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14ㄴ-2,2ㄴ.8-10
14 정녕 나는 위대한 임금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민족들은 나의 이름을 경외한다.
2,1 자 이제, 사제들아, 이것이 너희에게 내리는 계명이다.
2 너희가 말을 듣지 않고, 명심하여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리겠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8 그러나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
너희는 레위의 계약을 깨뜨렸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9 그러므로 나도 너희가 온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리라.
너희는 나의 길을 지키지 않고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10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한 분이 아니시냐?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서로 배신하며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더럽히는가?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2,7ㄴ-9.13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에서,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9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불가능에 도전하는 이는 위선적일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말은 하고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기는 잘하고 인사 받기 좋아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서 그렇게 보이려는 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가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기 몸을 무화과잎으로 가리기 시작한 이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죄는 교만에서 시작되고 교만은 우리를 위선자로 만들기에 이 죄에서 벗어나려면 솔직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해지면 다른 이들이 나를 무시함으로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천에 사시는 한 할머니가 병원장 사모님으로서 잘 나갈 때 의료 사고가 터져서 병원 문을 닫을 수 있는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그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친구들에게 비웃음 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돈이 있다고 많이 자랑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위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이러저러하게 보이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시선의 노예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고.
교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영화 ‘스포트라이트’(2015)는 미국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을 은폐해 온 사실을 신문 기자들이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우리로서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했고 실제로 이 사건을 통해 미국 가톨릭교회가 상당한 물적 정신적 타격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왜 교회는 솔직하지 못했을까요? 하느님을 완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의 시선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자기 힘으로는 모두를 속일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으로 가리던 서로의 부끄러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가죽 옷을 입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죽 옷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말은 세상과 다른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 지상 시스템 안에 속해서는 세상 시선에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물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래야 배에 타고 있을 때보다 자유로워집니다.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면 아무래도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그들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물 위로 뛰어내리면 이제 물 위를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타인을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 덕분으로 새롭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때 이 지상 사람들과 다른 위치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의 판단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위 병원장 사모님도 십자가의 길을 하다가 제4처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만나실 때, 예수님께서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주셨고 그 이후로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창피해서 나가지 못하던 본당에 나가 먼저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병원장 사모님이 성당 화장실 변기를 매일 닦으면서도 기쁠 수 있었습니다. 병원이 망해도, 친구들이 비웃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런 것과 무관한 존재가 될 하느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이렇게 하느님 사랑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아무 능력이 없는 작은 수녀로서 모든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입히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비웃음에 무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동전 몇 개만 가지고 담대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커다란 병원을 짓겠다고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결국 수녀님의 말대로 병원이 지어지는 것을 본 세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세상 비웃음에 맞서봅시다. 버락 오바마는 학교에서 장차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을 때 항상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흑인 아이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하면 대부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무시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성체 성사가 있습니다. 우리를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는 가죽 옷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의 시선에 지배 받는 노예 생활로 생을 마감할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에 도전하며 세상을 이길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낮은 자존감과 무력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이동귀 교수는 ‘완벽주의’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남들은 이 기준에 도달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고 또 앞으로도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존감은 떨어지고 이에 따라 무력감에 힘든 시간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기가 요구하는 기준이 됩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연예인처럼 멋지고 예쁠 수 있을까요? 학벌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상위 1% 안에 들 수 있을까요? 또 자산은 어떻습니까? 100억 이상을 가져야 괜찮고 그 이하는 실패하는 삶일까요?
자신의 높은 기준 때문에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박하게 평가합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만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될 때, 그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잘못된 기준을 내세워서 판단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날카로운 각을 세웠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중첩되어 보입니다. 따라서 생각 자체를 바꿔야 했습니다. 잘못된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백성의 지도자들과 교사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준을 내세워서 사람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모두 틀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대로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하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기들 삶의 특권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향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섬길 수가 없겠지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기억하면서, 상대방에게서 하느님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 자체를 바꾸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보다는 주님의 관점을 찾고, 세상의 것보다 주님의 것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며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더욱더 사랑하는 것밖에는 사랑의 치료법이 없다(H.D. 도로우).
사진설명: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