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살생하는 수단으로 자살(自殺)・타살(他殺)・수희동업(隨喜同業) 세 종류로 분류하지만 똑같이 가공할 살생죄로 한다. 다음은 그 살생의 내용이다.
①자살(自殺) ― 자살이란 세속적인 개념인 자기 생명을 자기 스스로 끊는 의미가 아니며, 자기가 직접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를 말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타의 생명을 죽이고 있음인가. 여기에 있어 우리들이 살생하는 동기에는 크게 나누어 세 종류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가 탐욕이 원인으로 재물을 탈취하기 위한 살인과 식물(食物)을 얻기 위한 어조(魚鳥)등을 죽이는 경우이다.
다음 진에(瞋恚: 분노)를 원인으로 한 경우는 원한의 증오심에 사람을 죽인다든지 혹은 벌과 같은 종류에게 쏘이거나 물리어 홧김에 죽이는 경우이다.
세 번째의 우치(愚痴)를 원인으로 한 살생은 놀기 위한 재미로 냇물에 그물을 치거나 취미로 하는 낚시와 사냥과 같은 살생의 경우이다.
②타살(他殺) ― 타살이란 자기가 직접 살생하지는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남을 시켜 살생하는 경우이다. 직접 죽이지 안했어도 자살의 경우와 동등한 살생죄로 된다.
어물점에서 생선을 육간에서 고기를 사 먹는 것도 나라는 육식자가 없었다면 그 생명체들은 직업인들로 하여 죽는 일은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직업인으로 하여 살생을 시킨 것으로서 타살의 죄를 면할 수 없다. 이는 바로 우리들이 받아야 할 타살의 업(業)인 것이다.
③수희동업(隨喜同業) ― 세 번째의 수희동업(隨喜同業)이란 자기와는 관계없는 사람이 살생하는 것을 바라보고 재미있어 기뻐하면 자살, 타살과 똑같은 살생의 죄업을 짓게 된다.
에컨대 낚시꾼의 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끌려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며 즐기는 마음이 생기면 수희동업의 살생죄를 범하게 된다. 수희(隨喜)1)했기 때문이다. 불교는 마음을 근본으로 하는 이유에서이다.
무주선사(無住禪師1226 ~ 1312)의 사석집(沙石集)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 돼 있다.
어느 날 선사가 설법차 가던 도중에 찻집에 들려 차를 청했다. 노파가 차를 준비하려고 가는 뒷모습을 선사가 보니 노파의 엉덩이에 고양이 꼬리가 늘어져 있다. 미혹한 자는 보이지 않지만 육근(六根)1)이 청정한 무주선사의 눈에는 잘 보인다. 그래서 선사는 놀라,
「할멈! 딱한 나날을 보내고 있구만. 할멈은 다음 생에 고양이로 태어날 거야」
하고 말했더니 노파는 안색이 변해,
「왜 내가 축생계에 떨어진단 말이오. 무엇 때문에 고양이가 된단 말이오」
하고 반문했다.
선사는 그 증거를 보여 주겠다며 노파를 돌아서게 하고 꼬리를 밟고는,
「자, 움직여지나 움직여 보소」
하고 말하니 노파는 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다. 놀란 노파는,
「오늘부터는 심중을 고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피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고 한다.
「나는 미륵보살을 만나고 싶어 선정(禪定)에 들지만 선정에도 들지 못하고 관념(觀念)도 안되는 자를 구제코자 아미타여래는 명호(名號)를 성취해 주셨으니 그것을 들어 열리게 되면 구제된다」고 하였다.
이를 들은 노파는 깊이 참회하고 일생을 염불(念佛)로 보냈다고 한다.
이는 하나의 일화이지만 왜 그 노파가 고양이의 업을 맺었느냐 하면 고양이가 쥐를 뒤쫓아 잡아먹는 재빠른 솜씨를 칭찬하였고, 노파 앞에서 쥐를 반죽음시켜 장난하는 모습을 보고 즐겼기 때문이다. 즉 고양이의 살생을 수희(隨喜)했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고양이의 꼬리가 나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가슴속에는 지옥의 화염이 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침묵의 부르짖음 —
(엄마 살・려・주・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인공 중절이 격증하여 연간 2백만이 넘는 태아가 암암리에 죽어간다(1999). 어디 우리나라 뿐이랴. 인간사회 도처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발전한 의학기술이 역이용되는 무서운 살생 행위이다.
아무리 법률이 묵인 또는 허용한다해도 태아는 충분한 인간으로서의 생명이다. 불교에서 본다면 태아를 죽이는 일은 분명한 살인죄에 하등 변함이 없고 무서운 죄악이다.
임신 1개월의 태아는 귀이개로 떠내리 만큼 작지만 벌써 눈과 입이 구비되어 있다. 4개월이 되면 팔과 다리가 담배 한 개피 정도로서 머리털도 나 있으며 이미 당당한 아기이다. 손가락을 빨며 외계의 엄마의 소리와 여러 소리들을 분별하며 태어나기 힘든 인간계에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부모들의 형편과 사정으로 중절해 버리면 분명한 살인이다. 태아들은 대체 어떻게 죽음을 당하고 있을까.
1954년 미국에서 「침묵의 부르짖음」이라는 영화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3개월이 된 태아가 중절되는 모습을 초음파 진단법으로 촬영한 세계 최초의 기록영화이다.
이 영화는 중절을 반대하는 산부인과 의사가 중심이 되어 제작한 작품으로 문제의 중절 장면은 어느 병원에서 진공흡인법(眞空吸引法)으로 중절되는 모습을 여의사 양해 하에 촬영한 것이다.
「초음파 진단법」이란 밖에서 태아의 몸 일부에다 고주파의 음파를 대고 내부의 반사를 컴퓨터로 처리하여 화상(畵像)에다 구성시키는 기술이다.
3개월의 태아는 약 10cm로 화면은 약간 희미하지만 양수 속에 떠 있는 태아의 눈과 입 그리고 심장이 뛰는 울림이 분별이 된다.
돌연 출입구 쪽에서 가늘고 긴 자궁 중절기구가 들어온다. 흡인용(吸引用) 튜브이다. 태아를 찾아 자궁 속을 휘젓으면 태아는 마치 이 기구로부터 도망치려는 듯 이리저리 심하게 움직인다. 심장의 뛰는 울림이 빨라지는 것 같다. 이윽고 양수를 싸고 있던 양막이 터지고 양수가 흘러나오면 튜브는 태아의 동체를 붙잡아 강력한 진공펌프에 빨려들어 최후에 튜브의 직경보다 큰 머리만이 막혀 남게 된다. 태아는 입을 빠끔빠끔 무엇을 외치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것을 의사들은 「침묵의 부르짖음」이라고 말했다. 소리가 들린다면 「엄마 살・려・주・오」라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어미의 의지에서 죽음을 당하고 있으니 자식에게 구제는 있을 리가 없다. 곧 겸자(鉗子: 날 없는 가위)가 삽입되어 태아의 머리를 집어 산산이 부수어 댄다. 소름이 끼치는 비정한 기술이다.
의사들은 초음파 진단법 개발로 태아의 연구가 진첩되어 태아도 버젓한 인간사회의 일원임을 느꼈다고 한다. 법률상 아무리 허용한다 해도 인공중절이 살인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무도한 행위이다. 인연이 있어 태내에 잉태한 나의 자식을 죽이는 죄악의 두려움에 놀라지 않는자는 벌써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 쓴 악마이다. 이런 경우 잉태한 여인은 타살죄(他殺罪) 의사는 자살죄(自殺罪)를 범한 것이다.
뿌린 씨는 반드시 싹이 튼다. 인과의 도리는 어김없다. 이와같은 죄악의 응보는 금세의 불행만이 아니라 미래의 세계 무량영접을 지옥의 고통에서 피할 수 없다.
(2) 투도(偸盜)
몸으로 짓는 죄악의 두 번째가 투도(偸盜)이다. 투도의 원인은 탐욕에서 일어나 남의 재물을 절취하는 일이다. 경전에는「나에게 상응하지(걸맞지) 않는 것을 많이 소유하고 또한 먹는 자는 이미 도심(盜心)이 움직인 것이라고 설해져 있다.
본래 도(盜)의 원어(原語)는 불여취(不與取)이므로 일반으로 소유자의 허가 없이 탈취하거나 눈을 속여 훔치는 것으로서, 살며시 훔치는 것을 투(偸)라고 하며 노골적으로 약탈하는 것을 도(盜)로 분별하지만 포괄적으로 투도(偸盜)라고 말한다.
고금의 만국이 투도(偸盜)만은 아릴 금제하고 죄로 다스리지 않는 나라는 없다. 하물며 불교는 그 죄악을 중대시함은 말할 것도 없고 악랄한 행위로 거만의 부자(富)를 얻었다 해도 악전(惡錢) 몸에 붙어 있지는 않으며 남의 눈속임 생활을 한다해도 일조 일석에 무상(無常)의 바람에 유혹되면 그 죄업에 끌리어 무량겁 동안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어김없는 인과의 도리가 경전에는 설하여 있다.
현대는 교육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실로 무서운 투도(偸盜)의 세계이다. 펜촉을 농락하여 착복하는 도둑에서부터 사기・횡령・위조・폭로・공갈・변론・인신매매・폭력 등등 투도(偸盜)의 방법도 가지가지로서 혼탁 악세의 독버섯은 무섭게 번져만 가고 있다. 이는 모두가 지옥의 화염이 타는 무서운 응보가 있을 뿐이다.
(3) 사음(邪淫)
육체로 짓는 다음의 죄악이 사음(邪淫)이다. 본래 사음(邪淫)이란 정음(正淫)에 대한 상대의 말로서 욕사행(欲邪行)을 말한다. 욕심 중에서도 심히 불꽃이 사납고 추잡스런 소행이라 하여 사행(邪行)이라고 한다.
자기의 처에 만족 못하고 남의 처와 통한다든지 부부의 사이에도 상대의 의사에 반하여 범하면 사음으로 된다. 금력 권력으로 부녀자를 마음대로 하면 같은 죄악이다.
세상 사람의 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실로 금수보다도 못하다고나 할까. 참아 보고 듣기에 거북한 사음의 사건이 무수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여기에 논술할 필요조차 없는 상식화 한 주지의 사실이다. 가정에 많은 내란을 일으키는 것도 부정한 사음에서가 아니든가.
인간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항시 사음을 품고 외설을 생각한다. 그 음란한 마음은 가슴에 가득 한시도 떠나는 일이 없다. 실로 흉악 망측한 색정의 번뇌이다.
젊은 남녀의 사랑의 도피, 처녀의 타락, 남의 부처와의 통정, 강간, 강간 치사, 끝내는 간부와 결탁 남편 살해까지 꾀하는 색정의 죄악은 그 인면 수심에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윤리 도덕 속에 있어서 혼례(婚禮)로서 시작되어 상례(喪禮)로 끝을 이룬다. 그런데도 이 위대한 시작인 부부의 예를 어지럽힐 때는 인도(人道)에 등지고 의(義)에 어긋나는 그 죄악의 결과가 두렵다 할 것이다. 사람은 이 음욕의 제재가 있기 때문에 금수와 다르다 하겠다. 만약 이 제재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실로 금수와 다른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색욕의 번뇌는 끊임이 없고 찰나의 쾌락을 추구하며 헤아릴 수 없는 죄악을 첩첩이 쌓고 있는 것이 인간들의 실상이 아니든가.
◎증무일선(曾無一善)
—잡독(雜毒)의 선(善) —
이미 몸・입・마음(身口意) 3업 모두가 항상 악만을 짓고 하나의 선도 없으니 부처는 끝으로 「증무일선(曾無一善)」을 설하셨다. 일찍이 하나의 선도 없다는 뜻이다. 어느 고승은 일생조악(一生造惡)의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생 동안 악만을 짓고 있다는 것으로 티끌만큼의 선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더러는 악을 생각하고 더러는 악을 행한다면 이해가 가지만 「항상」이라든지 「하나의 선동 없다」는 데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는 하나 너무 과장되어 있다며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고, 일생동안 악만을 짓고 있다는 데에도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들은 때로는 친절도 베풀고 남을 돕는 일도 있는데 이것도 다 악이라는 말이냐 라는 의문이다. 이는 도덕적인 입장에 너무도 당연한 의문이다.
물론 불교는 친절이나 보시행을 적극권장하고 있으므로 이를 악으로 가르칠 리가 절대로 없으니 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들이 행하는 선에는 「독(毒)」이 함유되어 있어 진실의 선으로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티끌 만한 악도 보아 넘기지 않는 불교의 입장에서 우리들이 선으로 생각하는 것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우리들은 때로는 친절이나 베품을 행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베푼 것을 의식하고 기억에 남기어 마음은 은근히 그것을 자부라고 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기쁨을 알고 있지만 주었다는 자만의식이 남아 거기에 대한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기대하는 보기 흉한 마음이 움직인다. 그 기대에 어긋나든지 만족을 얻지 못하면 은근히 화가 치밀어 상대를 마음 속에서 죽이고 있으니 무섭다 하겠다. 이는 선을 베풀었다는 자만심이 원인이기 때문에 선행이 크면 클수록 독(毒)의 함유도 크다 하겠다. 이를 불교는 촌선척마(寸善尺魔)라고 한다. 한 치의 선이 한 자의 마를 일으킨다는 의미이다.
—무제(武帝)와 달마(達磨) —
양(梁)나라 무제(武帝464 ~ 549)는 중국에서 불심천자(佛心天子)로 까지 일컫던 열렬한 불교 신봉자였다. 그가 건립한 사원과 탑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이고 불교 발전에 세운 공적은 대단히 크다.
유명한 달마(達磨)대사가 120세 고령으로 3년을 걸쳐 인도에서 멀리 중국으로 왔을 시에 국빈의 예를 다하여 온 나라가 환대하였다. 그때 무제는 달마대사에게,
「집은 천자의 자리에 오른 뒤 무수한 사찰과 탑을 세우고 승니(僧尼: 스님과 비구니)를 공양하여 불교 발전에 노력을 했습니다마는 대체 얼마나 선근공덕(善根功德)이 있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달마는 대갈일성으로,
「무공덕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무제는 노여우메,
「어째서 공덕이 없다는 겁니까」
하고 재차 물었다.
「 이는 잡독(雜毒)의 선으로서 허가(虛仮)1)의 공덕입니다」
라고 딱 잘라 대답했다고 한다.
부처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선근공덕(善根功德)은 속기(俗氣)가 분분한
악취가 풍긴다 하겠다. 팔종(八宗)1)의 조사 용수보살(龍樹菩薩150 ~ 250경)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는 「사방 40리 얼어붙은 연못에 끊인 물 두,서너 됫박을 끼얹고 다음 날 보았더니 녹았던 그 자리가 오히려 어름이 불어나 있었다」고 설하여 있지만 우리들의 선근의 보기 흉한 모습을 나타낸 비유이다. 선을 베풀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스스로 교만의 양상을 들어낸 가르침이라 하겠다.
—센가이(仙涯)의 자각 —
일본 큐슈(九州) 하카타(博多) 쇼후쿠지(正福寺)의 화상 센가이(仙涯)는 일본 근대 선종의 고승으로 유명하다. 그 센가이(仙涯)가 어느 겨울에 다리 위를 걷고 있을 때 그 밑에서 추위에 떨고있는 거지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입고 있던 옷 한 벌을 벗어 던져 주었다, 거지는 그것을 받아 곧바로 입었지만 말 한마디 없다. 그래서 센가이(仙涯)는,
「어떤가, 좀 따뜻해 졌는가」
하고 말을 걸으니 거지는 굳은 표정으로 센가이(仙涯)를 응시하며,
「당연하지요, 먼저보다 따뜻한 건 정한이치가 아닙니까. 당연한 일을 왜 묻는거지요. 당신이야말로 기뻐해야만 할 일이요. 보시다시피 나는 거지의 몸, 베풀고자해도 뜻대로 이룰 수 없습니다. 받는 것보다 줄 수 있는 입장을 기뻐하시오」
하고 때우쳐 주었다고 한다.
듣고 있던 센가이(仙涯)는 거지의 한마디에 자기의 심중에는 주었다는 것에 대한 자만심이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를 기대하는 추한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자각하게 됐던 것이다.
「어떠가 좀 따뜻해 졌는가」하고 던진 말속에는 「거지야 너는 베품을 받고도 인사 한 마디 할 마음이 없는가 한심한 놈이다」라고, 고마움에 대한 사례의 인사를 은근히 기대하는 자만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거지에게 폭로 당하고 놀란 센가이(仙涯)는 일생동안 이일을 따끔한 교훈으로 삼아 불도 수행을 다시 고쳐했다고 한다.
전술한 무제도 자기가 행한 베품을 은근히 자만하고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하는 명예심을 간파한 달마대사의 답변이다.
인간의 선에는 한정이 있다. 「잡독(雜毒)의 선」밖에는 쌓을 수 없다. 필경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있음을 자기 실상에 놀랄 뿐이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될 일은 잡독(雜毒)의 선이라 하여 결코 무의미하다든가 냉혹하라는 뜻은 절대로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로 진지하게 선을 추구하여 행하다 보면 진정한 선과 공덕은 절대로 되지 않는 자기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니 거기까지 정진하여 인간이라고 하는 실상을 알도록 불교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선근을 쌓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자만이 선근의 조가리도 쌓을 수 없는 자신에게 아연할 따름이며, 필경은 잡독(雜毒)의 선에 불과한 허가부실(虛仮不實)의 자신을 자각할 뿐이다. 진정 효도하려고 힘써 온 자식만이 불효밖에 안되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삼륜공(三輪空) —
불법에는 삼륜공(三輪空)이 아니면 진실의 보시 진실의 善으로 말하지 않는다.
삼륜(三輪)이란 베푼자(施者) 받은자(受者) 베푼 물건(施物)을 말한다. 공(空)이란 ①내가 ②누구에게 ③무엇무엇을 이 세 가지를 의식에서 잊어지지 않으면 즉 공(空)으로 되지 않으면 진정한 선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베품으로서 명예를 팔거나 얼굴을 내세우는 마음이 있다면 진실의 선(善)이 될 수 없다.
전술한 센가이(仙涯) 화상은 모처럼의 선행을 감사의 인사를 바라는 더러운 마음으로 더럽혔다. 센가이(仙涯) 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선행에는 모두 독이 함유되어 있다. 선을 베풀었다는 자만심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 보답을 기대하는 깨끗지 못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의 선은, 인간의 본성인 아리아리욕(我利我利欲)에서 나왔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자기중심으로서 남의 평가를 높이고, 칭찬 받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근성 외에는 없다. 이런 근성에서 행해지는 선인데 잡독(雜毒)이 아니고 허가부실(虛仮不實)이 아닌 것은 있을 리 없다.
이렇듯 깊숙이 자리잡은 자기의 본성을 비추어 내면 선악의 논의는 무의미하다. 렌트겐(X레이) 앞에 서게 되면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고 노・소・남・여의 차별도 없으며 선・악・미・추의 시비도 없다. 다만 보기 흉한 뼈의 연쇠만이 있을 뿐이다. 절대의 부처의 빛 앞에는 선・악・정(淨)・예(穢)1)의 차별이 없고 대・소・범(凡)・성(聖)2)의 구별도 없다. 시방중생 모두가 증무일선(曾無一善) 일생조악(一生造惡)의 범부이다.
이상의 잡독(雜毒)의 선에 관한 가르침은 부처의 예리한 눈으로 보신 인간의 실상을 깨우쳐 주시기 위한 것으로서 선행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니다. 잡독의 선도 틀림없는 성행이며 인과법칙에 의해 어김없는 선과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뿌린 씨는 반드시 싹이 트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인간의 선행이 극락정토에 왕생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는 달리 극락 왕생의 길을 가르친 것이 불교이다.
◎ 아리아리망자(我利我利亡者)는 인간의 본성
―인간을 지나치게 미화시킨 루소의 최후 ―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어느 시대에도 금언이라는 것은, 우리들에 있어 가장 불가해한 것이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18세기 불란서의 사상가 루소(1712 ~1778)도 자기를 찾는 데에 노력해 온 한사람이다. 그는 탄생하자마자 어머니와 사별하고 아버지는 어린 자식 루소를 친척에 맡긴 채 행방이 묘연하였다. 이후 루소는 학교는 거의 다니지 못하고 각지를 전전하며 살았다. 그가 일약 유명해진 것은 1750년에 출판한 「학문・예술론」에 의해서이다. 「문명의 진보는 인간을 행복하게 했는가」라는 아카데미 현상논문에 「과학의 진보야말로 인간을 행복한 자연상태에서 타락시켰다」라고 주장하고 당당히 당선됐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유명한 말에 상징되어 있듯이 그는 인간이 본래 지닌 「자유・평등・무구(無垢)1)・미덕」들을 만회시켜 자연상태에로 가까이 할 것을 제창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은 그러한 그의 인간관이 표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불란서 혁명(1789)은 어떠했는가. 「자유・평등・박애」라는 고매(高邁)2)한 이상과는 정반대로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구(舊)체제를 붕괴시키니 인간의 욕망과 이기주의 가 노골적으로 노출되었다. 행복의 자연상태는 고사하고 무질서와 혼란을 거듭한 결과 나폴레옹(1769 ~ 1821)의 독재를 초래시켰다.
루소는 또한 교육론(敎育論) 에멜을 저술하고 「아버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는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기의 다섯 자식은 태어나면 곧바로 유아원에 집어넣어 신세를 지게 했다. 이렇게까지 언행불일치도 고금을 통해 드문 일이다.
인간을 지나치게 미화시킨 루소는 최후의 10년 사이 반미치광이가 되어 죽었다.
불법(佛法)의 법경(法鏡)에 비추어 진 인간의 실재의 모습인 번뇌구족(煩惱具足)・죄악심중(罪惡深重)의 자신임을 그가 만일 지각하였더라면 오늘의 민주주의도 교육도 다른 차원에서 많은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아리아리・이기주의・죄악」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루소는 너무도 어두웠던 것이다.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보다 알지 못하는 것은
나 자신이로다
―심구각이(心口各異) 언념무실(言念無實) ―
앞 지면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대무량수경』에 우리들의 마음의 모습을 「심구각이(心口各異) 언념무실(言念無實)」이라고 설해져 있다. 「마음과 입이 각각 다르고 말하는 것과 마음의 생각에 진실이 없다는 뜻으로서 용케도 이 입이 찢어지지 않고 혀가 썩지 않는 것」이라고 무서운 자기의 참상을 알 수가 있다.
불행을 당한 상대에게 퍽 안됐다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왠지 자기도 모르게 상쾌한 마음이 생긴다.
성장한 옷차림을 한 여인이 득의양양 걷고 있다. 때마침 달리는 창[ 흙탕물을 맞고 울상인 그 여인을 보고,
「어머나! 안됐네요. 얌통머리 없는 기사도 다 있네」라며 말로는 동정하지만 「꼴좋게 됐다. 그런 옷으로 잘난 체 하니까 그렇지! 더 흠뻑 맞지 않고....」마음은 상쾌하다. 입으로는 「딱하다」 속마음은 「꼴좋다」이다.
옆에 호화주택이 세워지면 자기의 단층집이 초라해져 심정이 좋을 리 없다. 그 건물 주인에게 「훌륭한 집을 지었습니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내심은 「화재라도 나라」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거짓말 비교에 「죽고 싶어하는 시어머니와 말리는 며느리」라는 말이 있듯이 「이만 죽어야지」하는 시어머니 말이 거짓이라면 「무슨 말씀이세요 오래오래 사셔야지요」하고 말하는 며느리도 빨간 거짓이다.
찬밥을 먹어도 냉대를 받아도 살고 싶은 것이 본심이지만 며느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짓말로 으르대어 「더 좀 나를 소중히 해다오」라는 재촉이며,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언제 죽어 살림을 물리고 해방시킬 작정이야」라는 시어머니를 짓밟고 있는 마음이다. 참으로 불어(佛語)의 「심구각이 언념무실」그대로이다.
만일 사람의 마음속에 생각하는 전부가 보이는 것이라면 주위 사람들은 딱 질려버릴 것이다. 이 실상이 부처의 법경(法經)에 비쳐진 자기의 모습이다.
인간 표면의 모습을 벗기면 무수히 악을 직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쳐져 나온다. 신란(親鸞:見眞大師 1173 ~ 1262)은 부처의 거울에 비쳐진 자기의 모습을 「일상조악(一生粗惡)」「극중악인(極重惡人)」「지옥은 정해진 나의 집」이라고 고백했다. 자신은 일생동안 죄악을 지어 온, 지옥밖에 갈 곳이 없는 극악인이라고 참회하였던 것이다. 그분은 자기의 참 모습이 법의 거울(法鏡)에 비쳐져 그 실상을 꿰뚫어 보았을 때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절대의 서원력(誓願力)에 구제되어 어느 무엇으로도 미동도 하지 않는 절대의 행복자가 되었다.
진실의 불교를 듣는 그 이유의 하나가 법경에 가까이 하는 일이며, 가까이 할수록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자기의 참 모습이 보이게 된다. 가식 없는 실상이 철저히 보일 때까지 자기의 속마음을 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화상(和尙) 니시무라 호켄(西村法劍)과 교장 —
1900년 초기 기지(機智)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화상(和尙) 니시무라・호켄(西村法劍)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어느 마을 절에서 설법이 있었던 날의 일이다.
한편 그 마을에는 소학교 교장선생님이 살고 있었다. 불교를 대단히 싫어하는 사람이다. 불교는 모든 인간을 악인으로 말하는 데에 불쾌하고 마음에 거슬렸던 것이다.
때마침 그 화상이 설법차 온다는 소식이 들렸왔다. 그렇게 유명한 중이라면 한번 만나 따끔한 맛을 보야주겠가며 단단히 벼르고 있던 중 예정대로 법회는 열였다.
니시무라 호켄(西村法劍)은 그런 계략이 있으리라 알 리가 없고, 여느 때와 같이 「이 세상에 선인은 한 사람도 없다. 부처의 지혜의 눈으로 보면 전부가 악인이다」 라 역설한다.
설법이 끝난 후 교장선생은 곧바로 니시무라 호케(西村法劍)의 대기실로 찾아갔다.
교장:「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건네주는 명함을 보고,
화상: 「아! 교장선생님이시군여. 잘 오셨습니다. 자자 앉으시지요」
하면서 마주 앉아 겸손히 대한다.
교장:「단도직입적인 말씀입니다마는 내가 찾아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의 설교속에 묻고 싶은 점이 있어서요」
화상:「그러십니까 무엇이든지요」
공손한 화상에게 교장은 쌓인 감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교장: 「오늘 설교에, 이 세상에 선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셨는데 아무렇게나 함부로 말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교육하는 선생도 전부가 악인이 돼버려 교육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인도 있고 선인도 있습니다. 이 후에는 그러한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말은 안 하도록 하십시오」
하고 불같은 항의를 토했다.
화상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눈치를 보고 있으니, 그는 곧바로 교장에게 가까이 당기어 조아리고,
화상:「그것은, 그것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고 사과를 하지 않는가.
너무나 의외의 태도에 교장은 놀라는 동시에 어쩐지 마음이 불안하다. 뭐
라해도 당시 생불(生佛)로 일컫는 니시무라 호켄(西村法劍)이 아닌가. 한 마디 반론도 없이 사과하고 있다니?
교장: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것은 없습니다. 앞으로 그러한 설교만 안 하신다면 됐습니다」
하고 교장이 너그럽게 나오니,
화상:「아니오, 선생님과 같은 분이 계신 줄은 전혀 모르고 터무니없는 실례를 했습니다」
지나치게 나긋나긋하므로 이상히 여기면서 교장은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화상은 염불을 외우면서 바짝 따라온다. 견송할 기색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대로 보내줄 것 같지가 않다. 부랴부랴 현관문을 열었을 때,
화상:「그런데 교장선생님 잠깐만....」
하고 말을 걸었다. 아차 왔구나 역시....
화상:「교장선생, 좀 묻고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씨는 상냥하나 교장선생은 마음이 쓰인다.
화상:「아까 이 세상에는 선인도 악인도 있다고 하셨는데 교장선생은 그 어느쪽입니까」
하고 반격의 불을 댕겼다.
교장:「․ ․ ․ ․ ․.」
그 물음에 교장선생은 딱 난처해 졌가.
「선인」으로 대답하고 싶지만 어쩐지 주저해지는 데가 있다. 이제와서 악인이라고도 못한다. 「악인이 교육시킬 수 있는가」로 된다. 진퇴 양난하여 머뭇하고 있으니,
화상:「교장선생 자신의 일입니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그러시면 묻겠습니다. 교장선생은 『거짓』을 선으로 가르치십니까 아니면 악으로 가르치십니까」
이는 간단한 질문이다.
교장: 「거짓은 도둑의 시초라하여 물론 악으로 가르치지요」
화상: 「그러시면 교장선생은 지금까지 거짓을 말한 일이 없으신가요」
그렇게 물음을 받고 보니 새롭게 기억나는 일이 많다.
교장: 「입장이 난처해지면 알면서도 거짓을 말하는 경우도 있지요」
화상: 「싸움은 선악 어느쪽으로 가르치십니까」
교장:「․ ․ ․ ․ ․.」
대답이 없다. 살아오는 과정에 더러는 다툼도 있었으며 마누라와 자주 싸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수 없기 때문이다.
화상: 「산 동물을 죽이는 일은 아이들에게 선으로 가르치십니까 악으로 가르치십니까」
교장: 「그것은 악으로 가르칩니다. 생명체를 귀여워하도록 교육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화상: 「그러시면 교장선생은 전혀 생물을 죽이는 일이 없겠네요. 생선이나 소, 돼지고기를 자시는 일도 없고요」
교장:「음! 늘 먹고 있기는 합니다만․ ․ ․.」
화상: 「그렇다면 교장선생은 거짓도 싸움도 살생도 다 악으로 알면서도 매일 그와 같은 악업을 무심히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니시무라 호켄(西村法劍)은 교장의 뱃속을 도려내듯 평시 무의식중에 되풀이하고 있는 악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지적해 나갔다.
그 한마디 한마디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교장은 지금까지 자신이 선인으로 자만하고 있었음을 자각하였으며 의식하지 못한 곳에 얼마나 많은 악을 쌓고 있음을 알게 되어 마침내 현관에서 머리 숙여 엎드리고,
교장:「아까의 자리에서는 실례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와 같은 악인도 없는가 싶습니다. 이런 자도 구제의 길이 있는지요」
불교를 혐오하여 온 교장이 놀라울 정도로 심기일전 열렬한 불법(佛法)자로 대변신하였다는 실화이다.
이제껏의 교만심이 자신의 악의 실상을 덮어 가리게 한 그 자각이야 말로 불교의 올바른 꽃이 피게 되고 구제의 길은 열리게 된다. 「어니(淤泥: 수렁)에 피는 연꽃」이란 이것을 비유함이다. 선인으로 자만하고 있는 사이에는 불법(佛法)은 나와 관계없는 존재물로 되며 진실 불교와의 인연은 멀다 하겠다.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 「아리아리망자(我利我利亡者)」1)의 무서운 본성을 은폐하고 있다. 나만 살면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무자비한 본성이 바로 그것이다.
2차대전 중에 남방전선으로 향하던 일본 수송선이 잠수함 공격을 받아 침몰되어 몇 천의 병사들이 주위에 섬 하나 없는 태평양 한복판에 빠졌다.
그때 구명보트 몇 척이 바다 위에 떴지만 순식간에 병사들도 만원이다. 이제는 탈수 있는 한계를 넘었는데도 타지 못한 많은 병사는 「나도 태우라」
며 보트에 매달렸다. 더 이상 방치하면 전복될 것을 감지한 보트 안의 병사들은 군도를 빼들고 살려 달라 매달리는 전우의 팔을 닿는 대로 잘라 버렸다.
팔을 잘린 병사들은 「개새끼들」을 외치면서 주위 바다를 피로 물들이고 고기밥이 되었던 것이다.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전우를 죽이는 참혹한 수라장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만일 내가 보트에 탄 병사라면 어떠했을까. 남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몸을 바다에 던지는 아름다운 마음이 우러나왔을까. 아니다 무서운 아리 아리 마음 뿐이다.
만약 나의 양친・처자・형제가 구원을 청했다면 어떠했을까. 그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구하고 자기는 깨끗이 죽을 수가 있었을까. 한 사람이란 부모일까 형제일까 처자일까 누구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은 자기 자신이 아니든가.
평화 시대인 오늘에도 한 해에 수백만의 태아가 인공중절이라는 문명의 기법으로 살생되고 있다. 부모의 사정이 나쁘면 자식도 가차 없이 죽이는 것이 인간이다. 「자식을 버리는 숲은 있어도 내몸을 버리는 숲은 없다」는 속언대로이다.
여유가 있을 때는 모습을 숨기지만 막상 만일의 경우에는 부스스 머리를 쳐드는 마음이 인간의 「아리아리망자」의 본성이다.
참으로 구원겁(久遠劫)1) 이래 인간의 자성(自性)은 아집(我執)의 마음이다. 씻어도 깨끗해지기 어렵고 태워도 없어지지 않는 오만 불손의 독아(毒我)2)이다. 아(我)는 일체의 청정(淸淨)과 무아(無我)와 자비(慈悲)에 반항하는 근본이다. 이것이 종교의 모양을 갖추게 되면 자성 유심(自性唯心)으로 된다. 겉으로는 도덕, 철학의 이상을 말하고 스스로 거기에 잠기어 있는 심산이지만 진실의 자아(自我)는 여전히 미망(迷妄)3)에서 헤매고 있다.이리하여 그 아름답고 고원한 이상도 철학도 헛되이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고 매달리고 있다. 마치 죽은 아이에 예쁜 옷을 입혀 안고 있는 거와 같으다.
도(道)에 철저하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겸허하게 돼야 할 일이다. 이것은 어떻게 얻어지느냐 하면 이상을 파괴하는 일이다. 개념의 종교를 부수는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각하는 일이다. 아집(我執), 아심(我心)을 지니고는 진정한 선(善)을 실행할 수 없다. 순간적으로 변하고 찰나에 바뀌며 늘 흔들흔들 고정이 없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을 토대로 한 이사이나 종교는 전복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