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외국이다 보니까 저의 컴 자판기가 한글 타이핑에 오타가 많으니 이해 바랍니다.
그 숙소의 아가씨 이름석자만 기억하고 그후 뭍으로 돌아왔다.
*재주 사람들은 그 당시 서울, 부산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육지를 통틀어"뭍"이라고 부르던걸로 기억함)
감기로 고생할때 도와준 그 아가씨의 순수함에 보답하고자 나는 그후 매달 "샘터" 라는 잡지를 매달 보내주었고 그녀는 가끔씩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주곤 했다. 특별한 내용도 없었지만 그 편지는 꽤 오래.. 모아 두었었는데.
그리고 그해 늦가을 어느날 집에 들어오니 제주에서 밀감 한박스가 소포로 와있었다. 그 당시로는 그것 한박스 보내기가 그렇게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인데 ,, 우리집에서는 그 당시 웃기만 할뿐이고, "야' 넌 제주도에도 여자친구가 있냐고 묻기만 할뿐 이었다. 그 이전에 밤늦게 친구들과의 전화통화 할일이 많다면서(사실임) 집의 전화선을 엄청 길게 연장해서 만들어 놓고 필요시에는 내방에 들고 와서 할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아주 가끔씩 제주도 아가씨께도 전화를 걸었는데 한번 시작하면 약 4-5시간씩 이야기를 했는데 내용은 아무런 특별한것은 없고 그저 이것 저것 생활 이야기 뿐 이었다. 나 그녀를 꼭 HS씨라고 부르고 ,그 당시에 전화비는 장난이 아니었지만 내가 내는것 아니니까 뭐,,.
요즘 처럼 핸드폰도 없었고.
그 시절 저의 개인신상을 시절을 잠시 소개 할께요.
제법 폼잡고 산다는 어느 시골에서 태어나 많은 형제중에 공부 제일 잘했고 제일 잘생기고(?) 고집은 말도 못하게 세고,, 아주 어린 나이에 학업을 위해 도시로 전학가서....살면서 세상 내마음대로 하고 싶은것 다해가며 철없는 시절을 보냈음.
어릴때부터 친구를 워낙 좋아하는 나인지라 대학 초년에도 내 주위에는 수많은 남여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여자친구도 참 많았다. 그런데 난 하나도 이성으로 그들을 좋아 해본 적도 없었고 따라 다니느 여친들 에게는 매일 한두번씩 울게 만드는 것이 나의 일과 였다.
조금만 가까이 붙어서 걸어도 창피하다고 꾸중하고,길거리에서 구두나 옷 쳐다 보면 꾸중하고 내가 보고 싶으것은 보고 가야 되고,, 만나 자면 1-2시간씩 기다리게 하느것은 여친들의 일상생활 이고 영화 보자고 하면 영화비, 담배값, 밥값도 여자 친구들이 내야하고 늦어면 집에오는 택시비도 대주면 가고 않그러면 않만나고,, 보는데서 나는 다른 애들 많나도 되고...선물주면 버리고.. 한마다로 난 못된놈이었다.
그리고 어린시절부터 여행을 참 좋아 했는데 닞선곳에 가서 새로운 것을 보는 그 기분은 언제나 내게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고등하교 다닐때도 난 비가 오느 날이면 책방든 채로 하교 버스 기다리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겨서 다른 버스 타고 고속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다른 도시로 갔다가 바더로 갔다가,,, 그런데 그 비가 개이고 해가 뜨면 왜 그렇게 기분이 멀쭉한지 이상하고 다시 학교로 가기도 하고,, 그 당시 하학교에는 어머님이 교장 선생님 이하 담임 선생님으 ㄹ꽞 잡고 있으므로 별 문제는 없고, 지도부 선생님은 친구와 내가 같이 잘못해도 항상 하시는 말씀이 - 넌 착한 놈이 왜 그랬냐고 하고, 친구는 별 이유 없이 한대 더 맞고,, 특히 나의 그 시절 담임 선생님은 나를 끔찍히 아껴 주셨는데 결속을 해도 출석부의 내 이름은 항상 깨끗하고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여 선생님 있는데 학교 방과후 여자 친구 만나러 갈때 할말 있다고 고려당 양과점으로 선생님 불러서 여자 친구들과 맜잇는것 다 먹고는 선생님께 빵값 내개 만들고,,(그때는 여학생들 못만나게 되어 있었음. 마나면 정학)
언젠가는 선생님 찾아가야 하는데 --이젠 70 노인이 되셨겠지마는.
그러한 부러울것 없는 나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허전했었고 난 언제나 외로웠다. 지금 생각하면 난 그 당시에 우울증에 걸려 있었던것 같다.
난 도무지 어느것에도 만족을 못하고 항상 방황을 하고, 집중을 못했다.
아마 너무 어린나이에 부모형제를 떠나 공부라느 명목으로 객지 생활을 한것이 그 모든 이유였으리라 본다. 그래서 우리집 큰애도 대학생인데 항상 친구와 아파트 얻어서 나가겠다는데 결혼때가지는 내 옆에 붙어 있어야한다고 못박아 놓았다.
그해 겨울 방학, 어느날 난 누나의 핸드백에 꽤많은 돈이 들어 있는것을 보고는 그것을 훔쳐서 또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갑자기 전화한통 없이 제주를 방문한 나에게 그녀는 놀랐고 난 그 당시 갓 조성된 신제주에 숙소를 정했다.
그곳에 있는 조그마한 공원에는 기차를 못본 제주 사람들을 위해서 기차엔진과 2-3칸의 객실차를 전시해 놓았었고 옆동내에는 집의 디자인이 완전 외국식에 팬스도 외국 처럼 낮고 하얀 나무로 되어 있었다, 꼭 스위스의 산골 같은 모습 이었다.
그녀는 그 당시에 체신(통신) 공무원이 되어서 제주의 관공서에 근무를 하고 있어서 시간이 쉽게 나질 않아 가끔식 신제주에 와서 만나고 공원에서 얼굴 정도 보고 가곤 했으며, 그녀와는 요즘 젊은 세대 처럼 손을 잡아 본적도 없고 그저 만나서 웃고 갈뿐이었다.
나 역시 여자 친구들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자고 하면 제일 싫어 했다. 왜냐하면 여자 친구가 나를 좋아 하든 말든 그건 자기 마음이고 나느 그때까지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마음도 없었고 그 많은 여자 친구들 중에 딱히 내가 정신을 잃을 만 한 여자도 없었으니까. 예쁜애는 많았어도,, 그당시 여친들과 멀리 1-3박 여행을 가도 우린 손도 않잡고 잠만 자고 왔다.
그래도 그 당시에 난 남자 친구들과 사실 술집 아가씨들과 섹스의 경험도 꽤 있었지만 여친은 그냥 친구였음.(내 마음에는)
*지금의 마누라한테는 말했음, 그때 경험 있었다고,,. 그랬다고*
난 혼자 제주도를 이리 저리 버스 타고 다니고 그녀가 시간 나면 만나고,,난 술을 전혀 못하므로 주로 찻집에서 커피만 마시고 가끔 식당가서 밥먹고,, 그때 난 그녀가 공항 근처의 하귀라는 동네가 고향이고 아버지는 않계시고 엄마와 오빠와 같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날 저녁 새로 옮긴 숙소에서 그녀와 키스를 하게 되었고 그녀에게는 그것이 첫키스임을 알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그녀의 크고 맑은 눈은 잊을수가 없다, 머리는 약간 단발 머리 그타일에 눈은 언제나 놀란 토끼눈 같은데...
그녀는 울었던것 같기도 한데,,,이제는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우린 서로 그전 이나 그때나 보고 싶다는 말이나, 좋아한다느 말도 해본적도 없다.
그후 서귀포로 간 나는 "태공각"이라는 꽤 근사한 숙소에 보따리를 풀고 혼자서 서귀포를 다니고 그녀와는 가끔 전화 한번씩 하고. 그러다 어느날 그녀가 서귀포로 왔는데 그당시 장욱제가 한다는 하니문하우스; 폭포, 거기서 약 15-20분정도 서쪽으로 걸어가면 새로 조성된 공원까지 갔다 오면서 난생 처음으로 노래를 노래를 부렀다. 내가 좋아하고 아느 유일한 김상희의 "석류의 계절" -- 밤이 지나고 햇살이 부실때, 발간 알알이 석류는 웃느데,,.
그당시 내가 두려워하느 두가지가 있었는데- 노래 부르는것, 술 마시는것 이었다.
그래서 난 훗날 장가도 가기가 무서웠다 왜냐하면 장가 가면 신혼 여행후 처갓집 가면 노래도 불어야 하고 주는 술도 마셔야 하는데 그 당시 내게는 다가올 가장 큰 걱정 이었다. *난 결혼 했고, 그에 관한 에피소드도 있음.
그녀는 돌아가도 혼자 남은 나는 서귀포 시장을 다 섭렵하고 한창나느 밀감도 많이 먹고,, 특히 숙소에서 보는 일출은 참 아름 다웠다.
어느날 약국에 가서 잠이 않온 다는 핑계로 많은 수면제를 샀다.
그리고 제주시에 있는 그녀에게는 아주 그냥 일상적인 안부 전화를 좀 길게 하고 잤다.
그런데 깨어 나서 보니 내 옆에는 그녀가 앉아 있고 언제나 처럼 크고 맑은 큰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지금도 그녀의 눈에 가득한 기쁨과 미움을 잊을수가 없다.
순간 주위를 보니 숙소가 아니고 거긴 병원 독실이고 팔에는 닝겔 주시와 온 몸에는 피 투성이었다.
이미 3일이 지났다는 그녀의 말에 난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는 머리 맡에 앉아서 잣죽을 끓여 왔다면서 입에 넣어 주었다. 지금 생각 하니 그당시에 제주도에서는 잣 구하기가 쉽지가 않았을 것이고 꽤 비싸기도 했을 텐데 공무원의 박봉에 참으로 미안하다. 집에는 전화를 했는데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이라 공항에서 출국 대기중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울지도 웃지도 않았고 그냥 어떻게 왜 왔냐고만 물었다.
그 이전에 그녀는 그날 밤 따라 내가 꽤 길게 통화 하고 난후 예감이 이상해서 다시 내가 있는 숙소에 전화를 했는데 받지를 않기에 무언가 일이 났다 싶어서 숙소의 주인께 연락을 하고 서귀포로 한밤중에 택시로 날라온것 같다. 언제 그 택시비 갚을날이 있을까?
난 그제서야 손목위에 감긴 붕대를 보고서 내가 손목위의 동맥을 면도기의 면도 칼로 그었다느 것을 알았는데 참 많이도 그었다.
의사는 얼마나 다급하고 어려웠는지 지금도 흉터를 보면 복잡하게도 기웠다.
곧 내 가족이 도착하고 그녀는 바깥에서 가족과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했던것 같다.
그녀에게는 인사도 전화 한통도 할 겨를도 없이 손목과 위 치료를 위해서 난 즉시 육지로 후송이 되었다.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오는 길은 제2 순환 도로 인데 웬 비가 그토록 많이 오는지 세상이 다 떠내려갈것 같았고 한라산 정상에는 초겨울인데도 붉은 단풍으로 가득 했다., 나 그때서야 속으로 울기 시작 했고 언젠가 내가 죽으면 저 한라산중에 묻히고 싶다느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난 그때 그 눈큰 바바리 아가씨를 다시 꼭 찾아 오겠다고 다짐을 했다.
이글은 회원님들께는 아무런 재미도 없는 글이지마는 저는 그냥 그 누군가에게 해야할 이야기 이기에 씁니다, 그것이 나 자신일 수도 있고 아마 그녀 일수도 있고 , 여러분 일수도 있겠지요. 제 나이가 이제 50 턱 밑인데 평생 간직 할려니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 와이프에게 말하기도 그렇고요.
회원님들중에는 힘들게 공부하신 분도 많으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저는 참 쓸데 없는 놈이었지요. 이것은 제 철없는 시절의 불쌍한 모습 이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 드립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첫댓글 이유없는 반항 이었나 봅니다. 젊은날의 방황 다들 한번쯤 있을것같은데요 ?
님의 답글- 이유 없는 반항으로 돌리면 내 마음이 한결 편하고 내 자신에게 용서가 될것같습니다. 난 왜 그렇게 모든것에 반항을 했느지.
정학...참으로 오랫만에 듣는 말이네요..ㅎㅎ 천만다행입니다...그 시절 오클랜드님을 만나지 않았음이..ㅎㅎㅎ 여자 꽤나 울렸다기에 말에요..ㅎㅎㅎ 근데 왜 손목을 그으셨대요?
글쎄요, 그당시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군요.
기억 안납니다... 물러난 대통령각하들의 대답.
하
죄책감이 크셨나봅니다.. 지금은 평안하신지요...남은 미래가 아름답게 채색되길 바래봅니다.진지하게 글을 쓰셨는데 중간 중간에 웃음이.. 아드님을 아직까지 붙들고 계신다는 말에요.. 그리고 여자들을 너무 햑대?하셨어요...ㅎㅎㅎ.
죄책감은 아직도 있습니다,. 아직도 괴롭고요. 난 많은 여자들을 울렸기도 했지요. 그때 난 여자들과 애인이니 어쩌니 하는 그런 관계가 제일 싫었거든요. 그저 하루에 1-5전 정도는 길거리에서 눈에 눈물 나게 만들었지요. 그 모두가 지금은은 다 잘살고 있을것입니다. 특히 내조는 확실하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도 사람교육(?)을 많이 시켜놔서,,,.
매려기는 종"""을 많이 울렸는데... ㅋㅋ 교육을 시켰다고 되남유? ㅎㅎ 본질의 마음은 죽을때 까지 초심으로 안아 흙""이 되어 다시 탄생한다 하옵니다. 오클랜드님은 시방부터ㅁ 잘 하셈. 후~다닥... 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