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빈산(禮賓山) 정상의 임을 만나고 나니
(예빈산 제3편)
筆 嶺/金 相 和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포토존을 세워 놓았고 그 뒤에 임의 얼굴이 보인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임이든가~^^
더위를 무릅쓰고 깔딱고개를 올라오느라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임의 곁으로 갔다. 필자를 본 임은 빙그레 웃으며 어서 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어째 이토록 더운 삼복(三伏)에 위험한 이곳을 오셨느냐고 한다.
그러면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예빈산(禮賓山)을 택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유가 있다면 당신이 보고 싶어 더위를 무릅쓰고 온 것이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임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그 미소 짓는 그 얼굴이 그리 예쁠 수 없다.
임과 대화는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다. 왜 안 그렇겠는가!! 얼마나 보고팠던 임이든가?
우리는 젊은 연인(戀人)들처럼 불이 타오르듯 사랑이 타오른다. 가슴은 뜨겁게 타들어 가고 심장은 뛴다. 이보다 더 행복한 시간이 또 있을까?
말도 없이 시간만 흐른다. 이때 우리는 향기 가득한 입맞춤을 했다.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니든가??
기념사진도 찍었다. 이제 하산하면 영영 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럼 먼 훗날에 임이 보고 싶으면 사진첩을 꺼내 보면 되지 않겠는가?
사진 찍을 때 왜 그런지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그 짜릿한 감정을 참고 지금부터는 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주 먼 옛날, 하늘에는 옥황상제가 있었고, 그에게는 예쁜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베 짜는 여인“ 직녀”이다. 왕은 처녀가 된 딸의 짝을 찾았고 그 짝은 소를 모는 “견우”였다.
그들은 결혼하고 놀기에만 빠져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옥황상제는 참다못해 화가 났다. 그래서 왕은 궁리 끝에 견우와 직녀를 갈라놓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견우와 직녀의 설화를 간략하고 서술해 보면, 견우와 직녀는 옥황상제께서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그리워하다가 한 해에 한 번 만날 수 있도록 갈라놓았다. 이유인즉 두 사람은 결혼 후 깨가 쏟아졌기 때문에 일은 하지 않고 빈둥대며 놀았기 때문이다.
직녀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고 눈물은 큰비와 폭풍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까마귀와 까치는 일 년에 단 한 번 다리를 만들어 그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 다리를 까마귀 오(烏)와 까치 작(鵲)자를 그리고 다리 교(橋) 자를 써서 우리가 말하는 오작교(烏鵲橋)라 했다.
이 설화는 한국의 칠월 칠석의 민속과 함께 오랜 세월 우리 민족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 이야기로 평가받고 있다.
견우직녀(牽牛織女)는 한국, 일본, 중국에 전해지는 전설이다. 문헌상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에서는 사대 민간 전설로 여기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견우직녀(牽牛織女)의 전설로, 중국은 우량 직녀(牛郎 織女)의 이야기로 나라마다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여름의 별자리인 견우와 직녀는 관련이 있다. 한국의 칠월칠석과 일본의 타나바타(七夕) 등의 풍습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두 부부는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건널 수 없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애태우면서 지내야 했다. 이러한 견우와 직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 들은 까마귀와 까치는 해마다 칠석날에 이들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것이 곧 오작교(烏鵲橋)라 하는데 얼마나 아름다운 전설인 오작교(烏鵲橋)가!!
오작교(烏鵲橋)는 없어도 필자는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 임과 상봉했다. 그간 만나지 못해 가슴 한편에 싸였던 감정을 털어놓으니 그리도 시원할 수 없다.
이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우리는 각자 즐겁게 지내기로 약속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비록 이곳을 오지 못할지라도 오는 산객이 있으면 안부 편지라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다.
그런데 그녀를 바라보니 매무새에 자기의 이름을 예빈산(禮賓山)이라 써 놓고 옆에 작은 글씨로 직녀봉이라 써 놓았다. 밑에는 자기의 키를 590m라고 새겨 놓았다. 그럼, 견우봉은 어디 있을까? 견우봉은 여기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젠 하산할 시간이다. 아무리 뙤약볕이 쏟아진다고 해도 우리는 하산할 것이다. 임이시여!! 부디 행복하소서~^^ 이 말 한마디하고 필자도 뒤돌아섰다.
우리 세 사람은 따가운 뙤약볕을 머리에 이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얼마나 좋을까?
한참을 내려오다 명품 소나무가 이산에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그곳에 가서 구경하고 가자고 했다. 두 분은 그곳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은 나를 위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명품 소나무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내려가는 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 썼지만, 아무 소용없다.
명품 소나무가 있는 곳까지 왔다. 필자는 명품 소나무를 보는 순간 기쁜 마음을 참지 못할 정도였다. 왜 그런가 하면, 소나무는 학이 날개를 펴고 비상(飛翔)하는 자세이다. 그 자세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감탄사를 연실 터트릴 정도였다.
그런데 다른 한편은 속이 상해 참기까지 힘들었다. 이유는 그 소나무가 무슨 원인인지 알 수 없지만, 안타깝게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그 상태를 보고 어찌 속이 상하지 않을 사람 있겠는가?
그 소나무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 명품이란 칭호까지 받은 나무인데 소리 없이 신음하고 있는 자태를 보았을 때 어찌 이렇게 팽개쳐 놓았을까?
소나무가 이렇게 병이 들도록 도(道)나 군(郡)에서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것부터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내일 당장 전화 걸어 알아볼 것이다.
비를 맞으며 보기도 안쓰러운 소나무를 보았을 때 안타까움이 쏟아지기 직전까지 왔다. 송광(松光) 선생도 너무 안타깝다는 말을 쏟아낸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더욱 울컥한 마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 마음을 달래며 옆에 써 놓은 글을 읽어 보았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소나무의 명칭=적송
소나무는 소나뭇과에 속하는 상록 침엽 교목으로 높이 35m, 지름 1.8m까지 자란다. 침엽은 2개씩 나오고, 길이는 6~12cm 정도 된다. 나무껍질은 거북등처럼 세로로 넓게 자라며 줄기 밑은 회갈색이고 윗부분이 적갈색을 띤다.
꽃은 6월에 피고, 열매는 구과를 맺는데 달걀 모양 원추형으로 다음 해 9~10월에 성숙한다. 열매가 익으면 조각조각 벌어지면서 날개 달린 씨가 나온다. 우리 나리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전역에 자생한다.
보호 소나무
소나무는 마을을 수호하는 통신 목으로 소나무 가지는 잡귀와 부정을 물리치고 제의 공간을 정하는 뜻을 가진다.
소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로 예로부터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나타냈으며, 비바람과 눈보라의 역경 속에서도 푸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꿋꿋한 절개와 의지를 나타낸다.
꿈에 소나무를 보면 벼슬을 할 징조이고, 솔이 무성함을 보면 집안이 번창하며, 송죽 그림을 그리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해몽한다. 반대로 꿈에 소나무가 마르면 병이 난다고 한다.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슴에 안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길이 없어졌다. 이런 비가 2~30분 더 내렸다면 우리는 영락없이 오가도 못하고 고립될 뻔했다.
그래도 우리가 힘은 들어도 도랑을 건널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것 역시 신(神)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셨기에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삼복(三伏)더위를 무릅쓰고 예빈산(禮賓山)을 산행했지만, 무사히 다녀온 것만으로도 신(神)께 감사드립니다.
더위를 달래며 함께 산행한 송광(松光) 선생과 야해(也海) 회장께 감사를 드립니다. 두 분 덕분에 3편의 수필을 쓸 수 있어 기쁩니다.
2024년 7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