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참판 고유(高裕)와 정부인(貞夫人) 박씨

[김철인]

이조 참판 고유(高裕)와 정부인(貞夫人) 박씨

아직 나이가 10대 후반인 청년이 허름한 옷차림으로 경상도
밀양 땅에 왔습니다. 이름은 고유,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
명의 현손이 었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떠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이곳에서 남의 집 머슴을 살게 되었습니다
비록 궂은일은 도맡아 하고 있지만 사람됨이 신실(信實)하였습니다.

언변에 신중하고 인격이 고매하며, 허우대까지 훤칠한 귀공
자여서 사람들은 그 머슴을 존대하는 말로 "고도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마을에는 박 초시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세는 가난했습니다. 중년에 상처를 했지만 초시에겐 
효성이 지극한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딸은 성품이 현숙하고 효성이 지극해서 사방 십리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청년은 먼발치에서 그 처녀를 보고 연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내 처지가 이러한데 그 처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벌써 매파가 여럿 다녀갔다니 내심 불안했습니다.

노을이 곱게 물든 어느 날 청년은 박 초시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초시는 내기 장기를 좋아해서 우선 장기판부터 벌려 놓았습니다.

"초시어른, 장기는 내기를 해야 집중할 수 있지요.
그게 장기 두는 재미 아닙니까?"
자네가 웬 말인가?
듣던 중 반갑구먼.
그래 무엇을 걸겠나?"
이웃들과 자주 하는 막걸리나 파전 내기 이겠지.

이왕에 할 바에는 좀 색다른 내기를 합시다.
이러면 어떨까요? 제가 지거든 초시 댁 머슴살이를 삼년,
초시님이 지면 내가 초시님 사위가 되고요.

에끼 이 사람아! 내 금쪽같은 딸을 머슴에게 줄성싶은가?
자네 따위에게 주려고 스무 해를 키웠단 말인가?"
청년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무안만 당하고 돌아갔습니다.

부엌에서 듣고 있던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무엇 때문에 고도령을 나무라셨습니까?"
그 놈이 글쎄 날더러 자기를 사위 삼으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내가 혼내주었지!

아버님, 그이가 어때서요.
지금은 비록 하인이지만 본래는 뼈대 있는집 손이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성품이 듬직하고 성실하다면서요."
이 말을 엿들은 옆집 아낙이 빨래터에 모여 동내 방내
소문을 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믿음직한 청년의 편을 들었습니다.
초시에게굴러온 복이라며,
마치 자신들 일인 양 혼인을 서두르라고 재촉하였습니다.

당시엔 보쌈도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내색은 안 했으나 박 초시도 그 청년을 욕심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물 한 사발 떠놓고 혼례를 치렀습니다.
화촉동방 밤은 깊어지고 고유와 신부는 촛불 아래서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서방님! 글을 아시나요?
부끄럽습니다. 아직 배우지 못했소이다!
글을 모르시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갑니까? 대장부가 글을
알지 못하면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도 공명을 얻을 방도가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앞으로 십년 작정을 하고 서로 떨어져서,
당신은글을 배워 과거에 오르고 첩은 길쌈을 하여 세간을 모으도록 하지요!
우리들은 약관이니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닙니다.

우리 부부가 헤어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훗날을 위하여 참기로 해요!.

청년은 동이 트자 아내가 싸준 베(布) 
다섯 필을 짊어지고 대처로 떠났습니다.
시장에서 베를 팔아 돈으로 바꾸고 스승을 찾아보았습니다.

마침내 좋은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고유는 어린 학동들과 함께
천자문(千字文)에서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오년이 지났습니다. 고유의 글은 대성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스승도 탄복했습니다. 네 뜻이 바위처럼 굳더니 학문
이 일취월장(日就月長)하는구나! 글은 그만 하면 족하다.
이제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올라가 과거를 보도록 하라!
고유는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글을 더 익혔습니다.

 드디어 숙종대왕의 정시(庭試)영이 내렸습니다.
고유는 처음 치루는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곧장 가주서(假注書)로 시립(侍立)하여 왕을 모시게되었습니다.

어느 날! 
숙종은 고유의 상소문을 보고 그 글이 마음에 든다며,
왕대밭에 조릿대가 나오지 않는 법, 경의 집안 내 력을 소상하게 아뢰어라!

신은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의 현손(孫)이옵니다
."허~! 충신 제봉이 손자 하나 잘 두었군. 
고향에 부모님은 강령하시냐?"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그럼 처자가 있겠구나." 
예, 있습니다.

숙종은 고유의 과거 행적이 궁금했습니다. 떠돌아다니다가
밀양 어느 마을에서 머슴을 살게 된 것과 거기서 내기 장기
를 두고 장가 든 이야기며, 첫날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려
고 집을 떠나 스승을 찾아 공부한 내력을 소상하게 아뢰었습니다.

허허~! 그러면 약속한 십년이 다 되었다고 했느냐?
아내도 네 형편을 잘 알겠구나! 모를 줄 믿사옵니다.
과거에 오른 지가 며칠이 안 되어 아직 기별을 못 했습니다.

"음 그래?"
이조판서에게, 왕은 현 밀양부사를 다른 고을로 옮기고
고유를 밀양부사를 임명하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 "이제 너를 밀양으로 보내니. 전에 살던 마을에 가서
과객 행세를 하고, 아내의 마음을 떠 보아라.

과연 수절하며 너를 기다리고 있는지, 변심했는지
그 뒷이야기가 나도 궁금하구나!
마침 소를 몰고 가는 노인을 만나서 초시 댁 형편을 물었습니다.
박 초시 어른이요? 
그러니까, 3년 전에 죽었지요.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습지요. 
벌써 오래된 일입니다.

마을 머슴에게 시집을 갔는데 웬일인지 첫날밤에 신랑이
자취를 감추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조화인지?
초야에 유복자(遺腹子)가 생겼지요. 참 똑똑한 아이입니다.

그 여자도 어찌나 부지런한지~~
남편이 없는데도 크게 가산을 일으켜 일대의 전답은 모두 사들였습니다.
동내가 그 집 낭속(廊屬)입니다. 정말 현숙한 부인이지요.

고유는 데리고 온 군졸들에게 
주막에서 대기하도록 하였습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제일 큰 집을 찾아 대문을 열고들어갔습니다.
불쌍한 인생이 한 그릇 밥 비러 먹으려고 왔습니다.

사랑방에서 글을 읽고 있던 소년이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손님" 고유는 그가 아들인줄 알면서도
짐짓, 아니 처마 밑이라도 좋네!

"올라오세요. 우리 집에서는
과객을 절대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굳이 올라오라하니 못이기는 척하며 들어갔습니다.

"저 그런데 손님의 성씨를 물어도 되나요?
“ 허! 비렁뱅이에게 무슨 성이 있나? 남들이 고가라고 합디다.
그러자 소년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럼 손님 처가의 성씨는요?
오래 전에 장가들고 첫날밤에 헤어졌으니, 무슨 처가랄 게? 

박 초시 댁이었다네.
안방에서 부인이 댓돌로 나와
그 아이에게 큰 절을 시켰습니다. 
부인은 비록 오래 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고유를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고유는 아들을 쓰다듬으며,
부인에게 힘없는 소리로 그간에 
있었던 일을 꾸며대 말했습니다.

집을 떠나서 뜻을 이루려 하였으나,
운수가 사나워 노자는 야바위꾼에게 빼앗기고,
이리저리 유랑 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글을 배울 염두도 못했습니다.

혹 서당이 있다 한들 돈이 없으니 허사였습니다.
그래 세월만 허비하고 글은 한 자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렁뱅이가 되었지요.

그러나 부인은 고유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궁달(窮達)은 하늘에 달려있습니다,
낭군이 없는 사이에 수 천석을 장만해 놓았으니
무슨 걱정이있겠습니까.

남편의 겉옷은 거지 옷차림이지만
안에 비친 속옷은 비단이었습니다.
허리춤에는 관리들이 차는 호패가 흔들거렸습니다.

부인이 서방님! 사실대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고유는 품에서 호적(胡笛)을 꺼내 불었습니다.
기다리던 관속들이 사랑채 안으로 들어와 도열하였습니다.

고유는 얼마 안 있어 벼슬이 경상감사에 올랐다가
이조참판에 이르렀습니다.
숙종 영조 정조대왕등 3대를 모셨습니다.

부인도 나라에서 지정하는 정부인(貞夫人)이 되어 늦도록 
복록을 누렸다고 합니다.
여자 일생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 것입니다.

[옳긴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