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는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성을 띤다. 또한 다른 상품들과는 달리 시장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이윤을 창출하려면 더 많은 대중을 끌어들여야 하고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스타시스템’이 적용된다.
대중문화는 예술성보다 흥행이 우선한다. 예술적 수준이 낮은 사람의 취향까지 만족시켜야 하기에 예술적인 완성도보다는 선정적이고 음란한 내용들이 많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불가피하게 예술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한다. 이와 같은 까닭을 들어 대중문화가 예술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저급문화'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의 분류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컨대, 그것이 문화 수용자의 적극적인 행위가 가미되지 않은, 또는 수용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투영된 문화라면 '저급문화'와 '고급문화'라는 이항대립적 분류는 그것을 향유하는 대중 개개인의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객관성과 공정성을 침해하는 결과다.
선풍기 하나로 창문 없는 쪽방에서 뜨거운 여름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가난한 ‘쪽방촌 노인’이 TV를 시청하는 것은 적극적인 문화행위라기보다는 다른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수동적 수용이라 보아야 한다. 대형극장 오페라나 미술전시는 상상할 수 없지 않겠는가?
호주 머독대학의 존 하틀리 교수는 TV의 유치함을 '소아주의(paedocracy)'라고 불렀다. 하틀리의 주장에 따르면 시청률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TV는 다양한 속성을 가진 거대 집단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어린이와 같은 구경꾼들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굳이 문화적 등급을 매겨, TV가 유일한 문화적 수단인 사람을 문화적 3등 국민, 영화관도 찾고 연극이라도 볼 여유가 있는 사람을 문화적 2등 국민, 연간 몇 회라도 고급 뮤지컬 공연과 미술관 등의 관람이 가능한 사람을 문화적 3등 국민이라 분류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구라도 용쓰면 한 번쯤 비싼 고급 뮤지컬을 볼 수는 있는데 무슨 해괴한 분류인가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지난 5월에 있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카고 오리지널 내한 공연 VIP석도 17만 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5인 가족을 기준하면 90만 원에 가깝다.
핵심은 시간과 돈이다. 그것을 지속하게 수용할 수 있는가이다. 경제적으로 불투명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가난한 사람은 여력이 없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대중문화의 저급성과 고급성을 분류하는 것 또한 ’ 자본의 논리‘에 불과하다.
그에 앞서 문화수용자의 필요를 누가 무슨 근거로 결정하느냐를 따져보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자칫 엘리트들의 취향을 대중에게 강요하는 독선을 범할 위험마저 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문화의 저급과 고급이라는 이항대립적 또는 이분법적 분류에 앞서 대중문화의 공공성과 공익성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 또한 그것이 가능하도록 국가적 차원에서의 예술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예컨대 이렇게 하면 어떨까?
소득이 없는 사람도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카고 오리지널 내한 공연’도 BTS 수준의 공연도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하자. 또한,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예술활동을 할 수 있도록 거리의 악사들에게도 국가가 생계를 지원하자.
이렇게 되면 우리의 대중문화는 고급문화만 존재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