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올 사제는 그토록 열망하던 땅을 밟게되자, 깊은 감동과 감사에 휩싸여 목숨을 걸고 그를 이 땅으로 안내한 뱃사공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축복했다.
물론 상상도 못할 정도로 조심하면서 온갖 감시 눈길을 벗어난 뒤에야 비로서 상륙 할 수 있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던져 조선교회에 이바지한 것은 단지 교구 책임자로서의 지위나 사도직만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영광스러 운 순교 역사에서, 유럽의 순교자들과 연관되는 영웅적인 도착 사제들의 시조가 되는 자제들을 처음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여기 에서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떤 기적적인 일치가 자주 일어나 천주의 섭리가 그 의도를 실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1842년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의 세실 제독은 조선 해안을 탐사하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당시 마카오에 유학중이던 김 안드레아(金大建)를 통역으로 추천했다. 옛 조선왕족의 후예 이며 천주교인의 가계에 속할 뿐 아니라 순교자가 되는 행운을 얻게 될 안드레아는 그때까지만 해도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인 성격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용감한 형제들과 접촉하면서 그의 사고는 고양되고 성격은 강건해져 곧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 다. 그 때부터 그는 훌륭하게 계획을 세우고, 대담하고 신중하고 참을성 있게 이를 집행했다.
안드레아는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갈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있던 페레올 신부와 뜻밖의 상황에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안드 레아는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에 그 때까지 실천에 옮길 수 없었 던 사제의 조선입국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때를 기 다리면서 제자의 자격으로 페레올 신부를 따랐다. 안드레아에게 천주교 신앙 교리와 그것이 과하는 의무를 가르친 페레올 신부는 그에게 성직자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특질을 발견하고 그를 부사제로 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