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장가가는 날 (외 2편)
박제천
보석 세공법은 쉽게 말해
두드리고 닦고 문지르고 비벼서
반질반질 광을 내는 것이다
참기름 두른 듯이 광이 나고 환해져야 한다
백일기도 드리듯이 치성 드리듯이
정성껏 쓰다듬고 어루만져 부드럽게 윤이 나되
아른아른 얼굴이 되비치는 거울처럼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창처럼
맑아져
그 속에서 그 빛나는 알몸을 보여주며
반짝이는 눈과 눈을 맞추고
두근거리는 심장의 숨소리를 껴안아야만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귓속이든 볼우물이든
가슴이며 엉덩이며 사타구니랑 오금이랑
튀어나오고 그늘진 틈까지
여우비 내린 다음에
무지개가 서리는 황홀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 오는 것이다
안 그러냐 내 사랑아.
호랑이 사랑 놀이
늙은 범이 살찐 암캐 대신 까치를 등에 태우고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이이이 내 사랑이로다
중광스님 그림 속에서 들려오는
저 사랑가,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어허 둥둥 내 사랑이야
생각만 해도 예쁜 춘향이를 다시 만났을라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빵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술 한 잔에 노래 한 접시,
스님이 어찌 저럴까,
늙은 범이 담배를 문 채 궁리궁리하다가도
까치 한 마리를 어찌 요리할까
침을 질질 흘리며
내 양팔을 네 어깨에다 얹고
징검징검 따라다니면 그 가운데 진진한 일이 많지야
아니리로 끝나는 사랑가 한 대목
따라 하며
까치 올라탄 호랑이 그림,
부적 삼아 침실 벽에 걸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마음에 문신을 뜬다
애고 따거워라, 애고지고 보고지고,
벌 받는 밤, 극락 가는 밤, 지옥 가는 밤,
열두 가지 짐승 되어
꼴깍꼴깍 한밤내 지새웠을라.
물의 교실
나는 저 물 속에서 모든 것을 배웠네
푸른 칠판에 백묵 글씨로 써 나가는
내 자서전도
처음에는 저렇게 흘러가는 물소리였네
나는 저 물소리가 들려주는
해와 달의 사랑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바다가 그리운,
처음에는 저렇게 반짝이는 햇빛이었네
저 물 속에 반짝이는 유리창
푸른 칠판, 물푸레나무 의자, 대나무 지시봉,
까르르 웃어대는 조약돌, 자갈돌들
버들치, 빠끔치, 여울각시며 퉁가리들이 돌아다니며
동화책을 읽는 책꽂이
그 뒤로 찬찬히 찾아보면 이부자리 펼쳐진 채
나를 기다리는 안방도 보였네
나는 저 물 속에서 모든 것을 배웠네
다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나는 저 물소리 속의 햇빛, 물빛에게 배웠네.
—시집『호랑이 장가가는 날』(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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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천 / 1945년 서울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66년《현대문학》등단. 시집『장자시』『너의 이름 나의 시』『호랑이 장가가는 날』등 13권. 현재 문학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