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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8일 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제1독서 : 이사 2,1-5
제2독서 : 로마 10,9-18
복 음 : 마태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복음 선포의 삶
-기도(신비가), 공부(학자), 일(선교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제94차 전교주일입니다.
마침 10.18일자 가톨릭신문 10면은 온통 한국가톨릭학술상 특집 기사 중
본상 수상작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번역한
성염(요한 보스코)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에 관한 기사로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교회문헌을 번역한다는 것은 복음 전파의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번역은 제게는 선교소명과도 같지요.”
선교는 교회의 생명이자 존재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각자 제 고유의 삶의 자리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일이
신자들에게는 본질적인 일임을 깨닫습니다.
책 한권을 번역하는데 수년이 걸리는 교부문헌 등을 비롯해
성염 선생이 선보인 번역서만 무려 100여권입니다.
요즘에도 새벽 4시면 일어나 성무일도를 바친 직후부터
하루 10시간 이상을 번역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합니다.
1942년생이니 만78세의 노령에도 한 결 같이 노력하는 ‘영원한 현역’의 학자이자 선교사입니다.
성염 선생은 2013년 8월 정요한 수사가 선종한 후
수도원에 위로인사차 부부가 방문하여 주일미사 후 대화를 나눈 적이 있고,
마침 제 ‘새벽’이란 시가 좋다하여 적어 드렸던 일이 생각납니다.
-“새벽 숲
온갖 새들 맑은 소리
임의 찬미에 밝아오는 아침
물러나는 어둠
잠깨는 숲
새로 시작되는 하루
새벽을 잃으면
하루 전부를 잃는다”-2001.5.29.
오늘 교황님의 전교주일 담화문중 마음에 와 닿은 내용입니다.
“파스카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상처받은 우리 인간을 치유하고 온 우주에 흘러넘칩니다.
세상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보편 성사인 교회는
역사 안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으며 모든 곳으로 파견됩니다.
선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자유롭고 의식적인 응답입니다.
우리는 당신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을 때만,
이러한 부르심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의 사명 수행에 앞서 예수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가 본질적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날 기후변화로 인한 코로나 19 감염병 등 국내외 상황이 급박하고 심각합니다.
복음 선포의 삶에 필히 함께 고려해야 할 생태적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하여라. 대재앙이 가까이 왔다”
가슴을 친 기사 제목과 더불어 “울부짖는 우리 어머니 지구 앞에서”라는
한국천주교 주교단 특별 사목 교서 제하에 참회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마태28,18-20참조)는
교회의 선교사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지만,
기후위기로 고통 받고 있는 이웃과 피조물들의 고통에는 충분히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힘 있는 이익집단이 주도하는 개발 사업에 희생되는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지 못했으며,
생태계 파괴 현장을 보면서도 피조물을 지키기 위한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생태적 회개를 실천하며 복음을 선포할 것을 다짐합니다.”
요즘의 이런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을까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은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입니다.
직접 선교활동중인 선교사들과 연대하며 각자 삶의 제자리에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다하며 사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정주의 분도 수도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환대를 통한 선교, 바로 우리의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얼마 전 타계한 생태사상가 김종철 선생의 글 중
마지막 결론이 큰 울림으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옆에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절망스럽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우리가 옆에 있는 사람하고 잘 지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상상황일수록 우리가 사람을 더 아끼고, 물자를 더 아끼고,
더 아끼는 마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게 천하의 진리인 것 같아요.”
바로 복음 선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금주 ‘시사IN’ 잡지의 표지 제목, ‘젊은 노인의 시대’와 내용 중
“노년은 회색이 아니라 무지개 색깔이더군요.”라는 제목도
오늘날의 위기상황에서 나이와 관계없이 모든 신자들은 온몸의 감각을 동원하여
‘영원한 현역’의 선교사로 깨어 살아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신비가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사야 예언자처럼 하늘나라의, 영원한 평화의 비전을, 꿈을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집이 서있는 산에 밀려오는 모든 민족의 백성들의 고백을 통해
실현될 비전을 내다보는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자, 주님의 집에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런 하늘 나라의 비전을 지니고 살았던 이사야 예언자요,
바로 우리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실현되는 꿈이면서도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영원한 꿈의 하늘나라입니다.
바로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도하는 신비가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선포의 삶에 첫째 요소입니다.
둘째, 공부하는 학자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부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배워야 하는 공부요 우리는 영원한 학인이자 학자입니다.
공부는 우리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참으로 배워야할 공부중의 공부가 평생 공부인 하느님 공부입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함께 배우며 공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고 너를 알아가는 공부가
바로 말씀공부요 이에 필히 전제되는바 겸손입니다.
평화의 공부도 중요합니다.
이사야의 평화의 비전을 오늘 지금 여기에서부터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면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의 집안아, 빛속에 걸어가자!”
참으로 우리 인류의 영원한 평화의 꿈을 우리 공동체로부터 실현해가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공부보다 더 좋은 공부, 필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가
하늘 나라 영원한 꿈을 새롭게 하고 평화의 꿈을 실현시켜 줍니다.
하느님과의 평화, 피조물 형제들과의 조화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물론 주님은 최고의 배경이자 조력자가 되십니다.
셋째, 전문적 선교사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잊고 지내는 선교사로서의 신원의식입니다.
정주의 삶을 살다보면 안주의 폐쇠적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웃의 세상에 활짝 열린 개방의 자세로 살아가는 선교사의 삶입니다.
참으로 선교는 우리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바로 선교의 모범이 하느님의 선교사인 예수님이요,
그리스도 예수님의 선교사인 바오로 사도요,
작금의 가톨릭교회의 선교사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이분들의 본업이 바로 선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어야 받들어 부를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선포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고, 파견되어야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전문적 선교사가 되어
삶의 자리에서 늘 새롭게 파견된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바로 아름다운 전문적 선교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 삶 자체가
복음이, 하늘나라가 될 때 최고의 전문적 선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복음 선포의 삶에 본질적 요소인
기도하는 신비가, 공부하는 학자, 전문적 선교사로 살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수행자와 선교사로서 세상에 활짝 열린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신원입니다.
한국에 54년 동안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성골룸반외방선교회 안광훈 신부의 충고에도 공감합니다.
“교회만을 위한 선교는 진정한 선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구원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말로만 전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몸으로 실천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한 수행자와 선교사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겠다.”(마태28,20ㄴ).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텔레비전 광고로도 자주 나오는 것을 보니, 결혼정보회사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이 회사는 결혼 정보를 통해 자신의 상황에 맞는 인연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결혼정보회사 안에는 등급표가 있다고 하더군요.
사람을 등급으로 매긴다는 것이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비슷한 조건의 만남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등급이 매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분명히 세상이 바라보는 기준입니다.
남들의 기준에 맞추는 삶,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삶을 살아야
결혼도 가능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저는 가톨릭 신부로 살기에 이 세상에서 말하는 결혼을 하지 않고 삽니다.
그만큼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에 사는 저입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 살고 있어서인지 저 역시 일정 부분 세상의 기준을 따르게 됩니다.
세상 기준에 맞추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저만의 고유함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의 기준에 맞춰서 사는 삶은 이제까지 충분히 살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주관적으로 나만의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요?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나만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당신 뜻에 벗어나지 않는 길이면 분명히 응원해주시고 지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모두 다른 모습을 창조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을 제자들 손에 맡기시고는,
온 세상으로 나가라고 지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굴욕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뒤 부활하심으로써
당신께 합당한 영광을 되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현재의 어려움만 보지 않고,
머지않아 와서 영원히 계속될 좋은 것들도 바라보도록 만드시고자,
그들에게 세상 끝 날에 대해 다시 일러 주셨습니다.
이는 곧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을 따르는 ‘나만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과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마음으로 믿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9.10)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만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힘차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고백성사와 선교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이며, 전교 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대해서는 몇 말씀 드리고 고백성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전교 주일의 의미는 우리의 사명인 선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특별히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되기를 원하며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듣고 사랑의 길을 걷도록 기도합시다.
제 1 독서인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주님의 빛 속을 걸어가자!”고 합니다.
제 2 독서인 로마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세상 끝 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약속을 믿으며 우리 고백성사의 유형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1, 나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누구누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 물귀신 작전 형.
2, 고해 신부가 묻는 질문에 못 들은 척 하면서 엉뚱한 말만을 늘어놓는 - 동문서답 형.
3, 교묘하게 목소리를 바꾸어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고해하는 목소리 - 변조 형.
4, 자신의 잘 못은 고백하지 않고 세상사만 탓하는 - 조상 탓 형.
5, 자신의 죄는 하나도 고백하지 않고 모두 다른 사람의 죄만 고백하는 - 대변 형.
6, 장황한 세상사와 자신의 죄를 적당히 얼 버무려 고백하는 - 비빔밥 형.
7, 고해신부가 헛갈리게 빙빙 돌려 고해하는 - 우회 작전 형.
8, 무엇인가 고해를 하는데 전혀 알아들을 수 없게 말하는 - 안개자국 형.
9, 감탄할 정도로 자신의 죄의 횟수까지 정확하게 고해하는 - 산수 형.
10, 고해신부가 해야 할 훈계 내용까지 다 말하는 - 고해사제 형.
11, 자신의 고해 내용을 사제가 이해했는지 확인하는 - 확인 사살 형.
12, 겸손하게 사는 게 모두 죄라고 달랑 한마디만하는 - 세상초월 형.
13, 보속이 너무 많다고 줄여 달리고 우기는 - 흥정 형.
14, 고백할 게 없지만, 판공 때라 왔다고 말 하는 - 정기방문 형
15, 성탄 판공 때만 와서 1년치 고백을 하는 - 연말 정산형.
여러분들은 모두 이 유형들에 속하지 않는다고요?
대신 며느리의 죄를 상세하게 모두 일러바치는 미주왈 고주왈 형 이라고요? 하 하 하
이거 재미있지요.
교부들은 고해성사를
“배가 난파된 다음에 만나는 두 번째 구조의 뗏목”이라고 말했답니다.
첫 번째 구조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세례성사이지요.
물로 씻는 세례성사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씻어지고
우리는 죄의 홍수에서 구조를 받았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가장 훌륭한 선물이며 은총이다.
기름 바름은 ‘재생의 목욕’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우리도 왕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 표징으로 우리의 이마에 인호를 새겨 주셨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세례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세례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에 의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에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하여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런데 약한 우리 인간은 다시 죄에 빠지게 되지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죄를 사하시는 권한을 주십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후 죄에 떨어지는 신자들이
하느님과 다시 화해하고 은총을 회복할 수 있도록
고해성사를 당신 교회 안에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으로 고백성사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했지요.
“교회는 물과 눈물을 가지고 있으니, 세례의 물과 참회의 눈물이 그것이다”
고백성사는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여 용서받는 일로
성찰(省察), 통회(痛悔), 정개(定改), 고백(告白), 보속(補贖) 등의 다섯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어려운 말을 풀어 주는 것이 신부가 할 일입니다.
첫째, 성찰은 깊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자기가 지은 죄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죄를 짓게 된 연유와 상황과 그 죄가 미친 영향 등을 생각해 보고
그 죄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둘째, 다음 통회에서는,
하느님 앞에 죄를 지은 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자기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셋째, 정개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정개에서 굳은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다시 죄는 반복될 수밖에 없겠지요.
넷째, 고백은
말 그대로 고백성사를 주는 사제 앞에서 성찰하고 통회한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백은 솔직 담백해야 하고, 특히 양심에 걸리는 대죄는 빠뜨리지 말고 모두 고백해야 합니다.
다섯째, 보속이란
사제가 고백하는 사람에게 지은 죄를 보상하는 마음으로
기도, 사랑의 실천, 생활의 개선 등을 하도록 주는 실천 사항을 말합니다.
다섯 가지 단계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다섯 개의 단추가 달려 있는 옷을 입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오지요.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성찰이 가장 중요합니다.
깊이 성찰하면 통회는 자연스럽게 따라오지요.
진정으로 통회를 하면 다시 죄짓지 않겠다고 마음으로부터 결심하게 되고요.
그 결심을 구체적으로 살기 위해서 고백을 하게 되고, 보속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의무에서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성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깊이 성찰한 후에 성사를 보신 분들은 모두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느껴 보셨을 것입니다.
성사 안에 특별한 은총이 있고, 진정으로 기쁨과 내적인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성사가 정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롭게 살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섯 단계보다도 정말 중요한 것을 강조했습니다.
성사 후에 우리 마음을 감사로 채우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사 후에 우리 마음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다시 자기만 아니라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와서 자리를 잡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이지요.
악이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늘 감사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앞에 우리 마음을 열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이해해 주는 분이십니다.
다른 누구도 우리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성사 전에 우리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시간을 들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성사 자주 보세요. 성사를 잘 보면 전교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말씀 묵상
‘제자로 삼아라’
김혜윤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 제1독서 (이사 2,1-5) 제2독서 (로마 10,9-18) 복음 (마태 28,16-20)
교리 전파와 윤리 제시 자체만으로는 선교의 목적 이룰 수 없어
어떤 차별이나 예외도 없이 모든 민족들에게 은총 주어져야
복음 선포와 파견은 주님과 긴밀한 관계로 이뤄지는 신비
진정으로 감동해 믿고 기쁜 마음으로 증거 하는 것이 전교 핵심
너무 오래전에 본 영화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은데 가끔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동급생 청소년들의 이야기였는데
여자아이는 공부를 잘하고 남자아이는 공부를 못했습니다.
둘 사이에 느닷없이 짝사랑이 시작되었고,
여자아이는 공부를 못하는 남자아이의 성적을 걱정하며
자기의 참고서와 똑같은 것을 선물로 사 주었습니다.
남자아이는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책을, 선물로 준 여주인공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며
조금씩 읽어가며 이해하려 합니다.
마지막이 해피엔딩이었는지... 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결말이 기억 안 날 수가 있지...? 하면서도,
아 공부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 라는 깨달음이 워낙 커서
다른 건(결말조차도) 기억이 안 나는가보다... 그렇게 받아들이며
심각한 저의 건망증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하느님을 억지로 주입시키고 교리 조목들을
강제로 외우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교가 아닙니다.
곁에서 지켜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도 크고 감동적인 사랑이어서
이 기쁜 소식을 자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전교입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 복음서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마무리되는 구조로 되어있는데,
오늘 복음은 그 대미(大尾)로서 다시 갈릴래아에서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곳이고 가르침의 대부분을 설파하신 곳이며
이제 당신의 지상생활을 마무리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심으로써
당신의 일이 이제 제자들을 통해 이어질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 제자가 되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날 장소로 갈릴래아를 언급하십니다.(마태 28,10)
그래서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돌아가 예수님을 만나는데(16절)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17절)합니다.
유다인들에게 ‘경배하다’라는 행위는 상대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경외 때문에 그 앞에서 정말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경배 행위 중에도 제자들 “더러는 의심하였다”(28,17)고 합니다.
‘의심하다’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동사는
‘디스타조’로서 ‘마음이 갈라진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게중심을 잃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 단어는 베드로가 물위를 걷고 있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에 빠졌을 때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열한명의 제자들 중 “더러는 의심하였다.”는 표현은
제자들의 불완전함과 결함에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주목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해 흔들리고 망설이는 제자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시고 그대로 놓아두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제자들의 도덕적 소양이나 교양, 신앙의 깊이와 상관없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고상한 수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힘과 그분의 사랑, 구원의지로 완성되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의 결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당신의 현존과 구원의 여정을 교회를 통해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사명은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형을 중심에 두고
‘가다’, ‘세례를 주다’, ‘지키도록 가르치다’라는 내용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모두 분사형태로 등장함으로써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부연(敷衍)합니다.
즉 가서, 세례를 주고, 지키도록 가르치는 행위는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에 따른 부차적 행위인 것입니다.
교회는 교리를 가르치고 윤리적인 행동강령들을 제시하며
인류의 공동선을 이룩하는 위대한 과업들을 수행해 오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 선교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진정한 목적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리를 배우는 것보다 더 주목해야할 사안은
우리가 과연 그분의 제자들인가에 대한 정직한 성찰인 것입니다.
제자로 삼을 대상은 “모든 민족들”입니다.
제자의 특권은 그 어떤 차별이나 예외 없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은총이며,
이는 보편교회인 가톨릭교회의 보편주의를 명확히 표명합니다.
■ 보편적 구원과 그 방법
이러한 보편주의적 관점은
오늘 본문들 안에 유난히 자주 반복(복음과 제1독서, 제2독서, 화답송에까지도)되어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먼저 선행되어야할 조건으로,
우선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누군가가 ‘선포해야’ 하며,
선포하려면 ‘파견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로마 10,14-15)
그러면서 이 파견이 얼마나 역동적 행위인지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15절)라는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복음의 선포와 이를 위한 파견은
단순한 강요나 정치적 정복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특별하고도 긴밀한 관계성으로 이루어지는 신비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그들을 성당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들이 지옥에 갈 불쌍한 인간들이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리고 소개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에서 발생하는
능동적이며 아름다운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교’(傳敎)라는 말의 자구적 의미,
‘가르침을 전하다’에 너무 매일 필요는 없겠습니다.
강요하고 개종을 요구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입하는 것이 전교가 아니라,
우리가 감동하여 믿고 매료된 그 사랑의 관계를 살고
기쁜 마음으로 증거 하는 것이 전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의 혼란으로 너무도 낯선 절망이 전 세계를 휘감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더욱 명료한 의식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모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기위해 존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충만히 살도록 초대되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시니,
이제 우리는 그 경이로운 사랑과 구원의 현실을 믿고 충만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에 말해주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자, 주님의 빛 안에서 걸어가자!”(이사 2,5)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신학생 때입니다. 제의실에는 책들이 있었습니다.
수녀님께서 복사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동화책이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큰 나무는 소년에게 그늘이 되어 주었습니다. 소년은 나무 그늘에서 책도 읽었습니다.
청년이 된 소년은 배가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소년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내 주었습니다.
청년은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노인이 된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릴 때 그늘이 되어 주었던 나무는 이제 노인을 위한 쉼터가 되어 주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소년에게 그늘이 되어 주었고, 청년에게는 배가 되어주었고,
노인에게는 쉼터가 되어 주면서 모든 것을 내어 준다는 내용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셨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 연탄장사, 쌀장사, 밥장사를 하셨습니다.
강철 같은 줄 알았던 어머니는 체력이 다하셔서 많이 아프셨습니다.
일을 하지 못하실 때는 자식들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신앙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께서 바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도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썼던 쉘 스타인벡의 작품입니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잘 구를 수 없었습니다.
빠진 이를 찾기 위해서 길을 떠납니다.
꽃을 만나고, 풍뎅이를 만나고, 구름을 만나고, 소나기를 만나면서 잃어버린 짝을 찾았습니다.
어떤 것은 너무 커서 맞지 않았고, 어떤 것은 너무 작아서 소용이 없었습니다. 드
디어 짝을 찾았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맞는 짝이었습니다.
완벽해진 동그라미는 거침없이 구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르기만 할 뿐 꽃도, 풍뎅이도, 구름도, 소나기도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같이 구르는 짝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조금 불편하지만, 조금 늦게 구르지만 편안했습니다.
꽃도 보고, 하늘도 보고, 바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복은 부족한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의실에서 복사들이 읽는 동화이지만 어른에게도 감동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신학과 철학의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신학적인 깊이와 철학적인 통찰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미주 지역에서 교회의 소식을 알리고, 복음의 기쁨을 전했던 ‘가톨릭 신문’이 폐간 되었습니다.
이제 미주 지역에는 ‘가톨릭 평화신문’만 남았습니다.
같이 있을 때는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정보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북미주 사제회의에도 함께 참석했습니다.
의지할 수 있었고, 도움이 되었던 ‘가톨릭 신문’의 폐간 소식을 들으면서 안타까웠습니다.
코로나19로 팬데믹 상황이 오래가면서 경영의 어려움이 생겼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문을 사랑하시고 구독해 오셨던 독자들에게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가톨릭 평화신문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구독자의 감소입니다.
코로나19가 장기화 되면서 홍보를 갈 수 없는 것도 어려움입니다.
북미주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교회의 소식지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일하려고 합니다.
기존에 가톨릭 신문을 구독하셨던 분들은 가톨릭 평화신문을 구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북미주에 계신 본당 신부님들께서 유일하게 남게 된
가톨릭 평화신문을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북미주 신앙공동체를 위한 ‘매일미사’에 가톨릭 평화신문에 대한 홍보를 하려고 합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본당으로 홍보를 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도 우리가 가진 신앙을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전교를 열심히 하시고, 잘 하시는 분들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많이 배웠거나, 시간이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장에서 힘들게 장사를 하시는 분도 있고, 대학 공부를 못 하신 분도 있고,
가정일도 하고, 직장 일하기 때문에 바쁘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들이 전교를 많이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전교 방법을 따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전교했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몸으로 뛰셨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만나셨고,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만나셨고,
부유한 자와 가난한자를 가리지 않고 만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한자 병든 자, 외로운 자를 더욱 많이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셨고, 힘을 주셨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전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기도 하셨고, 언제나 섬기는 자가 되라 하셨고,
자신의 십자가를 먼저 지라 하셨고, 착한 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알아듣고,
양들을 푸른 시냇가로 인도하고, 비가 오면 양들을 안전한 우리로 인도하며,
사나운 짐승이 나타나면 지팡이를 들고 지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혼자 하시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제자들을 신뢰하셨고,
제자들에게 힘을 주셨고, 제자들과 더불어 전교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비록 겨자씨와 같이 작은데서 시작하지만
엄청난 결실을 맺으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분이셨지만
기다려 주셨고, 인내해주셨고, 함께 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피눈물이 나도록 기도하셨고,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누워 잠을 자고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기도는 바로 전교의 힘이며, 기도는 바로 전교의 발판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항상 당당하셨습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으셨지만, 비록 내일 어찌될지 기약은 없으셨지만
늘 당당하셨고, 자신감이 있으셨습니다.
당당한 예수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셨고, 권력에 무릎을 꿇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 불의와 권력을 야단치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지치고, 힘든 자 앞에서는 늘 자비를 베푸셨고, 늘 그들에게는 약하셨습니다.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행복은 좋아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짧은 글인데 제게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자선을 베푸는 것, 사랑을 나누는 것,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좋아하는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일을 좋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복은 시작될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마태 28, 1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울려야 아름다운
자연의 생생한 모습이다.
복음화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나눔이다.
사랑은 이와 같이
나눔의 힘으로 드러난다.
서로를 아름답게 변화시킨다.
나눔이라는 복음화는
서로를 살린다.
나눌 때
생명은 더욱 아름답다.
나눔은
복음화의 본질이다.
나눔은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있다.
서로를
환하게 비추어준다.
참되게 사는 것이
복음화의 모습이다.
복음화는
신앙인의 참된 실천이다.
나눔과 사랑이
서로를 위한 구원이 된다.
복음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복음이다.
복음화는 삶의 의미이다.
삶의 의미를 가르쳐준다.
무의미한 삶이
기쁜 삶으로 바뀌게 된다.
복음화는 나눔으로
함께하는 기쁨이다.
우리를
살아나게 하는 복음화이다.
복음화 되어가는
만남이길 기도한다.
이렇듯
올바른 실천이 있는 곳에
복음이 있고
복음이 있는 곳에
서로를 살리는
가장 아름다운 복음화가 있다.
복음과 복음화 사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삶이 있다.
복음화는
삶으로 전교한다.
전교는 삶을
외면하지 않는다.
복음을 나누는
삶의 기쁜 주일이다.
복음화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상호존중에서
시작되는 참기쁨이다.
삶을 위한 복음화이며
사랑을 위한 복음화이다.
동행과 선교는 동의어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선교 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합니다.
기쁜 소식을 지니고 있으니 그 사람은 기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보좌로 있을 때 저는 본당 신자 할머니에게 선교를 받았었습니다.
본당 보좌 신부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성당에 다니라고 선교하시던
그분의 발은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예전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선교가 몸에 배어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해야 할 소명 하나만 말하라면 그것은 선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복음 선포의 소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며 앞에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선포를 위해 파견하시는 제자들 앞에서 왜 당신의 권한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복음선포를 인간의 힘으로 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교의 힘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선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제에게까지 선교하려고 하셨던 그분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동행하기를 허락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저절로 우리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게 하십니다.
얼마 전에 카이스트에 766억 원을 기부한 ‘이수영 회장’(83)이 화재였습니다.
이 회장은 처음에 기자로 활동하였었습니다.
1976년도에 그녀는 이탈리아로 관민 합동 경제사절단 수행 기자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카메라는 아사히 펜탁스였고,
그때 자기 옆으로 일본 관광객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옷을 여며 카메라를 감추었습니다.
한국인이 일본 카메라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 창피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한이 되어 한국 최초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게 해 달라고
카이스트에 재산을 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기부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부하게 된 사연이 재미있습니다.
이 회장은 기부한다고 하고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돈을 가지고 있는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됩니다.
같은 서울대 법대 출신 첫사랑과 81세에 한 가정을 꾸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며 이 회장은 암을 앓게 되었습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때에 신랑이 말을 했습니다.
“아니 왜 유증을 한다고 그러고서는 안 해?”
이 말에 더는 머뭇거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이 회장은
TV에서 카이스트 총장이 연설하는 것을 듣고 바로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기부는 이 회장이 한 것이고 이 회장의 돈으로 한 것이지만
그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준 것은 신랑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신랑이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을 반대했다면
그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우리 옆에서 선교하도록 우리를 부추기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선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선교하고 있다면 분명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시는 것이고,
선교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신 사랑의 법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은
밥을 굶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보다 훨씬 큰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밥을 주어야 영원한 생명도 관심을 두게 합니다.
예수님과의 동행, 이것이 곧 선교입니다.
‘유퀴즈온더블럭’에 현대 사장보다 연봉이 높은 판매 영업부장이 소개되었습니다.
그의 연봉은 10억 2천 7백만 원입니다. 게다가 판매 실적에 따라 성과보수도 받습니다.
그는 17년 연속 우리나라 자동차의 판매왕을 차지하였습니다.
미국의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가 평생 13,001대를 팔았는데, 이분은 12,705대를 팔았습니다.
아직 50대 중반이 안 되었으니 이 기록은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특별한 판매 전략이 있느냐고 물으니 특별한 게 없다고 대답합니다.
누구나 다 쓰는 노트 정도입니다.
그런데 제가 본 것은 이분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렇게 충실하게 약속을 지키니
그 얼굴에 신뢰심이 발산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언변이나 상술보다
그 얼굴에서 풍기는 것 때문에 더 신뢰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일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 신뢰가 얼굴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뢰가 가는 삶이 모습에서 신뢰가 배어 나오게 만들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를 믿고 차를 사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났다면
그렇게 일어나도록 옆에서 부추기던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신이든,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할 때만
자신을 이기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선교도 이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죄의 삶을 살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 삶을 살다 보면 외모에서 신뢰가 풍기게 될 것이고
그러면 굳이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보며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내가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그 모습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선교는 이렇게 멀리 나가기보다는
자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합니다.
이에 ‘동행’과 ‘선교’는 결국 같은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