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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칠우(江邊七友)
조선 광해군 때 여주의 북한강변에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낸 박응서(朴應犀) 등 일곱 사람을 말한다.
江 : 강 강(氵/3)
邊 : 가장자리 변(辶/15)
七 : 일곱 칠(一/1)
友 : 벗 우(又/2)
개요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에 경기도 여주(驪州)의 북한강 가에서 시주(詩酒)로 일을 삼으면서 세월을 보내던 서자 출신의 일곱 사람을 말한다. 곧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 심우영(沈友英), 이경준(李耕俊), 박치인(朴致仁), 박치의(朴致義), 김평손(金平孫)을 이른다.
이들은 당시의 고관 대작의 서자들로서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것을 불평하고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하여 칠우라 일컫고, 여주의 북한강 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짓고 시와 술로 소일하며 먹을 것이 떨어지면 도적질도 서슴지 않았다.
광해군 4년(1612)에 조령(鳥嶺)에서 은(銀) 장수를 죽이고 은 수백 냥을 빼앗았다가 이듬해에 모두 검거되었는데,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과 내통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기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려고 저지른 범행이라고 거짓 자백하여, 마침내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게 되었다.
내용
조선 선조, 광해군 때 7인의 서자(庶子) 출신 서생들이다. 양반 자제들이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힘을 한탄하여 북한강가에서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계축화옥(癸丑禍獄: 계축옥사 癸丑獄事)을 일으키는 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들이다.
박응서(朴應犀: 朴淳의 庶子), 서양갑(徐羊甲: 牧使 徐益의 庶子), 심우영(沈友英: 沈鉉의 庶子), 이경준(李耕俊: 兵使 李濟臣의 庶子), 박치인(朴致仁: 商山君 朴忠侃의 庶子), 박치의(朴致毅: 朴致仁의 弟/朴忠侃의 庶子), 김평손(金平孫) 등 고관들의 자제들이나 서출(庶出)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혔음을 한탄하며 세상을 증오했던 7인의 서생 모임이다.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김평손 등이 연명(連名)으로 서자에게도 관계에 진출할 수 기회를 주도록 허통 상소하였으나(1608 선조 41) 허락되지 않자, 소양강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짓고 옛날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세상을 냉소하였다. 때로는 생활이 궁핍해지면 도둑질도 서슴지 않았다.
광해군 초에는 여주(驪州)에 모여 서로 결의형제하고 도적이 되어 악행의 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결국 조령(조령/새재 鳥嶺)에서 큰 도적질을 하고 붙잡혔는데, 포도청에서 그들을 심문하는 중에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의 꾐에 빠져 계축화옥(癸丑禍獄 1613, 광해군 5)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사실인즉, 대북파는 광해군을 옹립하였고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옹호하였다. 실권파인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당시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고, 계속하여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선조의 장인)인 김제남(金悌男)을 압박하였는데, 구실을 잡지 못하고 있던 차, 강변칠우 박응서 등이 은(銀)상인을 살해하고 은 수백 량을 강탈하였고, 이들은 살인죄로 포도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대북파 이이첨 일파는 이들을 꾀어, 살인강도의 목적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김제남이 시켜서 하였다는 허위 자백을 도적들의 목숨을 담보로 받아냈다(박응서의 옥). 결국, 김제남은 역모죄로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폐서인 당하여 강화도로 유폐되었다.(계축옥사 1613, 광해군 5).
강변칠우(江邊七友)
조선 광해군 때 적서 차별에 불만을 품고 여주의 북한강변에 모여 시대를 한탄하고 비판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낸 박응서 등 일곱 사람을 말한다.
강변에 모여 신분 차별의 시대를 한탄하며 개혁을 꿈꾸었던 벗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적서 차별이 심하던 조선시대 적서 차별에 불만을 품고 강변에 모여 시대를 한탄하고 비판하던 사람들이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이들의 뜻에 동조하며 그들을 이끌었고 어울린 죄로 능지처참(凌遲處斬)을 당했다. 허균은 처형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사면 복권이 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공식적으로 범정부적 차원에서 사면 복권되지 않았다. 다만 허씨 가문에서 사면 복권하였을 뿐이다.
1. 공정사회에 대한 갈망
모든 인간은 평등을 원한다. 공정한 대접을 받길 원한다. 최근에 와서 우리 사회에 핫이슈가 공정이었다. 그 공정에 대한 갈망의 물결을 타고 윤석열 현 대통령은 검찰총장 시절 급부상하였다. 공정사회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조국 일가의 딸과 아들을 둘러싼 입시 비리와 불공정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대단하였다. 그 여파로 지난 정권은 결국 아슬아슬하게 정권을 국민의 힘에 이양하게 되었다.
그런데 불공정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굳이 정치적인 영역을 떠나더라도 언제나 발생한다. 어쩌면 과거에 우리 사회를 경악하게 하였던 지존파 사건도 불공정과 사회적 소외와 불만에 의한 반사회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이 한 행동 자체가 워낙 잔인하고 반인륜적이며 왜곡된 것이어서 더욱 충격을 주었다. 지존파 사건은 당사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공정이 무너지고 양극화와 소외가 극에 달하면 언제나 그런 반사회적인 사이코패스들이 나타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경고장이기도 하다.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가 동구 공산권이 무너지고 나서 한 말이 생각난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종말을 고한 것이 아니라 다만 침전되었을 뿐이다. 언제나 불공정과 양극화, 계급적 불안이 확대되면 다시 고개를 들어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다.’ 사회적인 모든 악과 이슈와 반사회적인 이념들도 평화의 시기에 한동안 침전되어 있다가 불공정과 부당한 대접, 양극화가 극에 달할 때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렇게 수면 위로 올라온 모습들이 정상적인 절차와 방법을 동원한 것이라면 문제가 크게 되지 않겠으나 반사회적이고 사이코패스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또 다른 사회적 불안이 될 수 있다. 띠라서 우린 그런 것들을 경계하면서 늘 공정사회를 지향하여야 한다. 모든 국민과 사회 구성원들은 공정사회를 바라며 부당하고 불공정한 대접을 받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2. 전통 사회의 근원적 불공정성
동서를 막론하고 전통 사회는 근원적인 불공정 사회였다. 그것은 신분제라는 이름으로 합법화 합리화되었다. 따고 난 신분에 따라 정치 사회적, 인간적인 불공정한 대접을 받았으며 종족과 인종에 따라 차별을 받고 지배자에 의해 피지배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정치 사회적으로 계층 상승을 할 수 없었으며 상위 계층의 지배와 구속에 신음했다. 우리나라에선 그런 신분사회의 모순이 조선 말까지 지속되었으며 출생 신분에 따라 인간은 구분되었다. 유명한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과 남북 전쟁은 전통적인 신분과 차별사회에 대한 인간 해방선언이며 인간해방전쟁이었다. 그 전쟁의 승리로 인류는 모두 하나님이 부여한 천부적 인권을 부여받았음을 인정받았으나 미국 사회에서도 그것이 사회의식 곳곳에서 인정되기까지는 지난한 길을 걸었다.
조선 말기 신분 타파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은 개화파였다. 개화파들은 1881년 통리기무아문이 일본에 파견한 김옥균 등 62명의 신사유람단은 일본을 시찰하고 나서 교육 장려 신문 발행, 군대 조련 등의 개혁안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천주교를 믿으며 만민 평등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특히 신분 타파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박규수를 중심으로 한 인물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양반 신분이었지만 개화에 눈을 뜬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박규수 아카데미>를 열었다. 그는 김옥균, 오경석, 유홍기 등 젊은이들에게 개화사상과 함께 사회적 신분 차별제의 부당함을 가르쳤다. 1880년 박규수의 수제자 김옥균은 불과 20세에 문과에 급제한 엘리트로서 개화당의 영수가 되어 개혁에 앞장섰으나 그의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조선은 신분 타파를 이루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어느 정도 신분제가 타파되었으나 해방 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신분 의식이 민간을 포함한 사회의식에서 제거되기 시작한 것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어쨌든 신분 의식과 신분에 대한 차별은 조선을 넘어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사회적 활동을 옥죄는 흉기였음은 두말할 것이 없다. 여러 역사적 정황을 보면 하나의 굳어진 사회의식이 전환되기까지는 비록 제도가 바뀌어도 두 세대는 흘러야 하는 것 같다.
3. 허균의 [홍길동전] 차별사회에 대한 항거와 인권운동의 상징
허균이 살았던 조선 사회는 철저한 신분사회였으며 같은 양반 자제라 하더라도 어떤 어머니에게 태어났느냐에 따라 달리 대접을 받았다. 허균은 조선 사회의 적서차별이라는 신분 질서에 회의를 품고 그 질서의 부당함을 알리며 철폐를 원했던 엘리트 양반이었다. 허균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은 바로 당시 정치 사회적인 신분 질서의 부당함에 대한 저항의 글이었으며 인권운동의 상징이었다. 허균은 엘리트 양반 자제로 뛰어난 문장가였으나 의협심과 울분이 강한 혁명적인 개혁사상가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철저한 신분 질서와 성리학적 고정관념에 얽매였던 당시에는 이단아였다. 그러기에 조선 말기 이완용이 집권하여 과거의 모든 역적 등의 누명을 쓴 사람들이 사면 복권되었지만, 허균만은 사면 복권되지 않았다. 허균이 살았던 시대의 강변칠우는 적서차별에 불만을 품고 한강 변을 중심으로 울분을 토로하던 사람들이었다. 그 중심에 서자가 아닌 엘리트 양반 출신인 허균이 있었다. 허균과 관련한 강변칠우를 이해하기 위해 허균의 생애와 그 질곡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 이유는 불공정 사회의 개혁에 대한 한 혁명가의 진면모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4. 허균의 생애와 강변칠우 그리고 최후
(1) 금수저로 태어난 문학 천재
강릉에 가면 강릉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과 기념 공원이 있다. 거기에는 옛날 허균의 생가도 있다. 거기에는 날설헌을 비롯한 양천 허씨 문중의 5명의 빼어난 문장가들을 접할 수 있다. 그들은 허균의 아버지 허엽과 허균의 형제들인 허성, 허봉, 허초희(난설헌) 허균 등 5명이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유명한 화담 서경덕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로 동인의 거두였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우리에게 더욱 익숙한 것이 있다. 그는 요리에도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어 두부를 잘 만들었고 두부 요리를 잘하였다. 그의 호는 초당인데 지금의 강릉 초당 부두는 바로 허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으로부터 유래하였다.
허균은 1569년(선조 3년) 당시 경상도 관찰사인 아버지 허엽과 둘째 부인인 강릉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금수저였다. 아버지 허엽은 첫째 부인이 1남 1녀를 낳고 요절하자 다시 당시 예조판서 김광철의 딸 강릉김씨에게 장가를 들었기에 허균은 서자(양민첩의 자식)도 아니고 서얼(천민첩의 자식)도 아닌 엄연한 양반 자제였다. 허균은 허엽과 강릉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2남 1녀의 막내였다. 그는 외조부인 김광철의 강릉 애일당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그 애일당은 허균이 어린 시절 글공부를 하고 마음대로 뛰어놀던 추억의 장소였다.
허균은 어렸을 때 틈만 나면 외가에 갔다. 그는 외사촌들과 사천 앞바다로 나가 바다낚시를 즐겼다. 그는 애일당 뒷산에서 사천 앞바다로 이어지는 뱀같이 구불구불한 능선의 산이 마음에 들어 그 산의 이름인 교산(蛟山)을 따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를 보면 허균에게 외가인 애일당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읽고 9세부터 시를 지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의 허균은 매우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시대의 유몽인은 그런 허균에 대하여 “9세에 능히 시를 지었다. 작품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이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문장을 잘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이모 사위 우성전(禹性傳)만은 ‘훗날 이 아이가 비록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될지라도 허씨 문중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가 될 것이다.’고 말하여 아쉬워했다(어우야담)”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허균의 시는 모습이 갖추어지고 수려했으나 그 골격에 의협심이 뭉쳐 있음을 말해 준다.
(2) 아버지와 형의 죽음, 그리고 상실감
허균의 나이 12세(1580년) 때 아버지 허엽이 경상북도 상주에서 객사하고 집안은 큰형인 허성(첫째 부인의 맏아들)이 책임지게 되었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허균은 열심히 과거 공부를 하여 1585년에 초시에 합격하고 안동 김씨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했다. 제일 맏형인 허성은 허균이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를 통해 벼슬살이를 착실하게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생원시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둘째 형인 허봉(허균과 같은 강릉김씨의 아들)이 죽었다. 허봉은 18세에 이미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출세 가도를 달리던 상태였다. 허봉은 뛰어난 문장으로 당시의 모든 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던 율곡 이이의 행적을 비난했다. 그 때문에 서인의 공격을 받아 종성(終成)으로 귀양살이를 갔다. 그러나 유배에 풀려난 후 방랑하다가 38세에 금강산에서 병으로 죽었다. 허봉은 허균에게는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자신과 너무도 닮았고 자신을 깊이 사랑하며 이끌었던 형의 죽음으로 대단한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3) 형 허봉이 맺어준 허균의 스승들
허균의 정신적 지주였던 허봉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교우관계도 두터웠다. 그는 특히 동복의 누이동생 허초희(허난설헌)와 허균을 무척 사랑하며 글공부를 시켰다. 허봉은 두 동생에게 별도로 스승을 붙여 학문과 문장을 익히게 했는데 그가 서자 출신으로 유명한 학자였던 손곡 이달이었다. 이달은 허봉의 친구였으며 이름난 시인으로 친구의 동생을 참으로 열심히 가르쳤다. 허봉은 날로 글과 문장이 돋보이게 성장하는 두 동생을 대견스러워했다. 스승 이달은 가끔 허균과 허난설헌 앞에서 술 한잔하면 서자이기에 벼슬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허균은 이를 안타까워하였다. 아마 허균이 적서차별에 대한 반감을 깊게 가지게 되는 계기가 여기서부터 싹텄는지 모른다. 그리고 형 허봉 역시 적서 차별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기에 이달을 친구로 가깝게 교분하였으며 사랑하는 두 아우의 스승이 되게 하였던 것 아닌가 한다.
허균이 18살 되던 해 여름에 형 허봉은 봉은사 아래에서 친구인 사명당(사명대사)에게 불교와 문학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서애 류성룡 문하에 들어가 유학과 문장을 배우게 하였으며 이달에게서는 당시(唐詩)를 배우게 했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에게 수학한 허균의 학문은 성리학을 넘어 불교와 시와 문장에 이르기까지 두루 폭을 넓혔다. 반면에 허난설헌은 시에 몰두하였다.
(4)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의 문장과 사랑
허균과 허난설헌은 문장이 뛰어났다. 특히 허난설헌의 시감각은 뛰어났다. 누이 허난설헌과 허균은 함께 공부하며 의지했으며 허균은 허난설헌을 의지하고 따랐다. 둘은 시와 문장에서도 서로 격려하며 일깨워주었다. “허균은 글재주가 뛰어났다. 어릴 적에 시를 써서 누이인 허난설헌에게 보였다. 그 시의 내용에 ‘여인이 흔들어 그네를 밀어 보낸다’라는 싯구를 보자 누이 허난설헌이 ‘잘 지었구나. 다만 한 구가 잘못되었구나’라고 하자 허균이 어떤 어구가 잘못되었는지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이에 난설헌은 ‘문 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백마를 타고 황금 채찍질하면서 가버렸다’라고 고쳐 주었다. <임상원의 [교거쇄편 제2권]> 이렇듯 남매는 글로서 의지하며 서로 격려하였다.
(5) 누이와 아내의 죽음에 대한 비탄
허균은 1589년 음력 3월 17일 한성부에서 있는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였으며 생원시에는 2등으로 합격했다. 허균은 이제 벼슬길에 나아가는 길이 점차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허균에게는 둘도 없었던 누이 허난설헌이 결혼하여 혼인 생활이 원만하지 못했으며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런 누이가 낳은 두 자식이 죽은 충격으로 앓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허균은 방황했다. 그리고 끝까지 누이를 그리워했다.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에 발발하여 홀어머니 강릉 김씨, 부인 안동 김씨, 어린 딸과 같이 피난을 하던 중 부인 안동 김씨가 첫아들을 낳고 피난 중에 병사했다. 허균은 외로웠으며 극도의 비탄에 빠졌다.
(6) 누이 허난설헌의 시집 편찬
1589년 5월 3일 허난설헌이 죽기 전에 허균에게 유언으로 “내가 쓴 문집을 모두 불태워다오.”라고 부탁했지만, 허균은 누이의 말을 듣지 않고 허난설헌의 시를 모아 시집을 간행했다. 1590년 허균은 우선 누나의 시집을 스승인 서애 류성룡에게 보여주었다. 류성룡은 허난설헌의 시집 난설헌고(蘭雪軒藁)의 발문을 써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훌륭하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 어떻게 허씨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은가... 돌아가서 간추려 보배롭게 간직하고 한 집안의 말로 비치하여 반드시 전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서애집>” 당시의 명문장가요 학자였던 서애의 이런 찬사를 받았으니 참으로 뛰어났던 모양이다.
허균은 허난설헌의 시를 알리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원정 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허난설헌의 시 200수를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과 <열조시선>에 실리도록 했으며, 명나라 사신 주지번과 양유년에게 누나의 시집을 주어서 명나라에서 간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1608년 허균 스스로 <난설헌집>을 출간했다. 그리하여 허난설헌의 시는 동생 허균에 의해 중국과 조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난설헌의 시는 “하늘에서 떨어진 꽃처럼 사람들에게 회자 되었다(열조시집)” “이태백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고금야사)”는 등의 극찬까지 받았다. 중국에서는 그 이후로도 북경에서 <난설헌 집>이 출간되었고 난설헌의 시를 계속하여 읽고 책에 실었다. 뒷날 일본에도 건너가 일본 시문학계를 놀라게도 하였다.
(7) 벼슬, 시문외교, 탄핵
그러나 허균은 동인의 초기 당수였던 선산 김씨 김효원의 딸과 재혼하여 벼슬길이 열렸다. 그는 분조를 맡은 세자(광해군)가 이천군(지금의 북한 땅)에서 분조를 이끌 때 동행하였다. 이 공로로 뒷날 위성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594년 음력 2월 9일 문과 정시에 을과 급제하였으며 1597년 음력 4월 2일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에는 명나라 사신이 오면 직인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수행하면서 외교에 공을 세웠다. 허균은 시문외교(詩文外交)에 능하여 당시 명나라 사신이 오면 주로 필담을 나누고 시(詩)를 통해 주연을 베풀었는데 그들에 대적할 사람은 허균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허균은 문장이 출중하고 임기응변의 시작(詩作)에도 뛰어났으며 가무(歌舞)와 음곡(音曲), 주색(酒色)에도 뛰어나 명나라 사신들이 놀랐다고 한다. 명나라 사신들은 그런 허균의 호방하고 인간미 넘치는 재주에 반하여 명나라로 향하는 사신의 대열에 반드시 허균을 끼워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 후 허균은 난설헌의 시는 물론 명나라에 조선의 문장과 문화를 알리고 자존심을 세운 공로로 광해군이 허균을 삼척 부사로 삼는 등 벼슬을 주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등의 이유로 1604년과 1607년 사이에 수차 탄핵 되었다.
허균의 관직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황해 도사로 임용되었지만, 기녀 문제로 임용 반년 만에 파직당했으며, 삼척 부사로 갔을 때도 불과 보름 만에 파직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공주 부사로 임용되었으나 서자들과 어울렸다는 이유로 9개월 만에 또 파직되었다. 이렇듯 허균은 20여 년의 관직 생활 중에 3번 유배형을 당했고 6번이나 파직당했다. 그것은 허균의 자유분방한 생각과 거침없는 행동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허균에게 잠재해 있는 사회 개혁과 혁명적인 기질을 강화시켰을지 모른다.
(8) 자유분방한 기녀편력
허균의 기녀편력은 대담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어쩌면 사대부로서 또 관리로서 조심성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가 “나는 남이 틀린 것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속된 선비들의 멍청하고 바보 같은 짓을 보면 비위가 거슬려 견딜 수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성격이 원만하지 못하고 다혈질적, 직설적이었던 것 같다. 기녀편력도 그러한 성격의 연장선 같다.
허균이 첫 부임지인 황해 도사로 떠날 때 한양의 기생들을 수십 명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들의 관아까지 지어주었다. 당시의 관례로 새 임지를 발령받아가면 수청 기생이 있는데도 허균은 스스로 수십 명을 데리고 가서 밤마다 기생을 교체해 가면서 희롱하였으며 그러한 행적을 글로 써서 낱낱이 드러나게 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유교적 풍습에 전혀 어긋난 것으로 양반들의 탄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 반년 만에 파직당하고 말았다.
허균은 기녀 문제로 탄핵받으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인륜은 성인의 가르침이지만,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하늘은 늘 성인 위에 있으니 나는 인륜을 어길지라도 하늘의 이치를 따르겠노라.”라며 거침없이 기녀와의 행각을 가졌다. 그는 1601년에서 1609년 사이에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 판관을 하면서도 당시 부안의 명기이며 문장가였던 이매창과 친하게 지냈다. 허균은 시와 문장이 어느 정도 뛰어난 기녀이면 누구든 관계하려 했다.
이매창과는 오랜 친구 관계로 교분을 나누었다. 1609년 9월 이매창이 죽기 1년 전 허균은 이매창을 그리워하는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봉래산 가을빛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 싶은 흥을 가눌 길이 없구려. 낭자는 내가 구학의 맹세를 저버렸다고 비웃겠지만, 만약 그때 한 생각이라도 어긋난다면 나와 낭자의 사귐이 어찌 10년간 끈끈하게 이어질 수 있겠소. 언제 만나 하고 싶은 말 마음껏 나눌 수 있을는지, 종이를 앞에 두니 서글퍼지는구려<1609년 9월 허균이 이매창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김준형『이매창 평전』>” 이것은 허균이 이매창을 얼마나 사모하였으며 교분이 돈독하였는지를 말해 준다.
(9) 성리학에 고착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사상가
허균의 학문과 사상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유교적 이념과 성리학적 사상에 고착되지 않고 자유분방하였으며 다양했다. 이것은 허균의 학문과 사상에 영향을 준 이들이 다양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이미 화담 서경덕에게서 배웠다. 화담의 사상은 송도의 기인으로 당시 정통 성리학의 주류에서 살짝 벗어난 도교적인 색채를 지닌 대학자였다.
허균은 류성룡에게서 유학적 이념과 성리학 나아가 치세학을 공부하였으며 이달에게서는 시문을 공부하였다. 특히 불교의 승려 사명대사를 큰 스승으로 모셨으며, 80세의 나이로 도교를 믿고 득도(得道)하여 신선술을 익혔다는 남궁두(南宮斗, 1526~1620)를 스승으로 섬기고 요나라의 신선으로 알려진 방회로 하여금 도를 깨우쳤다고 했다. 그리고 명나라에 천추사로 오가며 천주학도 접했다.
이렇듯 허균은 유불선 3교를 넘나들었으며 사상과 행동, 시문에 거침이 없었다. 그것은 당시 성리학적 원리주의에 젖어 있던 양반 관료들에게는 학문과 사상의 이단아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1606년 허균이 1605년 탄생한 명나라 황제(만력제)의 장손에 대한 조서를 가지고 온 사신 주지번과 양유년을 영접하는 원접사 유근의 종사관으로 의주로 갈 때 함께 동행한 신흠이 한 말에서 드러난다. 신흠은 허균이 날마다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고서를 줄줄 외우며 알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는 사람이 아니다. 생김새 또한 좋지 않으니 필시 여우, 뱀, 쥐 등의 정령일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런 신흠은 허균이 매형(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임에도 허균을 폄하하였으며 허균의 사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10) 홍길동전의 집필
허균은 평소 [수호전]을 즐겨 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균이 강변칠우들인 서양갑, 심우영 등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수호전] 이야기를 많이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수호전은 그가 [홍길동전]을 집필하는데 많은 참고가 된 것으로 추정한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집필한 것은 계축옥사 1년 전인 1612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홍길동전이 지어지기 1년 전인 1611년 허균은 시와 문집을 엮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간행했는데 거기에는 당시 사회제도의 문제와 적서차별 폐지를 공공연히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길동전은 지금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 문학사적 의의를 빛내고 있지만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오랫동안 불온서적이었다.
(11) 강변칠우, 계축옥사, 허균의 최후
허균은 1607년 공주 목사로 부임하면서 처외삼촌 심우영과 친한 양반가의 서얼인 서양갑 등 서얼들과 친해졌다. 그 서얼들 중에 1613년 계축옥사와 관련된 모임인 강변칠우들도 상당히 있었으며 뒷날 허균은 그들의 주동자로 지목되었다. 허균은 스승인 이달이 서자 출신의 울분을 볼 때부터 적서 차별과 신분제에 대한 강한 회의와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허균은 서얼인 심우영과 ‘내 친구 심군’이라고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으며 서양갑은 양반 가문의 자제였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혀 있었다. 서양갑은 같은 처지인 심우영, 이경준, 김평손 등과 1608년 연명하여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더욱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으며 적서 차별 제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세상을 개벽해야 한다는 등의 말들을 하고 다녔다. 그러자 조정에는 허균이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품고 서얼들과 어울리며 적서와 반상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그들을 종용하고 역성혁명을 일으키려 모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초기만 하더라도 광해군은 허균을 믿고 있었으며 그를 명나라로 가는 조선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허균은 조천(지금의 북경)을 방문하여 천주교 기도문을 가지고 왔으며 1610년 2월 다시 조천을 방문할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러나 1610년 4월 다시 천추사에 임명되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참여하지 않아 파직되었다. 이를 두고 사헌부에서는 누차에 걸쳐 임금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했으나 광해군은 역시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균에게는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쳤다. 그는 자기 신변 관리에 신중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 대독관이 되었을 때 자기편의 사람을 합격시켰다는 시험 부정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을 허균이 주모하였다는 협의로 다시 탄핵되었다.
1613년 계축옥사 때 허균과 친하였던 서양갑, 심우영 등 강변칠우들이 죽었다. 그래도 허균은 살아남았다. 허균은 1589년 같이 생원시에 합격한 이이첨과 의기투합하여 인목대비를 폐모하는 인목대비 폐모살제의 선봉장이 되었다. 초기에는 대북의 영수였던 이이첨이 허균을 신뢰하여 허균이 몇 차례 인목왕후를 암살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암살을 기도하는 중 허균이 하인준 등을 끌어들여서 도성 내외에 유우국(유리국)이 쳐들어온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트린다는 것과 불교를 끌어들여 봉기를 계획한다는 등의 이유로 이이첨과 틀어졌다. 거기다가 허균의 제자인 기준격(전 영의정 기자헌의 아들)이 허균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상소를 올려 체포되었다. 기준격은 일시적으로 허균에게 배웠는데 그 아버지 기자헌이 불교에 심취하여 허균과 인연을 맺고 아들을 가르치게 했다. 그런데 허균은 기준격 앞에서도 언행을 거침없이 하였으며 속내를 드러내고 자기의 사상과 뜻을 피력하였다. 이에 기준격은 허균이 매우 위험한 인물로 여겨 상소를 하게 되었다. 게다가 하인준 등이 그 모든 일의 선봉에 허균이 있었음을 자백하여 허균은 여러 죄가 겹쳐졌다.
허균의 죄는 다음과 같았다. ① 기준격의 전후 상소에 나타난 흉모의 곡절, ② 김윤황을 사주하여 흉격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 ③ 남대문 흉방에 대하여 하인준이 허균이 했다고 자백한 것, ④ 몰래 승도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고 한 것, ⑤ 산에 올라가 밤에 소리쳐서 도성의 백성들을 협박하여 나가게 한 것, ⑥ 유구(琉球)의 군대가 원수를 갚으러 섬에 숨어 있다는 것, ⑦ 이 모든 것들을 허균이 모의한 것이라고 김윤항과 하인준이 낱낱이 자백한 것 등 죄목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허균은 심문받는 줄 알고 나갔으나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눈치채자 광해군에게 “전하! 잠깐만!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간청했지만, 신하들은 “닥쳐라 이 역적놈아!”“라며 일축했다. 이이첨의 강력한 주장으로 조사도 하지 않고 반역죄로 단죄되었다. 사실 당시에도 사형에 해당하는 중형은 철저한 조사와 심문을 거친 후에 처벌되었으나 허균의 처형은 조사나 심문 없이 진행되었다. 허균은 자신이 역적의 수괴라는 죄목에 서명하라고 하자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억지로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허균은 한양의 서쪽 거리에서 능지처참으로 사지가 찢어졌다. 부친 허엽의 묘는 역적의 부모라는 죄목으로 파해쳐졌으며, 아들들도 연좌되어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일족이 멸문되었으나 사위인 이사성과 조카들은 의금부에서 평소 허균과 친하지 않았음을 항변해 처벌되지 않았다. 지금 용인에 있는 양천 허씨 가문의 허균 묘와 그 아버지 허엽의 묘에는 시신이 없는 가묘(假墓)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한 세기의 혁신적 사상가이며 풍운아이고 대 문장가의 생애는 종말을 고하고 20세기에 들어 그의 문장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
5. 강변칠우와 홍길동전이 주는 교훈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기를 원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거부한다. 나아가 불공정(이를테면 특정한 인물이 부당하게 특정한 대우를 받으면) 분노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민란은 바로 그러한 불공정과 불합리한 대접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인간은 폭력에 대해서는 고개를 숙이고 납작 엎드릴 수 있지만 불공정에 대해서는 분노하며 폭발하는 성향이 있다. 그만큼 불공정과 차별은 인간의 분노를 자극하고 나아가 사회 개혁 운동의 불씨로 점화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불씨가 된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건의 단초는 정유라 사건이었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 대한 부정 특혜 입학 사건은 국민을 분노하게 했고 공정사회를 갈망하는 수많은 국민이 촛불을 들게 했다. 앞서 말했지만, 더불어민주당 정권을 위기에 몰아넣은 것도 역시 조국의 딸 조민의 부정 특혜 입학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이런 여러 정황을 보면 불공정과 부정 차별이 난무하면 언제든 국민은 분노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또 선거관리위원회의 고급 간부가 직위를 이용하여 자녀들을 특채하고 특별 승진하여 도마에 올랐다. 국민의 분노가 더 크게 표출되기 전에 철저하게 조사하여 단죄되어야 한다. 대충 처리되면 공정사회로 가는 길은 묘연해진다.
정의로운 사회는 공정사회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현실 사회이며 미래지향적인 사회이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바라는 민주주의 사회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린 불공정과 차별을 살피고 제거하는 노력을 정부, 정치인, 국민이 함께 하여야 한다. 홍길동전과 강변칠우는 역사 속의 한 장면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 江(강 강)은 ❶형성문자로 冮(강)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工(공, 강; 크다)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江자는 '강'이나 '양쯔강'을 뜻하는 글자로, 水(물 수)자와 工(장인 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工자는 땅을 단단하게 다지던 도구인 '달구'를 그린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범람하는 강을 다스리기 위해 둑을 쌓는 치수(治水) 사업을 했었다. 그러니 江자에 쓰인 工자는 흙을 높이 쌓아 물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다. 江자는 본래 양쯔강으로도 불리는 중국의 장강(長江)을 지칭하던 글자였다. 예를 들면 중국 상서(尙書)에서는 민산도강(岷山導江)이라 하여 민산(岷山)에서부터 양쯔강(江)까지 물길을 잘 다스렸던 우 임금의 업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江자는 '양쯔강'을 이르던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江자는 큰 하류를 통칭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江(강)은 ①강, 큰 내 ②양자강(揚子江) ③나라의 이름 ④별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내 천(川), 물 하(河), 바다 해(海), 시내 계(溪), 물 수(水),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메 산(山), 큰산 악(岳)이다. 용례로는 강과 산을 강산(江山), 강의 남쪽을 강남(江南), 강의 북쪽을 강북(江北),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강풍(江風), 강물이 흐르는 가에 닿는 땅을 강변(江邊), 강물의 흐름을 강류(江流), 강에서 나는 모래를 강사(江沙), 강 기슭을 강안(江岸), 물 줄기가 길고 큰 강을 장강(長江), 강물에 던짐을 투강(投江),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음을 격강(隔江), 강물을 건넘을 도강(渡江), 가까운 곳에 있는 강을 근강(近江), 큰 물이 넘치는 것을 막거나 물을 저장하려고 돌이나 흙 따위로 막아 쌓은 언덕을 방강(防江), 맑게 흐르는 강을 청강(淸江), 세상을 피하여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이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강호지인(江湖之人), 자연을 벗삼아 누리는 즐거움을 이르는 말을 강호지락(江湖之樂),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강호산인(江湖散人), 학문이 두각을 나타낸 후 퇴보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강랑재진(江郞才盡), 강이나 호수 위에 안개처럼 보얗게 이는 잔물결 또는 산수의 좋은 경치를 일컫는 말을 강호연파(江湖煙波), 강산은 늙지 않고 영구 불변이라는 뜻으로 불로장생을 비는 말을 강산불로(江山不老), 강과 산 그리고 바람과 달이라는 뜻으로 자연의 경치를 일컫는 말을 강산풍월(江山風月), 강산의 도움이란 뜻으로 산수의 풍경이 사람의 시정을 도와 좋은 작품을 만들게 함을 이르는 말을 강산지조(江山之助), 조선시대에 속세를 떠나 자연을 벗하여 지내면서 일어난 시가 생활의 경향을 일컫는 말을 강호가도(江湖歌道) 등에 쓰인다.
▶️ 邊(가 변)은 형성문자로 邉(변)의 본자(本字), 边(변), 辺(변), 过(변)은 통자(通字), 边(변)은 간자(簡字), 邉(변)은 와자(訛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臱(면, 변)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臱(면, 변)은 처마가 좌우로 같이 내민 집, 나중에 좌우 양쪽 끝, 한쪽 끝의 뜻으로 되었다. 끝으로 걸어가는 일의 뜻으로 쓰이고, 나중에 음(音)을 나타내는 臱(면)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邊(변)은 (1)물건의 가장자리 (2)기하학(幾何學)에서 다각형의 변두리의 선분(線分) (3)등식(等式)이나 부등식에서 부호(符號)의 양편에 있는 식(式), 또는 수(數) (4)바둑판의 중앙과 네 귀를 빼놓고 남는 변두리 부분 (5)과녁의 복판이 아닌 부분 ↔관 (6)한문(漢文) 글자의 왼쪽에 붙는 부수(部首)의 일컬음 (7)제사(祭祀) 지낼 때 신위(神位)의 좌편에 마른 음식이나 과일 등을 담아 놓는 대나무로 만든 제기(祭器). (8)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가, 가장자리 ②곁, 측면(側面) ③변방(邊方: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 ④국경(國境) ⑤국토(國土)의 끝 ⑥두메(도회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변두리나 깊은 곳) ⑦한 자의 변 ⑧성(姓)의 하나 ⑨모퉁이 ⑩이수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가 제(際)이다. 용례로는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 땅을 변방(邊方),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의 땅을 변경(邊境), 변경에 있는 요새를 변새(邊塞), 국경 지방에서 적을 물리쳐 세운 공로를 변공(邊功), 국경의 관문을 변관(邊關), 국경을 지키는 군대를 변군(邊軍), 변경에 사는 백성을 변민(邊民), 변경의 방비를 변방(邊防), 변경에서 들려오는 경보를 변보(邊報), 국경의 경비를 변비(邊備), 가장자리 금을 변선(邊線), 변경에 있는 성을 변성(邊城), 주위의 가장자리를 주변(周邊), 강물이 흐르는 가에 닿는 땅을 강변(江邊), 바다와 땅이 서로 잇닿은 곳이나 그 근처를 해변(海邊), 몸과 몸의 주위를 신변(身邊), 냇물의 주변을 천변(川邊), 국경이나 강가 따위를 따라 있는 일대의 지방을 연변(沿邊), 화로나 난로가 놓여 있는 주변을 노변(爐邊), 강물의 가에 닿은 땅 또는 그 언저리를 하변(河邊), 지극히 먼 변두리나 먼 변경을 극변(極邊), 남쪽 가장자리를 이루는 부분을 남변(南邊), 길의 양쪽 가장자리를 노변(路邊), 어떤 변이나 각에 상대되는 위치에 있는 변을 대변(對邊), 머리 근처나 꼭대기 부분을 두변(頭邊), 다변형에 있어서 각 변의 길이가 같음 또는 길이가 같은 변을 등변(等邊), 끝이 닿은 데가 없음을 무변(無邊), 변경의 중요한 땅을 변상중지(邊上重地), 너르고 커서 끝이 없음을 광대무변(廣大無邊), 헤아릴 수 없이 크고 넓음을 무량무변(無量無邊), 멀리 떨어진 국경 부근의 성을 만리변성(萬里邊城), 자기 한 몸이 처해 있는 주위에서 일상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적은 수필체의 글을 신변잡기(身邊雜記) 등에 쓰인다.
▶️ 七(일곱 칠)은 ❶지사문자로 柒(칠)과 통자(通字)이다. 다섯 손가락을 위로 펴고 나머지 손의 두 손가락을 옆으로 편 모양을 나타내어 일곱을 나타낸다. 아주 옛날 숫자는 하나에서 넷까지는 선(線)을 그 수만큼 한 줄로 늘어 놓고, 다섯 이상은 다른 기호를 사용했다. 그 중 五(오)와 七(칠)과 九(구)는 닮음꼴, 六(육)과 八(팔)과도 닮음꼴로 되어 있다. 일설에서는 七(칠)은 베다란 뜻의 글자를 빌어 쓴 것이며 후세의 切(절)이란 글자를 기원이라 한다. ❷상형문자로 七자는 '일곱'이나 '일곱 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七자는 칼로 무언가를 내리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과 금문에 나온 七자를 보면 十자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칼로 사물을 자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갑골문에서는 十(열 십)자가 막대기를 세운 그려졌었기 때문에 十자와 七자는 혼동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두 글자의 구분이 어려워지면서 끝을 구부리는 방식으로 지금의 七자를 만들게 되었다. 七자는 본래 '자르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후에 숫자 '일곱'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刀(칼 도)자를 더한 切(끊을 절)자가 '자르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七(칠)은 일곱의 뜻으로 ①일곱 ②일곱 번 ③칠재(七齋; 죽은 지 49일 되는 날에 지내는 재) ④문체(文體)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한 해의 열두 달 가운데 일곱째 달을 칠월(七月), 사람의 일곱 가지 심리 작용을 칠정(七情), 바르지 못한 일곱 가지 견해를 칠견(七見), 그 수량이 일곱이나 여덟임을 나타내는 말을 칠팔(七八), 나이 70세로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옛날에는 드문 일이다는 뜻의 칠순(七旬), 일곱 걸음에 지은 시를 칠보시(七步詩), 한 줄이 일곱자로 된 한시를 칠언시(七言詩), 일곱 줄로 매어 만든 거문고를 칠현금(七絃琴), 제갈공명의 전술로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잡는다는 말을 칠종칠금(七縱七擒),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는 말을 칠전팔기(七顚八起), 유교에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의 조건을 이르는 말을 칠거지악(七去之惡), 사물이 서로 연락되지 못하고 고르지도 못함을 이르는 말을 칠령팔락(七零八落) 등에 쓰인다.
▶️ 友(벗 우)는 ❶회의문자로 또 우(又; 오른손, 또, 다시)部가 겹쳐 쓰여 이루어졌다. 又(우)가 음(音)을 나타내기도 하며 친한 친구끼리 왼손(부수를 제외한 글자)과 오른손(又)을 서로 맞잡고 웃으며 친하게 지낸다 하여 벗을 뜻한다. 동족의 친구를 朋(붕)이라는데 대하여 관리(官吏) 친구를 友(우)라 하였으나 나중에 朋(붕)도 友(우)도 친구를 의미하며 사이좋게 하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友자는 '벗'이나 '사귀다', '우애가 있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友자의 갑골문을 보면 又(또 우)자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친한 벗과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사이가 매우 가깝다는 뜻이다. 가까운 친구 간에 또는 이성 간에 손을 맞잡고 다니는 모습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友자는 그러한 의미가 반영된 글자이다. 그래서 友(우)는 '벗, 친구, 동무'의 뜻으로 ①벗(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 ②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 ③뜻을 같이 하는 사람 ④벗하다, 사귀다 ⑤우애가 있다, 사랑하다 ⑥가까이하다 ⑦돕다 ⑧순종하다, 따르다 ⑨짝짓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벗 붕(朋)이다. 용례로는 친구와의 정을 우정(友情), 형제 사이의 정애 또는 벗 사이의 정분을 우애(友愛), 벗으로 사귐을 우호(友好), 가까이 사귀는 나라를 우방(友邦), 친구 사이의 정분을 우의(友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우생(友生), 자기편의 군대를 우군(友軍),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붕우(朋友), 친한 벗이나 가까운 친구를 친우(親友), 오래도록 사귄 벗을 고우(故友), 한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벗을 학우(學友), 벗을 사귐이나 친구와 교제함을 교우(交友), 같은 학급에서 배우는 벗을 급우(級友), 마음으로 사귄 벗을 심우(心友), 서로 마음을 아는 친한 벗을 지우(知友), 동기끼리 서로 사랑하는 정을 일컫는 말을 우애지정(友愛之情), 바람은 구름과 함께 움직이므로 구름의 벗이고 비는 구름으로 말미암아 생기므로 구름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구름을 일컫는 말을 우풍자우(友風子雨), 나라와 나라 사이의 우의를 위하여 맺는 조약을 일컫는 말을 우호조약(友好條約), 마음이 맞아 서로 거스르는 일이 없는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친밀한 벗을 일컫는 말을 막역지우(莫逆之友),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 또는 서로 뜻이 통하는 친한 벗을 일컫는 말을 지기지우(知己之友), 대나무 말을 타고 놀던 옛 친구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내며 자란 친구를 이르는 말을 죽마고우(竹馬故友), 생사를 같이 하여 목이 떨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친한 사귐 또는 그런 벗을 일컫는 말을 문경지우(刎頸之友), 오륜의 하나로 친구 사이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붕우유신(朋友有信),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교제하는 벗을 일컫는 말을 망년지우(忘年之友), 죽마을 타고 놀았던 오랜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를 이르는 말을 죽마교우(竹馬交友), 친구는 서로 착한 일을 권한다는 뜻으로 참다운 친구라면 서로 나쁜 짓을 못 하도록 권하고 좋은 길로 이끌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붕우책선(朋友責善),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