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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JMRHjjT2KI?si=RnZ8ywC9Cir5Ru0Q
비에니아프스키 일가의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헨릭 비에니아프스키는(Henryk Wieniawski) 1835년 7월 10일 폴란드의 루블린(Lublin)에서 태어났다. 그가 음악 세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전문 피아니스트였던 그의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음악적 훈련을 통해 그를 바이올린 신동으로 키웠다. 5세 때 그의 능력은 Jan Hornaziel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어 그에게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으며, 그 후에는 Stanislaw Sewacaynski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로부터 3년 뒤, 8세의 비에니아프스키는 11세 이하에게는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파리음악원의 규칙을 깨고 입학하여 콘서바토리 역사상 가장 어린 열한 살의 나이로 졸업했다. 그곳에서 클라벨(J. Clavel)과 마자르(Lamber Massart)의 수업을 들었는데, 특히 마자르 교수의 지도 아래 그의 테크닉은 완벽해져 갔다. 당시 그는 어머니의 파리 살롱 음악회에서 가장 유명한 폴란드 망명자인 시인 미키비츠(Adam Mickiewicz)와 쇼팽(Fryderyk Chopin)을 만나게 된다. 비에니아프스키의 첫번째 곡은 그가 13세 때 쓰여졌다.
1848년 파리의 콘서트 후에 비에니아프스키는 피아니스트인 그의 동생 요제프(Jozef Wieiawski)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로 가서 5회의 성공적인 콘서트를 열었다. 1848년 비에니아프스키는 헬싱키, 리가, 바르샤바, 드레스덴 등지에서 연주하였고, 그 해 가을 다시 폴란드로 돌아갔다. 그즈음 작곡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1849년에 파리음악원에 다시 들어가서 1850년까지 공부한다. 1850년에 그는 Societe Philharmonique의 멤버가 되었고, Cercle-des-Arts를 받았다.
연주여행과 함께 시작된 비르투오조로서의 생애 |
1851년 경 비에니아프스키는 연주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이 여행에서 그는 벨기에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앙리 비외탕을 만나게 된다.
그는 1851년부터 3년간을 러시아에서 보냈고, 동생과 함께 200회의 연주회를 가졌다. 이들의 연주에 대해 청중은 열광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적인 목소리들도 있었는데, 그 중 세로프(Serov)는 “비에니아프스키 형제들에게는 ‘비르투오조 재능’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며 이들의 연주가 지나치게 떠받들여지는 데 반대하였다. 그러나 비에니아프스키는 자신이 단순한 비르투오조 이상이라는 것을 곧 입증했다. 1853년쯤에 그는 폴로네이즈 제1번과 ‘모스크바의 추억( Souvenir de Moscou)’ Op.6, 마주르카들,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f 단조 등 14개의 작품을 작곡, 출판했다. 1853년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독일에서의 첫번째 큰 성공을 거뒀다.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퍼졌고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에서 많은 연주회를 가졌다. 1858년에 그는 파리에서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과 연주했고, 가을에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맨체스터, 글래스고우 등 9개 도시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1859년에 그는 런던에서 열린 베토벤 현악학회 콘서트에 참여했고, 음악연맹(Musical Union)의 실내악 연주회에도 참가하였다.
다음 해인 1860년 비에니아프스키는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의 조카인 이사벨라 햄톤(Isabella Hampton)과 결혼했는데, 그의 유명한 ‘전설(Legende)’ Op.17은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루빈슈타인과의 연주 활동 |
당시 러시아의 음악적 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안톤 루빈스타인은 비에니아프스키를 참여시켰다. 1860∼1872년까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비에니아프스키는 러시아 바이올린 악파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는 황실의 바이올리니스트 및 오케스트라와 러시아 음악학회 현악 사중주단의 리더로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1862년부터 1868년 사이에는 새롭게 창립된 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수로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러시아에 머물며 그는 위대한 음악 해석자이자 작곡가로서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에튀드-카프리스 (Etudes-caprices) Op.18과 화려한 폴로네이즈(Polonaise brillante) Op.21, 그리고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인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d단조 Op.22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루빈슈타인(N. Rubinstein)의 지휘 아래 1862년 11월 2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작곡자 본인의 협연으로 초연되었는데, 그로부터 이틀 뒤 혹독한 비평가였던 퀴이(Cui)는 그의 친구 발라키레프에게 “나는 비에니아프스키의 첫 악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비에니아프스키는 1872년, 2년여의 미국 순회 연주를 시작으로 다시 세계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루빈슈타인과 함께 첫해에만 215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유럽에 돌아오자마자 비에니아프스키는 비외탕(Vieuxtemps)의 뒤를 이어 1875년부터 2년간 브뤼셀 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1876년 독일 투어를 하면서 대규모의 연주회를 갖던 그는 1878년, 세계 박람회를 위해 조직된 러시아 콘서트의 파리 연주를 위한 루빈슈타인의 초청을 받아들였고,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협주곡 2번과 ‘모스크바의 추억’을 연주했다.
심장병으로 인한 죽음 |
평소 심장병으로 고통받았던 비에니아프스키는 극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2월과 6월에는 런던에서, 그 해 11월에는 베를린에서 연주를 강행했다. 그러나 11월 11일,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던 중에 비에니아프스키는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무대 뒤로 옮겨졌을 때, 청중 가운데 앉아 있었던 그의 동료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Joachim)이 무대 위로 급히 올라가서 직접 청중 앞에 나섰다.
“비록 나는 내 친구의 훌륭한 협주곡을 연주할 수 없지만, 그를 대신하여 나는 바흐의 샤콘느를 연주할 것입니다.”
요아힘의 연주가 끝날 즈음 다시 원기를 회복한 비에니아프스키는 자신을 대신해 무대에 섰던 요아힘을 무대에서 만났다.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비에니아프스키는 재정적인 이유로 인해 러시아 연주 여행을 계속해야만 했다. 1878년 12월 17일에 열린 모스크바 연주회에서 ‘크로이처(Kreutzer)’ 소나타를 연주한 그는 단 첫 악장만을 연주한 후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1879년 초, 그는 성악가 아르토(Desiree Artot)와 함께 러시아 투어를 시작했지만 2월에 오뎃사(Odessa)의 병원에 입원하였다. 4월쯤 오뎃사에서 고별 콘서트를 준비할 만큼 충분히 회복된 비에니아프스키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그러나 11월에 마린스키 병원(Mariinsky Hospital)에 다시 입원하였고, 다음 해 2월에는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였던 메크 부인(Madame von Meck)의 집에서 요양하였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위한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회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친구들의 이러한 노력은 비에니아프스키가 자신의 가장 어린 딸 이렌느(Irene)가 태어나기 두 달 전, 45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비에니아프스키에 대한 평가 |
파가니니 이후 시대의 바이올리니스트 중에서 비에니아프스키는 거의 정상급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연주에는 프랑스와 슬라브 기질이 함께 녹아 있었다. 그는 기술적인 능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청중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시켰다. 그의 톤에 묻어 있는 감정적 음색은 크라이슬러에 의해 칭송되기도 했다. 안톤 루빈슈타인은 비에니아프스키를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다. 1878년에 비에니아프스키와 동행했던 파리의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인 프랑코(Sam Franko)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연주에 충격을 받았다. 이전에도, 또 그 이후로도 그와 같은 바이올린 연주를 결코 듣지 못했다. 그의 놀랄 만한 감정, 풍부한 음색, 강렬한 기질, 완벽한 테크닉, 그의 매혹적인 활력이 모든 것은 나를 무아지경에 빠지게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비에니아프스키를 계승한 아우어(Leopold Auer)는 또한 그가 가진 특별한 재능에 대해 ‘그의 연주 방법은 그 시대의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와 전혀 다르다…그가 죽은 이후로 그를 회상시킬 수 있을 만한 어떤 바이올리니스트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저(Moser)는 비에니아프스키를 ‘의심할 여지없이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모든 시대의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그의 주법에 대해서는 ‘막연하고 굳은 주법’이라고 비평했다. 비에니아프스키의 주법은 그의 시대의 관습을 쫓지 않았다. 그의 주법은 오른쪽 팔꿈치를 높이 들고 집게손가락으로 활을 눌렀는데, 이 방법은 하나의 현에 많은 스타카토 음들을 연주하는 데 있어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특별히 러시아 악파 중 몇몇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방법을 채택했다
작곡가로서의 비에니아프스키, 그리고 그의 작품 |
일생 동안 강렬한 표현력, 독창적인 테크닉을 지닌 매우 개성적인 음악가로서‘천재적 바이올리니스트’라 여겨졌던 비에니아프스키의 테크닉은 러시아 악파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 스타일에 영향을 끼쳤다. 연주 여행을 통해 비춰졌던 이러한 비르투오조로서의 삶은 그가 남겼던 작품에 영향을 주었는데, 비에니아프스키가 주로 사용한 작품 형태는 그 시대의 경향과 일치한다. 즉 그는 변주곡, 환상곡, 카프리치오, 협주곡 등과 같은 큰 규모의 작품들과, 엘리지, 환상곡, 소품과 같은 작은 규모의 서정적인 작품들을 작곡했다. 바이올린 협주곡 f 단조를 포함하는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최고의 연주자이기도 했던 작곡가의 작품답게, 고난도의 테크닉과 비르투오조 효과를 강조했다.
작곡가로서 비에니아프스키는 낭만적 상상력을 가지고 파가니니의 기술적 진보와 슬라브적인 색채를 결합시켰는데,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 등에서는 그의 폴란드 민족주의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손꼽히는 작품은 역시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첫번째 협주곡에서는 기교를 강조했지만, 사라사테에게 헌정된 두 번째 협주곡은 낭만적 발전을 이룬, 표현력이 두드러진 걸작이다. 이 작품들은 바이올리니스트의 레퍼토리의 필요 불가결한 부분이 되어왔다. 그가 남긴 에튀드L’cole moderne와 Etudes-caprices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다음으로 가장 음악적이고 큰 노력을 요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글·정윤경(객원기자)
헨릭 비에니아프스키(Henryk Wieniawski)는 오늘날까지도 강하게 지속되고 있는 이른바 ‘파가니니 쇼크(Paganini’s shock)’의 영향권 속에사 살다 간 두 번째 세대의 가장 대표적인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composer-violinist)로 꼽히는 인물이다. 자신들의 커리어를 파가니니의 치세(治世)와 공유할 수밖에 없었던 제1세대 바이올리니스트들은 183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파가니니의 아성이 급속도로 허물어지자 그 무대와 찬사와 외경의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열띤 각축을 벌였다. 즉, 살아 생전에 유일하게 파가니니에 맞설 수 있었던 바이올리니스트로 평가되는 하인리히 빌헬름 에른스트(Heinrich Wilhelm Ernst)를 비롯하여 샤를르 드 베리오(Charles de Be?riot), 앙리 비외탕(Henry Vieuxtemps), 올 불(Ole Bull), 카롤 립핀스키(Karol Lipinski), 그리고 파가니니의 유일한 제자로 알려진 카밀로 시보리(Camillo Sivori) 등은 모두 파가니니가 살아 생전에 연주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으며 눈과 귀로 그것을 모방하는 과정을 통해 파가니니라는 산을 넘으려 했던 인물들이다.
그에 비해 비에니아프스키나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 바로 뒤이어 등장하는 파블로 데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등은 시기적으로나 연령적으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을 수 없었다. 설령 직접 들었다 하더라도 필시 이들은 너무 어렸을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그것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소화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과 그 이후 세대들에게는 파가니니에 관한 구구한 전설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그의 ‘작품’들이 남겨졌다. 위의 세 사람은 특히 파가니니 작품 번호의 맨 처음을 장식하는, 즉 ‘Op.1’로 명명된 스물네 곡의 카프리스를 면밀하게 연구하고 끊임없이 연습하며 성장한 첫번째 세대가 된다. 심지어는 ‘고전주의자’로 알려졌으며, 기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 나갔던 요아힘조차도 파가니니의 카프리스를 열심히 연습했다. 요제프 뵘(Joseph Bo¨hm)이 이끌고 있던 비엔나음악원과 비오티(Giovanni Battista Viotti) 휘하의 크로이처(Rodolphe Kreutzer)와 바이요(Pierre Baillot)가 역사의 미명을 아직 헤쳐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유럽의 변방, 차르의 지배 아래서 신음하던 폴란드 류블린 출신의 비에니아프스키는 홀연히 유럽 음악계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바이올리니스트와 작곡가로서의 길을 동시에 내닫다 |
파리 음악원의 크로이처와 바이요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수군거림을 받는 한 사내가 자신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이룩해 놓은 바이올린 테크닉상의 일대 혁신에 별반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보다 젊은 샤를르 라퐁(Charles Lafont)이 기교적인 문제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면서 심지어는 파가니니를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하급 술사(術士)로 오판(誤判)한 것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다. 이러한 상황의 파리 음악원이었지만, 어린 비에니아프스키를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들, 특히 오만했던 크로이처를 길러낸 위대한 스승 랑베르 마자르(Lambert Massart)였다. 여덟 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헨릭은 열한 살의 나이로 바이올린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하며 졸업한다. 비에니아프스키의 빠른 성장과 그 속도를 능가하는 눈부신 성취는 음악원이라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 생긴 이래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음악원을 떠나지 않고 마자르로부터 2년 동안 더 수업을 받는다. 사회주의 혁명의 물결이 유럽 전역을 휩쓸던 1848년에 12세의 소년 헨릭 비에니아프스키는 파리 데뷔 공연을 가졌다. 성공리에 치러진 이 공연의 프로그램 중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자신이 작곡한 ‘변주를 동반한 아리아(Air varie?)’와 카프리스 한 곡이 들어있었으며 그 중 카프리스는 훗날 그의 공식적인 작품 목록에서 ‘Op.1’로 매겨진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스승(mai^tre)에 대한 감사의 뜻을 실어 이 곡을 마자르에게 헌정했다.
아직 어린 비에니아프스키가 바이올리니스트와 작곡가로서의 첫발을 동시에 내디뎠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곡을 쓰고 동시에 연주도 하는 어린 신동은 모차르트 이래로 선망되어 온 것이지만, 이러한 유형이 파가니니에 이르러서는 기술상의 엄청난 진보와 더불어 보다 심각한 가늠대 위에 오르게 된다. 즉, 연주예술의 첨단에 선다는 것이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혹독한 조건들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연주자가, 그것도 어린 나이에 다시 작곡가로서의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은 파가니니가 마련한 기교의 엄청난 발전, 그리고 그것을 다시 창작과 결합시키는 새로운 미적·방법론적 패러다임에 어린 비에니아프스키 역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결과도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작곡가로서의 비에니아프스키는 비외탕이 이룩한 다대한 성취를 뛰어 넘지는 못했으나, 사라사테보다는 훨씬 매력적이다. 그런가 하면 보다 이후의 인물들, 이를테면 이자이(Euge?ne Ysau¨e)는 바야흐로 ‘근대’라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요하임과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는 조금 색다른 방법으로 창작 욕구를 충족시켜 나갔다. 사라사테에 이르러 이미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작곡이 시대 흐름과의 벌어진 격차에 버거워하는 것을 보면 비에니아프스키야말로 파가니니, 비외탕과 더불어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절정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바이올린의 음색과 프레이징, 다양한 주법들이 더없이 매력적으로 포착될 수 있었던 시대를 살았다는 것, 동시에 그러한 시대를 열어 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혁신들이 일정한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이들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들은 서양 음악사의 진정한 행운아로 기억될 만하다.
1848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데뷔 연주에 이어 파리 음악원에서 화성학과 작곡 수업을 마친 헨릭은 동생 요제프 비에니아프스키와 함께 두오를 구성해 다시 러시아를 찾았다. 형이 16살, 동생이 14살인 이들 형제 두오는 열렬한 관심과 환호를 불러일으키며 대략 2년 동안 200회 이상의 연주회를 소화해냈다. 알렉산드르 세로프(Alexander Serov)같은 평론가 겸 작곡가는 비에니아프스키 형제의 성공에 대해 ‘단지 기교적인 재능일 뿐’이라며 여전히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으며, 음악적인 소양의 측면에서는 평가절하를 서슴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에니아프스키의 초기 걸작들은 바로 이러한 비판을 직면한 상황에서 하나씩 완성되어 갔다.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작품번호는 이미 18번까지 출판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비에니아프스키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들, 이를테면 폴로네이즈 D장조나 ‘모스크바의 추억(Souvenir de Moscou)’, 그리고 몇 곡의 마주르카와 바이올린 협주곡 1번 f#단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연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패시지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작곡자 자신이 유서 깊은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독일 데뷔를 장식한 첫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가 독일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다.
기교적 장인성을 갖춘 바이올린의 쇼팽 |
종종 그에게 부여된 ‘바이올린의 쇼팽’이라는 닉네임은 마주르카나 폴로네이즈를 작곡하는 자랑스러운 폴란드 음악가라는 인식 이외에도 밝고 화려하며, 달콤한 서정성으로 가득 찬 비에니아프스키의 음악들을 상당히 잘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자칫 바이올린 연주의 통속적인 측면과 결합한다면, 이 말만큼 그의 음악세계를 오도하는 것도 달리 없다. 감미롭고 달콤한 멜로디와 서정성, 녹아내리는 듯한 전율은 자칫 그의 작품들이 떠받치고 있는 기교적인 장인성과 초절적 경지를 향한 노력을 사상(捨象)해 버리는 일면이 있으며, 모차르트의 경우에서와 같은 유년(幼年)의 순수함과 해맑음이 아닌 성인(成人) 취향의 멜랑콜리로 전환시켜버릴 가능성이 크다. 장년에 이룩한 정점으로서 협주곡 2번의 빼어난 1954년 레코딩(RCA, The Heifetz Collection Vol.20, 09026-61751-2)에도 불구하고 하이페츠가 열 일곱 살 되던 해인 1917년에 레코딩한 스케르초-타란텔라 Op.16(RCA, The Heifetz Collection Vol.1, 09026-61732-2)에 굳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쿠스틱 시대에 이루어진 자신의 첫 레코딩들의 목록 가운데 소년 하이페츠가 가장 돋보이는 자신의 기량을 뽐낸 것은 다름 아닌 비에니아프스키의 작품을 통해서다.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지배적인 패러다임 중의 하나가 노년화(老年化)의 지속을 통한 유년으로의 회귀에 있다면, 비에니아프스키의 음악을 떠받치고 있는 정서의 근간은 바로 유소년(幼少年)의 그것에 해당한다. 최근 선보인 데뷔 레코딩에서 역시 비에니아프스키를 연주하고 있는 알렉산더 시트코베츠키(EMI Angel 5 57025 2)나 다비드 갈로우슈토프(LYRINX LYR 207)의 경우에도 이러한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며, 더 나아가 이것은 비에니아프스키를 듣는 데 있어 하나의 첩경을 제공한다.
파가니니 이후 ‘최고’로 평가받은 최초의 연주자 |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비에니아프스키가 지닌 가장 큰 의의는 무엇보다도 바흐로부터 자신과 동시대 작품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본격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한 ‘현대적인 연주자’라는 점에 있다. 오늘날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19세기적 비르투오지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장 먼저 벗어 던진 것이 바로 비에니아프스키였다.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같은 작품들을 잘 연주했음은 물론이고, 그가 연주하는 바흐의 ‘샤콘느’를 들은 투르게네프는 그런 종류의 작품에 관한 연주로는 당대 최고로 꼽혔던 요아힘에 필적할만하다고 말했다. 1858년 파리에서 있은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과의 역사적인 첫 듀오 공연 역시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였으며, 비오티, 멘델스존, 비외탕의 협주곡들을 지속적으로 연주했다.
“나는 비에니아프스키의 연주에 완전히 감전(感電)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는 그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따스한 톤과 억양의 풍부함, 백열(白熱)하는 기질적 특성, 완벽한 테크닉, 그리고 매혹적인 도약과 같은 요소들이 나를 거의 최면적인 흥분상태로 이끌고 갔습니다. 이때의 나날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그의 시뻘겋게 달아오른 집중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에니아프스키만큼 나에게 흥분을 안겨다 준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무도 없었습니다.”(1878년 파리에서 열린 전(全) 러시아 음악 축제에서 비에니아프스키 자신과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협연한 오케스트라의 단원 샘 프랑코(Sam Franko)의 회고 중에서)
비에니아프스키는 기본적으로 정열적이며 감정적인 풍부함을 갖춘 연주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열발산형의 연주 스타일은 쉬지 않고 이어진 공연 활동의 연속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비에니아프스키야말로 파가니니 이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은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어 연주여행을 통해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있다는 하나의 성공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런던에서 이사벨라 햄튼(Isabella Hampton)에게 구애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전설’을 그가 연주할 때면 자주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던가, 혹은 폴로네이즈의 당당한 보무(步武)에 감상자들이 의자에서 들썩이며 일어났다는 장난기 어린 일화들이 아니라도 그의 톤이 유난히 강렬하면서도 미묘한 음영의 뉘앙스로 충만했다는 사실은 곳곳의 기록과 증언으로부터 그다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연주하는 기교적인 프레이즈들은 치밀한 계산과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감정에 충실했다. 따라서 많은 경우에 음악의 흐름을 잘못 이끌기도 했지만, 당대의 어느 누구도 이것을 문제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연주하는 것을 지켜본 요하임은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바이올리니스트다. 그가 왼손으로 해내는 일들은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 술회했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지독하게 어려운 패시지에 도달해서는 항상 붉은 글씨로 ‘누군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Il faut risquer)’라고 써놓고 도전적인 전의를 불태웠다. 중략
비에니아프스키를 위한 음반 |
비에니아프스키의 작품들은 모든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위한 선택이 됨에도 불구하고 한 장의 대부분을 그의 음악에만 할애하고 있는 음반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따라서 협주곡 2번이나 두세 곡의 소품만을 연주한 음반들을 제외하고는 사실 한 장 한 장이 소중한 기록들이다. 비에니아프스키의 작품들을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혼신의 정열이 베어 있으며, 관심이 있다면 기회가 닿는 대로 들어 볼 것을 권장한다.
작곡자의 정서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하이페츠 유년의 싱싱함과 천진함을 젊은이다운 박력과 독특한 탐미성으로 결합해서 전화(轉化)시킨 레오니드 코간의 1950년을 전후한 레코딩(오리지널은 Melodiya, Arlecchino Leonid Kogan Legasy Vol.3, ARL27)이 가장 기억에 남지만 현재는 구하기 쉽지 않다. 두 곡의 마주르카와 ‘전설’ 이외에 구노의 ‘파우스트’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눈을 번쩍 뜨이게 할 정도로 강렬한 오리지널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15를 한 음반에서 들을 수 있다. 구 소련의 덜 알려진 바이올리니스트 안드레이 코르사코프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들을 모은 음반(Melodiya SUCD 10-00255)에서 ‘파우스트 환상곡’을 에른스트의 오텔로 환상곡을 비롯한 왁스만, 짐발리스트, 카스텔누오보-타데스코의 작품들과 나란히 연주하고 있다. 코간 못지 않은 강한 집중력과 자신감 있고 유창한 흐름이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른 죽음에 대한 아쉬움을 더욱 커지게 한다.
두 곡의 협주곡 모두와 몇몇 소픔들을 함께 연주한 것으로 현재 가장 널리 애호되는 음반은 세이지 오자와와 협연한 이착 펄먼의 음반(EMI, Itzhak Perlman Collection Vol.10, 4 83187 2)이다. 펄만이 자신만의 농염한 낭만성과 인간적인 따스함으로 짙게 채색해 놓은 이 음반이 부담스럽다면, 신성(新星)의 탄생을 알린 길 샤함의 음반(DG 431 815-2)도 대단히 훌륭한 선택이다. 낙소스에서는 카자흐스탄 출신의 마라 비젠갈리예프가 격찬받아 마땅한 두 장의 음반을 선보이고 있다. 폴란드 지휘자 안토니 비트와 협연한 음반(NAXOS 8.553517)에서는 두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파우스트 환상곡’을, ‘바이올린 쇼우피스’라는 제목이 붙은 다른 음반(NAXOS 8.550744)에서는 피아노 반주로 특히 비에니아프스키의 작품들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의미에서라면 상당히 강력한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루지에로 리치가 에른스트와 비에니아프스키의 에튀드를 연주한 음반(Dynamic CDS 28)은 본 시리즈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독자라면 반드시 구해서 들어보아야 할 음반이다. 비에니아프스키의 ‘에꼴 모데른’ Op.10을 모두 들을 수 있는 데다가 ‘지난 여름의 마지막 장미’ 변주곡을 제외하고는 음반을 찾기가 쉽지 않은 에른스트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여섯 개의 폴리포닉 스터디’까지 모두 수록하고 있는 유일한 음반이기 때문이다. 리치의 연주가 상당히 노쇠한 감이 느껴지고, 녹음 역시 바이올린 소리가 다소 두텁게 잡힌 감이 없진 않지만, 문헌상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19세기 비르투오조의 한 단면을 정면으로 투시하고 있는 데다가 에른스트와 비에니아프스키 사이의 음악적 친화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젊음의 청신하고 무구한 감각은 슬러와 스타카토의 교차 반복으로 점철된 에튀드에도 밝고 강한 빛을 비추었다. 파가니니 음반으로 격찬을 받은 일리아 그링골츠가 알렉산드르 뷸로프와 듀오로 연주한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에튀드-카프리스 Op.18(BIS BIS-CD-1016)이 바로 그것. 전대의 거장들보다 세련된 톤과 유연한 음악의 흐름이 새로운 세대들의 독자적인 개성을 대변한다. 두 대의 바이올린이 보다 친밀하게 얽혀 있는 연주로는 오이스트라흐 부자의 음반(DG 463 616-2)을 꼽을 수 있다. 생략---
글: 배민근(음악칼럼니스트)
https://youtu.be/ZUutlof9ke0?si=CvGb4UegfO469To_
Oistrakh plays Wieniawski Legende op.17
글출처: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