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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은 2024. 1. 7. 일요일.
무척이나 추워서 바깥에 외출하지 못한 채 아파트 안에서 머문다.
방금 전 핸드폰에 문자가 떴다.
"내일 아침 기온 영하 10도 내외로 춥겠으니 야외활동시 목, 목도리 등 방한용품 착용, 수도계량기는 헌 옷 등으로 감싸 동파를 방지하세요."
내 경험으로는 년간 가장 추울 때는 1월 초순.
내 경험이 맞다는 듯이 내일 서울의 아침 온도는 최저 영하 10도라니...
추위가 걱정이 된다.
그 많은 종교 신한테 그 누구라도 한번 부탁했으면 싶다.
'날씨 따뜻하게 해 주셔요.'
아무도 간청하지 않았나?
방안에 있는데도 장단지, 발목이 후들거린다.
창밖은 얼마나 더 추울까?
인간은 무엇이라도 옷 더 껴입고, 불 피워서 방안에서도 따뜻하게 버틴다지만 바깥 야외의 동물, 식물들은 벌거벗은 채 이 추위를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그간 아파트 실내 베란다에 있는 화분 140개 가운데 식물들이 제법 많이 얼어죽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거실로 옮길 수도 없다.
화분 속의 벌레, 병균이 거실에 번질까 싶어서....
그 많은 종교의 신들아.
너희들도 추운 겨울을 즐기냐?
얼음과자 깨뜨려 먹고, 눈썰매를 타려고?
세계 80억 명 사람이 사는 지구에 대해서는 신인 너희들은 아무런 조치도 못하냐?
부탁하기 전에 날씨를 따뜻하게 선조치하면 안 되겠냐?
제발 좀 어떻게라도 해 봐라.
2.
<한국국보문학카페>에 올렸던 내 글 일부를 퍼서 여기에 다시 올린다.
더 다듬어야 하기에....
'삶의 이야기방' 제 3648번 '이겨서는 안 되는 사람들'
2021. 2. 16 수록되었음.
(원 제목) 그게 아니었는데....
(수정) 이겨서는 안 되는 사람들
거실에 나가니 TV에서는 흘러간 옛 영화 '성모 마리아'가 재방영되고 있었다. 서양 여자가 '주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기도 드리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소파 위에서 무엇인가를 골몰히 하는 아내가 보였다. 아무런 종교가 없는 나는 '사이코'라고 말하고는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왜 사이코예요?" 아내의 대찬 소리가 들렸기에 나도 황당했다.
"내가 왜 당신한테? 전혀 아니여."
"당신이 방금 전에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요!"
"아녀. 나는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여. 당신한테 한 게 아녀." 내가 아니라는데도 아내가 무어라고 쫑알거렸다. 별안간 나도 모르게 '에잇!' 하면서 외마디 고함을 지르고는 내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문을 거칠게 닫았다. 2015. 12. 31. 한 해의 마지막 밤에 일어난 말다툼이었다.
2016. 1. 1. 새해 아침. 아내는 내 누나한테서 새해 안부 메시지가 왔다면서 답신을 보내야 하는지를 나한테 물었다. 지난해 2월 말 어머니 임종 직전의 간호 방법에 대해서 의견 충돌이 있었다. 어머니의 목구멍에서 가래를 뽑아내야 하기에 아내는 서툴더라도 뽑아내려고 애를 썼고, 누나는 전적으로 간병인한테만 의존하려고 했다. 아쉽게도 간병인은 정말로 이따금 마지못해서 가래를 뽑았고, 환자 가족들한테 은근히 종용하고 있었다.
아내는 옆 침대의 보호자인 젊은 여자한테서 가래 뽑는 방법을 배워가면서 뽑고 있었다. 40대 초반의 여자는 친정어머니의 가래를 2 ~ 3년간이나 직접 뽑았다는데도 내 누나는 이 환자 보호자마저도 대판 말싸움을 벌였다. 이런 관계로 아내는 기가 드센 최씨네 여자와의 관계를 껄끄러워했다.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 손자 본 이야기를 할까요?" 아내는 시누이한테 핸드폰 답신을 보낼 생각으로 내게 의향을 물었다. 내가 "아니야, 말하지 마"라고 거절했다.
"당신은 앞뒤가 안 맞아요. 어떤 때에는 누나와 통화를 하면서 왜 이번에는 ..."
순간 나는 화가 치밀었다. "앞뒤가 안 맞는다니?" 나도 누나한테 전화를 주고받기를 꺼려하면서도 최근에는 여러 차례 전화도 하고 문자 메시지도 보냈다. 고향* 앞뜰에 있는 누나의 논이 일반산업단지로 토지수용되기에 내가 어떻게 하라고 조언한 사실이 있다. 또 이모네가 짓는 누나-논이 혹시 산업단지에 편입되는 지를 확인해서 만약에 편입되면 이모네 식구한테 말해서 보상비를 받아야 한다고 남매간에 의견을 묻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누나와는 말을 하면서도 첫 손자를 낳았다는 기쁜 소식을 왜 누나한테 말하지 못하도록 하느냐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한테 '앞뒤가 안 맞는다'는 식으로 비난하면 내가 어떻게 되지?
"당신, 문제를 공격하지. 사람을 공격하지 마.":
"나는 그런 어려운 말은 몰라요."
간밤 12월 31일에도 한마디가 어긋나서 서로 감정이 상했던 차에 또다시 대차게 붙었으니 말이 온공할 리는 없었다.
나는 말을 보탰다. "왜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당신은 사람을 먼저 공격했어. 왜라고 물었더라면 내가 그 이유를 말했을 거야."
"당신은 간섭하지 말아요" 아내도 지지 않고 내게 말했다.
"나는 내 의견을 말한 것이었지만 당신을 간섭한 적은 없어." 내가 말을 이어갔으나 아내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기에 나도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간밤에 흘러간 영화 한 편이, 나는 불과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각에 자막 한 줄 '주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문구에 내가 이상반응을 보인 탓이다. 내가 사이코라는 단어를 아내한테 한 것이 아니고 영화 속의 자막에 한 것이었는데도 아내는 자기한테 한 것인 양 오해를 한 뒤 남편인 내게 대차게 대든 탓으로 촉발된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나한테도 문제는 많다. 나는 아무런 종교도 없거니와 종교 그 자체를 그다지 곱게 보지 않았다. 나는 거짓말과 사기에 관한 책을 내려고 오랫동안 자료를 수집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었다.
최근 석 달 전부터 인터넷 뉴스에서 거짓말과 사기에 관한 사례를 다시 모으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사이비 목사, 엉터리 무당, 불량한 중(스님) 등 종교인들이 제법 많이 수사기관에 검거되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한테서 어떤 음울한 공포감을 조장해서 금품을 뜯고, 또는 시설을 운영하면서 수용한 사람을 폭행하고 돈을 갈취한 사례들이 제법 많았다. 종교인의 탈을 쓴 일부 악행들이 떠올랐기에 위 영화의 한 자막으로도 나는 그들의 허위를 보는 듯싶어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천주교 신자인 아내한테 한 말은 분명히 아니었다.
나도 사람이다. 나도 남하고 말싸움할 줄도 안다. 그런데도 나는 원인이 된 문제에 대해서 말을 주고받는 성미이다. 오로지 발단이 된 문제에 대해서만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먼저 말한다. 말다툼하는 상대방한테는 공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의견충돌이 생긴 문제해결에만 집중해서 의견을 조율하고 싶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자기가 불리하다고 싶으면 대뜸 사람부터 공격한다. 특히 인신공격을 하면 대화는 순식간에 끊어지고 곧바로 말싸움으로 변질된다.
이런 과정들을 알기에 나는 문제해결만 이야기하고 싶은데도 아내는 대뜸 남편한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앞뒤가 안 맞는다'라고 모작스럽게 내뱉었다.
나 역시 누나와의 관계가 그다지 매끄럽지 않다. 내가 2008년 6월 말에 직장을 벗어난 다음날부터 나 혼자서 시골로 내려갔다. 그때까지 꼬장꼬장하게 혼자서 살던 아흔 살의 어머니와 함께 둘이서 살기 시작하여, 몇 년 간 같이 살았으며, 때로는 성격차이로 약간 언쟁을 높인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나날이 노쇠할수록 노인성 치매증상도 나타나서 나를 힘들게 했고, 내가 방심하는 사이에, 어머니는 운동신경이 극도로 감소한 탓으로 순식간에 통나무 쓰러지듯 넘어져서 다치기가 일쑤였다.
어머니는 당신의 노년상태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노인의 특유한 생활습관으로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즉 도시행활에 익숙한 나는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는데 비하여, 어머니는 이른 새벽녘에 일어난 뒤 혼자서 대문 바깥에 나가셨다가 넘어지곤 했다. 어머니의 부상과 치매 전초기 증상으로 내가 어머니를 종합병원 응급실과 개인 병원으로 모시기를 여러 번 했다.
하나뿐인 아들인 내가 어머니를 소홀히 모신다는 구실로 누나를 비롯한 두 여동생의 비난이 이따금 있었다. 그들이 과연 효녀여서 그랬을까? 아니다. 재산에 대한 욕심으로 친정 남동생이며, 친정오빠를 헐뜯었다고 여긴다. 그들은 어머니의 간호 뒤끝에는 으레껏 재산에 대해서 언급했기에.
어머니의 장례 때에도 몽리를 피웠던 세 누이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한다. 어머니는 지난해(2015년) 2월 25일 밤 11시 15분쯤에 충남 보령아산병원에서 돌아가셨다. 나는 중환자 가족용 대기실에서 혼자 누워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는 벌떡 일어나서 모든 일을 재빨리 마무리 수습해야 했다. 의료비용 행정처리를 다 끝내고는 웅천장례식장에 연락하여 영현차를 불러서 밤 11시 45분경에 병원을 떠나 고향 근처인 두룡리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내려갔다.
밤잠도 안 자고는 장례를 어떻게 무사히, 빠르게 치를 것인가를 계획하고, 사촌동생, 남한테 부탁과 협조를 곧바로 내렸다.
아들이 혼자인 나는 문상객 받기에도 벅찼다. 장례기간은 돌아가신 날을 포함해서 3일장이기에 시간이 무척이나 짧았다. 내가 장례식장에 머문 날짜로는 3일이었으나 실제로는 고작 32시간이었다. 첫날은 자정을 넘어서야 장례식장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둘째 날이 되었기에 종일토록 문상객을 받았고, 셋째 날은 날씨가 사나웠기에 서둘러서 아침 8시에 장지로 떠났다.
고향 선산(웅천읍 죽청리 산) 아버지 무덤 한 자락을 파서 합장하는 날은 2월 27일.
겨울 끝이라도 무지하게 추웠다. 추웠기에 운구차는 고향집*에 잠깐 들르는 수준으로 운구시간을 짧게 짰다.
운구차가 고향집에 도착했다. 영정사진 속의 어머니가 90여 년 간 살았던 시골집에 잠깐 들러서 안팎을 후이 둘러보시도록, 영혼이나마 마지막으로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막내 여동생의 비난이 빗발쳤다. "오빠는 뭐하는 거야? 왜 제례상 준비를 하지 않았어?" 누나도 둘째 여동생도 함께 비난했다. 정말이다. 나는 바깥마당에서 황당하게 비난을 받아야 했다.
노제(路祭)는 내 집이 아니라 선산 바로 입구의 서낭댕이 느티나무(당산나무) 아래에서 지내려고 했다. 선산으로 막 들어가는 지점에서 노제를 지내려고 제수물 준비를 부탁했다. 그 추운 날 시골집 바깥마당에서는 노제를 지낼 생각은 계획조차도 세우지 않았다. 나를 비난했던 세 누이들. 상주(喪主)인 나는 입을 꾹 다물고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당했다.
날씨가 곤두박질해서 추웠기에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 더 빨리 앞당겨라'라고 선산에서 작업지시를 하던 큰당숙의 핸드폰 전화를 받고는 내 집에서 즉시 출발했다.
무창포해수욕장으로(606지방도로) 가는 길목인 구룡리와 죽청리의 경계선에 있는 서낭댕이 빈 터, 당산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꽃상여에 시신을 옮겨 얹고는 미리 준비한 제물(祭物)로 노제(路祭)를 지냈다. 마지막으로 문상객을 맞이했다. 눈발이 휘날리는 정오 이전에 모든 일(매장)을 서둘러서 빨리 끝내야 했다.
상주가 묫자리 부근에 피운 장작불을 쐬는 게 조금은 뭐해서 불을 쐬지 않으려다가 얼어죽는 줄 알았다. 어쩔 수가 없어서 통나무에 타오르는 불꽃, 장작불을 잠깐이라도 쬐었다. 피곤과 추위에 얼었던 몸이 뜨거운 불길로 정신이 피잉 돌았다. 힘든 장례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와 아내는 가장 나이 많은 누나조차도 멀리했다. 나보다 두 살 더 많은 누나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속으로 되짚어 보면 누나와의 관계도 불편하게 이어진다. 친정 재산, 아버지의 재산 상속, 어머니의 재산 상속에 대한 세 누이들의 행태가 그다지 곱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첫 손자가 태어났다는 사실조차도 누이들한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덜 비양심적인 누나한테는 알리고자 했던 아내의 생각을 제지한 내가 어쩌면 더 옹졸했을 게다.
내가 누나를 배려한 이유는 있었다. 누나 일곱 살 때다. 서낭댕이 주막집 여편네가 트럭에서 몰래 빼낸 휘발유를 등잔용 석유라고 속여서 내 아버지한테 팔았다. 누나는 휘발유를 넣는 등잔 밑에서 재잘거리다가 등잔이 엎질러져서 발생한 화재로 얼굴과 목에 깊은 화상을 입었다. 철도역 뒤편에 있는 중학교에 다녀서 졸업했고, 이웃 남포면의 가난한 사람한테 시집갔고, 노동자이던 남편이 일찍 죽는 바람에 누나는 50대 말에 과부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조금은 마음적이라도 보살펴야 했던 누나였다.
다르게 생각하면 삼신할머니가 점지한 귀중한 내 손자를 나쁜 이미지가 든 누이들한테 알리지 않고, 숨기고 싶은 할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좋은 일은 애써 숨기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였다. 이런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아내는 나와 누나와의 관계를 빗대어 '앞뒤가 안 맞는다'며 남편인 나한테 비양심적이거나 이중인격의 뜻을 지닌 말을 내뱉었을 게다.
나는 정치외교관도 아닌데도 타인과의 협상 방안에 대해서 조금은 공부했다. 젊은 날에 정치외교학을 전공했고, 사십대 후반에도 몇 년 간 공부를 더 했다. 이익이 상반된 상대방과의 협상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윈-윈(Win-Win)전략'을 써야 한다고, 서로가 만족하는 수준의 협상으로 마무리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려면 협상하고자 하는 문제 그 자체만을 집중해서 의견을 교환해야 한다고, 자기 뜻에 안 맞는다고 대뜸 상대방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면 판은 순식간에 깨지게 마련이다.
예컨대 이렇다. "너는 왜 그 따위냐?",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너는 과거부터 늘 그랬어", "너는 비양심적이여" 등이다. 이런 말투의 비난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싸움질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이나 쓰는 술법이며, 판 깨기 전략이다.
몇 시간이 지난 뒤 아내는 내게 말했다. '당신, 이런 내용을 컴퓨터에 올리지 말아요.' 내게 거듭 부탁했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왜 쓰지 말아야 하는데? 과거에도 내 개인적인 글을 썼다가 아내한테 된통 당했다. 어떤 개인 카페인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우연히 내 글을 발견한 아내는 나하고 대판거리를 한 뒤에는 그 카페에서 활동을 그만두었다.
나는 그다지 똑똑한 사람은 아니다. 부끄러운 개인사, 가정사를 숨기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까발린다. 인간의 행태는 모두가 엇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나를 까발려서 반성하고 싶다. 글 쓰면서 무엇을 잘했는지, 또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잘못을 헤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부끄러운 가정사를 까발리면서, 오늘도 반성한다. 나는 가난한 촌 태생인 나는 별 볼 일 없는 직장에서 직급도 미미한 공무원이었다. 자식을 넷이나 낳아서 키워낸 아내를 소중히 여긴다. 살림에만 정진하는 아내이기에 나는 늘 고마워하면서도 미안해한다. 아내의 취미라고는 오로지 성당에 나가는 것밖에 없다. 말발이 나보다 조금은 뒤쳐졌을 아내한테는 나는 공격하고 싶지 않다. 헝클어진 문제 그 자체만을 집중해서 말다툼을 해도 아내 그 자체를 공격하기는 싫다. 내 소중한 자식들의 어머니이며, 내가 이겨서는 안 되는 가족이다. 나 또한 지지도 않고, 이기지도 않는 그런 중립의 언행을 유지하고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이기는 자이다. 특히나 제 가족을 이기는 자는 가장 못났다. 나는 오늘도 못난이가 아니었나를 반성한다. 결코 떳떳하지 못한 내 가족사는 한없이 이어질 게다. 내가 수십 년 동안 마음의 고통을 받았던 과거사들은 어쩌면 숨겨야 한다. 화가 나면 입을 다물면 되는데도 나는 옹졸한 사람이기에 때로는 화를 내고는, 이처럼 파렴치한 고백도 한다.
* 고향 : 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
* 고향집 : 어머니는 보령시 남포면 용두리(용머리, 월전리)에서 다섯살 때(음력 섣달 그믐날 생일) 이웃 면에 있는 이 집으로 이사 왔고, 동네 결혼을 한 뒤에 일평생 한 곳에서만 사셨음
2016. 1. 2.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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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더 다듬어야 한다.
나중에 문학지에 올렸으면 싶다.
부끄러운 내 가족사이다.
추가 :
이른 아침에 서울 송파구 잠실 아파트에도 흰눈이 내렸다. 날씨 기온은 곤두박질쳐서 영하로 떨어지고.
가뜩이나 당뇨 등으로 혈액순환이 잘 안 되어서 추위를 더 타는 나. 오늘도 바깥에 나가지도 못한 채 방안에서만 머문다. 뭐라도 꼼지락거려야 하기에 컴퓨터를 켜서 오래 전에 쓴 산문일기 등을 꺼내서 다시 들춰본다.
2024. 1. 9. 화요일. 최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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