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의 전설이 서린 주왕산과 대전사,
“당나귀가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말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여행이 인생의 한 전환점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여행을 통해서 인생의 좋은 길동무 즉 도반을 만나기도 하는데, 니체는 여행자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첫 번째가 가장 의미 없는 여행을 하는 사람이다. 떠나면서 돌아오는 순간까지 남에게 관찰당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 어떤 의미에서 최하급의 여행자이다. 두 번째는 자신의 눈으로 실제의 세상을 관찰하는 여행자이고, 세 번째가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체험해보는 여행자이며, 네 번째가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을 이해하고 소화해 내는 사람이다. 다섯 번째는 극소수이지만 최고급의 여행자로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을 즉시 자신의 행동으로 옮기며 자신의 생활에 활용하는 사람이다.
남들이 장에 가니까 따라는 왔는데, 왜 왔는가? 회의 하면서 질질 끌려가는 사람들을 간혹 만나기도 하는데, 여행을 떠나는 순간, 만나는 모든 사물, 모든 사람, 그리고 내면의 나와 나누는 대화, 그것만으로도 여행은 일상에서 느끼는 그 어떤 것들과 비견할 수 없는 커다란 매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답사에 참가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왔기 때문에 참가한 뒤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그리 흔치가 않아 답사가 어려운 점은 없는 편이다.
경상북도 청송군에 있는 대전사 앞 주방천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흐르고 있다. 대전사 뒤편에 솟은 봉우리들이 반쯤은 구름에 가려 있고 그 구름이 걷히자 그 봉우리들이 연꽃을 닮았다.
가장 작은 면적의 주왕산 국립공원
대전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고려 태조 2년(919)에 보조국사가 주왕周王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라고도 한다. 그 뒤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조선 중기에 절이 불타는 바람에 오래된 건물은 별로 없다. 그런 연유로 다른 절과 달리 경내가 넓지 않아 호젓하기 이를 데 없다. 대전사의 중심 전각은 보광전이고 명부전과 선령각 그리고 요사채 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왕산 내의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과 주왕암 등이 있다.
이양오가 지은 <유주왕산록>에 실린 기록으로 보아 주왕산은 한때 대둔산大遯山으로 불렸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청부靑鳧(청송의 별칭)의 동쪽 20리 주왕산에 대전사가 있는데, 산의 앞 자락 굽어도는 시내 울 밖에 있다. 榜에 대둔산 대전사라고 써 놓았기에, 그 절에 있는 중더러 어째서 대둔산이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더니, 옛날에 여기로 피난 온 사람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둔자에는 숨는다와 도망친다는 뜻이 있다.) 그는 ‘이절이 단청이 바래 고 또 기둥과 서까래가 많이 헐어 보기에 딱하다.’ 고 하였는데, 중이 말하기를 ‘옛날에 주왕이 적을 피해 이 산으로 숨어들어, 상류에서 횟가루를 풀어 흘려보냈더니, 성 밖에 이른 적들이 그 물을 마시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 적을 이겼다’ 고 하지만 그 말이 황당하므로 믿을 수가 없다. 백제 때 문주왕文周王이 적에 의해서 시해弑害되었는데, 그 시해당한 곳이 이 근처일지는 모르지만 주나라 천자天子가 여기까지 왔을 이치는 없다.” 고 하였다.
보광전 앞에 두 개의 석탑이 서있는데 모두 한 개의 석탑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가져다 짜 맞춘 석탑들이다. 그러나 석탑 속에 숨어 있는 사천왕상이 너무 재미있다. 석탑을 손에 들고 서 있는 사천왕상은 다른 데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절 보살의 말로는 탑의 부재들이 거의 다 있어서 다시 세울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세월에 잃어버린 그 형체들을 다 찾아내서 세울 수 있을까 기다려 볼일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된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내부는 녹색과 보라색이 조화된 단청 빛깔이 차분한데 왼쪽 벽 위쪽에 코끼리를 탄 보살상 벽화가 유난히 눈에 띈다. 단독으로 그처럼 그려진 보살상 벽화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데 코끼리를 탄 보살상은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다. 이 벽화는 나중에 색깔을 다시 입힌 듯하지만 원형은 처음부터 있었었던 듯싶으며 불전을 장식하는 벽화의 색다른 맛을 보여준다.
대전사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사명대사의 진영과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사명대사에게 보냈다는 친필 목판도 있다. 옛날에는 깊은 산골이며 한적한 곳이라서 수도하기가 알맞았던 듯, 신라 때부터 고운 최치원과 아도화상 그리고 나옹화상, 도선국사, 보조국사 지눌, 무학대사를 비롯한 당대의 빼어났던 스님들을 비롯 조선시대의 문신이었던 김종직, 서거정 등이 와서 수행을 했다고 하며 또한 임진왜란 때 사명당 유정 스님이 이 절에 승군을 모아 훈련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주방천 따라 산길을 오른다. 주방천은 이곳 주왕산과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의 성재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하의리를 지나며 마령천과 합하고 용점천으로 들어가 반변천에 합류하는 낙동강의 한 지류다. 조선 후기의 문인 홍여방은 청송읍 찬경루에 있는 <찬경루기>에서 이곳 청송의 형승을 일컬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산세는 기복이 있어서 용이 날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범이 웅크린 것도 같으며, 냇물은 서리고 돌아 마치 가려하다가 다시 오는 곳 같다.’ 그 말처럼 주왕산은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나라 안에서 국립공원 중 면적이 가장 좁은 주왕산이 1976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기이한 풍광이 많아서였다. 그렇게 높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이 산은 조물주가 정성껏 빚은 솜씨인 듯 봉우리 하나 하나와 계곡이 어울려 경이로운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대전사에서 제3폭포에 이르는 4킬로미터쯤의 계곡은 주왕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주왕산은 720미터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그 주위로 태행산(933m), 대둔산(875m), 명동재875m), 왕거암(907m) 등 대개 600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이 둘러쳐져 산들이 병풍을 친 듯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래서 주왕산 일대는 예부터 석병산(石屛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 병풍 같은 봉우리들 사이로 남서쪽으로 흐르는 주방천 상류인 주방계곡의 이쪽저쪽으로 기암, 아들바위, 시루봉, 학소대, 향로봉 등 생김새를 따라 이름 붙인 봉우리도 한 둘이 아니다.
대전사 뒤편에 솟은 흰 바위봉우리는 마치 사이좋은 형제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이 봉우리가 주왕산 산세의 특이함을 대표하는 기암이다. 이 기암이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울퉁불퉁한 화강암 바위와는 달리 그 생김새가 매우 매끄러워 보이는데 그것은 기암을 구성한 석질의 성분 때문이다. 기암은 화산재가 용암처럼 흘러 내려가다가 멈춰서 굳은 응회암 성분으로 되어 있는 봉우리다. 이 기암처럼 주왕산의 봉우리들은 화산이 격렬하게 폭발한 뒤에 흘러내리면서 굳은 회류응회암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다.
주왕의 전설이 서린 주왕굴
옛 이름이 석병산인 주왕산이 <삼국유사三國遺事> ‘진덕왕眞德王’ 편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 신라에는 영험 있는 땅이 네 군데 있으니, 큰일을 의논할 때는 대신들이 여기 모여 의논을 하면 그 일이 꼭 성공하였다. 첫째로 동쪽에 있는 것을 청송산靑松山이라 하고 둘째로 남쪽에 있는 산을 우지산亏知山이라 하며 셋째로 서쪽에 있는 곳을 피전皮田이라 하고, 넷째로 북쪽에는 금강산金岡山이다. 이 임금 시대에 처음으로 신년 축하 의식을 거행하고 또 처음으로 시랑侍郞이라는 칭호를 썼다.” 라고 하였는데 그 청송산이 이곳 주왕산을 칭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주왕산에는 중국 주나라 왕의 전설이 서려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고 칭한 뒤 당나라의 도읍지였던 장안으로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한 뒤 쫓겨 다니다가 마지막 숨어든 곳이 이곳 주왕산이었다고 한다.
당나라에서는 그 주왕을 섬멸시켜 달라고 신라에 요청했고 신라에서는 마일성 장군의 5형제를 보내 주왕을 쳤다. 그때 주왕은 주왕산에 솟아있는 기암들을 노적가리처럼 위장하여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한 전설을 뒷받침하듯 이곳 주왕산에는 주왕이 군사들을 숨겨두었다는 무장굴과 주왕의 군사들이 군사 훈련을 하고 그 안에서 주왕의 따님인 백련공주가 성불했다는 연화굴, 그리고 주왕이 마장군을 피해 있으면서 위에서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다가 마장군이 쏜 화살과 철퇴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서린 주왕굴이 있다.
푸른 물살과 떨어져 내리는 폭포들과 주왕암을 지나 철 계단을 올라가자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 옆으로 음산하게 뚫린 주왕굴이 보인다. 그 굴에는 촛불 두 개가 밝혀진 채 떨어지는 폭포가 내는 바람결에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 주왕굴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물로 세수를 하던 주왕이 화살에 맞고 철퇴에 맞아 죽음을 맞았다지, 그래서 그때 주왕이 흘린 피가 산을 따라 흐르면서 이 산기슭에선 수진달래가 그토록 아름답게 피어났다지….’
반계潘溪 이양오李養吾가 지은 <유주왕산록遊周王山錄>에는 주왕암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극히 조용한 곳에 들어 앉아 선미禪味에 들기 알맞다. 서쪽으로 법당이 있어 나한 10여구가 안치 되었고, 지세가 산을 업어 꽤나 높은데 누각 앞 기둥이 들어서 있는 자리가 궁궐터라고 한다. 동쪽 마루 앞 역시 산을 깎아 근 10보나 되는 마당을 만들었다. 산이 높고 가팔라서 마치 쇠 항아리 속에 들어앉은 것과 같고, 동쪽으로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빼어나기가 천 길이나 되어 보인다. 앞에 누각 현판에 가학루駕鶴樓라고 쓰였으나 몹시 누추하여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
이곳 주왕산은 주왕 뿐만이 아니라 신라 때 사람 김주원도 숨어들었던 곳이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으로 추대되었던 김주원이 훗날에 원성왕이 된 김경신의 반란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쫓겨 와 이곳 석병산에서 한을 삭이며 숨어 지냈다고 한다.
주왕과 김주원의 한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주왕산의 골짜기들은 음습하기만 하고 이곳저곳에서 망설임도 없이 떨어져 내리는 폭포 소리가 온 천지에 퍼져나갔다.
2024년 7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