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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퇴짜'입니다.
중국 충칭에서 마감된 제3회 동아시아선수권에서 허정무 정대세 구자철 등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때 처절하리만큼 비참한 퇴짜의 추억을 지닌 이들이라는 것이죠.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
박지성 역시 수원공고 3학년이었던 1998년 '왜소하다'는 이유로 수원, 서울(당시 안양) 등 K리그 팀들에게 퇴짜를 맞고 대학들로부터 문전박대를 받았었죠. 간신히 명지대에 진학한 후에야 그는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들어 자신의 가치를 알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퇴짜의 경험을 지닌 허정무였기에 박지성을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허약하다는 이유로 대학 문턱을 넘지 못하던 구자철(19·제주)이라는 무명을 전격 기용하며 '제2의 박지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강릉상고를 졸업하고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방황하다 이현창 감독의 한국철도에서 새로운 축구인생을 펼친 이을용(33·서울)에게 기회를 준 이도 허정무였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잠실벌에서 김도훈의 결승골로 브라질을 1-0으로 이기던 날(1999년 3월 28일). 히바우두를 그림자 수비했던 이가 이날 A매치에 데뷔한 이을용이었습니다.
◆2년을 꿇고 축구배운 허정무
우선 허정무의 이야기부터 해보려 합니다. 1969년 1월 17일. 허정무는 이 날을 잊지 못합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그해 겨울 그는 생전 해본 적 없던 축구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이었지만 집안 형편상 7남매 중 넷째였던 그가 고등학교에 올라갈 방법은 체육 특기생이 되는 길밖에 없었죠.
허정무 IS포토 |
그는 먼 친척뻘이었던 허윤정 선생(※60년대 국가대표로 허정무와는 촌수를 따지기 힘들만큼 먼 친척이지만 삼촌이라고 불렀음)의 권유로 축구를 하기로 맘을 먹습니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허선생이 추천해준 중동중을 찾아갔습니다. 운동신경이 남달랐던 터라 축구를 시작하면 곧바로 고등학교에 올라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은 촌놈의 순진한 희망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중동중 감독이던 유판순 선생은 허정무를 보자마자 '축구 말고 다른 길을 알아보라"며 내쳤습니다. 153㎝의 자그마한 키에 왜소한 체격, 게다가 축구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허정무에게 축구화를 신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사정사정해서 고등학교 대신 중학교 2학년으로 다시 편입해야 했습니다. 졸업을 하고도 다시 중학교 2학년으로 돌아간 것에 아버지는 노발대발했지만 허정무는 "6개월만 기다려달라. 안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설득하고는 스스로 처절한 지옥훈련에 뛰어듭니다.
주전으로 뛰어야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할 수밖에 없었죠. 운동복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다 한 밤중 몰래 일어나 체력과 축구 기술을 다졌고 한 겨울 우물가에서 나이어린 선배의 빨래까지 도맡아야 했습니다.(※본인이 회고하기를 당시 3개월간의 일화만 묶어도 책 한 권 분량이라고 함).
훈련을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유판순 선생이 "이제 그만 하라"며 자제시킬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이를 악물고 뛰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3개월만에 주전을 꿰찼습니다. 선수가 부족하기도 했고 운도 따랐지만 목숨을 내건 도전이 있었기에 얻을 수 있던 기회였습니다.
◆'빈혈앓던 아이' 구자철
구자철은 '빈혈을 앓던 아이'였습니다. 보인정보산업고 3학년이던 2006년 소변에 철분이 빠져나와 빈혈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었죠. 퇴원하자마자 제14회 백록기전국고교축구대회서 팀을 준우승까지 올려놓았지만 그토록 가고 싶던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서는 '힘이 모자라다'면서 본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런 축구선수로 다른 인생을 찾아봐야했던 그를 눈여겨보던 정해성 당시 제주 감독의 눈에 띄어 K리그에 몸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2월 17일 중국전 후반 17분 염기훈과 교체 투입된 그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30여분을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23일 한일전서 후반 11분 그는 왼발뒷꿈치가 아픈 주장 김남일을 대신해서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아직 앳되지만 만나본 구자철은 당돌할 만큼 자신에 대한 확신이 넘칩니다. 좀처럼 주눅들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발전 가능성을 읽었습니다.
◆냉담한 오카다에게 한방 먹인 정대세
학생과 직장인으로 구성된 조선팀과 일본 JFL(실업리그·3부)에 속해있던 사가와 큐빙과의 '조일(朝日) 친선대회'가 벌어지던 2005년 5월 25일. 조선팀은 이날 3-6으로 패했지만 혼자 3골을 몰아넣던 정대세는 J리그 입단 테스트를 받을 기회를 얻게 됩니다.
정대세 IS포토 |
5부리그의 아마팀이었던 조선대 소속이던 그는 가와사키 프론탈레에 테스트받기 전 요코하마F.마리노스를 찾아갑니다. 당시 요코하마의 지휘봉은 오카다 다케시 현 일본대표팀 감독이 잡고 있었습니다. 오카다 감독은 냉담하게 그를 돌려보냈죠.
2006년 가와사키에 입단한 후 지난해 J리그, 나비스코컵,일왕배 등 30경기서 15골을 몰아넣자 일본에서는 그를 귀화시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북한대표팀으로 8월 마카오 동아시아선수권 예선에 참가해 8골을 뽑아냈고 지난 2월 17일 일본전서 전반 5분만에 선제골을 뽑아냅니다. 2년 전 그를 내치던 오카다 감독은 아마도 씁쓸했겠죠?
◆호나우두 플라티니 베켄바워 등도 '퇴짜 인생'
세계적인 선수들이라해도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 호나우두(※생생한 왼무릎을 되찾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은 진정한 전설입니다)의 어릴 적 선망했던 클럽은 플라멩구였습니다.
플라멩구로부터 입단 테스트를 허용한다는 초청장을 받고 정말 기뻤겠죠. 하지만 플라멩구는 그에게 지급해야 할 교통비가 아까워 그를 테스트하지 않기로 합니다.
기차도 항공기도 아닌 단지 버스 비용 때문에 훗날 축구황제로 등극하는 호나우두를 놓친 셈인데 더욱 황당한 것은 당시 버스 비용이 한국 돈으로 3800원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유벤투스의 판타지스타의 계보이자 프랑스축구의 거두 미셸 플라티니(현 UEFA 회장)는 1972년 고향 근처에 있던 메츠(※2005∼2006시즌 안정환이 활약)에 입단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심장기능 부족과 호흡기관 능력 부실'이란 판정을 받아 퇴짜를 받고 맙니다. AS낭시에 다시 도전해서야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연고지에 인접한 발라베르테 알토에서 태어난 한 소년은 어릴 때부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유소년팀에서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유명 스타들을 영입하기 위한 자금 때문에 유스팀을 해체하고 그를 내쫓았죠. 바로 그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설을 쓰고 있는 라울 곤살레스입니다.
포포투 한국판 3월호를 보니 '거칠다'는 이유로 TSV 뮌헨에서 거절당한 프란츠 베켄바워, 휜 다리 때문에 바스코다가마에서 홀대받았던 가린샤, 입스위치타운의 보비 롭슨 감독으로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았던 폴 개스코인, '키가 작다'고 코벤트리시티가 영입하지 않았던 케빈 키건의 이야기가 써있더군요.
열거한 이들 외에도 많은 축구선수들이 한 번쯤은 퇴짜를 받았을 겁니다. 결국 인생의 진수는 자신의 배설물(퇴짜 경험)을 거름으로 만드는 것이겠죠.
첫댓글 '조재진·해외축구·찌라시' 원창을 맞아 강해진 이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랜만이군.... 원창이형.....
원창이 이젠 스펀지 흉내를 낸다.
원창의 구라를 맞아 찌라시에 강해진 알싸 1인...
원창아저씨안녕하세요 'ㅅ'
김국진 용어로는 빵인듯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ㅍ,,ㅋㅋㅋ 노래 만들었는데 바로 삭제..ㅋㅋ
원창이형도 퇴짜좀 맞자
팬카페도 생길듯?
원창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큰일이다... 원창이 스킬이 점점 늘어나고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