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3학년도 여수좌수영초등학교 4학년 3반 제자들과 함께 만든 까치둥지라는 학급 문집에 실린 글이다.〈까치둥지 학급 문집에 실린 우리들의 작품 소개, 독후감〉
190. 독서감상문17 (장찬송)
제목 : 유관순을 읽고
저는 유관순 전기를 읽고 16살의 애국심을 느끼기 위해 읽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이 책을 읽고 나서 알았다. 유관순은 충남 천안에서 1904년 태어났다. 예수교 공주교회 부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16세의 소녀로 시위 대열에 끼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이 운동의 전국적인 파급의 일익을 담당키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를 방문하면서 시위 운동 계획, 음력 3월 1일 일제히 궐기하였다. 삼일운동은 당시의 조선민족의 뿌리 깊은 독립의지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로 합류한 민족운동이다.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린 유관순은 당신 16세의 이화학당의 학생으로서 고향인 천안시 목천면 지평리로 내려가 수천 명의 시위 군중의 앞장을 섰다. 어린 16세 나이로 저런 큰 일을 하는 것이 놀랍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은 일본 헌병의 발포로 즉사하고 어머니 역시 참살당하고 말았다. 유관순은 체포되어 오빠 관옥과 함께 유치된 뒤에 재판이 회부되었으나 그녀의 옥중 법정 투쟁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은 일본인이다. 그런 일본인에게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라는 주장을 시종 굽히지 않았다. "죄를 뉘우치고 제국신민이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 재판관의 회유에 "강도를 몰라낸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살아서도 독립만세, 죽어서도 독립이다."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한 재판장의 검사를 향해서 의자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낮밤으로 계속되는 고문은 그녀의 죽음을 앞당겼다. 그녀의 밥에 모래와 쇳가루를 섞어 먹게 했다. 머리에 콜타르를 칠해 머리 전체를 잡아 당기고, 가발처럼 머리 가죽을 벗겨내기도 하였다. 겨드랑이와 음부의 털도 불에 달군 인두로 태워버렸다. 코와 귀는 면도날로 잘리고, 손톱, 발톱은 몽땅 집게로 뽑아 버렸다. 그러면서도 유관순은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920년 10월 12일 그처럼 가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그녀는 끝내 숨지고 말았다. 17세의 꽃다운 나이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접한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그녀의 시신 인도를 거듭 요구했다. 학교 측에 유관순의 시신은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머리, 몸통, 사지가 따로따로 여섯 토막으로 절단되어 있었고, 코가 귀가 잘리고 머리와 손톱, 발톱이 뽑혀진 모습이었다. 그러니 흉보기는 그지없는 일제의 고문은 그녀의 육신을 무참히 죽게할 수 있었으나 그녀의 애국심만은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가슴으로 설움과 슬픔이 복받쳤다. 읽으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유관순은 우리 독립의 씨앗이자 밑거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