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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 <강상회음>, 종이에 연한 색, 22.4×27cm, 간송미술관
초여름이다. 초여름 날씨는 살짝 더워도 못 견딜 정도로 덥지는 않다. 후덥지근하지만 불쾌하지는 않고, 더위 중간중간에 섞여 있는 서늘함이 은근히 기대되는 계절. 무엇을 해도 좋고, 무엇을 하지 않아도 좋은 계절이다. 이렇게 좋은 날에는 하던 일을 잠깐 내려놓고 하루쯤 그냥 넋 놓고 앉아 짙어가는 신록에 빠져 있어도 상관없다. 그런데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 계속되는 가뭄에 나뭇잎들은 축 처지고, 나무의 다리를 감싸던 이끼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계곡물도 말라 돌바닥을 드러냈다. 이렇게 메마른 계절에는 물가에서 놀았던 추억이 새록새록 그립다.
🎈평범하지만 특별했던 그날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이 그린 <강상회음(江上會飮)>도 그렇게 그리운 추억의 한 장면일 것이다.
여섯 명의 장정들이 강변에 모였다.
햇볕 따가울 때는 나무 그늘이 최고다. 그들은 강가에 거룻배를 대어놓고 버드나무 그늘 아래 앉아 갓 잡은 물고기를 반찬 삼아 점심을 먹는다.
한 남자는 이미 식사를 마친 듯 다리를 깍지끼고 앉아 먼 산을 바라본다. 나머지 다섯 명은 몸을 밥그릇에 기울여가며 먹기에 바쁘다. 비록 물고기는 한 마리 밖에 잡지 못했지만 물속에서 첨벙거리며 웃고 떠든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운 천렵이었다. 시장이 반찬이다. 생선 한 마리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어른들을 따라 온 아이는 뒤통수를 보이며 오른쪽을 쳐다본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어른들 너머 버드나무 뒤에 또래 친구가 서 있다. 나무 뒤의 아이는 일행들과 함께 오지는 않은 듯 쭈뼛거린다. 시선을 마주친 아이가 부르기라도 하면 금새라도 그 옆으로 달려갈 태세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친구되기가 훨씬 쉽다.
김득신의 <강상회음>과 《고씨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의 염립덕(閻立德)의 그림
김득신의 <강상회음>은 한여름에 냇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은 오른쪽에 무게중심이 쏠리도록 대각선으로 배치했다.
나머지 왼쪽 상단의 빈 공간에는 낚싯대 위에 앉은 가마우지를 그려 균형을 맞추었다. 네 마리 가마우지는 휘어진 낚싯대에 앉은 반면 다른 한 마리는 우측을 향해 날아간다. 볼수록 정겹고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작품이다. <강상회음>은 김득신이 냇가의 풍경을 보고 그린 독창적인 작품 같지만 그렇지 않다. 중국 명대에 출판된 《고씨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에서 염립덕(閻立德)의 그림을 참고하여 그렸다. 차이가 있다면 염립덕의 그림이 세로가 긴 반면 김득신의 그림은 가로가 길다. 그래서 김득신의 그림이 훨씬 안정감이 느껴진다. 차이점은 또 있다. 염립본의 그림에서는 화면의 대부분을 바람에 휘날리는 버드나무가 차지한다. 그러나 김득신의 그림에서는 인물들이 주인공이고 버드나무는 오른쪽으로 비껴나 있어 배경으로만 설정했을 뿐이다. 그래서 <강상회음>에서는 밥을 먹는 중간중간 터져나오는 농담소리와 시끌벅적한 웃음소리 그리고 가마우지의 울음소리가 찰랑거리는 강물소리에 섞여 들려온다. 화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그대로 베끼지 않고 조선의 현장으로 번안한 덕분이다. 우리가 <강상회음>을 보면서 중국 화보를 참고해서 그린 작품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풍속화가 김득신
이렇게 현장감있는 조선풍속을 그린 김득신은 자가 현보(賢輔)로 호는 홍월헌(弘月軒), 긍재(兢齋)다. 홍원헌은 초기 작품에, 긍재는 후기 작품에서 주로 발견된다.
그는 4대에 걸쳐 17명의 도화서 화원을 배출한 개성김씨 가문 사람이었다.
개성김씨 가문에서는 그의 작은아버지 김응환(金應煥)을 필두로 동생 김석신, 김양신 그리고 세 아들인 김건종(金建鍾), 김수종(金秀鍾), 김하종(金夏鍾)이 모두 화원을 지냈다. 김득신은 산수, 풍속, 화조, 영모, 고사인물, 도석인물 등 전 화목의 그림을 골고루 다 남겼다. 그중에서도 특히 <파적도(破寂圖)>(간송미술관 소장), <귀시도(歸市圖)>(개인 소장),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개인 소장), 《긍재풍속화첩》(간송미술관 소장) 등의 풍속화는 해학적이면서도 현장성이 농후해서 김홍도 못지않은 역량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김득신의 풍속화가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의 작은아버지인 김응환은 김홍도와 함께 화원생활을 하였고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다. 그러나 김득신은 단순히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아류에 머물지는 않았다. 그의 풍속화는 김홍도의 작품에 비해 훨씬 더 설명적이고 배경묘사도 꼼꼼하다. 이것은 우열을 가리는 차원이 아니라 개성의 차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강상회음>에서처럼 김득신의 그림은 우리에게 좋은 추억만들기를 권유한다. 평범하지만 지나고 보면 한없이 그리운 한때를 만들어보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한다. 올 여름에는 동네 탄천이라도 나가 거닐며 그런 추억을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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