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죽었을 때 어머니의 상복은? 효종의 시신을 둘러싼 이런 소동들은 모두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소동을 겪고도 효종의 시신은 조용히 땅속에 묻히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북벌의 한이 너무 커서 그를 조용히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장장 전후 15년에 걸친 예송논쟁이 일어나는데, 그의 사후 15년째는 중국 남쪽에서 오삼계가 청나라 타도를 기치로 군사를 일으킨 해란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효종의 뒤를 이은 인물은 만 18세의 외아들 현종이었다. 그는 효종 사후 4일 만에 예조에서 새 왕의 즉위절목을 올리니 화를 내며 물리쳤다. "지금이 어떤 때이고 이것이 어떠한 거조인데 분명히 계품하지 않은 채 감히 택일하여 들인단 말인가." 백관과 삼사에서 "성복하는 날 뒤를 잇는 것은 조종께서 이미 행해온 예법"이라고 주장하자 다시 사양했다. "예법이 중대하기는 하지만 정 또한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경들은 어찌하여 나의 망극한 회포를 돌아보지 않는가. 결코 억지로 정리를 억제하면서 이를 거행할 수는 없다." 이런 실랑이를 거쳐 세자는 드디어 즉위하지만 그가 정작 싸워야 할 일은 선왕의 빈전 앞에서 즉위할 수 있느냐 여부가 아니라 예송논쟁이란 거대한 암운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효종이 승하했을 때 효종의 계모의 자의대비 조씨가 살아 있었던 것이 제1차 예송논쟁의 시발이었다. 그녀의 상복 착용 기간이 문제가 된 사건이 바로 제1차 예송논쟁이다. 인조는 반정을 일으키기 13년 전인 1610년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딸과 결혼했으니 그녀가 인렬왕후 한씨였다. 그녀는 소현,봉림,인평,용성대군 등 4남을 낳고 인조 13년(1635) 사망했고, 인조는 그 3년 후인 영돈녕부사 양주 조씨 창원의 딸과 재혼했다. 그녀가 바로 장렬왕후 조씨이다. 인조의 나이는 만43세였고 그녀의 나이는 만14세였다. 인조가 사망함으로써 대비가 된 그녀는 효종2년 자의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가 되었다. 자의대비는 효종보다 5살이나 어렸다. 만30세의 효종이 즉위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만25세였다. 10년을 재위한 효종이 죽었을 때 겨우 만 35세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인조와 국혼을 올렸으니 효종에게 법적인 어머니였다. 이 법적인 어머니 자의대비 조씨가 아들인 효종의 국상 때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제1차 예송논쟁이었다. 1659년인 기해년에 벌어졌다 해서 기해예송, 상복문제로 논쟁했다 하여 기해복제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이 예송논쟁 자체에 대해 냉소적 인식을 갖고 있는 현대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식민지 시대 일인 학자들이 이를 당파싸움 망국론의 중요한 전거로 사용한 데 큰 요인이 있다. 현재의 잣대로 보아 상복을 얼마 동안 입든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사회에서 종법은 현대국가의 헌법과 같고, 예는 현대국가의 공법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예송논쟁이 국가의 부강이나 백성들의 민생을 둘러싼 논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예론이 정권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게 대두한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임진,병자 양란 이후 신분제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에 위기감을 느낀 사대부들이 수구적인 예론으로 지배질서를 계속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이 그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억울하게 비명에 간 소현세자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왕가의 왕통은 일반 사대부가의 종통과 다른 차원의 질서인가 아니면 같은 성격의 질서인가 하는 서인과 남인이 시각차가 있었는데, 바로 이 점이 예송을 정권 차원의 논쟁으로 격상시킨 주된 요인이기도 하다.
[출처] 예송논쟁(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