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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2의 ‘박주영 신드롬’이 나올 수 있을까?
필자의 나이도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교 새내기에 불구 하다. 이 칼럼을 쓰게 된 이유는 요즘 시들어있는 축구의 인기와 타 종목에 쏠려있는 인기를 보며 옛 회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2년 한일월드컵 D조 2차전인 한국과 미국의 경기를 보고 축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당연히 이 전에는 축구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으며, 폴란드전에는 동 시간대 만화 채널 투니버스에서 해주던 ‘드래곤볼’이라는 만화를 보았었다. 월드컵 이후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했으며, 부모님도 골머리 썩을 만큼 축구에 미친놈으로 보았었다. 월드컵 당시와 직후 내가 제일 좋아했던 선수는 단연 파마머리 안정환이었다. 잘생긴 외모와 그의 테크닉을보면서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안정환에서 한 선수로 넘어가게 된 선수가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직후 한국축구의 큰 위기가 찾아왔다. 대표팀의 중심이었던 ‘황새’ 황선홍과 ‘영원한 리베로’였던 홍명보가 은퇴했기 때문이다. 그 후 우리나라는 세대교체과정에서 큰 과도기를 거치게 된다. 히딩크 체제에서 코엘류 체제로 변화하면서 약체 오만과 베트남에 패하는 등 졸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 후 코엘류는 경질되었다.
2004년 6월 코엘류의 후임으로 네덜란드 출신 감독 요하네스 조 본프레레가 선임되었다.
본프레레 감독은 황태자 이동국을 바탕으로 팀을 리빌딩하기 시작하였고 출발은 좋았다.
그러나 아시안컵에 이란에 져 8강에 머물었고,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사우디 원정에서 0:2로 패하며 월드컵진출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그 후 본프레레 감독은 우즈베키스탄전에서 박주영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축구천재 박주영, 축구 신동 박주영, 득점기계 박주영 수많은 수식어가 박주영 앞에 따라다녔다. 지금 필자보다더 어린 친구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이해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박주영이라는 선수를 처음 본 건 아마 부산 4개국 친선대회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브라질 청소년대표와 경기였는데 이때 박주영의 결승골로 우리나라가 승리했었다. 당시 나는 우리나라가 브라질에 이긴 것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박주영을 제대로 지켜보게 된 것은 U-19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였다. 1차전에서 우리나라는 이라크에 0:3으로 패해 토너먼트 진출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멘과의 경기서 박주영의 2골에 힘입어 4:0으로 이기며 불씨를 살리는듯했다. 태국과의 마지막 3차전에서는 0:1로 지고 있었는데 박주영의 멋진 프리킥으로 1:1 동점을 만들어 이라크에 이어 조 2위로 8강에 진출하였다. 그 후 우즈베키스탄, 일본을 꺾고 올라온 대표팀은 결승에서 중국을 만났다.
이 경기에서 2골을 넣은 박주영은 원맨쇼를 펼치게 되는데 그 유명한 수비수 4명을 제치면서 농락하는 골이 나온다. 박주영은 이 대회에서 득점왕과 MVP를 휩쓸면서 2004년 아시아 올해의 유망주에도 선정된다. 그 후 우리나라 언론에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그러나 내가 박주영에게 제대로 매료된 대회는 카타르 8개국 친선대회이다. 이 대회가 진정한 박주영 원맨쇼 대회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회에서 4경기 9골로 득점왕을 차지하였고 그 득점하는 골들조차 예술이었다. 더욱더 우리나라는 박주영의 존재에 대해 큰 경이로움을 느낀다.
2005년 3월, 박주영은 FC서울과의 프로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박주영은 프로데뷔 2경기 만에 데뷔골을 터트리면서 이때부터 ‘박주영신드롬’을 써나가기 시작한다. K리그 데뷔 첫해 리그와 컵 대회만 포함하여 32경기 18골이라는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박주영을 한 사람을 보기 위해 평균 관중 수 2만 8천여 명이라는 숫자를 찍게 된다. 필자도 이 당시 박주영을 보기 위해 FC 서울 경기가 있는 날이면 무조건 아버지를 졸라서라도 박주영을 보러 갔다. 또한, 박주영을 따라 하기 위해 머리를 기르기도 하고 경기에서 골을 넣으면 기도세레머니도 따라 했다. 나뿐만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그랬을 것으로 본다. KBS 예능 프로그램인 ‘날아라 슛돌이’의 한 꼬마도 따라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한, 이 당시 공중파도 박주영이 출전했다하면 방송되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도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만큼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어 호나우도, 루니 등 유명선수하고도 비교가 됬으니 말이다.
2005년 6월 박주영은 본프레레호에 승선하게 되는데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첫 데뷔전을 치렀다. 이때만 해도 우즈베키스탄에 후반 45분까지 0:1로 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박주영이 후반 46분에 골을 넣지 않았다면 2006년 독일월드컵은 우리나라가 없는 채로 치러 졌을지도 모른다. 그 후 박주영은 쿠웨이트와의 원정에서도 선제골을 작렬시키며 우리나라를 6회 연속 본선진출로 이끌게 된다.
이후 박주영은 곧바로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를 위해 네덜란드로 이동하게 된다. 본선 첫 경기 스위스에 1:2로 졌지만, 박주영은 이때 80m드리블을 선보이며 세계대회에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이지리아와의 2차전 경기에서도 멋진 프리킥을 성공시키며 2:1 역전승의 주역이 된다. 마지막 3차전은 브라질과의 경기였는데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와일드카드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기억나는 게 필자<당시 초등학교 6학년>도 축구대회를 나갔었는데 교장선생님들도 초대되었다. 교장선생님들 하시는 말씀이 오늘 경기는 박주영이만 믿으면 된다고 할 정도로 박주영 이야기로 가득했었다. 물론 브라질전은 아쉽게 0:2로 패해 16강 진출에 탈락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대회 이후 박주영은 더욱더 성장하였고 지금까지 박주영의 플레이를 볼수 있어 흐뭇하다.
요즘 유소년 대표팀들은 박주영같이 특별히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원맨쇼하는 팀은 아니다. 물론 축구가 개인 이전의 팀 스포츠이긴하지만 지금의 축구 인기나 타 종목의 인기를 생각하면 한 번쯤은 나와줘도 괜찮을 것같다는 생각도 해보기는 한다. 물론 지금 대표팀엔 손흥민, 기성용, 구자철, 지동원등의 젊고 유망한 선수들이 있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 ‘박주영신드롬’을 능가할 선수는 없다. 박주영 그 자체가 흥행카드였으니까.
끝으로, K리그에 박주영 같은 스타가 언제 등장할지는 모르겠으나, 필자 생각엔 K리그 부흥을 위해 언젠간 한 번쯤은 나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By. Kim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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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론에서안도와주명 메시가나와도 지금과별잔다를수어뵤음....
그 때 기억나는게 서울이 원정경기 가면 갑자기 관중이 급증했음
박주영 신드롬이란 말이 괜히 생겨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ㅋ
이 때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어렴풋이 기억나네여 ㅋㅋㅋㅋㅋ
그당시 저희지방 학교근처 육교에 플랭카드 생각나네요
" 박주영이 온다...모두 모여라..." ㅋㅋㅋ
유소년중에 눈에 띄는 스트라이커없나.....토종스트라이커보고싶다
비상에서 나왔듯이 상대팀인데도 인천이 박주영을 중심으로 홍보했을정도였으니
서명원선수가 K리그에서 뛴다면...어쩌면
진짜잘되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