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 혜능의 돈법!
누가.
도난당한. 혜능의 두개골을 가져 오겟는가!
<단경>에는 북종 신수가 파견한 지성(志誠)과 혜능의 대화가 나온다.
여기에서 혜능은 북종과는 다른 남종의
돈교법문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육조(六祖)가 북종(北宗) 신수(神秀)의 제자인 지성(志誠)에게 물었다.
“너의 스승은 어떻게 대중에게 법을 보여주느냐?”
지성이 말했다.
“늘 대중에게 가르치시길, ‘마음을 쉬어 깨끗함을 보고,
[주심관정(住心觀淨)] 오래 앉아서 눕지 말라.’[장좌불와(長坐不臥)]라고 하십니다.”
육조가 말했다.
“마음을 쉬어 깨끗함을 보는 것은 병(病)이지 선(禪)이 아니다.
늘 앉아서 몸을 구속하면 도리(道理)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나의 게송을 들어라.”
“살아 있을 때에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를 못하네.
더러운 냄새나는 육신을 한결같이 붙잡고서
어떻게 공부가 되겠는가?”
다시 육조는 신수대사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고 물었다.
지성(志誠)이 말했다.
“신수대사께서는 모든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계(戒)라 하시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慧)라 하시고,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정(定)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말씀은 이와 같습니다만,
스님께서는 어떠한 법을 가지고 사람을 깨우쳐주십니까?”
육조가 말했다.
“내가 만약에 사람에게 줄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를 속이는 것이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얽매인 것을 알맞게 풀어주는 것을 거짓 이름하여 삼매(三昧)라고 한다.
너의 스승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계․정․혜는 진실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보는 바의 계․정․혜는 그와는 다르다.”지성이 말했다.
“계·정·혜는 다만 한 종류가 있을 뿐인데,
어떻게 또 다른 종류가 있겠습니까?”
육조가 말했다.
“너의 스승이 말하는 계․정․혜는 대승(大乘)의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이고,
내가 말하는 계․정․혜는 최상승(最上乘)의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깨달음이 같지 않고,
자성을 보는 것에도 빠르고 늦음이 있다.
너는 내 말을 들어라. 같고 다름을 말해주겠다.
내가 말하는 법은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본바탕에서 벗어나 법을 말하는 것을 일러 모습을 말한다고 하니,
자성에는 늘 어둡다. 모름지기 온갖 법들이 전부 자성에서 일어나 활동함을 아는 것이 바로 참된 계․정․혜의 법이다.”다시 지성에게 말했다.
“네 스승이 말하는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지혜를 자진 사람에게 권할 만한 것이고,
내가 말하는 계․정․혜는 큰 근기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만약 자성을
깨닫는다면,
보리열반(菩提涅槃)도 세우지 않고 해탈지견(解脫知見)도 세우지 않는다.
얻을 만한 하나의 법도 없어야,
바야흐로 만법을 건립할 수 있다. 만약 이 뜻을 이해한다면,
불신(佛身)이라고도 말하고, 보리열반이라고도 말하고, 해탈지견이라고도 말한다.
견성한 사람은 세울 수도 있고 세우지 않을 수도 있으니,
가고 옴에 자유로와 머묾이 없고 장애가 없다.
인연에 응하여 행동하고, 말에 따라서
답을 하며,
온갖 조화를 두루 보면서도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자재신통유희삼매(自在神通遊戱三昧)를 얻은 것이니,
이름하여
견성(見性)이라 한다.
”지성이 거듭 육조에게 여쭈었다.
“어떤 것이 뜻을 세우지 않는 것입니까?”
육조가 말했다.
“자성에는 잘못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다.
순간순간 반야로써 비추어보아 늘 법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세울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을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니
[돈오돈수(頓悟頓修)], 점차(漸次)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적멸(寂滅)한데 어찌 점차 닦을 일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