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병적인 기계치이다. 즉 기계에 대하여 완벽하리만치 무능하다는 말이다. 단순한 병따개나 연필깎이를 포함, 무엇이든 모종의 작동을 요하는 물건에 관한 한 나는 두려움을 넘어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경외심까지 느낀다. 그러나 하다못해 화장실의 물 내리는 일부터 자동차 안전벨트 매는 일, 비디오 켜는 일에도 나의 온갖 지력을 다 동원해야 한다.
내가 기계를 싫어하는 것처럼 기계도 나를 싫어한다. 멀쩡하게 돌아가던 기계도 내가 만지면 고장이 날뿐더러 휴대폰이나 오디오를 사도 꼭 하자품이 내게 걸린다. 그러니 요새처럼 모든 것이 기계로 작동되어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나의 생활이 얼마나 버겁고 불편한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나마 악전고투 끝에 작동법을 배워 놓으면 순식간에 새로운 모델이 나와 다시 익숙해져야 하고, 날이 갈수록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기계들이 쏟아져 나오나 이제는 아예 배우는 것조차 포기해버렸다.
올더스 헉슬리(1894-1963)의 멋진 신세계(1932)는 공상과학소설의 백미로서 기계문명이 극도로 발달하여 과학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세계를 그린 반유토피아적 풍자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인 600년 후의 런던에서는 일부일처제는 사라지고 아이들을 공장에서 인공수정으로 태어나 유리병 속에서 보육되며,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능의 우열만으로 지위가 결정된다. 각 개인은 과학적 장치에 의하여 할당된 역할을 자동적으로 수행하도록 프로그램되고, 고민이나 불안을 ‘소마’라는 신경안정제로 완벽하게 해소한다.
이러한 문명세계에서 성장한 린다는 인디언 보호지역에 놀러 갔다가 계곡에 추락해서 인디언들에게 구원을 받고 존을 출산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남녀 간의 사랑이 존재하고, 일부일처제를 따르고, 출산, 갈등, 질병 등 온갖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야만사회의 생활방식에 익숙하지 않아 비참한 삶을 산다.
그러다 린다의 아들 존은 구원을 받아 ‘멋진 신세계’인 문명세계로 돌아가는데, ‘야만인’ 존은 육체적 행복이 완벽하게 보장되지만 인간의 감정과 정서 생활이 불가능한 이곳에 적응하지 못한다. 원시의 삶과 문명의 삶을 모두 경험한 존은 마침내 두 세계 사이에서 어느 것이 진정 가치있는 인간의 삶인지를 진지하게 질문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다.
문명세계에서 폭동을 유도한 존이 통치자 무스타파 몬드에게 불려 가서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전 편안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神)을 원합니다. 저는 시(詩)를 원합니다. 현실적인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선(善)을 원합니다. 저는 죄악(罪惡)을 원합니다.”
19세기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진화론의 거성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이며, 천재적인 작가인 헉슬리은 ‘멋진 신세계’에 관해 스스로 이렇게 평했다.
“이 책의 주제는 과학의 진보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다. 물질의 과학화는 삶을 파괴하거나 복잡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에 적용될 수 있다. 유토피아는 이미 오래 전에 누군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신 더 우리에게 접근해 있다. 나는 이를 향후 600년이라는 미래에 투영시켰지만 그 공포는 1세기 안에 다가올 것 같다.”
요즘 나오는 여러 기계들, 인간보다 지능이 높다는 로봇, 우주정복, 복제인간에 관한 논란 등을 보면 1세기 안에 멋진 신세계가 오리라는 헉슬리의 전망이 맞아떨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 5막1장에 나오는 멋진 신세계 라는 말을 역설적으로 사용한 것처럼 헉슬 리가 생각한 미래는 나같이 완벽한 기계치이자 아직은 신과 시를 믿는 ‘야만인’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다. 그나마 일찍 태어나 ‘멋진 신세계’가 오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게 천만다행이다.
둥근 보름달을 보고 옆에 있는 초등학교 3학년 조카에게 ‘저기 봐, 저 그림자는 토끼 두 마리가 절구에------.’ 열심히 설명하는데 조카가 갑자기 말을 끊는다. ‘이모, 저 크레이터 말이야?’ 그리고 이상한 눈으로 날 처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