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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 춘천-홍천전투, 계속
박헌균씨등 3인의 제보다.
부평리에서 정자리 들어오는 길이 예전에는 비포장이었으며 매우 좁은 단차로 였다.
그런데 도로를 넓히고 포장하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정자천 변에서 유해가 나와 2군에 매장하였다는 제보와 박헌균(81세. '07)어른이 전쟁 당시에 직접 하천의 바위밑에 매장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로공사간에 나오는 유해를 재매장한 곳에서는 탄피나 전투화 조각등은 나왔으나 유해는 없었다. 그러나 바위 밑에서는 바클, 약병 실탄등 총 28점의 유품과 한구의 유해가 발굴 되었다.
김관흠(72세. '07)씨의 제보는 국군이 철수도중 중식을 먹다가 포격을 받아 4~5명이 전사하여 직접 가매장을 하였다고 하여 그 지역을 발굴 결과 탄박스와 기타 많은 유품 그리고 2구의 유해가 발굴 되었다.
심순길(40세. '07)씨에 의하면 6.25전쟁 당시에 마을 주민들이 학교 앞 나무 옆에 당시 전사한 국군을 2구 매장하였는데 계속하여 학교에서 안좋은 일이 벌어져 이 유해를 발굴하여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2구의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다.
[말고개 탱크잡는 전투 목격자 만나다]
홍천북방에서의 전투중 가장 확실한 제보자가 나타나 우리는 말고개전투의 치열함을 다시한번 일캐우는 대 사건이 터졌다.
화촌면 주음치리 김남수(82세.'07)어른의 제보다.
"저기 밑에서 탱크가 올라오는데 군인들이 죄다 산속으로 들어가 보이지도 않아. 그런데 갑작스레 꽝 하더니 앞에 오던 탱크가 덜커덕 하더니 멈추고 북한군이 뚜껑을 열고 나와 도망치는데 다 죽었지. 저 길바닥에 시체가 쌓였어. 그러더니 몇대인지 몰라 탱크는 다 놓고 저 놈들이 도망치고 말았지. 그러더니 얼마 있으니까 말을 타고 나타난 북한군이 저기 산길로 올라서서 넘어가는데 탱크가 다시 나타나 산에 대고 얼마나 포탄을 쏘아대는지 아마도 앙갚품을 하는 모양이야. 군인들이 많이 죽어 동네에서 올라가 묻어 주었어"
할아버지는 원래 홍천 두촌면지역 청년방위대였다.
이지역은 전쟁전에도 북한군의 유격대들이 심심찮게 넘어와 습격을 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내촌이나 혹은 남면 수리봉까지 지원나가 실제 전투를 하였다. 품걸리로 넘어가던 지금의 관대리로 넘어가든 38선이 바로 목전에 있어 공비들의 잦은 침투로 항시 지역주민들이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곳이다.
할아버지는 이곳 전투에서 국군을 도와주다 부상을 당하여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고향으로 복귀하였는데 돌아오니 마을에서 여러명이 북한군 통제로 큰말고개 앞산에 올라가 8구를 한곳에 매장했다고 하였다. 이 일대 교통호에는 많은 유해가 있었는데 누가 수습이나 묻어주지도 못했다가 워낙 냄새가 심하니 북한놈들이 나서서 묻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권팀장 팀을 올려보내고 능선위주 탐사를 하도록 하고 할아버지와 말고개 정상에 올랐다.
지금도 구길 말고개 정상에 가면 몇기의 묘가 있는데 이곳의 어느 하나가 당시에 전사한 유해를 거둬서 집단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바로 옆에는 조그만 가게가 있는데 30년 넘게 장사를 하였다.
"혹시 한식이나 추석 때에 성묘하러 오는 분들이 전쟁 관련 이야기를 하시는 들어본 적 있습니까?"
"이 산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묘에 대해서는 들은바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혹시 잘못 들으신거 아니예요?"
막상 현장에 오니 할아버지도 "이곳이다"이렇게 찝어서 말을 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지금 산속에서 탐사하는 권팀장은 신이 나있다.
왜냐하면 국군 용사님을 8구나 발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제76사단에서 병력을 지원받고 지뢰탐지기도 지원받아 산 정상에서 8부능선까지 정밀 탐사를 계속 하는데 모든 곳이 탐지음이 걸려 당시의 치열함을 느낄 수 있다.
"한곳에 발신음이 크게 들리는 곳이 있습니다."
"알았다. 한번 조심스레 기초 굴토를 해봐라. 지금 바로 밑에 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니 곧 간다."
나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산을 들어갔다. 체 400m가 안되기 때문에 해발고도를 고려하면 그리 올라가지않아도 된다.
현장에 도착하여 소리가 탐지되는 지역을 경시해보니 거의 10m 범위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래서 발굴병을 투입하여 겉 흙을 걷어내고 조심스레 실태를 확인하니 정확하게 8구가 매장되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8구의 유해가 맞습니다. 감사 합니다. 그런데 탱크가 올라오는 것을 정말로 직접 보았습니까? 부상은 언제 당하셨는데요?"
"직접 보았지. 산 위에서 바라보면 저 밑에 탱크가 올라오는 것 다 보여요. 그때 한 5부능선에 호를 파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거리가 불과 얼마 안되는데 처음에는 그놈들이 무방비로 걸어오다 우리에게 당하고 나서는 저 강건너 북창에서 주음치리-외삼포리로 빠지고 한 무리는 철정에서 야시대리로 넘어가 우린 포위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니 죽기살기로 철수하는데 어디로 모이는지도 모르고 홍천쪽으로 길을 바라보며 가는겁니다."
주음치리 김성덕(84세. '07)할아버지의 제보다.
"'50.7.15일에 말고개로 피난중에 교통호속에 전사한 국군 전사자 1명을 직접 매장 하였다."
우리는 이곳에서도 직접 할아버지를 모시고 현장을 확인하여 1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두촌면에 사는 김종우 어르신의 증언이다.
"내가 12살에 전쟁이 났다. 어른들이야 전쟁이 뭔지 알겠지만 나는 총쏘고 불이 번쩍번쩍 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길가에 나가 전쟁하는 모습을 구경도 했다. 군인들이 몰려 올라가기도 하고 탱크가 길을 달려 내려가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지나 북한군이라는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와 있는데 국군이 도망가지 못하고 붙잡혀버렸다. 그러자 북한군이 동네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총으로 쏴 죽여버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묻어라 하여 묻었다."
이런 내용은 나는 흔하게 듣고 있지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가.
아마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나 색깔이 있는 분들은 믿지 않거나 조작이라 할 것이다.
기막힌 이야기인데 무슨 인민군이나 중공군은 나쁜짓을 안하고 지역 빨갱이가 다 못된 짓은 한다고 하는데 내가 들은 바로는 아니다. 사람이 문제인 것이냐 이념이 문제인 것이냐의 이분법에서 나는 둘 다 해당된다고 본다.
중공군도 나쁜 짓 많이 했다. 아니 남의 집 물건을 가져가고 쓰지도 못하는 돈을 주고 가면 그건 정당한 것인가? 여인도 손대는 놈들 많았다. 심지어 할머니로 욕정을 채워 그 동네 모든 할머니가 제대로 걸음을 걷지 못한 마을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유해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지형의 변화로 찾지 못했다.
또 두촌지역의 자은리에 10여구의 유해가 군복을 입은 체로 홍천강가에 있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지금은 오산에 살고 계시는 한형식이라는 분이 전쟁당시에 개울가에 군인이 죽어서 군복을 입은 체로 썩어가고 있어 형님과 같이 시체를 거두어 자은 1리 고모부 밭에 직접 매장하였다는 것이다.
우린 설레이기도 하고 과연 남아 있을가 하는 반신반의의 생각을 가지고 현장에 가니 밭은 그대로 있지만 주변이 다 복토되어 실제 제보자의 기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지역 주민을 대동하고 현장에 대한 면밀한 접근을 해 보았지만 그동안 많은 수해와 농로를 넓히고 44번 도로를 확포장하는 가운데 어느 곳은 2m이상 복토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니 어떻게 찾겠는가? 너무 늦었다!
수원 장안구에 허광영씨의 제보다.
"홍천 괘석리에서 살았는데 6.25전쟁 당시에 후퇴하던 군인이 전사하여 마을 사람들이 봉분을 만들어 주었는데 동네에 연로하신 분들이 장소를 알고 있다."
우린 조심스레 주변을 탐문하였으나 이곳 일대가 과학화 훈련장이 들어서며 많은 분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현장을 알 수 있는 분이 없었다.
어슴푸레 알고 있는 분이 있긴하여 발굴하여 보았으나 유해를 찾지는 못하였다.
괘석리 광암리등은 백우산 895m,소뿔산 1109m, 가마봉 925m등 1,000m가까운 고지군들이 즐비한 곳으로 이곳 일대는 '51년도 중공군 4월 및 5월공세시 주요 격전지라 중공군과 우리 국군 제5,7사가 녹아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산 고지정상과 능선상에는 대부분 개인호가 엄청나게 그대로 남아 있다.
광암리에 계시는 서병찬씨를 만나 우린 '51년 4월에 숨져간 제5사단 참전용사 두분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발굴하여 한분은 신원이 확인되기도 한다.
사실 참전용사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초기전투에서는 높은 산에는 올라갈 여유도 없었다고 한다.
어떻게 봄면 나는 행운아인지 불운아인지 모르지만 말고개 전투 영웅 양학진 분대장이나 조달진 일병을 몇번씩 만나 보았고 김운한 장군, 김주형 장군도 만나 뵈었다.
더구나 당시 사단장 김종오 장군의 공관병도 만나 초기 전투시 대응하는 제6사단의 실상을 많이도 들었기에 꼭 제6사단 참전용사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44번도로를 가운데에 놓고 서쪽은 상수내리 682고지-부평리 매고개-신남 558고지-희골고개-거니고개-자은리 410고지-큰말고개 382고지로 이어지고 실제 이런 곳에서 전투를 했다.
동쪽으로는 부평리 수리봉704고지-신풍리 500고지군-어론리 586고지-거니고개-철정 고사리봉356고지 등 큰 도로변에서 전투를 했다.
이곳 일대의 모든 산은 올라가면 개인호나 탄피 등을 쉽게 식별할 수가 있다.
주로 유해를 발굴한 곳은 희고개에서 거니고개에 구간에서 우린 10여구의 유해를 찾았고 말고개일대에서 20여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바로 이런 분석결과를 기초로 어디가 전쟁의 중점인지를 어느정도 분석이 가능하리라 보며 잊혀진 전사를 찾아낼 수가 있다.
거니고개는 지금도 거니고개다.
이곳은 북쪽의 매봉에서 내려서는 아주 양호한 산악 기동로다. 실제 전쟁 당시에도 이곳을 차단하면 신남에서 철수하는 병력이 포위되는 곳으로 중요지형인데 지금 고개 바로 우측에는 탄약중대가 자리 잡고 있고 거니고개 식당이 있다.
나는 이곳을 집중탐사하기 위해 갑둔리의 응봉산(887m)으로 올라 어론리 586고지로 내려서고 다시 어론리 속살메기부터 가마봉(925m)으로 올라 탄약중대가 있는 방향으로 서진하여 탐사를 해 보았다. 한여름의 탐사란 많은 땀이 흘려 체력도 문제지만 녹음으로 가시덩쿨로 숲속이 잡목이 많아서 진출하기가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이곳은 전쟁당시에 미군이 엄청난 포탄을 산에 퍼부어 소나무는 대부분 다 죽고 그후에 자란 일부 나무외에는 참나무 등이 주종이다.
또한 언제부터는 산에 아예 누구도 들어가지 않아서 소로길도 없다.
운전병인 수환이와 둘이서 김밥을 베낭에 넣어 하루종일 탐사를 하고 마지막 부분이 탄약중대 자리로 거의 탈진상태에 그 철조망 울타리에 접근했는데 너무 힘이 들어 부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쪽문도 없다.
투덜투덜 하며 울타리를 따라 걷는데 사계청소를 한다며 잡목들을 다 베어버려 아차하면 그 뾰족한 것에 바리 기우뚱하는 바람에 무척이나 힘들다.
얼마후에 보니 고가초소가 보여 그곳으로 접근하니 초병이 둘이서 신나게 이야기를 하느라고 우리가 온 것도 모른다.
"손들어, 유해발굴단이다!"
"누구냐, 손들어, 기린?"
우리가 암구어를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한손으로 철조망을 붙잡고 한손을 들어보였다.
그런데 벌써 싸이렌 소리가 나고 5분대기조가 출동하고 있다.
내부에 근무하는 한명이 비상벨을 누른 것이다.
상황은 벌어졌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우린 멍하니 물에 빠진 쥐마냥 철조망을 붙잡고 서서 보초와 대화를 이었다. 그들도 우리를 이해하고 경계심을 버리고 대화에 응해왔다.
"야, 너희들 여기서 근무하다 귀신 못봤니?"
"전 못밨는데 본 사람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너희들 여기가 전투 장소라는 것 알아?"
"잘 모릅니다."
이러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5분대기 소대장이 병력을 전개시키고 철모를 쓰고 달려 왔다.
우린 가까운 쪽문으로 들어가 탄약중대 행정반으로 안내되어 시원한 물 한잔을 대접 받았다.
인연이란 이런 것이다. 탄약중대 군무원(박덕용) 탄약관과의 10년 인연, 그리고 유해발굴!
그런데 탄약관 한분이 많은 관심을 갖고 내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떠나려 밖으로 나오는데 따라나와 질문을 던진다.
"사람뼈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하세요?"
우린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낯설은 내용이다.
상세히 설명은 못하지만 노출된 사람의 뼈가 꼭 오래된 나무색깔처럼 보이고 땅속에 것은 토질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답변을 했다.
그리고 얼마있어 제보가 왔다. 탄약관이다.
"부대안 골짜기에 바위가 있는데 돌틈에 전투화가 보이고 다리뼈같은 것이 보입니다."
우린 바로 달려가 현장으로 안내 되어갔다. 거니고개에서 불과 직선거리로는 얼마 되지 않는다.
산 게곡에 돌들이 굉장하게 모여있다.
계곡의 시작부터 끝이 아예 돌로 되어있다고 보는 편이 나았다.
"미군 조사단과 함께 현장을 가다."
그런데 그 시기에 미국 하와이에서 미국 유해발굴단의 조사팀이 국내에 들어와 있었는데 본인들의 제2사단이 '51년도 중공군 5월공세시 홍천 북방 가리산일대를 점령하고 있으면서 공격을 받아 후퇴하는 과정에 전사 또는 실종되어 찾지 못한 인원이 18명인지 된다며 전투화를 신고 있다하니 본인들도 조사활동에 참여하겠다 한다.
한국계 통역담당 여군 김중사와 일행4명이 우리를 따라 현장에 왔다.
탄약관의 안내를 받아 골짜기로 들어가 현장을 보니 참 이렇게도 찾아지는구나하는 탄성이 나왔다.
두개골은 아마 장마등 수해로 어디론가 굴러갔던지 돌과 부딪쳐 조각조각 나버려 흔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나머지 뼈는 돌틈에 또는 큰돌밑에 온전히 남아 파란 이끼도 끼고 심지어 발목 밑부분은 전투화가 살아있어 그 속에 발가락 잔뼈들이 발목뼈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강이뼈도 전투화에 반이 들어가 있는 관계로 살아서 있고 오히려 대퇴부는 한쪽은 있는데 한쪽은 없고 갈비뼈는 2/3가 그대로 고스란히 바위밑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나머지 허벅지뼈등을 찾으려 골짜기 끝까지 다 정밀 탐사를 하였지만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수류탄이나 터지지 않은 박격포탄, 칼빈탄, 쏘련제 모시나칸트 탄등 많은 유품을 수거했다.
하지만 미군의 기대와는 다른 동양계로 인종이 구별되었다.
점심식사 시간이 되어 우린 거니고개 식당에 갔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알고보니 식당 아저씨 아버지가 이동네 터줏대감으로 6.25전쟁 당시에도 이곳에 살고 있어 전쟁을 경험했다고 한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계시만 그때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지금 44번도로를 따라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북한군이 탱크를 가지고 밀어붙혀 국군이 바로 울타리선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다고 하며 전쟁중에 건천에 보이는 유해는 당시 북한군의 통제를 받아 부역으로 나가서 여기저기에 거둬 가매장하였다 한다.
그런데 국군만 죽은 것이 아니고 북한군도 많이 죽어서 있는데 북한군도 그렇게 자기들의 군인을 찾아가려 하지 않았다 한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지금 44번도로를 확포장하는 가운데 유해가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도로공사가 '98년도 부터인지 시작되었는데 신남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6.25참전 유엔군 동상이 있는 부근이 원래 커브길로 언덕이었다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전투가 치열했는데 어떻게 그곳일대에 가매장 되었는지 유해가 가장 많이 나왔는데 모두 신원미상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한다.
전투화며 실탄도 탄박스로 나오고 박격포탄도 나오고 그러다 도쟈로 밀어내는데 터지기도 했단다.
그러니 이 사업을 조금만 더 일찍이 시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한숨이 한번 더 나왔다.
또 얼마가 지나 탄약관이 전화가 왔다.
탄약중대 외곽 순환도로를 정비작업중 유해가 목격 되었다는 것이다.
원 이곳이 격전지였기에 또 다시 차를 몰아 달려가니 울타리로 접근하다 보니 간첩침투인지 알고 5분대기 비상이 걸려 출동했던 그 고가초소 옆이었다.
제보된 지역을 가니 울타리 경게선을 따라 순환도로를 우후 정비차 하고 있는데 예전에 길을 밀면서 언덕이 생긴 곳이 일부 무너져 내려 그곳의 흙을 치우는 과정에 뼈가 노출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롸탐지기를 사용하여 주변을 탐지해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잘 나타나지 않아 이상하다 싶어 잡목이 우거진 곳에 들어가 유심히 관찰해 보니 이곳이 과거에 공동묘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 오래되고 누가 관리하지 않아 봉분이 다 흘러내려서 언듯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였다. 주변이 그리고 고가초소가 있는 곳도 모두가 공동묘지의 일부였다.
아마도 군부대가 들어오면서 땅을 징발하고 전쟁이 몇번 이 일대에서 치열하게 있다보니 그 지역사람들이 다 다른 곳으로 피난아닌 피난을 가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북으로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나는 노출된 유해를 양지바른 곳에 잘 매장해 줄것을 당부하고 탄약중대를 떠나왔다.
나는 제6사단의 제7연대가 춘천을 방어하다 다음 방어진지가 원창고개 일원이라는 전사의 내용을 근거로 원창고개, 지금의 중앙고속도로 춘천휴게소가 있는 곳에 올라서 지형을 분석하니 저 앞에 안마산(304m)이 있고 우측에는 바로 소양강을 건너 구봉산(441m)이 있다.
그리고 원창고개를 중앙으로 좌측에 금병산(652m)이 우측 매네미골에 수리봉(645m)-매봉(759m), 매봉 앞으로 북쪽에 대룡산(899m), 남쪽에 연엽산(850m)이 발달하여 정말 나보고 방어하라 해도 방어를 잘 할 것같은 지형이다.
물론 이러한 산이나 능선에는 개인호가 약 10,000 여개가 연줄처럼 즐비하게 있고 대룡산 정상 능선에는 교통호도 있다.
"우리 탐사팀은 절대 산에서 산삼이나 특이한 약초등에 눈을 돌리면 부정탄다."
2000년부터 유해발굴을 하면서 느낀 점은 한가지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유해발굴, 아니 나라위해 숨져간 용사님을 발굴하러 다니면서 사심이 끼면 넘어져 다치거나 벌떼에 쏘여 절명하거나 어떤 벌을 받는다는 것이 나의 간절한 신념이다.
그래서 우리 발굴팀과 탐사팀은 수없이 그런 교육을 신념화하여 나에게 받았다.
"정말로 산삼이 바로 눈앞에 있다."
어느날 춘천 MBC에서 뉴스 제작팀이 우리가 원창고개 일원을 탐사한다고 하니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현충일 강원지역 뉴스에 내보내겠다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오늘 우리가 탐사할 지역은 금병산에서 대룡산에 이르는 횡적 구간을 탐사해 볼 예정이다.
전쟁초기 제6사단의 춘천방어선에 이어 원창고개 방어선을 탐사하여 새로운 발굴지역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사통팔달로 길이 뚤리고 농지개간과 산판도로등이 개설되어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꼭 내가 이곳을 찾으려 하는 이유가 있다.
"위장항복으로 아군 방어선을 넘어선 북한군"
가평 탐사시에 함께했던 바로 6사단 참전용사 김용철님이 증언해 주기를 원창고개에서 방어를 하는데 북한군이 백기를 들고 항복한다고 많은 인원이 진전에 나타나 순진한 우리 군은 정말 항복하여 귀순하는 줄 알고 잘 왔다며 어서오라 하였다.
그런데 웬일, 진전에 나타난 그들이 몸속에 숨기고 가지고 온 따발총으로 갈겨대 졸지에 방어선이 무너져 버리고 원창고개를 넘어서 홍천으로 빠져야만 했다.
이런 비극은 그후 하동 쇳고개전투에서 바로 초대 육군 참모총장이던 채병덕 장군이 백의 종군하여 이곳 전투에 참여했다가 백기투항하는 적군에게 직격탄을 맞아 전사하게 된다.
실수란 반복되기 마련이고 또 잊혀지는 것이기에 역사는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지 않는가.
전사도 역사다.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있는지 사실규명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주전투 현장이 대부분 춘천휴게소를 만들려 훼손이 되고 원형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지금 휴게소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찾아야 했다.
1주간의 탐사기간에 먼저 휴게소 안의 소동산을 탐사하고 금병산으로 오르기로 했다.
촬영을 지원나온 근영이와 희택이가 한조가 되고 나와 정덕이가 한조가 되고 진범이와 형석이가 한조가 되어 주변을 탐사하는데 바로 정상 부근에 개인호가 소대 규모로 오밀조밀하게 구축되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등잔밑이 어두운 법이다.
지탐기로 확인하던중에 한 개인호에서 요란한 발신음이 울려 그곳을 기초굴토하기 시작했다.
수류탄 파편이 나오고 칼빈탄피가 나오고 있다.
카메라는 돌아가고 우린 혹시 여기서 한구의 유해라도 발굴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지금 집중을 하고 있는데 마침 휴게소에서 쉬고 계시던 할아버지 두분이 처음부터 우리 이야기에 예사롭지않게 듣고 있더니 우리가 산을 올라 가는 것을 보고 뒤를 따라 오셨다.
청주에서 오셨는데 한분은 김재승 용사님이 한분은 박춘근 용사님으로 군에서 함께 인접부대에 있으면서 죽지않고 살아난 역전의 용사였다. 오늘 여기 6.25참전용사회에서 안보지역 견학을 가려 철원 땅굴에 가는 길이었다.
본인들이 바로 이곳 전투의 장본인인 제7연대 소속이라며 정연하게 당시의 백기투항 상황을 설명했다.
유해는 못찾았지만 더 없이 중요한 증언을 듣게 되었다.
"지금 저 밑에 산이 있지요?"
"네 안마산이라고 한 300고지 됩니다."
"춘천 시내에서 전투를 하다 저 산을 타고 올라오면 금병산으로 가요. 소대장이 그리로 뛰라해서 소대원이 뛰어 올라가고 있는데 저놈들이, 저기가 어디요?"
"네, 군견소입니다. 군견 훈련 시키는 곳입니다."
"그래요. 그 근방에 벌써 올라오고 있어요. 아직 우리는 도착을 못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방법이 없지요. 당시에는 무슨 연락할 무전기도 없고 지금처럼 헨드폰도 없고 아무런 방법이 없어요. 무작정 빨리 달려 누가 먼저 고개에 올라가느냐 경쟁하는 거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놈들이 오다말고 멈춰 있는데 제법 인원이 중대병력은 되어 보여요. 사실 우리는 춘천에서 다 녹아서 연대라고 해봐야 대대 병력밖에는 안된다고 보면 됩니다. 이러는 사이에 우리가 금병산으로 해서 고개에 먼저가 개인호를 좌우측에 파고 아마 대룡산쪽으로 일부병력이 이동해 갔는데 어디까지 갔는지는 모릅니다. 대대나 중대 건재도 다 무너지고 새로 편성된 인원들로 얼굴을 처음보며 희죽 웃기도하고 일부는 배고파 죽겠다고 하소연도 하고 일부는 얼굴을 한번도 씻지 못했다며 투덜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먼저 도착했으니......"
"그러면 뭐해요. 바로 얼마안지나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햇빛이 나오다 들어가다 하는데 바로 앞에 하얀 깃발을 달고 흔들며 올라오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가짜일수도 있으니 잘 관찰하라 하여 바라보고 있는데 이 길로만 오는 것이 아니고 보니까 우리가 올랐던 금병산 오르는 능선으로 엄청 많은 병력이 올라가고 있어 다시 소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뒤따르는 우리 철수병력일거라고 하여 그런줄 알았는데 우리 눈앞까지 도달한 그놈들이 무기가 없어요. 그래서 정말 투항하는줄 알았지 뭡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뒤에서 어느 간부가 나오더니 그들에게 소속을 물어보고 어디서 오느냐고 몇가지를 물어보는데 갑짝스레 허름한 옷 속에서 따발총을 꺼내어 갈겨 대는 바람에 솔직히 총한방도 못쏘고 무너졌어요. 저놈들이 정말 대단해요. 우리가 영천 신령까지 내려갔는데 가다 보니 어느 골짜기에 피난민이 가득하게 들어가 있어요. 그렇게 많은 피난민이 왜 그 골짜기에 들어왔는지 우리 군인이 지나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격었는데 아니 그속에 일부 그놈들이 무기를 어떻게 숨기고 들어와 우리를 따라서 함께 걸어가는 겁니다. 우린 피난민인지 그놈들인지 알려고도 안하고 몇일이 아니라 한 1주일씩 굶고 걷기만 하다 문경에서 전투다운 전투를 한번 하고 이곳으로 오는데 미칠지경이지요.
제정신이라면 아마 탈영하던가 적에게 포로가 되던가 했을 겁니다."
"그래서 군인정신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 그때부터 나온 모양입니다."
"말도 말아요. 한번은 문경밑에 유곡이라던가 그곳에서도 전투를 했는데 피난민이 황소등에도 집에 물건을 잔뜩 실고 가는 겁니다. 알고보니 그게 그놈들이 피난준비를 해서 그속에 총과 박격포를 실고 앞으로 걸어가게 한 겁니다. 얼마가서 짐을 내리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소를 몰고 가는 분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피난민 대열이 난리가 나 이리뛰고 저리뛰고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바로 그놈들이 다 쏘아죽이고 산속으로 숨어버리고 있다가 우리가 나타나면 기습하여 또 다 죽는 겁니다. 그러니 우린들 어떻게 해요. 그 다음부터는 피난민이 오지말라하는데 다가서면 다 쏘아 버렸지요."
용사님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먼저 전사한 전우를 만나 용서를 빌고 혹시나 본인의 총에 죽어간 민간인이 있다면 사죄하겠다 한다.
휴게소에서 경적소리가 들려온다. 관광버스가 출발하는 경고소리다.
용사님 두분은 우리들에게 고맙다고 고맙다고 몇번을 칭찬하며 현장을 떠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심봤다?" 방송국 사람이 횡재했다.
방송국 피디인지 과장인지 우리 근영이가 호를 굴토하고 있는데 10cm도 아닌 그 호에 붙어서 지라는 산삼을 본 것이다. 우린 아무도 그걸 산삼으로 보지않고 있었는데 산삼이란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아무리 유해 외에는 보려하지말라 교육이야 했지만 이건 호에 자란 산삼인데 그걸 몰랐다니 한순간 "애이 바보"하다가 그건 아니지 바로 우리의 당위성을 어필하는 좋은 교보재로 활용되었다.
입버릇처럼 말한 그것이 사실이 된 것이다. 물론 방송에는 그 산삼 발굴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우린 팀을 구분하여 2차 탐사를 시작했다.
방송국 카메라맨이 그 무거운 장비를 메고 금병산을 따라 올라오는데 무척이나 땀을 흘렸다.
그래도 우리가 도와 준다고 하는데 군인이 총을 남에게 주는 법있느냐며 한사코 거부했다.
그 프로정신이 바로 방송인인데 사이비 기자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도 그 춘천 휴게소에 가면 그산삼을 기억하고 있다.
팀원들간에 약속이 있다. "누가 먼저 그곳에 아무도 모르게 올라 산삼을 찾으려 할 것인가? 알게되면 모두에게 밥을 사기로말이다.
나는 방송국이 떠나가고 금병산에서 내려와 수리봉으로 향했다.
다시 휴게소로 들어와 휴게소측과 협조하여 후문으로 나가 410고지를 경유하여 매내미골로 해서 수리봉에 오르는 것이다. 얼마나 기온이 더운지 30도를 넘나들고 가시덤불이 나의 옷을 걸고 남어져 새로 마눌님이 사는 바지를 찢고 말았다.
사실 이곳에 오르기전에 마을 탐방에서 차로 매네미골을 올라간 적이 있다.
이 동네에는 10여구가 살고 있고 그 중 한집이 6.25전쟁전부터 살고 있는 집이 있다.
아저씨는 당시 12살로 군대를 안가는 나이인데다 피난도 안가고 계속 살아온 집안이다.
전쟁의 내력을 들으니 국군이 마을거쳐 수리봉으로 해서 매봉-연엽산을거처 홍천방향으로 후퇴해 갔다는 갔다 한다.
본인이 어려서 수리봉에 올랐는데 주변이 온통 탄통에다 철모도 많고 탄알이 수북하게 있어 그걸 형들하고 가져다 돈으로 바꾸어 갔기도 하고 엿도 바꿔 먹기도 했는데 이미 마을 어른들이 올라가 시신은 수리봉에서 바로 북쪽에 평편한 곳이 넓게 있는 그 사이에 매장했다 한다.
하지만 어찌딘 일인지 그시절에는 비도 많이 오고 눈도 많이 오고 산사태도 그러다 보니 자주 발생하여 사암리 방향으로 무너져 내려 많은 유해가 유실 되었다 한다.
한 30년전까지만 해도 골짜기에 두개골이 굴러다니고 큰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하였다.
울타리를 벗어나 한 20분 걸어들어가니 410고지 일대인데 이곳에서 춘천시내가 양호하게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시계가 좋으니 분명 누군가는 점령했으리라 판단하고 주변을 살피는 순간 교통호도 보이고 개인호도 보였다.
이미 참전용사님의 증언으로 교통호까지 구축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니 이것은 그후에 구축된 것으로 봐야 하고 개인호는 그 교통호를 따라 40여개가 남아 있는 걸로 보아 1개소대 병력이 올라옸던 모양이다.
우린 이곳에서 '08년도에 아직 군복이 완전분해되지 않고 손에 수류탄을 쥐고 있던 유해등 3구의 완전 유해를 발굴했는데 전투화를 싣고 탄통에 m1탄도 그대로 남아 있고 m1대검도 있고 모든 유품이 완전 100% 것만 있었다.
이곳에서 수리봉은 다시 매내미 마을 뒷산으로 해서 올라 가는데 한시간이 소요되었다.
동네 어른이 이야기 한대로 많은 개인호가 남쪽으로 있고 북쪽으로는 생각보다 넓은 평지로 산행에 아주 좋았다. 그러나 수해가 나서 무너져 내린 곳도 이제 사방공사가 이루어져 많은 부분이 원형이 바뀌었고 토사가 몇천톤은 흘러내린 곳에서 찾기란 쉽지가 않다.
여기서 매봉으로 올라간다고 간 것이 잘못 방향을 잡아 바로 세계기독교 훈련원이 있는 서쪽 산에 올랐고 내려서니 계곡에 한여름 날인데 꽐꽐 거리며 물이 흘렀다.
나는 눈치 볼것도 없이 옷을 입은 체로 들어가 흐르는 땀을 식히고 나왔는데 눈치빠른 운전담당자가 어느새 여기까지 차로 찾아왔다.
우린 차로 동산면 새술막, 구5번도를 따라 내려가면 할레루야 기도원이 나은데 바로 모퉁이를 돌면 새술막이다.
이곳은 제보지역으로 홍천으로 넘어가는 모래재인데 전쟁당시에 많은 군인이 죽었다고 한다.
전쟁당시 조양리 근처에 살았던 홍순모 어른의 제보다.
"전쟁시 집이 이근처에 있었는데 수리봉 472고지 일대에서 국군과 북한군이 전투를 했고 개인호도 많이 보았고 파편이나 틴피등이 산 능선과 고지에 다수 있었는데 전사자를 찾아서 유족에게 ㅂ내주었으면 한다."
또 다른 지역 제보자 정연화 어른은 새술막에 살았는데 모래재 올라가는 길 좌측산에서 전투가 있었고 국군 6사단이 전사하여 길에 있었는데 북한군이 지나가며 길 밖으로 굴려 버렸고 다시 이것을 마을에서 부역으로 나가 7~8군데에 묻었는데 산 꼭대기도 있고 지금 산양삼을 심은 밭에도 있다."
위의 두가지 제보는 모래재는 같은 지명인데 고개가 둘이 있고 수리산은 새술막에서 한참 홍천쪽으로 올라와 동막골이라는 동네 서쪽에 있는 산이다.
새술막은 바로 오르막 길이 나오는데 이곳이 두번째 제보자의 진술내용이 있는 곳이다.
그런 얼마후 여긴 새술막이다.
우린 날짜를 잡아 정연화 어른을 만나서 동행하여 탐사하기로 하고 우선 우리끼리 기도원 뒷산 아래 수용골에 들어가 지역주민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집은 몇가구 살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전쟁이 난지도 모르는데 북한군이 하루는 찾아왔다고 한다.
참 호랑이 담배피는 시대같은 이야기인데 같은 대한민국에 그것도 그 수많은 군인들이 원창고개 모래재에서 숨져 나가는데 전쟁을 몰랐다니 정말인지 거짓인지......
내무서원인지 하는 놈은 보았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총을 거꾸로 메고서 빨간 완장을 두르고 나타나 해방군이 들어왔다며 장군님께 감사하고선 수상한 놈들이 찾아오면 즉시 신고 하란다.
수상한 놈이야 바로 우리의 국군이나 경찰을 말하는 것이다.
수용골에서 뒷산에 올라가 춘천 정신병원쪽으로 내려오는데 실제 호가 별로 없었다.
다시 논골로 들어가 바람골고개 위로 해서 426고지로 올라서 군자리 마을회관 으로 내려섰다.
462고지 일대는 많은 개인호가 있고 군자리 마을 회관으로 내려오는 구릉성 능선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요소요소에 개인호가 있고 일부는 큰 폭격이 있었는지 포탄 탄흔도 발견 되었다.
그런데 얼마나 졸려오는지 나는 여기서 한 30분을 오수를 즐겼다. 너무도 포근하고 아득한 곳이다.
그러고 깨어나 여기저기를 탐색하는데 묘하게도 내가 살던 동작동 현충원같은 느낌이 들었다.
"야 정덕아 너는 어떠니, 난 여기가 너무 편안해서 안가고 싶은데?"
"아니 곧 내려가야지 늦습니다. 이상한 말 하지 마시고 아직 멀었습니다."
회관에 들어가니 할아버지는 3분 밖에 안계시고 10여 명이 할머니들이다.
땀으로 완전 범벅이 되어 들어서니 그것도 중령 계급장을 달고 시꺼먼 군인이 유배발굴단 조끼를 입고 덥석 들어와 꾸벅 인사를 올리니 짐짓 놀라는 표정이다.
"어르신 놀라지 마십시요. 북한군 아닙니다. 국방부에서 이곳 저 높은 산에 6.25전쟁 때에 전투가 있었다고 해서 죽은 군인이나 경찰들을 찾으려 왔습니다."
"그걸 지금 찾아 뭐한답니까?"
당황스런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비록 늦었지만 이제라도 국가가 제대로 못한 점을 인정하고 우선 나라를 지키려다 전사한 군인부터 찾고 순차적으로 애매하게 죽은 분들도 찾겠다는 나라의 의지입니다."
"아니 전쟁은 군인이 했는데 죽는 사람은 내 아버지고 내 오라버니라 어떻게 내가 세상을 살아온지 아세요?"
너무 충격적인 질문에 나는 입을 닫아야 했다.
"죄송 합니다."
그러자 할아버지 한분이 나서서 "왜 이런 사람에게 애먹이고 있어요. 이 사람들은 아무런 관계도 없고 좋은 일 하러 다니는 사람인데 한풀이 하면 되는 감?"
"아닙니다. 어르신. 할머니 괜찮습니다. 당연히 국가가 제대로 못해 그런 비극이 났고 저도 비록 그때 군인은 아니지만 국록을 먹는 사람으로써 책임감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할아버지는 6.25전쟁 참전용사신데 노무자로 미군 제3사단에서 있다가 휴전되어 돌아왔다 한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으니 미군들이 들어오고 국군이 들어오고 하면서 동네 여지는 다 거들짝 내고 부역자를 찾는다고 하며 이사람 저사람 잡아다 많이도 죽여버려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많았다 한다. 그런데 지금은 다 떠나고 별로 사람이 없단다.
본인이 그래서 산에 올라가니 그 당시는 그대로 모습이 남아 있어 총은 지서에서 가져갔고 죽은 사람은 백ㄱ골이 되었으니 누군지도 모르고 해서 가까운 호속에 밀어넣고 몇 삽씩 마을 사람들과 직접 올려 주었다고 한다.
우린 이 일대에서 '12년도에 6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다니다 보면 멱살도 잡히고 간첩으로 신고도 되고 무슨 부동산 투기꾼으로 몰려 절에 스님으로부터 혼도 나고 어떤이는 공기총으로 죽여 버리겠다고 총 가지러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산으로 도망도 치고 별별 일이 다 생겨서 지난 20년이 애환이 많이 남는다.
우린 드디어 정연화 할아버지와 만나는 날이 찾아와 모래재 수용골 입구로 갔다.
할아버지는 건강하셔서 모래재 정도의 고개와 인접 야산은 문제 없다고 하신다.
할아버지와 고개를 걷고 야산을 샅샅이 뒤졌다. 직접 매장을 목격했기에 총명하신지 그 자리를 대부분 잘알고 있었다. "여기요. 여기요. 여기요......"
그런데 그런 자리마다 지탐기의 요란한 탐지음이 울려 우리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실제 국군 제6사단의 병력을 여기서 발굴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때는 6월25일, 참전기념일이 곧 다가오는 기간이었다.
전년도처럼 높은 분이 현장을 찾을지 모른다는 첩보가 전해지고 어디를 발굴해야 의미있는 곳이 될까 고민하고 있는차에 역시 참전용사님은 나에게 고통을 주지않고 제보자를 만나게 해 주신 것이다.
탐사가 끝나고 새술막에 있는 막국수 집에서 할아버지와 점심을 먹었다.
할아버지도 참전용사신데 전투병이 아닌 병기부대에서 근무하다 제대하여 전방에서의 전투관련 사실은 잘 모르셨다.
다음날부터 바로 기초굴토가 시작 되고 할아버지는 종종 현장에 오셔서 확인하고 가시곤 한다.
그런데 한곳이 산양삼을 심어버려 주인이 아주 까다롭게 보상금을 많이 요구하여 난감했다.
그래서 일단 그곳은 보류를 하고 7군데를 굴토하여 4구의 유해모습을 확인하였다.
전투화를 신고 있는 유해부터 거구로 매장되어 있는 유해, 참나무뿌리가 안고 있는 유해, 어떤 집 묘가 있는 바로 아래에 매장된 유해 등......
1개소대 병력을 지원받아 주변을 정리하고 이동경로를 다듬고 안전줄을 매달고 내리막은 게단을 만들고 열심히 준비하는데 그만 계획이 취소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우린 지난해에 포천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현장으로 모신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끼리 '09년 4구를 발굴했다.
"땅이란 그런 느낌이 있나보다. 군자리 뒷산의 비밀"
이곳에서의 탐사는 정말 힘들지 않고 1주간 계속 되어갔다.
'08년부터 '18년까지 이곳 일대에서는 20여구의 유해가 발굴 된다. 전투가 심하게 치렀다는 춘천 소양강 연안은 복개공사와 수몰, 그리고 아파트단지등 많은 지형변화로 사실 몇구 찾지 못했다.
그러니 발굴 되는 유해숫자를 가지고 전투의 정도를 가늠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니 전사에 별로 언급되지 않은 지역은 유해발굴로 전쟁사의 부분을 수정할 필요성을 찾게는 되는데 한 예가 바로 춘천 북산면 내포리 오항리일대의 초전 전투사다.
어쨋든 나는 무척이나 행복한 탐사를 마치고 비록 높은 분을 모시는 행위는 없었지만 용사님을 찾아 모신다는 나의 책무는 계속 되었다.
그런데 묘한 것이 이곳 군자리 뒷산에서 잠들던 상상이 계속 떠올라 왜 그럴까 가끔씩 지도를 펴보곤 한다. 그러다 찾아낸 것이 다름 아닌 바로 바람골 고개 정상 426고지 남쪽에 춘천시 공설묘지였다. 그리고 얼마지나 '14년도에 이일대에 춘천시립 화장장이 들어섰다.
그 수많은 운수납자들이 살다가 이러저러 이유로 생을 마감하고 떠난 사람들의 안식처란 것이다.
나는 죽은자들과 무슨 인연이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래도 싫지가 않다.
지난번에 탐사하고 유해발굴한 지역인 춘천 북산면 오항리와 내포리도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부귀라라는 마을 이름과 백민터란 지명이 말해주듯 정말 살기좋은 곳이다.
이것은 내 느낌이지 또 무슨 땅장사나 풍수지리를 알고 하는 얘기가 아니니 오해없기 바란다.
가 보면 바로 앞에 소양강물이 넘실대며 잔잔한 미소로 아침저녁을 인사하고 그 남쪽에는 1,000m가 넘는 홍천 북방 가리산이 주욱 능선을 10km이상 펼치고 있다.
갇혀 있는 느낌이지만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 힐링하는 분들은 더없이 좋은 곳중의 하나다.
다시 주제를 춘천지역 전사로 넘어간다.
전쟁중 춘천은 많은 애환을 가지게 된다. 그만큼 중요한 중부전선의 요충지였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전철까지 연결되어 주말이면 춘천 막국수와 춘천 닭갈비로 최고의 먹거리며 춘천 판타지등 세계적인 문화(?)거리로 자리 잡았지만 70년 전의 춘천은 가평과같이 서울의 동쪽 외곾지역으로 교육 도시면서 그러다보니 좌익계열들이 많이 있었다 한다.
이상하게 배움의 정도가 좀 있으면 그당시는 죄익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춘천이 전쟁이 나니 당연 군인들의 집결지가 되고 이곳에서 군수품 조달이나 병력들이 기차로 춘천역에 들어와 전방으로 이동하는 군사도시로 커가고 비행장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비행장도 수명을 다하고 춘천역 일대에 휘황찰란하던 불빛도 꺼져 갔다.
춘천이 역사의 고장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중의 하나가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켜 썩어가는 조정과 일본군에 대항했던 의암 유인석 선생의 고향이 춘천으로 선생의 사당은 춘천 남면 가정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중공군이 내려와 있을 때에 홍천강과 북한강을 안고 있어 이동로로 사용되기도 한다.
내가 처음 이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하려 할 때는 순수히 격전지 위주 중요한 24개소를 전쟁기간('50~'53)인 3년을 고려하여 그 기간('00~'03)에 발굴하려 했다.
그러다 이것이 지금처럼 전국적으로 이제는 비무장지대에 이어 북한지역까지 확대 발굴하게 되어가는데 처음에야 누구도 모르고 관련된 자료가 있는 것도 없으니 힘센 참전용사가 남긴 자료위주로 지역이 선정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꼭 그 자료에만 억매여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군부대와 행정관서에도 협조공문을 보내어 전사자 매장지역을 발굴하려 많은 노력을 했고 행안부와 협조하여 월 단위 반상회보에도 거의 10차례 사업의 시행과 제보를 받는다는 내용으로 홍보를 하였다.
그런 어느날에 춘천에서 유격군 출신이란 고우선이란 분이 연락이 왔다.
1950년 6.25전쟁이 나고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간 국군이 다시 진격해 올라갈 때에 북한군 패잔병들이 미처 북으로 못가고 내륙으로 숨어들어 특히 가평과 춘천지역에 몰려 있다는 정보분석을 기초로 패잔병을 격멸하기 위해 당시 대한 유격대 소속 37명이 1개소대가 구봉산 자락에 남아 있다가 1950년 11월 18일날 북한군 패잔병에게 모두 포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군이 모두 총살을 시키려 하자 눈치빠른 4명은 먼저 도주를 하였고 미처 도주는 못했으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죽은척 하여 살아난 한명이 대원들이 사살되어 구덩이에 묻혀 있다고 증언하였으니 찾아서 발굴하여 현충원에 안장해 달라 한다.
춘천 퇴계동과 신동에 가면 보급대와 정비대가 있는데 이곳이 당시 유격군 훈련소라 한다.
전쟁 당시는 육본에서 통제하는 유격부대가 있는가 하면 지역별로 인원을 모집하여 특수부대라는 칭호를 주어 적진에 침투시키는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인원들이 어떤 사람은 유격군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지역노무자라고 하기도 하는데 국가라는 조직을 갖추지도 못하였고 기능 발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궁여지책인지 아닌지는 해석여하에 따라 다르겠지만(일부는 군이 독단으로 조직, 일부는 지역 관공서와 협조하여 조직) 군관민이 합심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현지인이 아무래도 지형을 잘 알고 있고 설사 잡히더라도 얼버무리고 빠져 나오기에 쉽다는 차원에서 유리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당시 춘천지역에는 북에서 몰려든 피난민이 안마산일대 등에 엄청 내려와 있었는데 사실 말이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지 얼마전까지만 해도 같은 조선인이었으며 일가친척이 여기저기 살고 있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니 간단한 교육을 2~3주간 받고 유격대원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제보자 증언대로 11월이라하면 국군이 춘천에 다시 들어간 것이 10월초순일테니 교육받은지 얼마 안되는 싯점이다.
2001년도에 다시 이곳일대의 탐사와 지역탐문을 위해 보급대대에 들어가 훈련 장소를 확인해 보고 하지만 지금 그 흔적도 없다.
부대에서 나와 안마산지역으로 갔다. 이곳은 내가 대대장시 우리의 1단계 진지가 여기였다.
그때야 아무것도 모르고 산을 올라다녔지만 지금 올라가니 정상부근에 호가 산재해 있고 춘천시립화장장(지금은 동산면 군자리로 이전) 있는 곳으로 서쪽은 보급대자리로 내려서는 능선인데 초기전투시 잠깐 올라섰다 바로 원창고개로 밀려간 곳이다.
여기서 동내면 사암리 마을회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마을잔치라고 떡도 하고 국수도 끌이고 우린 마침 점심시간대인데 얼떨결에 갔다가 대접을 잘 받았다.
"어르신, 제가 여기 온 것은 밥 먹으러 온 것이 아니고 6.25전쟁때 전사한 군인이나 경찰들의 유해를 찾으러 왔습니다."
"아이고 지금 얼마 지났는데 그게 남아 있는가. 한 10년전에 우리 동네 들어오는 길을 만들다 시체가 나와 어디다 묻었다는데 그런거 찾는갑네?"
"그게 아니고 전쟁하다 전사한 인원을 찾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노? 다 썩어 아무것도 없는데 전문가라 보면 알아요?"
"군인이 죽었으면 전투화나 파편, 총알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거든요. 그걸 유품이라 하는데 사실 그런게 없으면 누구도 판단하기 곤란하고 다만 보신 분이 군인이라 하면 신분은 확인이 되지요. 전쟁때는 옷을 다 베껴가 버려 발가벗고 전사한 군인이나 경찰도 있거든요."
이때 실제 유해를 관을 가져와 수습을 해서 옮겼다는 분이 어떻게 알고 오셨다.
"혹시 그 당시에 다른 유품을 보신적이 없나요?"
"누가 그러는데 유격군이라 하고 어느 집에서 밥먹다 인민군에게 죽었다는데 철모같은 것은 없고 눈으로 본 것은 탄피 몇개 있었고 탄티도 있었던 것 같은데......"
"와 감사합니다. 역시 용사님들이 저를 버리지않습니다. 중요한 사안이 발생하면 저는 꼭 이렇게 문제해결에 결정적인 단서를 갔고 계시는 분이 찾아와 주시거든요."
동네분들은 중령씩이나 되는데 아래사람 시키지 뭘 궂은 일 하고 다니냐고 하신다.
정말 그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살아서 해야할 일은 이거라고 믿고 있다.
"아닙니다. 높다고 책상에 앉아서 결재나 하고 높은 대우 받으면 나쁜 사람입니다. 더욱이 나라위해 싸우다 전사한 분을 찾는 것은 바로 저를 찾는 것이고 내 아버지나 형님을 찾고 전우를 찾는 일인데 귀천이 어디있겠습니까. 누구라도 먼저 나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아저씨는 복받겠어요. 어디 세상 사람이 다 그런가. 높은 0들은 ......"
나는 아저씨를 모시고 현장을 갔다.
사암교 밑으로 해서 한 도로에서 100여m 들어가 소로길 옆에 묻었다는 곳을 찾았다.그리고 보급대 병력을 지원받아 굴토를 해보니 일반 관이 나오고 드디어 뚜껑을 여니 몇구의 유해가 가지런히 모여 있다. 충북대 박선주 인류학 교수가 조교들을 데리고 분류를 하는데 7구의 유해로 판명 되었다.
남아 있는 유품으로는 전투복 바지 밑에 넣는 동그란 고무줄이 나오고 탄피 가 그대로 있었다.
"정강이뼈를 파고 들어간 아카시아 뿌리를 보고 나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식별 되는 유해중에 두개골에 총알 구멍이 그대로 나 있는 유해들이 있고 다리뼈들은 포크레인으로 긁어버려 많이 부서져 있는데 2차 가매장이라 부식이 빨리 진행되고 있어서 손만대도 가루가 되어간다. 토질에 따라 부식정도가 다르지만 이렇게 한번 파서 옮기면 옮기는 과정에 산소를 받아들여 훨씬 빠르게 썩어 버린다고 한다.
그래도 적의 총을 맞아 전사한 모습은 안타깝지만 군인으로서 영광의 상처라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한구의 유해 정강이뼈에 어떻게 아카시아 뿌리가 관을 뚤고 들어와 가운데 골수가 있는 부분으로 해서 앞과 뒤로 관통해 자라고 있었다.
나는 당장 내 다리에 피멍이 들고 살을 먹는 벌레들이 기어나오며 썩어가는 환상이 생겼다.
그러더니 다리를 절단하여야 한다고 하여 왼쪽 다리를 절단하여 한 곳에 묻었는데 얼마 지나 파보니 그 속으로 나무뿌리가 피 냄새를 맞고 파고 들고 있다.
나는 대검으로 당장 그 나무를 쳐버리고 뿌리채 뽑아 허공에 날려버렸다.
"감히 나무인 너가 내 다리를 파 먹고 자라려 들다니 괘씸한 놈 같으니......"
그리고 시간이 지나 2005년도에 만천리에 거주하는 김춘국씨로부터 그 마을 도로 및 배수로 공사간에 포크레인 기사가 유해를 식별하여 신고가 되었고 그 내용을 동면 사화복지과에 신고하였다 한다.
따라서 마을이장 김동수씨등 일부인원이 참여하여 유해를 수습, 시유림인 만천리 야산에 가매장 하였다는 진술을 받아 실제 그 곳에 가서 위치를 확인하여 '05년도에 7구를 발굴했다.
이제 14구를 발굴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유해는 어디로 갔을까, 최초 발견지점등을 확대하여 발굴 하였으나 찾지는 못했다.
지역주민들의 이야기로는 과수원을 만드는데 나와서 어디로 치워졌는데 모른다는 내용과 동네 가운데로 아스팔트 포장된 길이 생겼는데 그 밑에 있다는 등의 무수한 제보는 있었으나 아직까지 더이상 발견되거나 신고된 유해는 없다.
그러면 과연 춘천과 홍천지구 전투에 참여한 국군 제6사단의 참전용사들은 뭐라고 증언하고 있는지 대표적인 몇명의 증언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제6사단의 증언내용은 제2연대 관련 내용은 대부분이 예비대인 제2대대가 신남까지 진출하여 어론리에서 적 전차를 공격했다는 내용, 다음에 전방에서 후퇴하는 제1대대 제1중대가 자은리에서 적 전차를 공격 했다는 내용, 홍천 말고개에서의 전차공격시 제2연대 대전차포 김학도 일등중사 팀이 했는지, 아니면 예비연대 제19연대 대전차 특공조 조달진 일병 팀이 했는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제7연대의 촛점은 옥산포에서의 심일소위의 대전차공격 실시여부에 또 많은 증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진실이 어디에 있던 당사자들이 지금 살아있지 않고 지금 70년이 지나가고 있다.
또한 이미 그동안 많은 논란도 있고 해명도 되고 했는데 근자에 다시 '17년도에 작고한 이대용 전 주월공사의 증언내용이 조선일보에 '16년에 보도 되면서 심일소위는 영웅이 아니고 포 1문을 버리고현장에서 도망친 군인처럼 되어 버렸다.
하지만 많은 논란소게 지금도 그 진위여부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왜 제6사단은 유독히 적 전차를 누가 파과하였는가에 목숨을 건 증언을 그동안 많이 남겼을까?
서부전선에서는 적 전차를 무슨 도깨비로 보고 파괴하지 못하여 동두천에서 의정부로 미아리고개로 밀어붙인 장본인이 저 탱크부대다.
이곳 중부전선은 유독히 탱크를 대전차포로 옆구리를 강타하여 괘도를 못쓰게 만들어 기동불능으로 하던지 아니면 육탄 공격조가 뛰어 올라 해치를 열고 수류탄이나 휘발유 병으로 공격하여 승리를 일시적 이지만 결정적으로 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초전에 그렇게 밀리고 병사들의 희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적의 용병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였다. 그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대열을 갖추어 도보행군처럼 오기 일쑤였다.
적 전차가 귀신도 아니였다. 옆구리를 치면 기동 못하는 장비다.
우리 군인들은 잘 싸웠다. 하지만 휴가나 외박을 내보내 싸울 예비대가 없고 장비를 뒤로 빼내 기동장비나 중화기가 없고 부속품이 없다.
목전에 부대를 교대하고 지휘관을 교체하여 어디가 내가 싸워야 하고 지켜야하는 진지인지도 부지기수가 몰랐다.
내용의 많은 부분이 장교의 무능과 지휘관들의 현장 이탈, 심지어 대대장(좌측연대 좌측대대인 제7연대 3대대장 인성관 소령)등 부지기수의 장교들이 월북 또는 행불이 되던가 일부러 선심성 외출이나 휴가를 보내 전투력 발휘를 못하게 하는 사례가 무지기수다.
정말 너무 많은 좌익분자들이 장교나 하사관으로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 가장 전쟁 발발의 원인이며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간 원인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우리 용사님들은 정말 명령대로 싸웠고 그 자리를 지키려다 숨져간 영웅인 것이다.
또한 상부의 지시라는 이유로 차량등 기동장비와 중화기를 창설부대에 보낸다는 명목으로 내려 보내 초전에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등의 웃지못할 일들이 비일비재한데 과연 지금의 우리 간부들의 대북경계심이나 사상은 온전한 것인지?
그러면서 왜 이렇게 적전차 공격에는 사생결단으로 서로의 공적을 자랑하려할까?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그렇다면 그 당시에 전투를 한 인원들의 증언을 들어보고 객관적인 판단은 독자가 하기 바라며 나는 내 나름의 논리도 영웅이 맞다고 보고 있는 견해다.
먼저 우측 연대인 제2연대지역부터 알아보겠다.
'77년 3월 3일 당시 군사편찬연구소에 함병선 당시 연대장이하 8명이 모여 증언하게 된다.
1. 제1대대(좌측 대대)장 김주형의 증언이다.
"전방이 무너지면서 우리 1대대는 어론리로 철수하였다가 다시 자은리로 철수하여 다리가 있는 곳에서 좌우측으로 배치되었는데 26일 20:00에 적이 전차 10대를 앞세우고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데 이 공격에 대비하여 57mm 대전차포에 1개 소대를 배속 시켰다고 기억하고 있다.
전차 파괴는 한계에서 올라오는 2번째 고개에서다.
적은 다시 29일 전차를 앞세우고 아침에 공격을 해와 여기서 중대장 서봉호 대위가 전사했다.
나는 제19연대 제1대대가 지형정찰차 왔으며 병력은 냇가 옆에 있다고 들은바 있다. 하지만 제19연대와 공동 작전한 기록은 없다."
이때 제1중대 1소대장이었던 박병호 소위는 최초진지가 원대리 좌측 남전리의 800고지군인데 29일 당일 생존자는 소대장 혼자뿐이었다고 증언하였다.
2. 제2연대 작전주임 대위 조정연의 증언이다.('67.4.13)
"6월26일 도착하니까 자은리 북방에 새벽에 도착했다. 북한군들이 트럭을 타고 전차를 앞세워 진격해 왔다. 20대 정도라고 판단 되는데 10 몇 대 잡았다. 대전차포로 사격해도 끄덕도 안해 옆면을 사격하여 앞에 오는 것을 잡았다. 한 한시간 전투를 하여 적들은 다 달아났다. 내려가 보니 전차를 두고 도망갔다. 그때 포병사령관이 김성인데 전차를 돌려서 쏘아 보려고 했으나 못했다. 10여대를 불태웠다."
3. 제2연대 작전주임 대위 전동식의 증언이다.('82.7.26)
"우리 연대는 이동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외출 외박을 중지했다. 그러나 기동력의 부족으로 예비대의 투입에는 차질이 있었다.
현리에 있는 3대대와는 교전초기에 유무선이 두절 되었다. 3대대는 26일 저녁가지 현리-엄수동에 고립되어 있어 연대의 전투력은 현저하게 저하 되었으며 예비인 2대대는 용문산에서 3개월간 훈련을 실시한 직후에 홍천으로 이동하여 기간요원 몇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병으로 전투력이 약했다.
전쟁이 나 곧 2대대를 자은리 북방 410고지-갈이봉(396고지)에 준비된 에비진지에 투입하였으나 차량이 없어 징발차량으로 이동하는 관계로 14:00~15:00경에 도착 하였고 연대 지휘소도 자은리로 이동 하였다.
제2대대가 신남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올라갈 수도 없었다. 그리고 어론리에서 제5중대가 전차를 파괴한 것 믿어지지 않는다. 제1대대가 했다면 몰라도 제2대대는 연대본부에서 보이는 곳, 44번 도로 서쪽 고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말고개에서의 전차 파괴 상황은 재론하지 않겠으나 우리 제2연대에서 결정적인 역활을 한 것이다.
연대본부가 실제로 적을 보고 교전한 것은 말고개가 처음이다. 말고개에 제19연대 병력이 들어왔다는 말은 들었으나 협조한 바는 없다."
4. 제2연대 정보처 일등중사 강낙희의 증언이다.('80.10.6)
"S-2조사계원으로 홍천으로 이동하는 즉시 정자리에 가서 정보수집소를 인수받으라는 명을 받고 대원 5명과 같이 가서 인수받고 지형정찰도 못하고 전쟁이 났다.
이곳의 편성은 경찰 파견대로 자은리 지서에서 경찰 30명이 파견 근무하고 한청단 200명이 전투지역내 부락 단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보수집 대원은 민가에 경찰ㅇ픈 독립가옥에 숙박하고 m1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였다.
전쟁이 나서 철수 하는데 적 사이카 20대, 전차 2대, 후속 보병부대가 질서정연하게 44번 도로와 31번 도로의 교차점 3거라로 남하있음을 목격하고 광산촌(지금의 두촌면 자은리 우측 가마봉 밑에 있다)으로 방향을 돌려 후퇴하는데 광산촌은 외지인이 많아서 그런지 일부는 철수중이고 일부는 북한군 환영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25일 오전 중에 목격한 바 있는 전차가 성산리 44번 도로상의 S커브 길에 나타나자 2대대원과 57mm대전차포로 공격했으나 유유히 내려가다 전차병이 덮개를 열고 나와 아군의 직사탄에 맞아 사살 되었다. 이때 제2대대 특공대가 머리에 흰수건을 두르고 수류탄과 휘발유를 넣은 사이다 병으로 전차를 공격했다. 정보주임 송대후 대위가 사살된 전차병을 확인한 결과 소련군이 아님을 확인했다.
5. 제2연대 헌병대장 대위 최영철의 증언이다.('77.7.7)
"우리 헌병대는 본래 제8연대 소속인데 연대가 서울로 빠지며 헌병대 40명과 대전차 중대만 새로운 제2연대에 예속이 변경 되었다.
지역주민 청년단장과도 유대강화를 갖고 있고 특히 강,표 월북사건대는 그 놈들은 내가 방해하니까 서울에 가서 차량부속품을 사오라고 하여 갔다오니까 월북한 뒤였다.
말고개에서 전차를 파괴한 상황은 28일 아침으로 기억한다.
연대 대전차포 중대장이 교육을 가고(이 전투 끝나고 돌아옴) 이중위가 있었는데 4km 도망간 것을 내가 권총으로 머리를 내리쳐 다시 지역을 점령하여 전차포를 배치하고 사격했다.
나는 권총을 계속 그의 머리에 대고 있었다.
1번전차에 가 해치를 열고 보니 마치 개가 불타듯 죽었는데 계급장이 별이 세 개였다.
마침 사단의 G-2 권양수 중령이 왔다가 보고 북한군 대좌라며 사단으로 갔고 간 기억이 난다. 총 파괴 대수는 9대였다.
6. 제2연대 인사과 사병계 일등중사 김준배의 증언이다.('80. 10. 28)
"노무자들은 마을 사람들 가운데서 징발 사용했다. 마을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군에 노무지원을 자원했기 대문이다. '51년 말에는 노무사단이 창설되어 노무자를 보충받았다,
노무자는 주로 식사와 탄약을 고지정상까지 운반하는 임무였기 때문에 전사자가 속출했다.
7. 제2연대 제1중대 소대장 소위 박병호의 증언이다.('82.3.!2~13)
"제8연대와 교대하는데 우린 선발대로 '50년 6월 1일 방어진지를 인수하여 허술한 진지를 보강하였다. 6월 25일 당일 적의 포탄이 집중되어 상황보고를 하려 했으나 무전기가 삑삑거리기만 하고 유선은 절단 도었는데 나중에 알았는데 적이 사전에 주파수를 알아 교신방해를 했다.
적이 도하중에 한 손에 소총, 한 손에 수류탄을 들고 강을 건너 오고 있었다.
적의 제파식 공격을 3차례 격퇴 하였으나 실탄이 떨어져 진내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는데 2/3가량이 적의 포화에 손실되어 나와같이 철수한 병력은 7명뿐, 나머지는 전부 전사하거나 실종된 것이다.
6월27일 낮 자은리 남쪽 고지에 배치되어 방어중 "전차가 남하했다. 절벽 길에 TNT를 장치하여 폭파할 용사가 없느냐고 연대장이 말하기에 내가 자원했다.
나는 부하 3명을 이끌고 포대에 들은 TNT 주머니 3포대를 메고 화양강변(cs133890부근 333고지 하단) 산비탈 절벽에 TNT를 매설하여 2번전차를 흙더미에 묻히게 하여 뒤따르던 전차는 접근을 못하니 1번전차 승무원이 정지하여 탈출하려 하여 4명을 사살했다.
이날 밤 철수하여 말고개에 배치되었는데 이곳에서 적 전차를 파괴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우리 중대 정면이 아니였고 여기서 2일간 교전하다 횡성으로 철수 했다"
"앞에 가면 적에게 죽고 후방으로 철수하면 연대장(함병선)에게 맞아 죽는다. 우리는왜 싸우느냐"라고 장병들은 전전 긍긍 했다.
8. 제2연대 제5중대 소대장 소위 강승호의 증언이다.('77.4.14)
"제2대대장은 김상용인데 이 사람은 신망이 없고 지휘는 무능했다. 도주에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도망갔다고 하였다. 중대장은 이종기 대위인데 사상적으로 문제가 많아 의심하고 있었는데 문경에서 결국 부대 이탈죄로 총살 되었다.
연대장이 특공대를 조직하는데 내가 자원하여 대장이 되고 중상사만으로 20명을 모아 어론리 개천가로 나가 접근로에 배치하고 연대장은 558고지에 직접 올라가 지휘했다.
적 전차 10대가 남하하여 2.36"대전차포로 사격하여 1,2번 전차를 돈좌시켜 3번 전차부터는 뒤로 돌아 도주하고 말았다.
자은리 앞까지 내려오니 병력이 제5중대만 6~7명 전사하고 2개 대대(전방 1대대, 예비 2대대)가 집결해 보니 3개 중대 병력만 남았다.
9. 제2연대 제2대대 선임하사 일등상사 이용우의 증언이다.('66.11.1)
"제2대대가 예비로 홍천에 있다가 올라가 25일인가 26일인가 전투를 했다.
교전을 했는데 말고개란 곳에서 지연전을 하는데 적 탱크만 나타나면 후퇴를 하는데 함병선 연대장이 와서 후퇴하면 안된다고 하여 우리가 그곳에서 2개분대 가량이 말고개 경사가 있었는데 경사진 좌우에서 2.36"로켓탄과 수류탄을 가지고 잠복해 있다가 탱크가 8대가 나왔는데 우리가 차단하여 노획 하였다. 거기서부터 사기가 올라가 탱크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전투를 했다.
2,3일간 전투를 하고 서울이 함락 되었다고 후퇴하라 하여 후퇴하는데 연대장이 무질서하게 후퇴한다고 철수명령을 취소시켜 버렸다.
밤 12시경 완전히 포위되어 그곳에서 2일동안 헤매다가 탈출했다.
상기 내용에서 같은 제2대대원인데 직접 특공대장을 했다는 강소위는 어론리에서, 대대선임하사는 말고개라 하니 누가 맞는건지 별개의 상황인지, 아니면 말고개에서는 몇번에 걸쳐 대전차 공격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10. 제2연대 57mm 대전차포 중대 분대장 일등상사 김학두의 증언이다.('77.4.30)
나는 이분을 양학진 용사님과 같이 직접 만나 그날의 증언을 들었는데 본인은 27일날 직접 참여했고 특히 춘천 제7연대에서 춘천북방에서 대전차 공격도 심일소위와 같이 했다는 증언을 들었었다.('02~03년 2회정도) 물론 일방적인 본인들의 주장이라 할 수도 있지만 난 만남 그 자체가 영광이었으며 두 분을 존경한다.
"제1소대의 2문이 홍천 병력 대대지원을 위해 나가고 중대본부와 잔여 2개 소대는 홍천군 홍천면 대기리 버덤산 밑에 위치하여 교육훈련중이었다. 전원 외출하지않고 있다가 출동명령이 6월26일 새벽에 춘천의 제7연대로 지원을 나가 춘천도청 봉이산 우측에 배치하여 적이 소양강을 도하하는 것을 사격을 가하여 도하를 저지하고 어두워질 무렵 홍천으로 돌아와 잠깐자고 두촌면으로 출동하여 방열했다. 27일 날이 밝아 소대장 명령으로 1분대포를 추진하자 마자 적 전차 12대가 출현하였다.
1,2번 전차를 공격하여 돈좌시켰는데 아군이 불타고 있는 전차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고 적 전차병이 도주하는 것이 보였다.
총 8대중 2대를 제외하고 6대를 놓고 도주하였고 이중 한대는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다음부터는 제7연대쪽의 참전용사 증언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과 그 예하 간부의 증언이다.('82.8.27)
"모진교 폭파문제는?"
"장치는 되어 있었으나 시일이 오래되어 폭파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7연대에 배속된 사단 공병대대 제1중대 소대장 신이치 중위는 모진교 폭파 계획은 없었다고 하며 연대 작전주임인 이남호 소령의 증언은 6.25 1개월 전부터는 피아간에 모진교에 접근하지 못했다고한다.(서로 사격) 그래서 장애물 설치는 고사하고 보수공사도 못했다 한다.
"진지구축에 학생이 동원되었다고 하던데?"
"춘천사범, 춘고, 춘농, 춘여고생들이 한 5일간 자진해서 도와 주었다.(작전주임이 답변)
"자료에 의하면 약 200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여 정찰활동을 하였다고 하던데?"
"100명으로 안다. 이북출신으로 편성 되어 있는데 양구, 오음리 방면에서 정찰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다."
"각 전사에는 휴가, 외출, 외박을 안시켰다고 하였으나 과거 면담에서는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보낸 일이 없다."
이남호 작전주임의 답변은 내보냈다고 한다.
"연대자체에서 명령한 것이 아니고 상부(육본 및 사단)에서 군량미가 크게 부족하여 1/3병력을 내보내라고 했다. 그 명목은 농번기를 빙잫여 내보내도록 했으며 우리는 가급적 예비대에서 외박을 보내고 일부 휴가도 보냈다."
"전쟁전의 연대장비를 타부대 증강을 위하여 선사하였다고 하는데?"
이남호 작전주임의 답변이다.
"과거에 내가 증언한 바 있다. 이로 말미암아 부속품이 고갈상태가 되고 돈은 없고 차량기동 유지에 많은 곤란을 격었다."
김명익(예비인 제1대대장)의 답변이다 : 소총중대 화기소대 박격포 3문중 1문, 기관총 1정, 2.36"를 뽑아 보냈는데 어디로 갔는지가 불명확하다."
이남호의 답변이다 : "그때 창설된 부대가 어딘가 보기 바라며 내 생각으로는 공산당의 짓이 아닌가한다."
"부대별 전투상황은?"
포병 제1포대장 이금열 대위의 답변이다.
"우리 대대는 25일 04:00~07:00어간 출동해서 우두산 앞의 개활지에 전개하여 격전을 치르다 12:00에 총반격으로 지내리가지 밀고 갔다가 다시 원위치 했다.
26일 08:00에 재반격을 실시했는데 적의 전차병들이 아군의 반격이 없자 전차에서 나와 쉬고 있는 참이었다. 이때 3중대장(성명미상)이 접근하여 전차병으 ㄹ사살하고 권총을 시체에서 뺏고 전차는 병사들이 수류탄을 마구 집어넣어 1대를 파괴하는 큰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심일 소위는 25일 14:00의 폭파사건이다.
26일 14:00에 적은 4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내려오기 시작하여 2.36" 로켓포를 제3중대에서 뽑아 쏘았으나 효과가 없었고 백병전을 피아 하다가 16:00~17:00사이에 우두산으로 철수하여 재배치 하였다.
"부하가 본 연대장의 지도 요령은?"
김명익 제3대대장의 답변이 의미있다.
"덕장이고 능장이고 용장이다.
내가 신림 전투에서 제8사단 제10연대장 고근홍 대령을 보았는데 내 눈 앞에서 6명의 장교를 권총으로 즉결 처분 하였다.
우리 연대장은 한 사람의 목숨도 죽이지 않았다."
제7연대 작전주임 이남호의 증언이다.('77.7.20, '82.7.30~8.1)
"제16포병대대가 잘 싸워 적의 선봉대를 격파했으며 심일 소위가 적 Su-76자주포를 파괴함으로써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27일 오후에 철수할 때 17:00~18:00경 학곡리 일대에서 철수병력을 집결 시켜 휴식겸 식사 그리고 재편성을 하다 적의 따발총 사격을 받고 원창고개에 전방 우측대대인 제2대대를 배치하고 금병산에는 제1대대를 배치했다.
나는 28일부터 제3대대를 지휘하게 되었으며(제3대대장 인성관 소령은 도망감) 제3대대와 연대본부는 모래재에 지연진지를 28일 아침 일찍 점령했다."
"그때 당시에는 제6사단뿐만 아니라 전반에 걸쳐서 지휘관급에 있는 장교들이 전략전술에 지식이 박약했다는 것은?"
"그것은 인정 합니다. 그래서 적에 대한 상황을 충분히 파악을 못했고 그때는 여기에서 이중간첩을 써서 간신히 알고 물품교환을 이용해서 첩보를 알 정도였습니다. 38선에서 왔다갔다 했지요."
"25일은 어떻게?"
"전날인 24일은 우리 부대뿐만 아니지만 장교들이 다 술을 마셨을 것입니다......"
"춘천시내 시가전은?"
"시가전은 없었어요. 소양강에서 했지요."
제7연대 수색대 수색대장 이등상사 박용득의 증언이다.('81.4.14)
"수색대 편성 및 임무는?"
"연대 수색대는 약 50명의 병력으로 장교는 없고 내가 대장으로 지휘했다. 주 임무는 38선 이북에 침투 적정을 탐지하고 또는 귀순자 포로 등을 심문하여 연대 S-2에 보고했다."
"38선 근무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3개 파견대로 편성하여 파견대별로 월남 반공의용군청년이었던 서북청년단 요원을 약 50명씩 분산 배치하여 적전 정찰에 임하고 있었다."
"파견대 기간 용원은 몇 명이며 서북청년단의 보급은 어디서 지원 받는지?"
"파견대별 기간 요원은 4~5명이며 서북청년단 보급은 강원도청으로부터 지원 받았다."
"6월25일 적이 남침을 개시하였을 때는 어떤 임무를 하였는가?"
"연대장 명으로 연대 CP 경계임무를 받고 봉의산으로 이동하여 연대 지휘소 경계임무에 임했다."
"봉의산에서 계속 경계임무만 하였느지?"
"아니다. 6월 25일 23:00경 적이 적이 춘천 서북방 5km지점까지 진출하여 내가 직접 명령에 따라 포진지 파괴 임무를 띠고 서북청년단 30명을 인솔 우두산-164고지를 경유하여 삼거리 적진에 침투하여 수류탄 및 CAR 소총으로 적에게 난사하여 사살 및 와해 시키고 적진을 이탈하여 샘밭쪽으로 철수 하였다.
그런데 소양강 건너에 제2대대가 전방에서 철수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강을 도섭(지금의 세월교 근방)하려는데 우리 수색대원을 적으로 오인(복장이 적군 복장)하여 무차별 사격으로 30명중에 27명이 전사하고 나와 3명만 간신히 살아 제2대대에 합류했다."
제7연대 제1대대 병기장교 소위 안태석의 증언이다.('80.10.18~19)
" 6.25전 공비소탕에 대하여?"
"'49. 5. 15일 춘천에 있는 제2대대 제8중대 LMG소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소대는 45명으로 서북청년단으로만 편성 되었다. 제주도 공비토벌에 참전할 경우 장교로 임관시켜 주겠다는 약속하에 참가했으나 임관시키지 않자 전부 상사 계급을 달고 있었다. 우리는 공비소탕에 주로 투입 되었다.
1950년 3월 김무정이 이끄는 공비 500명이 흥정산에 출몰하여 제7연대 제2대대와 제8연대가 같이 공비소탕에 임하여 1개월에 걸친 작전끝에 김무정과 그의 처의 목을 잘라 허리에 차고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제7연대 제2대대는 32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들 공비들은 상당수의 여자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남한 해방시 행정기관에 종사할 사람들로 사전에 침투한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나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왜냐하면 나는 흥정산관련 제보를 '00년도에 듣고 실제 인천에 사는 제보자(원래 흥정리 거주)를 대동하고 흥정산을 올랐었다.
흥정산은 평창에서 흥정리로 산길을 들어가 불발령까지 가서 오르면 비록 1280m라 해도 쉽게 오를 수 있다. 아직 동네에 살고 있는 제보자의 동생까지 합세하여 올라섰는데 고지 정상은 완전 평평하여 넓은 공간처럼 되어있엇으며 개인호가 정말 한 1,000여개는 굴토 되어 있었다.
제보자 장사장의 이야기로는 어려서 올라가니 총이 그대로 있고 두개골이 굴러 다니고 있어 탄피를 캐다 묻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처음에는 이곳이 6.25전쟁터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북한군 유격군 출몰 지역이었다.
평창 봉평을 지나 북쪽 424번도로를 타면 보래령이 나오고 넘어가면 홍천 내면 창촌리 율전리가 나오게 된다. 나는 보래령에서 우측으로 가면 운두령이 나오는데 이 코스를 2회 탐사하고 보래령에서 좌측으로 올라 희령봉으로해서 보래밸리로 내려오고 한번은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여 불발령으로 나온적이 있는데 이곳은 평균 고도가 1,000m이상이다.
고지마다 개인호는 수없이 많고 특히 보래령에서 운두령에 이르는 구간은 중공군 춘계2차공세기간인 '51년 5월 21일부터 미 제3사단이 대관령가지 깊숙히 들어온 중공군의 첨단을 이 운두령에서 봉쇄하여 그들의 예봉을 차단함으로써 절대적 타격을 가하여 제기 불능으로 만든 곳이기에 의미가 있어 올랐었다.
그런데 희령봉으로 돌아오는 행군 당일 날 눈이 갑작스레 퍼부어 무릎까지 차는데 일행은 계속 불발령으로 가고 나혼자 걷는데 눈이 내리니 능선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짜기 오소리 한마리가 나타나 내 앞에서 뒤뚱뒤뚱 하면서 걷는 곳이다.
나는 오소리가 가는 길을 따라 한 100여미터를 걸어서 결국 죽기살기로 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섰는데 조난되지않고 무사히 내려왔다.
동료들 모두가 조난된줄 알고 얼마나 마음 졸이며 있었는지 앞으로는 나보고 절대 혼자서 어딜 가지 말아 달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용사님이 아마 오소리를 보내 나에게 길을 안내하게 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곳이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6.25전쟁 전에 있었다니......
"적정은 어떻게 수집했는가?"
"청평골에 위치하여 제2대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하루는 부귀리 마을 금광굴에 공비출현했다는 말을 듣고 소탕을하러 간사이에 이놈들이 청평골에 나타나 반장의 목을 잘라가 버렸다.
우리도 6월20일 야간에 보복을 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간척1리에 들어가 북한군 한명을 생포해 들어와 적정을 묻자 묵비권을 행사 했다.
그래서 드럼통에 넣어 뚜껑을 닫고 3/4톤 차량에 실어 밤내 청평국민학교 운동장을 돌고 돈 다음 대대본부에 도착하여 수백 km를 왔다고 안전하니 말하라 하니 입을 열었다.
'북한군 제2사단을 화천에 제7사단을 양구에 각각 위치하고 이곳에는 수백대의 전차와 포가 있다라고 증언하는데 계급은 하사였다.
6월21일 연대본부에 도착한 김종오 사단장에게 즉시 보고 했더니 사단장은 이를 인정하지않고 "전부 거짓말이다. 전선은 이상없다라고 비상경계를 해제한다"고 명하고 사단으로 귀대했다."
"경계상태는?"
"청평골에는 민가가 10동 가량 있는데 소대는 민가에서 유숙하고 있었으며 전방 중대도 마찬가지로 민가에 유숙하면서 거점의 경계초소에 병력을 순환배치. 소극적으로 경계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아침에 초소에 올라가 확인할 정도의 경계이었다.
우린 남침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6월24일은 토요일이기에 소대원1/2을 춘천으로 외박을 보냈다. 적 포화의 강타로 소대는 18명중 7명이 전사하고 각개분산하여 오합지졸로 46번 도로를 따라 우두산으로 향했다.우측의 5중대 7중대도 철수를 하는데 오전 12:00경이다. 아비규환이다.
재편성을 완료한 제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는 현 제2군단 사령부가 잇는 샘밭을 목표로 공격, 육박전을 수행했으니 중과 부족으로 소양강 이남으로 26일 08:00에 철수하여 방어하였다.
"심일 대전차포 소대장이 전차를 어떻게 파괴했는가?"
"제1대대는 대전차포 4문중 2문은 고장, 2문만 갖고 옥산포로 출동했다. 옥산포에서 전차와 대항하다 철수중 현 제201연대 주둔지에서 1문이 진흙 속에 빠져 1문만 갖고 소양교 이남으로 철수했다.
적 전차가 소강강으로 몰려와 도강 준비를 하였다.
26일 21:00에 심일 소대장이 "포 1문 밖에 없어 이제 우리는 죽었다. 마지막이다. 안소위 Cal-50으로 엄호사격을 해달라. 내가 전차를 공격하겠다." 말하고 사격준비를 완료하였다.
1번전차가 소양교에 진입하자 57mm 대전차포가 기다렸다는듯이 좌측 카타빌라를 적중시켜 전차가 정지하게 되니 따르던 전차들이 모두 정지하고 말았다.
제8중대는 Cal50 8정중 4정은 고장, 4정만으로 강북단에 있는 전차와 보병에 강타를 강하였다.
적 전차는 도로가에 전차를 방열하여 봉이산에 아군진지를 맹타하기 시작했다."
제7연대 제8중대화기소대 안태석의 증언이다('77.6.27)
"전투경과는?"
"제7연대는 1/3병력이 24시간 외출하고 있었다.(춘천시내) 25일 하루를 소양강 북안에서 싸웠다.
26일 새벽에는 제1소양교를 중심으로 자로 1대대 우로 2대대가 배치 되었다.
저녁에 적 전차 10대가 소강강교로 출현하였다.
전차에 대하여 심일 소위는 소양강 파출소옆 정자나무에 57mm 대전차포를 거치하고 26일 일몰경 적전차에 사격을 가하여 1번전차를 파괴하였다. 그날 밤 심소위는 잠행하여 2대의 전차를 특공대원과 같이 파괴하였다.
"춘천철수는?"
"28일 17:00경이며 그 후원창고개에서 그 날 저녁 한바탕 했다."
"철수시 병력 손실은?"
"소대원 40명중 12명이 전사했다."
"심일 소위에 대해 아는 사항은?"
"콧수염을 기르고 남자답고 활발하여 영향력이 컷으며(8기 7연대 회장) 그와는 북진시 금산까지 같이 갔으며 그곳에서 포위되어 나는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고 그는 후에 소식을 모른다."
이 내용에서 중요한 개념차이를 발견했다.
모든 사람들이 전차 파괴를 옥산포나 그 어디 우측일거라하고 사진 찍고 지역주민의 증언을 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소양강변에서 쏘아 그렇게 될 수 있느냐 하지만 안태석 소대장의 증언처럼 잠행하여 옥산포에서 파괴가 있을 수 있다고 보면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 제기다.
모두가 심일 소위가 적 전차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이대용 당시 예비대대인 제1대대의 중대장이던 이대용의 증언에 따라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재검토가 필요하다.
장소나 시간은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한 것만큼은 맞다고 판단 된다.
제7연대 제2대대장 소령 김종수의 증언이다.('77.4.12)
"57mm대전차포의 지원은?"
"천전 북안에서는 없었으나 남안에서부터 1개포대가 지원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맞아도 반응이 없었고 심일 소위는 쏴도 안되니까 부딪쳐서 깼다. 큰 나무가 있는 곳에서다. 아마 대전차포 소대장으로 안다. 도망가기 바쁜데 전차하고 들이받았으니 얼마나 용감한가."
"원창고개 전투 상황은 ?"
"28일 새벽에 춘천을 철수하여 원창고개를 점령했는데 29일 날이 새면서 적 1개 대대 규모가 기어올라 오기 시작하여 전투가 시작 되었는데 제5중대장 김일흥 대위가 적이 백기를 흔들고 있다하여 앞으로 나가보니 큰 백기를 들고 올라오고 있어 직감으로 항복하려는 것이다 판단하여 사격을 중지 시켰다.
전대원이 양손을 들고 빨리 올라 오라하였는데 고지에 올라서자 그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백병전이 벌어직 말았다. 완전히 속았다.
큰 희생은 없고 그 병력으로 낙동강까지 갔다.
제7연대 제3대대 인사장교(본부 중대장 겸무) 중위 송인규 증언이다.('80.12.18)
"1950년 6월 24일 저녁 상황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24일 저녁에 대대에서 화천에 파견한 첩자가 돌아왔다. 당시는 대대장도 첩자를 보냈다. 그때 내가 대대부관 겸 정보장교 근무를 겸직 했다.
정보 선임하사가 나에게 와서 첩자가 화천지역에 적전차가 집결하고 있는데 남침할 확실성이 있다고 하여 연대에 보고하였다. 대대장은 서울로 참모학교 교육받으러 가고 없었다.
25일 6시30분경 연락병이 와서 중대장님 비상이라고 하면서 깨웠다.
부대에 오니 지암리에 파견된 제10중대 이한종 중위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어떻게 된거니? 말마 쏘나기야 쏘나기 정신없이 떨어져" 하더니 전화가 끊어졌다.
09:00경 화기중대 잔여인원과 대대본부인원 몇 사람을 지휘하여 전방 고탄리로 갔다. 이미 이곳에 적전차와 자주포가 와 있고 병력이 아침밥을 길가에 앉아 먹고 있어 우측 산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니 부대대장이 조그만 야산 지역에 와 있었다.
심일 소위가 지휘하는 57mm대전차포가 명중했는데 전차는 끄덕도 하지않고 계속 전진하여 왔다.
그러자 심중위는 대전차포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도망가는 줄 알고 욕가지 했는데 조금 있으니 길 옆 풀밭으로 기어 나와 해치를 연 전차는 모조리 수류탄을 던져 파괴시켰다. 아마 7대는 파괴 되었을 것이다
그때가 오후 5시경이었다. 이와 같은 심중위의 공로로 말미암아 당일에 점령될 뻔했던 춘천시가 점령되지 않고 25,26일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26일 우두산에서 철수하여 27일 아침 연대본부에 가니 ㅐ대장이 카키복을 입고 참모학교 교육복장으로 와 있었다.
연대장은 봉이산에 있는데 대대장이 불러 갔더니 GMC 1대에 욘료와 탄약을 한 차 연대에서 실고 오라하여 갔다와서 대대장이 가평쪽으로 빠지는 10,11중대를 지휘하겠다고 하여 적이 이미 춘천지역에 들이닥치고 있는 상황이라 우회하여 27일 오후 4시경 금곡리에 가니 벌써 중대들이 와 있었다. 여기서 이왕 여기가지 왔으니 육본을 갔다 오겠다 하여 9중대 1개 경비분대를 데리고 서울로 가고 중대들은 원주로 가라했다.
서울로 들어가 육본에 가니 장창국 대령과 김석원 장군을 만났는데 대책이 없다하여 을지로 HID로 가서 표지철 중위를 만나 밥을 ㅍ얻어먹고 거기서 잠을 자고 28일 새벽 2시경 잠을 깼는데 밖으로 나가보니 우리차만 있고 그렇게 많던 차들이 하나도 없이 사라졌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혼잡하여 갈 수 없어 광나루쪽으로 가는데 한강 쪽에서 꽝하고 불이 번쩍하였다. 광나루에 다 왔는데 헌병이 차를 세워 다리가 끊어져 못간다고 하여 신내족으로 가라하여 한강으로 갔다가 끊어진 것을 알았고 도강할 수 없어서 왕십리로 가기위해 서울역을 돌아 신세계쯤 왔을 때에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대대장은 경상을 나는 중상을 당하여 다른 병력들에게 대대장과 떠나라 하고 그곳에서 지하로 숨어들어 수복될 때까지 숨어 있었다.
이 내용에서 대대장의 행태가 나타나 있는데 그후로 대대장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과연 그의 행동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은 도망친 것인지 알 수 없다.
전쟁을 하는 것인지 낭만을 즐기는 것인지 도대체 그 당시의 군의 많은 장교들의 사상문제와 사생관이 너무나 큰 상처를 우리군의 역사에 남겼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제7연대 제3대대 정보선임하사 일등중사 이석환의 증언이다.('80.9.19~20)
"6.25전쟁에 대하여 채병덕 참모총장을 의심하고 있는데 이유는?"
"첫번째는 6.25직전 전방 연대에 근무하는 고참 하사관 약 350명 전원을 만기라는 이유로 제대를 시킨바 있는데 이는 실제는 강제로 제대를 시켰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전쟁시 사용할 1:5만 지도를 전쟁 직전에 상부에 반납 했다는 것이다.
"첩보 수집 방법은?"
"춘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연대는 첩보수집 기구로 가평지구 정보파견대를 운용하고 있었는데 서북청년단원 200명으로 편성하고 운용했으며 직접 1950년 2월경 육군 남산학교 2기(첩보반)졸업후 정보파견대자으로 보직 받아 적목리 일대에서 첩보수집 활동을 했다.
식량은 가평군 행정기관으로부터 획득하고 적목리 일대에서 가구용 목재를 벌채하여 서울 목재상에 팔아 운용하였다"
"제3대대 제9중대장 이래흥 중위의 전사에 대하여?"
"6.25일 적의 포사격으로 1개 분대와 같이 호 속에서 폭사 당하였다. 제9중대는 3분의 2가 손실 되었고 제2대대 지역으로 철수 한 것으로 안다. 그 결과 5번 도로상은 공백지대가 되어 적들이 유유히 남하할 수 있었다.
제7연대 제10중대 제1소대장 중위 이한종의 증언이다.('82.7.7)
"고시락 고개에는 콘크리트로 축조한 토치카 3개소와 10여개의 유개호가 있었다.
이 고시락고개에서는 개전전에도 매일과 같이 북한군과 충돌이 있었다. 아 진전 마평리에는 민가 세 채가 있었으며 전쟁 발발전 3~4개월전에 11중대가 있다 하룻밤에 실탄 10,000여발을 사격하여 그 탄피를 소모해야 인정이 되는데 적의 방해로 회수하지 못해 미 고문관이 거짓이라 하여 부대가 교체되어 내가 지휘하는 제10중대에서 내가 지휘하는 제1소대가 증강된 1/52명으로 경계를 했다.
"6월24일 밤 지암리 유지 한사람이 제삿밥이라 하며 술,밥,고기등을 가져왔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자정이 지난후에 경계를 강화했다.
25일 04:30분경 우리 소대 정면에 적이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미 적이 전화선을 접선하여 선전하고 있었다. 중대에서는 아무일 없다고 하는데 05:00시 적의 공격준비 사격이 시작되어 제파식으로 밀고 들어오다 지뢰지대에 걸려 뒹구는데 그 위로 올라섰다. 08:30~09:00까지 지탱하고 홍적령으로 갔는데 3명이 전사했다.(?)
홍적령에서 몇이 손실되고 26일 새벽에 목동 남쪽 도로옆 고지로 철수해 내려가는데 여기서 비로소 중대장과 제3소대 병력을 만났다. 그러나 이곳까지 지원왔던 제8연대 포 2문과 장갑차 5대는 포 한방 쏘지않고 철수해 버려 실망이 컸다.
중대장 하상도 대위는 전쟁이 일어나자 21/2톤에 식량, 기타 물건을 잔뜩 싣고 가족을 태우고 서울로 피난 시킨후 복귀 했다.
"청평으로 철수하라 하여 보납산은 가보지도 않고 청평 남쪽 고개에 배치하였다가 가평에서 징발된 차량으로 이동하여 금곡에서 27일 대대장을 만나고 27일 해질 무렵 철수하여 원주에 28일 새벽에 도착했다.
여기서 삼마치로가 연대 주력과 합류하고 횡성다리를 중심으로 강변에 배치 되었는데 적이 아군 후방으로 우회하여 후방의 헌병이 많이 손실되고 분산 철수하여 충주로 갔다."
제7연대 57mm대전차포중대 포수 일병 주락현의 증언이다.('65.8.10)
"전차를 파괴한 적이 있습니까?"
"그때 전차가 옥산포까지 10대가 왔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소양강 다리를 건너서 파출소 부근에 대전차포를 배치하고 있었는데 경전차가 제일 앞에 3대가 나오고 그뒤에 중전차가 7대가 따라 나오고 그 뒤에는 보병이 따라 왔습니다.
거기서 나온 애들의 말을 들으니까 2대는 57mm에 맞아서 파괴되고 3대째는 운전병만 죽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전차를 끌어오려고 해도 전차를 운전할 줄 알아야지요.
그런데 그때 소대장을 8기생인 심일이라는 분이 했는데 그때 옥산포 수문 옆에다 대잔차포를 배치해 놓고 앞에 오는 전차를 사격했는데 잘 맞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전차는 가까이 오고해서 애들은 다 도망을 갔습니다
"후퇴하면서 무슨 특공대를 조직해서 전차를 파괴한 것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상의 내용이 제7연대 관련 내용으로 많은 부분이 중대장이나 대대장이 현장을 이탈하는 내용이 많으며 대대별로 해당 지역에서 정보수집위한 첩보활동을 해왔다는 사실과 그들은 정규군이 아니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심일소위의 옥산포나 아니면 바로 소양겅 넘어 큰 나무밑에서 전차를 공격하고 육탄으로 해치를 열고 수류탄을 가 넣는 행위가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자꾸 어디서라는 지역아닌 지점에 관심을 갔고 파 헤치려 하는데 전반적인 내용은 일치하고 있으며 나도 춘천에서 4년간 그 옥산포 앞을 지나다녔지만 그곳에서 용산리 어간에서 얼마드니 상황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심일소위의 용맹성을 인정하면 어느 연대나 대대의 공적이 낮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소설같은 이야기도 아닌데 여기서 그만 했으면 한다.
다음은 예비 연대인 제19연대(연대장 민병권중령)의 증언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연대장의 증언이다.('77.4.14)
"전투 당일 연대장의 위치는?"
"보병 담당반에서 교육중에 있다가 11시에 돌아왔다."
"제3대대의 말고개 투입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제3대대장 김한덕의 답변이다.
"홍천에 도착은 27일 20:00시였다. 일시는 모르지만 여기서 함병선 제2연대장을 만났다. 제3대대는 빨리 올라가라는 명령뿐이었다.
대대가 말고개에서 철수한 것은 28일 밤 10시인데 달이 있었다.
제3대대 제10중대장 김두일의 증언이다.
"27일 밤 10시에 우리 3대대는 말고개(도로포함) 좌측 능선에 배치되었는데 대략 우에 제9중대, 중앙에 제10중대, 좌에 제11중대가 배치 되었다.
이때 제2연대 병력 약 100여 명도 이고지에 혼합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3개 대대장이 만나 부대배치에 대하여 말다툼하는 것을 보았다.
말고개 대전차 공격에 관한 이야기는 조달진일병과 당시 특공대장등의 증언을 들어 보기로 한다.
조달진('65.7.13일 증언내용) : 그때 우리의 중대장은 성병수 대위이고 소대장은 김윤기소위였다.
특공대로 선발된 우리 20명은 27일 밤에 3/4톤 차에 실려 연대 정보과에 근무하는 어느 장교 인솔하에 목적지로 가다 차에서 내려 도보로 갔다. 연대장이 제2연대가 전차때문에 고전중이니 새벽 04:00시까지 적전차를 파고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09:00시가 되자 고지에서 병사들이 소리치며 전차가 온다고 하여 내가 1번차를 담당하고 나머지는 기타 전우들이 처치하기로 하고 달려갔다.
당시 특공대장 연대 수색대 박준수의 증언이다.
"연대 S-2요원과 제3대대에서 지원한 병사들 중에서 독신자 등을 빼고 30명으로 편성하였다.
연대장은 60mm 박격포탄을 쓰도록 하였으나 나는 81mm 박격포가 효력이 크다고 이를 대원들에게 갖고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연대장은 백주 소주를 주었고 저녁은 건빵으로 했다.
27일 저녁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도요다 1대에 모두 타고 앞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제2연대장을 만났으며 특공대를 이끌고 전차를 부수러 간다고 하니 수고한다고 하며 전방 상황을 설명하고 격려까지 해 주었다.
제19연대 의무대장 대위 윤봉찬의 증언이다.('81.4.6)
"임관은 언제 하셨는지요?"
"'49.3.25일 군의 8기생으로 임관하였는데 '45년 초 평양의전을 졸업했다."
"6.25전투가 발발한 후의 활동상황은?"
"당시 연대는 사단과 같이 원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 직전에 육본에서 전군 사단의무대장 및 연대 의무대장 교육이 2주간 있었고 6월24일이 수료날로 25일 수료증을 받기로 되어 아침에 육본으로 가는데 스피커를 통하여 알았다.
원주행 열차를 타고 부대에 오니 제19연대는 춘천지구로 출동하고 없고 잔류병만 있었다. 그때의 죄책감은... . 춘천에 도착하니 연대의무대가 춘천사범학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제 춘천에서 철수 하였으며 연대 의무대위치와 전사상자 처리는?"
"춘천 남방에 있는 원창고개로 철수중 제7연대만 방어하고 우리 제19연대는 사단장명에 의해 제2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27일 오전에 긴급히 홍천으로 이동하였다.
연대장은 특공대 12명을 엄선하여 편성하였고 2명 1개조로 10~20m 거리를 두고 도로 양측에 사체로 가장 누워 있었다. 수류탄과 휘발유병을 위장하여 가지고 있다 전차 뚜껑을 열고 집어넣었다. 부상자는 그렇게 없었으며 후송에 차질이 없었다."
제6사단 제16포병대대 군수장교 소위 김운한의 증언이다.
"6.25일 당시의 참상에 대하여?"
"우리는 과거에 만들어 놓은 진지, 방어진지에는 우리 포가 진출을 못했습니다. 전선 가까이 있는 탄약 1기수 약 5,000발을 빼내어 소양강 이남으로 운반하여 적에게 사격을 할 수가 있었다.
심일 소위가 대전차포 둘을 가지고 탱크와 대항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 생각 한다."
제16포병대대 제1중대장 대위 김장근의 증언이다.('81.3.11)
"농번기에 휴가를 갔는가?"
"보냈다. 그러나 대부분 춘천에 있어 금방 병력이 집결 될 수 있었다."
북진시는 어디까지 갔는가?"
"평안북도 초산까지 포병도 직접가서 2일간 물렀다. 압록강물을 떠다가 먹기도 했다. 화기와 장비를 파괴하고 개인화기와 장구류만 가지고 후퇴했다.
제16포병대대 경리계 상사 최갑석의 증언이다.('66.3.5)
"그때 적이 춘천에는 좀 늦게 들어왔지요?"
"소양강이 방어에 큰 역활을 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대전차포가 있었는데 그것으로 적의 전차를 직접 조준 사격하여 적의 진출이 지연 되었다.
나는 이곳 춘천지역의 구봉산 밑의 감정리 마을회관에 들러 지역주민 10여명을 만나 전쟁의 실상을 파악하려 했으며 '12년도에도 간담회를 한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소양강 이남사람들이라 그런지 초기전투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고 주로 1.4후퇴 이후의 내용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주로 중공군 매장 내용이었다.
박민웅씨의 제보다.
1.4후퇴시 원창고개로 빠져 나가는데 국군이 전사하여 항상하게 가지만 남아있는 나무에 시신의 일부가 걸려 있어 안타깝게 하였다.
더구나 강촌 지역에서는 철로변에 5사단 병력이 군복을 입은 체로 나뒹굴고 있고 중공군들이 발로 밟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박재익 할아버지의 제보다.
정규군이 아닌 노무자로 '51년도 중공군이 내려온 이후 4월부터 이 지역에서 미군을 따라 노무자를 했는데 근거가 남아 있지 않아 나중에 다시 군대에 갔다 왔다.
주로 미군을 따라 다녔으며 가리산일대에서 미군의 탄을 날라주고 가리산에 올라가 개인호도 팠다.
처음 중공군이 넘어 올 때는 삼마치를 넘어 피난을 풍기로 갔다가 돌아왓는데 삼마치를 지날 때에 엄청 많은 피난민이 있었는데 국군 7사단 8연대가 이리로 와서 중공군에 포위 되어 많이 죽었다고 들었으며 피난민들도 죽어서 그대로 있었다.
피난민이 죽을 때는 미군 비행기가 폭탄을 투하하여 죽었으며 중공군이 옆에 있는데 피난민을 통제하지 않았다.
안동환 참전용사님 외2명의 증언이다.
동네에서 함께 군에 들어가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훈련 받는 도중에 훈련병이 죽어 나갔다.
워낙 바람이 불고 먼지가 하늘을 뒤덮는데 무슨 돌림병인지 모르지만 죽어서 나가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훈련을 받고 처음 포천으로 와서 저격능선지역에 들어가 전투를 하다 12사단으로 갔다. 이때 말고개란 곳에 전사자를 모아서 화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실제 땅을 파러 지원도 나가 목격도 했다.
원통 북쪽으로 들어가면 강이 나오는데 고성으로 흘러나가는 강이라 한다.
그곳 일대 고지에서 휴전때까지 전투했으며 얼마나 죽는지 하룻밤에 1개중대가 들어가면 아침에 보면 인원이 별로 없다.(이 고지는 아마도 812-854고지 전투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됨)
최승서 할아버지의 증언이다.
노무자로 유해처리를 담당하였다.
지금 양구의 방산일대 산에서 국군의 유해처리(백석산,양갈래봉으로 추정 됨)를 했다.
평화의 댐을 넘어가면 그곳이 곧 나오는데 많이도 죽었고 산이 험한데 북한군이 골짜기에 숨어서 아군을 공격하여 많이 피해가 났다.
노무자들이 대기하다 올라가 시신을 메고 나오는데 들것이 없어 칡순을 이용하여 목에다 걸고 끌고 내려오는데 오다가 갑작스레 포탄이 떨어지거나 총소리나면 나 놓아버리고 나 살려라 도망친다.
지금도 거기 산 7.8부 능선에 유해가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가지고 내려오면 산 밑에 화장하는 장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화장을 했다.
안낙영씨의 증언이다.
현재 집근처 남의 밭에 중공군 3구가 매장 되어 있다.
가래울에 가면 과거에는 심심찮게 유해를 목격했는데 다 북한군이라 하더라.
고은리로 해서 대룡산을 넘어 북방리로 피난을 가는데 끌고 가는 소가 얼마나 영물인지 사람이 죽어있으면 절대로 밟지않고 뛰어 넘는다.
옛날에는 이 길로 홍천을 가기도 하는데 피난민도 죽어있고 군인도 산길에 얼마나 죽어있는지 정말 많았다. 지나가다 보면 어린아이를 업고 죽어간 사람도 있고 군인이 베낭을 메고 그대로 엎드려 죽었는데 총은 없고 수류탄은 보았다. 군데군데 즐비하게 늘어져 항소가 발을 내딛지 못하니 껑충 뛰는 바람에 몰고 가는 사람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60년대에 설악산에 올라가면 돌무덤이 있는 지역에서 유해를 수없이 목격했다.
나는 여기서 설악산 지역에 유해가 많이 돌무덤군에 있다는 내용을 근거로 저항령이나 소감투봉, 중청등에 대한 탐사계획을 수립하여 유해발굴을 할 수 있도록 하여 100여구의 유해를 발굴하게 된다. 가래울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말에 가서 농장 주인을 만나 바로 뒤 야산에 유해가 계곡에 묻혀 있다는 제보를 받아 이곳을 굴토하여 3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제7연대 수색대원 27명의 유해를 찾아라"
가장 심하게 전투를 하였다고 하는 소양강변중에서 그레도 원형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가래울로 가 주변을 탐문했다. 하지만 참전용사님은 그런 이야기를 증언하는데 실제 이곳에 그것을 목격한 사람이 별로 없다. 군인들끼리 전투를 하고 민간인은 다 피난을 간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 살았던 분들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그동안 수해나 복개공사등으로 그리고 새로운 도로개설등에 따라 실제 발굴지역은 찾을 수 없었다.
세월교 북안과 샘밭 천전리일대 탐사에서도 수색대에서 운용하던 정보수집조들의 27명 전사한 내용을 확인할 방법을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아마도 복장을 인민군 복장이라 니후 처리과정에 북한군으로 오인되어 강물에 흘려버렸거나 다른 곳으로 가매장처리 되었다고 보여진다.
누군가 2군단 들어가는 좌측 입구에 수목원 비슷하게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ㅕ 관리 되고 있는데 그곳에 집단 매장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누구는2군단 비행장 자리가 매장지란 사람도 있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다.
"꽃신의 수수께끼는 영원히 비밀로 남는다."
하지만 부창고개에서 발굴되었다는 곷신의 정체를 밝히려는 나의 노력은 계속 되고 있다.
당시 참전용사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군은 사전 침투조에 여자도 있었다고 한다.
점령시 아마도 행정관서를 장악하기 위한 행정요원이겠지라고 판단은 한다.
또한 서북청년단원들이 많이 정보수집조로 활용되고 사실 그 당시에 전방에 지금과 같은 초소나 막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민가를 주로 할용했다는 사실에서 그 당시 함께 월남하여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은 아닌가 믿고 싶다.
전쟁이 났다는데 어디로 피난을 가겠는가, 그러니 알고 있는 초소에 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곳을 지키다 운명했다고 말이다.
"꽃순이를 아시나요, 꽃처럼 어여쁜 꽃순이~~~!" 전쟁은 비극이다!
연대 정보장교 송대후 대위등 모두는 27일부터 당시에 지역별로 노무자를 활용하였고 부인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지원했다고 한다.
제 6 절 민간인 피해현황 : 다음 강원지역 전사 소개시 기록(164쪽~167쪽), 원주형무소 재소자 180명, 원주 문막읍 학살 주민 20여 명, 원주 반곡동 황보윤외 다수, 속초 인민군 가장 열성자대화 학살 주민 수십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