이기지 못한 성도는 열심히 기도하고 애를 쓴다. 그러나 염려에 짓눌려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염려는 사탄의 중요한 무기 중 하나이다. 염려를 이기지 못하면 기쁨에 넘치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없다.
_크신 하나님을 만나라
주님께서 염려를 다루시는 방법을 요한계시록4:1절에서 볼 수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이 일”은 연약한 일곱 교회 안에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교회는 핍박당하고 연약했지만 교회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이었다(계1:12-16). 하나님의 백성들이 로마로부터 큰 핍박을 받고 있던 때에 성도들을 격려하기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쓰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요한과 그 시대 백성들을 격려하는 놀라운 장면들을 보여준다(계4:2-3). 로마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제국이라 불리는 나라였다. 당시의 교회는 로마가 밟아 버리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런 로마를 보면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로마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로마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로마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고 성도들이 낙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염려를 극복하는 핵심적인 방법은 크신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 하나님을 뵙고 우리의 문제를 보면, 문제가 크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지 못한 채 문제만 보고 있으면, 그 문제가 산더미처럼 크게 되어 우리를 짓누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염려를 극복하게 하신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분인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확인하기 원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완벽한 운전사로 우리의 삶 중심에 모시면 어떤 문제 앞에서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행복하고 만족한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 가정의 회복 | … 부부, 평생웬수에서 천생연분으로 회복되기
| 에베소서 5:17-33 |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주시는 목표가 같다면,Viewer 서로 다른 것은 그 속에서 맞추어 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라는 배필'이 되지 말고,'돕는 배필'이 되라고 하신다. 서로 돕고 섬김으로써 예수님을 닮으라고 말씀 하신다”.
_왜 성령충만인가?
많은 사람들이 멋있는 사랑, 영화 같은 사랑을 꿈꾼다. 행복한 가정을 원한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눈물의 씨앗으로 주신 것인 아니고, 행복의 씨앗으로 주셨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을까? 바울은 성령충만을 받으면 된다고 말한다(엡5:18).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목표로 바뀌게 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나도 싫어하게 되며, 우리의 말도 하나님의 말로 변한다. 사람을 찌르고, 상처 주는 말을 예사로 하며 살던 사람이, 어느 사이엔가 사람을 세워주고 격려하는 말을 하게 된다. 이것이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부어질 때 두 가지 결과가 항상 나타난다. 첫째는 은사를 주시는 성령충만이다. 은사는 섬기라고 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시대마다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맡은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신다. 둘째는 열매를 주시는 성령충만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적인 성숙, 성화가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하나님께서는 평생에 걸쳐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주셔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은총을 주신다. 은사는 우리에게 순간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 그리고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열매는 순간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열매는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열매는 인격적인 성숙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성도는 은사와 열매가 모두 필요하다.
_성령충만과 부부의 삶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Viewer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5:26-27)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셔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자녀 삼았다고 말씀하신다. 부부로 함께 부르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신다. 결혼식은 교회 창립식이다(엡5:27).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부부가 되고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려 하심이다. 바로 가정 교회를 영광스럽게, 흠도 티도 없이 세우기 위해서 부부로 짝지어 주신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을 짝지어서 거룩을 목표로 해서 영광스런 교회로 만들고자 하신다. 영광스런 교회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이요 거룩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며 결혼한다. 행복이 첫째 목적이 되면 행복을 붙잡지 못하고 놓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설계도를 따라가면 인생은 행복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거룩을 목적으로 삼을 때 행복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모범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범이라고 하시는 말씀 중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돕는 배필'(창2:18)이 되라는 말씀이다. '돕는 배필'은 '바라는 배필'과 반대되는 말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결혼을 결정하면서, 이 사람이 내 행복을 위해 무얼 해 줄 것인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면, 이기심을 극복할 수 없다.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그 결과가 눈물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돕는 배필이 되라고 하시는 말은 바로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죄를 극복한다는 말이다. 서로 돕는 배필이 되어 거룩을 이루어가야 한다. 우리가 가정에서 돕는 배필이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적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거룩을 위하여 서로 섬기라고 하신다. 이 섬김을 통해서 죄인이었던 우리가 죄를 이기고 사는 성령 충만한 삶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이루어야 할 목표가 많이 있지만, 결혼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결혼 관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적인 성숙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 영적인 전투는 배우자들이 서로 사별할 때까지 계속되는 가장 중요한 전투이다. 보통 남자들은 일 반, 사랑 반이라고 말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랑에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세상에서 말하는 감성적인 사랑이 아니다. 돕는 배필이 되어서 서로를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을 이루어가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 목표를 향해서 다가가는 전 과정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은 18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나님의 사람이다. 팀 라헤이 목사님이 에드워드 목사님의 자녀 11명의 자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조사를 했다. 직손 729명 중 대학총장 13명, 교수 65명, 법관 30명, 변호사 100명, 의사 37명, 작가 60명, 부통령 1명, 상원의원 3명, 주지사 3명, 시장 3명, 고급 공무원 80명, 그리고 목사, 선교사, 신학교 교수와 그 배우자가 300명이 나왔다. 천대에 이르러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대로다. 이 약속을 바라보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령의 사람들이다. 성령 충만하여 가정을 회복한 부부들을 통해 교회와 민족의 내일이 복되기를 기원한다.
| 기쁨의 회복 | … 사는 것이 재미있습니까?
|롬5:1-4 |
“여러분은 사는 게 재미있는가? 혹 삶이 지긋지긋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가? 인생이 재미가 없다면 그보다 더 큰 낭패가 어디 있겠는가? 재미가 있다면 무엇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재미있어 하는가? 그 재미가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인가?'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이 재미있도록 도우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 때로 어려움도 있고 슬픔도 외로움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즐겁게 살아야Viewer 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산다면, 우리의 이웃들은 '우리 자신'을 읽으며 우리와 더불어 산다. 우리가 사는 모습은 우리의 이웃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읽게 하는 자료가 된다.
_모든 기쁨의 시작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하여금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롬5:1-2). 여러분은 의인인가, 죄인인가? 여러분이 죄를 토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사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고 용서함 받은 새사람이다. 아직도 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죄 용서함을 받은 의인이다.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으나 죄를 이기는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의인이다. 지난 날 많은 죄를 범했으나 지금은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의의 새 옷을 입었으니 의인이다. 앞으로도 죄를 지을 가능성은 있으나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의인이다. 죄를 이기는 법을 알고, 죄를 누구에게 가져가야 할지 알기 때문에 내가 죄로 인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을 아는 의인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가 없어져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화평하게 된다. 하나님과 화평을 얻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아가서는 자연과의 화평도 얻게 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기초가 되고 출발점이 된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으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은 기쁨과 즐거움은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한다. 또한 믿음으로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혜 안으로 들어감을 우리는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기초를 놓으신 분이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를 아시고 사람의 삶의 방향을 정하셨다. 이런 분과의 교제에 '들어감'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축복인 것이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며,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채울 수 있는 은밀한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것을 가져도 만족과 행복을 누릴Viewer 수가 없다. 왜 많은 사람들이 가질 만큼 가지고도 그렇게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는가?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유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존재의 원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으로 인해 기뻐할 줄 안다면, 우리의 삶은 인간의 삶의 경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지경에 들어서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에게 약속된 은총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후로 영원토록 갖게 되는 성도의 자신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그분의 전부가 아니다. 계속해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알아가야 한다. 그래서 더 큰 하나님, 더 영광스런 그분을 알아 갈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온 세상에 전해지기를 원하신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또한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쁨의 중요한 증거가 된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롬3:23). 우리는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셔서 여기까지 오시게 하신 것은 우리를 영화롭게,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와 같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게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영광임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사모하며 사는 것이다(요일3:2).
_건강한 성도, 가정, 교회, 그리고 세상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며 살 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가 이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쁨이 먼저 가정에서 열매 맺기 원하신다. 이 즐거움을 근거로 한 가정과 교회는 견고해지고 건강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이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어린 감람나무”같기를 원하신다(시128:3). 달콤한 포도즙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가정, 윤택한 가정,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신다. 복된 가정은 지역 교회 공동체의 기초가 된다. 교회의 영광은 건강에 달려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과 지역 교회가 회복되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의 영광으로 누리는 교회,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교회, 그리고 가정들이 행복할 떼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가 건강해야 세상을 하나님의 진리로 채울 수 있고, 세상을 섬길 수가 있는 것이다.
_사는 것이 지긋지긋 할 때도 있지만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성도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난 신부이다. 이 땅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더 큰 기쁨을 주시는 아버지를 기억하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살도록 주께서 도우실 것이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환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인내를 누린 사람, 인내를 통해 연단을 받고 성숙해진 Viewer사람들이 참 소망을 바라보고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즐겁게 이 땅의 생을 살다가 그분께서 예비한 집으로 오기를 원하신다. 인생의 참 즐거움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를 알아 즐겁고 복된 삶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 쉼의 회복 | … 두 번째 쉼에 이르는 길
| 마태복음 11:28-30 |
“성도에게는 두 가지 쉼이 약속되어 잇다. 첫째는 우리의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겨 드리고 얻는 쉼이다. 이 쉼은 우리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구원받을 때 얻는 쉼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얻는 쉼이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가 될 때 두 번째 쉼을 주시겠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두 번째 쉼에 까지 이르러야 한다”.
_짐 진 자에게 주시는 짐 / 자신의 짐을 져달라고 부탁하시는 예수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인간에게는 많은 짐이 있다. 가난의 짐, 질병의 짐, 외로움의 짐, 생존의 짐, 일의 짐, 미움의 짐 등 수 많은 짐들이 우리의 어깨에 놓여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짐을 자신에게로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풍성한 돈으로도, 남녀간의 멋있는 사랑으로도, 일의 성취감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은밀한 공간이 있다. 우리 영혼의 이 깊은 곳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로만 채워진다. 이곳이 채워질 때 인간은 가난의 극복과 함께, 질병의 치유와 함께 참 만족을 누릴 수가 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은밀한 자리로 오심을 가로막는 것은 죄이다. 이 죄가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므로 아버지의 공급이 차단되고 우Viewer리에게 죽음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죄가 사슬이 되어 우리의 목을 조이고 영원한 죽음으로 우리를 끌고 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죄 사슬을 끊어 주셨다. 이제 예수님을 우리 삶을 주인으로,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신 은총을 받아 들일 때 우리는 마태가 말하는 첫 번째 쉼을 누리게 될 것이다.
“ …..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두 번째 쉼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 얻는 쉼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두 번째 쉼까지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지셨던 멍에는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짐을 지셨다. 그분께서는 지금도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짐을 지기를 원하시며, 그 짐을 지는 일을 제자로 부르신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워주시는 이 짐은 가정과 일터와 교회와 우리 이웃 속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짐이다. 이 일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 무너진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서 다시 우리 속에 회복시키시는 이유 또한 바로 이 일을 위해서인 것이다.
_두 번째 쉼
예수님의 멍에를 우리가 대신 메면 두 번째 쉼이 주어진다. 이 쉼과 기쁨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는 다른 특별한 은총이다. 이 쉼은 짐을 내려놓고 얻는 쉼보다 더 깊고 크고 놀라운 쉼이다. 잘 섬기면 섬길수록 더욱 큰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섬김의 기쁨을 알지 못하면 반쪽 구원을 가진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혹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열심을 다해 사는데,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항상 쉼과 기쁨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우리가 헌신하면서도 쉼과 만족보다 불안과 고갈 상태를 느낀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근본적으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세대에는 안주형 그리스도인이 많아져 가고 있는 것 같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복 받는 것이요, 잘살기 위한 것이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고난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일리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이런 정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유가 늘어나고 편안하게 사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주께서는 우리에게 주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를 뿐 아니라,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이런 기쁨과 쉼을 누릴 때 세상을 이기는 자로 설 수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런 기쁨을 주시는 것이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마11:29). 배우면 쉽다. 배우되 우리는 예수님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나와 내 가정과 나의 일을 향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늘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 번째 쉼을 회복하고, 죄의 짐을 벗어 던진 모든 사람들이 이제 섬김의 짐을 지고 주님을 배우면서 더 깊은 은총의 자리로 나아가기 원한다. 그곳에 참다운 쉼과 안식이 있는 것이다.
| 섬김의 회복 | … 제자가 가야 할 길, 섬김
| 마태복음 20:1-16 |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이 무엇인가? 내가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께서 왜 내가 수고한 이만큼 안 주시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연륜이 있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은 곧잘 이런 생각을 한다. 그리곤 하나님께 섭섭해 한다. 우리는 섬김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잘 섬기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자신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자였는가를 잘 기억하라고 가르치신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이 제대로 섬기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누추한 인생을 살다 갈Viewer 뻔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교만해지기 쉽다.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재능과 기회를 주셔서 한 일을, 자기 잘나서 한 것인 줄로 착각한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속성이 있기 때문에, 이 죄성을 이길 때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울 수 있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 사도들을 일꾼으로 부르셨고, 오늘 이 세대를 위해 여러분과 나를 부르셨다.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섬김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섬기는 자들이 필요하다. 학교에도 필요하고 군에도 필요하다. 시장에도 필요하고 가정에도 필요하다. 회사에도 필요하고 공장에도 필요하다. 섬기는 학자도 필요하고 상인도 필요하다. 섬기는 남편과 아내가 있으면 가정이 일어설 것이다. 섬기는 사원이 있으면 회사가 일어설 것이다. 섬기는 공무원이 있으면 공직 사회가 일어설 것이다. 섬김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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