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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本文)은 논술(論述)입니다.
이번에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서문(序文)에 나오는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 易習 便於日用耳”이라는 문장(文章)을 살펴보고자 한다.
-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 불상유통
-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 고우민 유소욕언 이종부득신기정자 다의
-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 易習 便於日用耳
- 여 위차민연 신제이십팔자 욕사인인 이습 편어일용이
[筆者 註] 편의상(便宜上), 위에 인용(引用)된 문장(文章)에서 한자(漢字)의 발음(發音)은 현재(現在)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통용(通用)되는 것으로 하였다.
위에 인용(引用)된 한문(漢文)을 <월인석보(月印釋譜)> 권두(卷頭)의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에 나오는 언문(諺文)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언문(諺文)은 한문(漢文)을 당시(當時)의 조선어(朝鮮語)로 해석(解釋)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만으로 기록(記錄)한 문장(文章)이다.
- 나랏말미 듕귁에 달아 문와로 서르 디 아니
- 이런 젼로 어린 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내 제 들 시러 펴디 몯 노미 하니라
- 내 이 위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 여듧 노니 사마다 수 니겨 날로 메 뼌킈 고져 미니라
[출처=http://cafe.naver.com/azazaq.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87]
위에 인용(引用)된 언문(諺文)은 15세기(十五世紀)의 중세(中世) 조선어(朝鮮語)라고 하는데, 당시(當時)의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이 일상적(日常的)으로 사용(使用)하였던 말(語音; 口語)과 얼마만큼 다른 것일까?
다시 말하면, 15세기(十五世紀) 조선(朝鮮)에서는 i) 귀(耳)로 듣고 입(口)으로 하는 일상적(日常的)인 말(語音)과 ii) 눈(目)으로 보고 손(手)으로 쓰는 글(文字 + 文章)이 서로 얼마나 같았을까?
위에 인용(引用)된 한문(漢文)의 어순(語順)과 언문(諺文)의 어순(語順)은 분명(分明)히 똑같지 않다.
다시 말하면, 문장(文章)의 구조(構造)와 용어(用語)들이 일치(一致)하지 않는다.
당시(當時)의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이 두 가지의 어순(語順)을 모두 이해(理解)하고 일상적(日常的)으로 구사(驅使)하였다는 것으로 이해(理解)하여야 되는가?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서문(序文)을 21세기(二十一世紀) 현대(現代) 한국어(韓國語)로 해석(解釋)하면 아래와 같다.
- 나라(國)의 말(語音)이 중국(中國)과 달라서 문자(文字; 漢字)와 서로 맞지[통(通)하지] 않았다.
-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百姓)들이 이르고[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글자에) 실어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 내가 이를 불쌍히[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二十八) 글자(契字)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便安)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위에 나오는 15세기(十五世紀)의 조선어(朝鮮語)와 21세기(二十一世紀)의 한국어(韓國語)를 서로 비교(比較)하면 비슷한가? 아니면, 전혀 다른가?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서문(序文)을 해석(解釋)하는 경우(境遇)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이라는 문구(文句)에서 <사관(史觀)>에 따라 견해(見解)의 차이(差異)가 있다.
그 문구(文句)를 “조선(朝鮮) 말은 중국(中國) 말과 달라서, 두 나라(國)의 백성(百姓)들은 서로 말(語音)이 통(通)하지 않았다”고 풀이한다면 무엇이 문제(問題)되는 것일까?
두 나라(國)의 백성(百姓)들이 한자(漢字)를 알고 있다면 그 발음(發音)이 서로 다르더라도 한문(漢文) 형식(形式)의 필담(筆談)으로 기본적(基本的)인 의사소통(意思疏通)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새로운 문자(文字)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이 필요한 이유(理由)는 무엇이었을까?
당시(當時) 한자(漢字)와 한문(漢文)을 의사소통(意思疏通)에 이용(利用)하는 것이 너무 불편(不便)하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國) 백성(百姓)들의 말(語音)이 다르면 서로 대화(對話)하기 어렵다는 것은 지극(至極)히 당연(當然)한 현상(現象)인데, 과연(果然) 그것 때문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創制)되었을까?
새로운 문자(文字)가 있으면 그러한 문제(問題)가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었을까?
2010년 1월 22일 발행(發行)된 일간지(日刊紙) 조선일보(朝鮮日報)에 따르면,
“조선일보(朝鮮日報)는 1929년 신년호(新年號)에 ‘새해에는 우리 말과 글에 힘을 들이자’라는 글을 통(通)하여 문자보급운동(文字普及運動)을 펴나갈 것을 천명(闡明)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2천만(二千萬) 인구(人口) 중(中) 거의 90%에 달(達)하는 약(約) 1천7백만(一千七百萬)명(名)이 글을 모르는 문맹(文盲)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한자(漢字)와 한문(漢文)을 포함(包含)하여, 15세기(十五世紀) 중엽(中葉) 조선(朝鮮)에서 새로 만들어진 문자(文字)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이 20세기(二十世紀) 초엽(初葉)인 1929년까지도 조선(朝鮮)의 백성(百姓)들에게 골고루 보급(普及)되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 이유(理由)는 무엇이었을까?
1929년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의 문맹율(文盲率)은 거의 90%이었고, 대다수(大多數)가 자기(自己)의 ‘성명’(姓名) 또는 ‘이름’조차도 글(契)로 쓰지 못하였는데, 당시(當時) 조선일보(朝鮮日報)와 같은 신문(新聞)을 구독(購讀)하였던 백성(百姓)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던 누구이었을까?
소장파(少壯派) 훈민정음(訓民正音) 연구자(硏究者)인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김슬옹 교수(敎授)의 주장(主張)에 따르면,
“i)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이두(吏讀)와 더불어 비주류(非主流)이었지만, 조선(朝鮮)의 공식문자(公式文字)이었다. ii) 조선(朝鮮)의 법전(法典)이었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같은 국가윤리서(國家倫理書)를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풀어 써서 백성(百姓)들에게 보급(普及)하라는 구절(句節)이 있다. iii) 고종(高宗) 때까지 언문(諺文)으로 풀어 쓴 불교경전(佛敎經典)이나 의학서적(醫學書籍) 등(等)을 끊임없이 펴냈다. iv) 정조(正祖) 이후(以後)에는 임금이 백성(百姓)들에게 내리는 글(契)인 윤음(綸音)도 언문(諺文)으로 된 것을 함께 보급(普及)하였다. v) 왕실여성(王室女性)들은 공식문서(公式文書)를 언문(諺文)으로 썼다. vi)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언문(諺文)은 한문(漢文)을 익힐 시간(時間)과 경제력(經濟力)이 없는 하층(下層) 백성(百姓)들이 주(主)로 썼던 하층(下層) 언어(言語)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1929년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의 문맹율(文盲率)을 어떻게 이해(理解)하여야 하는가?
당시(當時) 백성(百姓)들의 일상생활(日常生活)에서 문자(文字)의 필요성(必要性)이 없었을까?
위와 같은 의문(疑問)들을 제기(提起)하면서 본론(本論)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오늘날 대륙사관(大陸史觀)의 대두(擡頭)로 역사연구자(歷史硏究者)들에게 비교적(比較的) 알려진 내용(內容)이지만,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서문(序文)에 관련(關聯)된 논점(論點) 몇 가지를 필자(筆者)가 정리(整理)하면 다음과 같다.
1. ‘國之語音’(국지어음)의 ‘國’(국)은 조선(朝鮮)을 말하는데, 구체적(具體的)으로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제후국(諸侯國)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故愚民’(고우민)의 ‘民’(민)은 조선(朝鮮)의 백성(百姓)들이다.
조선(朝鮮)의 중앙조정(中央朝廷) 또는 중조(中朝)가 봉지(封地)를 부여(附與)한 제후(諸侯)의 나라(國)를 ‘소화’(小華)라고 한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조선(朝鮮)에는 1천7백여(一千七百餘) 개(個)의 나라(國)가 모여 있다고 한다. 각(各) 나라(國)가 ‘소화’(小華)인 것이다.
그 지역(地域)의 크기는, 행정단위(行政單位)로 말하면, 군(郡)이나 현(縣)이 될 수 있고 더 작은 단위(單位)일 수 있다.
2. ‘異乎中國’(이호중국)의 ‘中國’(중국) 또한 조선(朝鮮)을 말하는데, ‘명’(明) 나라(國)를 이르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具體的)으로 대륙조선(大陸朝鮮)의 황제국(皇帝國)을 말한다.
‘두산동아’(斗山東亞) 출판사(出版社)의 <옥편(玉篇)>에 따르면, ‘異乎中國’(이호중국)의 ‘乎’(호)는 ‘~에’ 또는 ‘~보다’라는 뜻이다.
본래(本來)의 중국(中國)은 중토(中土), 중원(中原), 중방(中邦), 중주(中州), 중화(中華)라는 낱말들과 같은 뜻이다.
‘中國’(중국)이라는 명칭(名稱)은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辛亥革命) 이전(以前)까지 특정(特定)한 ‘나라 이름’(國名)은 아니었고, ‘땅 이름’(地名)과 다름이 없었다.
‘異乎中國’(이호중국)의 ‘中國’(중국)은 ‘좁은 뜻(狹義)의 중국(中國)’을 말하고, 조선(朝鮮)의 중심(中心) 지역(地域) 곧 대륙조선(大陸朝鮮)의 3경(三京)과 그 주변(周邊) 지역(地域)을 가리킨다. 그곳을 경기(京畿)라고도 말하며, 요즘의 말로는 수도권(首都圈)이라고 한다.
경조(京兆)는 경사(京師) 또는 한사(漢師)라고 하는데, ‘천자(天子)가 머무는 땅’ 또는 ‘천자(天子)가 직접(直接) 다스리는 지역(地域)’을 말한다.
이를 ‘신주’(神州)라고도 하며, ‘좁은 뜻(狹義)의 중국(中國)’에 포함(包含)된다.
그리고 ‘넓은 뜻(廣義)의 중국(中國)’은 세계(世界)의 중심(中心) 지역(地域)인 조선(朝鮮) 전역(全域)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모든 제후국(諸侯國)들이 포함(包含)되며, 조선(朝鮮) 전역(全域)을 ‘9주’(九州)라고도 한다.
신주(神州)에 8역(八域)을 더하면 ‘9주’(九州)가 된다. 그리고 천자(天子) 또는 황제(皇帝)가 제후(諸侯)들을 두고 통치(統治)하는 지역(地域)을 ‘4해’(四海)라고 한다. 따라서 9주(九州)와 4해(四海)의 중심(中心)은 신주(神州)이다.
4해(四海)는 <산해경(山海經)>의 해내동경(海内東經), 해내서경(海内西經), 해내남경(海内南經), 해내북경(海内北經)에 나오는 지역(地域)을 말하며, 신주(神州)는 <산해경(山海經)>의 해내경(海內經) 별권(別卷)에 나온다.
한편, <산해경(山海經)>의 해외동경(海外東經), 해외서경(海外西經), 해외남경(海外南經), 해외북경(海外北經)에 나오는 지역(地域)은 이른바 ‘오랑캐’들이 살고 있는 곳이며, 천자(天子)가 통치(統治)하지 않는 지역(地域)이다.
‘넓은 뜻(廣義)의 중화(中華)’는 유학(儒學)의 중용사상(中庸思想)을 바탕으로 ‘소화’(小華)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혹자(或者)는, 중국(中國)의 위치(位置)를 오늘날의 ‘중앙(中央) 아시아(Asia)’ 지역(地域)으로 비정(比定)하기도 한다.
혹자(或者)는, 명(明)과 청(淸)의 본래(本來) 명칭(名稱)은 명조선(明朝鮮)과 청조선(淸朝鮮)이라고 주장(主張)한다. 명(明)과 청(淸)은 모두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일원(一員)이라는 뜻이다.
혹자(或者)는, 명(明)과 청(淸)은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중앙조정(中央朝廷) 또는 중조(中朝)를 가리킨다고 주장(主張)한다.
3. ‘與文字’(여문자)의 ‘文字’(문자)는 이른바 ‘漢字’(한자)인데, 그것은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문자(文字)를 말하며, ‘漢字’(한자)는 곧 ‘韓字’(한자)이다.
그리고 ‘漢字’(한자)를 ‘동방문자’(東方文字)라고 부를 수 있다.
4. 대륙조선(大陸朝鮮)에서는 제후국(諸侯國)들 곧 지방(地方)의 고을마다 문자(文字) 곧 한자(漢字; 韓字)의 소리(語音; 發音)가 서로 달라서 언어소통(言語疏通)에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한자(漢字)의 ‘표준발음’(標準發音)을 만들기 위하여 15세기(十五世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년~1450년) 때에 ‘발음부호’(發音符號)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創制)되었다.
위와 같이 대략적(大略的)으로 정리(整理)할 수 있는데,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서문(序文)을 해석(解釋)하기 위해서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정인지(鄭麟趾)의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序文)을 함께 살펴볼 필요(必要)가 있다.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에 따르면,
“i) 대개(大蓋) 외국(外國)의 말(語)은 그 소리(聲)는 있어도 글자(字; 契字)가 없으므로 중국(中國)의 글자(字; 契字)를 빌어서 그 일용(日用)에 통(通)하게 되었다. ii) 우리(吾) 동방(東方)의 예악문물(禮樂文物)이 화하(華夏)에 견주게 되었으나, 다만 방언(方言)과 이어(俚語; 통속 언어)만이 같지 않다. iii) 옛날에 신라(新羅)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民間)에서 지금(只今)까지 이를 행(行)하고 있지만, 모두 글자(字; 契字)를 빌어서 쓰는 것이다”라는 내용(內容)이 나온다.
바로 위에 인용(引用)된 내용(內容)을 살펴보면,
외국(外國), 중국(中國), 화하(華夏), 동방(東方), 신라(新羅)라는 명칭(名稱)이 나온다.
일반적(一般的)으로, 화하(華夏)는 중국(中國) 또는 중화(中華)의 다른 이름(別稱)이라고 한다.
여기서 외국(外國)은 어느 지역(地域)의 나라들을 가리키는 것일까?
중국(中國) 지역(地域) 밖에 있는 모든 나라들을 말하는가?
외국(外國)은 외지(外地)이고, 중국(中國)은 내지(內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외국(外國)의 말(語)은 그 소리(聲; 發音)는 있어도 글자(字; 契字)가 없어서 ‘중국(中國)의 글자(字; 契字)’를 빌어서 썼다고 한다.
중국(中國) 지역(地域) 밖에 있는 지구상(地球上)의 모든 나라들을 외국(外國)이라고 본다면 모순(矛盾)이 생긴다. 왜냐하면 고유(固有)의 글자(字; 契字)를 가진 나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상(地球上)의 모든 나라들이 ‘중국(中國)의 글자(字; 契字)’를 빌어서 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中國)의 글자(字; 契字)’라는 것은,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의 서문(序文)에 따르면 ‘中國之字’(중국지자)인데 곧 ‘漢字’(한자)를 가리킨다.
신라(新羅)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만든 이두(吏讀)는 무엇인가?
그것은 ‘漢字’(한자)를 빌어서 쓴 것이었다. 왜(倭)의 ‘만요-가나’(万葉仮名; まんようがな)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理由)는 고유(固有)의 문자(文字)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設令), 고유(固有)의 문자(文字)가 있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기능(機能)을 발휘(發揮)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의 서문(序文)에서도 언급(言及)된 것이지만,
신라(新羅)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만든 이두(吏讀)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創制)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에서도 널리 사용(使用)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史實)이다.
그렇다면 중국(中國)의 글자(字; 契字) 곧 한자(漢字)를 빌어서 썼던 신라(新羅), 왜(倭), 조선(朝鮮)은 모두 외국(外國)에 포함(包含)되는 것인가?
그리고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序文)에 나오는 ‘동방’(東方)은 곧 조선(朝鮮)을 말하는데, 중국(中國)과 다른 것인가?
만약(萬若) 동방(東方)이 중국(中國)과 다르다면, 외국(外國)을 가리키는 것인가?
<대륙사관(大陸史觀)>의 일설(一說)에 따르면,
동(東)쪽의 기준(基準)은 대륙(大陸)의 천산(天山)인데, 동방(東方)은 조선(朝鮮)과 다름이 없으며, 넓은 뜻(廣義)의 중국(中國), 중원(中原), 중토(中土), 중주(中州), 중화(中華)를 가리킨다고 한다. 또한 동국(東國), 해동(海東), 대동(大東)이라는 낱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즉(卽) 동방(東方), 동국(東國), 해동(海東), 대동(大東)은 한반도(韓半島)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위에 인용(引用)된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序文)에 따르면,
동방(東方)과 화하(華夏)는 서로 비교(比較)되고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동방(東方)이 곧 화하(華夏)이고 넓은 뜻(廣義)의 중국(中國)이라면, 굳이 똑같은 것을 서로 비교(比較)할 필요(必要)가 있었을까?
가령(假令), 좁은 뜻(狹義)의 중국(中國) 곧 대륙조선(大陸朝鮮)의 황제국(皇帝國)과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모든 제후국(諸侯國)들을 서로 비교(比較)하였다면 납득(納得)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하(華夏)는 황제국(皇帝國)이고 동방(東方)은 제후국(諸侯國)이라면 이해(理解)된다는 뜻이다.
동방(東方)과 화하(華夏)는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만이 서로 같지 않다고 한다. 그것들을 제외(除外)한 나머지는 똑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자(漢字)라는 문자(文字)는 공통(共通)이었다는 뜻이다.
방언(方言)은 지방(地方)의 ‘사투리’를 말하는데, 사전적(辭典的)으로는, 하나의 언어(言語)에 있어서 사용(使用) 지역(地域) 또는 사회(社會) 계층(階層)에 따라 분화(分化)된 말의 체계(體系)를 가리킨다.
사투리 또는 방언(方言)이라는 것은 표준어(標準語)에 대응(對應)하는 낱말인데, 만약(萬若) 공통(共通)의 표준어(標準語)가 없다면, 각(各) 지역(地域)에서 사용(使用)되는 언어(言語)는 모두 사투리 또는 방언(方言)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어(俚語)는 이언(俚言)이라고도 하는데, ‘통속(通俗) 언어(言語)’ 또는 ‘항간(巷間)에 떠돌며 쓰이는 속(俗)된 말’을 뜻한다. 욕(辱) 또는 욕설(辱說)과 같은 ‘비속어’(卑俗語)가 이것에 속(屬)한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序文)의 일부(一部)를 살펴본 바에 따르면 몇 가지 의문(疑問)이 제기(提起)되는데,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傘下) 조선사편찬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 또는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교열(校閱)되거나 날조(捏造)된 위서(僞書)일까?
조선사편찬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는 1916년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로 발족(發足)하였으며, 1925년 일본왕(日本王)의 칙령(勅令)에 의(依)하여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명칭(名稱)이 바뀌면서 독립(獨立)된 관청(官廳)으로 격상(格上)되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훈민정음(訓民正音)에 관(關)하여 더 살펴보고자 한다.
<대륙사관(大陸史觀)>의 일설(一說)에 따르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초기(初期) 수도(首都) 또는 경도(京都)는 지금(只今)의 서안(西安; 시안) 곧 옛날의 장안(長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후기(後期) 수도(首都)는 선조(宣祖, 1552년~1608년) 때를 전후(前後)하여 지금(只今)의 무한(武漢; 우한)으로 천도(遷都)하였으며, 그곳이 당시(當時)의 한양(漢陽)이었다. 또한 지금(只今)의 남경(南京; 난징)과 함께 양경(兩京)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史實)이라면, 늦어도 15세기(十五世紀) 세종대왕(世宗大王) 때에, 한자(漢字)의 표준(標準) 발음(發音)은 당시(當時) 장안(長安) 지역(地域)의 그것과 똑같았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문자(文字)보다 어음(語音)이 먼저 존재(存在)하였으므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創制)되기 이전(以前)에, ‘좁은 뜻(狹義)의 중국(中國)’에서는 한자(漢字)의 표준발음(標準發音)이 사용(使用)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15세기(十五世紀)의 장안어(長安語)가 당시(當時) 대륙조선(大陸朝鮮)의 표준어(標準語)이었던 셈이다. 이른바 ‘중원아음’(中原雅音) 곧 중국(中國) 본토(本土)의 정음(正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통화(普通話; 푸퉁화)와 광동어(廣東語; 꽝뚱위)와 같은 지금(只今)의 중국어(中國語)는 조선어(朝鮮語)의 방언(方言)이 되는 것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14세기(十四世紀)에는 대륙(大陸)의 화중(華中)과 화북(華北) 지방(地方)에 직업(職業)과 계층(階層)과는 관계(關係) 없이 두루 통용(通用)되는 공통어(共通語)가 있었고, 이를 ‘중원아음’(中原雅音)이라고 한다. 나중에 이러한 공통어(共通語)가 다른 지방(地方)에도 확산(擴散)되었고, 이를 ‘관화’(官話)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중국어(中國語) 음운사(音韻史)에서는 자음(字音) 곧 한자(漢字)의 음운(音韻)과 어음(語音)의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지금까지 어음사(語音史)에 속(屬)하는 것은 전(傳)하는 것이 없고, 자음사(字音史)에 관(關)한 자료(資料)만이 전(傳)하고 있다고 한다.
즉(卽) 운서(韻書)나 운도(韻圖)에서 보여주는 음운체계(音韻體系)는 어디까지나 중국(中國) 각(各) 시대(時代)의 자음(字音)에 관(關)한 체계(體系)일 뿐, 실제(實際)로 사용(使用)되고 있던 어음(語音)의 체계(體系)는 아니다. 따라서 중국어(中國語) 음운사(音韻史)는 자음(字音)의 역사(歷史)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중국(中國) 한자음사(漢字音史)의 시대(時代) 구분(區分)은 학자(學者)에 따라 다르나 대략(大略), 상고음(上古音), 중고음(中古音; 隋-唐代 音), 근고음(近古音; 宋代 音), 근대음(近代音; 元代 以後 音), 현대음(現代音) 등(等)으로 구분(區分)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韓國) 자음(字音) 곧 한국식(韓國式) 한자(漢字) 음운(音韻)의 모태(母胎)는 중국(中國)의 각(各) 시대(時代) 음(音)이 끊임없이 전래(傳來)되어 형성(形成)된 것이지만, 가장 큰 바탕이 된 것은 ‘당대(唐代)의 장안음(長安音)’인 것으로 인정(認定)되고 있다고 한다.
바로 위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어음’(語音)과 ‘자음’(字音)이 구별(區別)되고 있다.
자음(字音)은 ‘한자(漢字)의 음운(音韻)’을 말하는데, 어음(語音)은 무엇인가?
어음(語音)은 입(口)으로 소리(聲)를 내거나, 귀(耳)로 들을 수 있는, 실제(實際) 발음(發音)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대륙조선(大陸朝鮮)의 각(各) 지역(地域)마다 한자(漢字)의 어음(語音)이 달랐다는 사실(事實)을 상기(想起)할 필요(必要)가 있다.
운서(韻書)나 운도(韻圖)에서 보여주는 음운체계(音韻體系)는 ‘자음’(字音)에 관(關)한 체계(體系)일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음(語音)과 자음(字音)이 일치(一致)하지 않는 경우(境遇)가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推測)된다.
그러므로 어음(語音)과 자음(字音)의 정확(正確)한 일치(一致)를 목표(目標)로 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새로운 ‘표음문자’(表音文字)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중국대륙(中國大陸)의 사투리 또는 방언(方言)은 매우 다양(多樣)하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현대(現代) 중국어(中國語)는 8대(八大) 방언계(方言系)로 크게 나뉜다고 한다.
그리고 각(各) 방언(方言)의 문법(文法)과 어휘(語彙)는 대체(大體)로 일치(一致)하고 어음(語音)은 서로 대응관계(對應關係)에 있지만, 차이(差異)가 심(甚)하여 외국어(外國語)처럼 서로 통(通)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한 현상(現狀)은 광활(廣闊)한 대륙(大陸)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유구(悠久)한 세월(歲月) 속에서 자연(自然)스럽게 형성(形成)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설령(設令)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모든 백성(百姓)들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사용(使用)하였다 하더라도, 지역별(地域別)로 자연(自然)스럽게 형성(形成)되었던 다양(多樣)한 방언(方言)들이 완전(完全)히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방언(方言)을 사용(使用)하는 백성(百姓)들이 지구상(地球上)에서 모두 사라져야 비로소 그 방언(方言) 자체(自體)가 없어지는 것이며, 문자(文字)의 유무(有無)와 직접(直接) 관계(關係)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萬若), 그 백성(百姓)들이 자기(自己)들 방언(方言)의 어음(語音)을 ‘소리가 나는 그대로’ 표음문자(表音文字)를 이용(利用)하여 어딘가에 기록(記錄)해두었다면 그 방언(方言)의 흔적(痕跡)은 남을 수 있다.
15세기(十五世紀) 당시(當時) 훈민정음(訓民正音) 또는 표준발음(標準發音)이었던 장안어(長安語)를 대신(代身)하여, 지금(只今)은 북경(北京; 베이징) 지역(地域)의 발음(發音)이 중국대륙(中國大陸)의 표준어(標準語) 또는 공통어(共通語)로 사용(使用)되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오늘날의 중국대륙(中國大陸) 전역(全域)만이 아니라, 한반도(韓半島)와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사용(使用)되는 한자(漢字)의 발음(發音)도 똑같지 않다.
그 이유(理由)가 무엇이었든, 똑같은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 국가(國家)인 지금(只今)의 대한민국(大韓民國=南韓)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北韓),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中國), 중화민국(中華民國=臺灣), 일본국(日本國) 사이에서 공통(共通)되는 문자(文字)인 한자(漢字)의 발음(發音)이 지금(只今)까지도 통일(統一)되어 있지 않다.
한국인(韓國人)이 중국어(中國語)나 일본어(日本語)를 학습(學習)할 때에 느끼는 불편(不便)이나 번거로움은 주(主)로 이러한 문제(問題)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에 현실적(現實的)으로 한자(漢字) 발음(發音)을 통일(統一)할 수 있을까?
21세기(二十一世紀)에도 불가능(不可能)한 일을 15세기(十五世紀)에는 가능(可能)하였을까?
다만, 한자(漢字)의 모양(模樣) 곧 자체(字體)의 통일(統一)은 관련(關聯) 국가(國家)들이 서로 협력(協力)하면 가능(可能)할 수 있다.
한편, 중국어(中國語)에 성조(聲調)가 발달(發達)한 이유(理由)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가 많은 한자(漢字; 韓字)만을 사용(使用)하여 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예(例)를 들면, 중국대륙(中國大陸) 북방(北方)의 북경(北京; 베이징) 어음(語音)을 표준(標準)으로 규정(規定)한 보통화(普通話; 푸퉁화)는 4성(四聲)이지만, 중국대륙(中國大陸) 남방(南方)의 광동어(廣東語; 꽝뚱위)는 8성(八聲) 또는 9성(九聲)이 사용(使用)된다고 한다.
그래서, “사방(四方)의 풍토(風土)가 구별(區別)되므로 소리(聲)의 기운(氣運) 또한 다르게 된다”는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序文)의 내용(內容)이 떠오르는 것이다.
본래(本來)의 한자(漢字)는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으로 이루어지는 4성(四聲) 체계(體系)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국어(中國語)에서는 ‘입성’(入聲)이라는 성조(聲調)를 발음(發音)할 수 없다.
게다가, 오늘날의 한국어(韓國語)와 일본어(日本語)에서 한자(漢字)의 성조(聲調)는 거의 무시(無視)되고 있다. 그 이유(理由)는 중국어(中國語)보다는 그 중요성(重要性)이나 필요성(必要性)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하여간(何如間),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세종대왕(世宗大王) 25년(1443년)에는 새로운 문자(文字) 곧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創制)되었으므로,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문자(文字)는 전통적(傳統的)인 ‘漢字’(한자)와 더불어 2가지로 되었다.
그런데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創制) 이후(以後)에도 계속(繼續)하여 구결(口訣)을 포함(包含)한 ‘넓은 뜻(廣義)의 이두(吏讀)’가 조선(朝鮮)의 관부(官府)와 민간(民間)에서 널리 사용(使用)되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의문(疑問)이다.
그 이유(理由)는 무엇일까?
오랜 전통(傳統)이었으므로 쉽게 바꾸지 못하였을까?
백성(百姓)들이 종래(從來)의 한자(漢字)와 이두(吏讀)를 지속적(持續的)으로 사용(使用)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일상적(日常的)으로 이용(利用)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문자(文字)가 무슨 소용(所用)이 있었을까?
예(例)를 들면, 적어도 백성(百姓)들이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이라는 한문(漢文)을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 불상유통”이라고 말하거나 글(契; 書)로 표현(表現)하여야 ‘표준발음’(標準發音)이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모든 지방(地方)에 조속(早速)히 정착(定着)되지 않겠는가?
당시(當時)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적극적(積極的)으로 이용(利用)되지 않는다면, 광활(廣闊)한 대륙(大陸)의 각(各) 지방(地方)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使用)되었던 한자(漢字)의 음운(音韻)이 ‘표준발음’(標準發音)으로 통일(統一)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서문(序文)에 나오는 ‘문자(文字) 창제(創制)의 취지(趣旨)’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아무튼, 훈민정음(訓民正音)에 관(關)하여 여러 의문(疑問)이 제기(提起)된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실제(實際)로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모든 지방(地方)에 골고루 보급(普及)되었을까? 아니면, ‘좁은 뜻(狹義)의 중국(中國)’에서만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사용(使用)되었을까?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써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전역(全域)에서 어리석은 백성(百姓)들의 언어소통상(言語疏通上) 어려움이 실제(實際)로 얼마만큼 해소(解消)되었을까?
결론적(結論的)으로,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입장(立場)에서 살펴보면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序文)의 당초(當初) 취지(趣旨)가 무색(無色)하다고 말할 수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一字一音’(1자1음) 즉(卽) 하나의 한자(漢字)를 하나의 음운(音韻)으로 나타낼 때에 매우 적합(適合)한 문자(文字)이다.
초성(初聲), 중성(中聲), 종성(終聲)으로 나뉘지만, 하나의 음운(音韻)으로 발음(發音)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초성자(初聲字)와 종성자(終聲字)는 같은 문자(文字)로 표기(表記)할 수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創制)되기 이전(以前)에는 한자(漢字)의 발음(發音)을 표기(表記)하기 위하여 ‘反切’(반절)이라는 방법(方法)을 사용(使用)하였는데, 다른 2개(二個)의 한자(漢字)로 표기(標記)하면서도 그 발음(發音)은 각각(各各) 절반(折半)씩 취(取)하여 합(合)치는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 <옥편(玉篇)>, <강희자전(康熙字典)> 등(等)에서 ‘反切’(반절)이 사용(使用)되었다고 한다. ‘反切’(반절)을 ‘切音韻’(절음운)이라고도 한다.
예(例)를 들면, 자전(字典)에서 ‘北’(북)이라는 글자(契字)는 ‘博墨切’(박묵절)이라고 표기(標記)되면서도, 그 발음(發音)은 ‘博’(박)의 초성(初聲) ‘ㅂ’에 ‘墨’(묵)의 중성(中聲) ‘ㅜ’와 종성(終聲) ‘ㄱ’을 더하여 ‘북’으로 하는 것이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反切’(반절)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초성(初聲), 중성(中聲), 종성(終聲)을 합(合)하면 하나의 글자(契字)를 이룬다는 것에서 유래(由來)한다는 뜻이다.
또한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反切法’(반절법)은 중국(中國)의 음운학(音韻學) 용어(用語)인데 불교(佛敎)와 함께 전래(傳來)된 범자(梵字)의 표음법(表音法)을 응용(應用)한 것이다.
‘東, 德紅(反切)’과 같이 ‘德’(덕)의 성모(聲母)[t][ㄷ]와 ‘紅’(홍)의 운모(韻母)[uŋ][ㅗ + ㅇ]에 의(依)하여 ‘東’[tuŋ][동]이란 자음(字音)을 표시(表示)하도록 되어 있다.
반절(反切) 가운데 성모(聲母)로 표시(表示)되는 글자(契字)를 ‘반절상자’(反切上字)라 하며, 운모(韻母)로 표시되는 글자(契字)를 ‘반절하자’(反切下字)라 한다.
그런데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創制)된 이후(以後)에 적지 않은 세월(歲月)이 흘렀는데도 불구(不拘)하고, 1716년 청조선(淸朝鮮)에서 간행(刊行)되었던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 ‘反切’(반절)을 대체(代替)할 수 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사용(使用)되지 않은 이유(理由)는 무엇일까?
현재(現在)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中國)에서는 1958년에 만들어진 ‘한어병음’(漢語拼音; 汉语拼音)이라는 발음(發音) 표기법(表記法)이 사용(使用)되고 있다. 이것은 한자(漢字) 발음(發音)을 ‘로마 문자’(Roma 文字; Roman Alphabet; Latin Alphabet)로 표기(表記)하는 발음부호(發音符號)이다.
오늘날 중국어(中國語)의 한자(漢字) 발음(發音)은 <강희자전(康熙字典)>에 나오는 ‘反切’(반절)과 대부분(大部分)이 다르다.
[筆者 註] ‘민중서림’(民衆書林)의 ‘漢韓大字典’(한한대자전)에는 각(各) 한자(漢字)마다 ‘반절’(反切)과 ‘한어병음’(漢語拼音; 汉语拼音)이 모두 표기(表記)되어 있으므로, 이를 확인(確認)할 수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야말로 한자(漢字; 韓字)의 진정(眞正)한 발음부호(發音符號)인데도, 지금도 중국대륙(中國大陸)에서 그것이 제대로 활용(活用)되지 못하는 이유(理由)는 무엇일까?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역사(歷史)를 중국대륙(中國大陸)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어서 그럴까?
지금(只今)의 중국어(中國語)는 ‘一字一音’(1자1음)의 규칙(規則)을 그대로 적용(適用)할 수 없는 상태(狀態)이다.
설령(設令), 지금(只今)에 와서 중국어(中國語)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활용(活用)된다 하더라도, 단순(單純)한 표음문자(表音文字)에 불과(不過)하며, 본래(本來)의 목적(目的)을 이미 상실(喪失)하였기에 큰 의미(意味)는 없다고 보인다.
필자(筆者)는,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집현전(集賢殿) 학자(學者)들이 고전(古篆)을 모방(模倣)하여 만든 훈민정음(訓民正音)이야말로 28자(二十八字)만으로도 쓰지 못하는 소리(聲)가 없기 때문에, ‘언문일치’(言文一致) 즉(卽) ‘말’(語音; 口語)과 ‘글’(文字; 文語)을 일치(一致)시키는데 매우 유용(有用)한 글자(契字)라고 본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언문일치(言文一致)는 일상적(日常的)으로 쓰이는 말(口語)과 문장(文章)의 용어(用語) 및 구조(構造)가 일치(一致)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한국(韓國) 최초(最初)의 국한문(國漢文) 혼용체(混用體)인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1865년) 서문(序文)에 ‘언문일치’(言文一致) 주장(主張)이 처음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국한문(國漢文) 혼용체(混用體)는 순수(純粹)한 조선어(朝鮮語)만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표기(表記)하고, 나머지는 한자(漢字)로 표기(表記)하는 방법(方法)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1445년(世宗 27年)에 편찬(編纂)되어 1447년(世宗 29年)에 간행(刊行)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1447년(世宗 29年)에 편찬(編纂)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초기(初期) 형태(形態)를 볼 수 있다.
1459년(世祖 5年)에 간행(刊行)된 <월인석보(月印釋譜)> 권두(卷頭)에 실린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혹시(或是)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와 같은 책(冊)들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傘下) 조선사편찬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 또는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교열(校閱)되거나 날조(捏造)된 위서(僞書)는 아닐까?
이 부분(部分)은 앞으로 더 연구(硏究)할 가치(價値)가 있다고 보인다.
위에 열거(列擧)된 책(冊)들이 위서(僞書)가 아님을 전제(前提)로 하여 더 살펴보고자 한다.
한문(漢文)을 언문(諺文)으로 바꾸는 것은 구어(口語)의 어순(語順)과 같게 만드는 ‘구조’(構造)의 일치(一致)이며, 단순(單純)히 ‘용어’(用語)만을 일치(一致)시키는 것과 차원(次元)이 다른 것이다.
모든 용어(用語)들까지 당시(當時)의 일상적(日常的)인 말(口語)과 완전(完全)히 일치(一致)한 것은 아니지만, 그 때부터 조선(朝鮮)에서는 새로운 문자(文字)에 의(依)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움직임이 시작(始作)되었다고 생각된다.
언문(諺文)은 한문(漢文)에 대응(對應)하는 낱말이고, 정음(正音)은 반절(反切) 곧 음운(音韻) 또는 절운(切韻)에 대응(對應)하는 낱말이다.
언문(諺文)은 한자(漢字)가 아니라 훈민정음(訓民正音)만으로 작성(作成)된 구어체(口語體) 문장(文章)이고, 한문(漢文)은 한자(漢字)만으로 구성(構成)된 문어체(文語體) 문장(文章)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말(語音; 口語)을 ‘소리(聲)가 나는 그대로’ 글(文字; 契)로 나타낼 수 있는 혁신적(革新的) 수단(手段)이다.
비록 완전(完全)한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創造)된 것은 아니지만, 다소(多少)의 신규성(新規性)과 진보성(進步性)이 인정(認定)되는 새로운 표음문자(表音文字)이다.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의 서문(序文)에 따르면, “글자(契字)는 고전(古篆)을 모방(模倣)하였다”고 하는데, 훈민정음(訓民正音)과 같은 새로운 문자(文字)가 더 일찍이 고려(高麗) 시대(時代)에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理由)는 무엇일까?
당시(當時)에는 새로운 문자(文字)의 필요성(必要性)이 없었을까?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의 서문(序文)에 따르면, “바람(風) 소리(聲)와 학(鶴)의 울음(唳)이든지, 닭(雞)의 울음(鳴)이나 개(狗)의 짖음(吠)까지도 모두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표현(表現)해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종래(從來)의 한자(漢字)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분명(分明)히 ‘아니오’이다.
물론(勿論)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반절’(反切)이라는 종래(從來)의 방법(方法)을 대체(代替)할 수 있는, ‘한자(漢字; 韓字)의 발음부호(發音符號)’ 또는 ‘정음’(正音)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重要)한 것은, 지금(只今)의 한국어(韓國語)와 같은 언어(言語) 체계(體系)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이야말로 ‘언문일치’(言文一致)를 가능(可能)하게 만드는 훌륭한 문자(文字)라는 사실(事實)이다.
예(例)를 들면,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서문(序文)에 나오는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이라는 한문(漢文)을 “중국(中國)과 달리, 나라(國)의 말(語音)이 문자(文字; 漢字)와 서로 맞지[통(通)하지] 않았다”고 해석(解釋)한다면, 당시(當時)의 중국(中國) 지역(地域)은 종래(從來)의 한자(漢字)와 한문(漢文)만으로도 문제(問題)가 전혀 없었다는 뜻인가?
혹시(或是), 좁은 뜻(狹義)의 중국(中國) 곧 대륙조선(大陸朝鮮)의 황제국(皇帝國)은 언문일치(言文一致)이었는데,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모든 제후국(諸侯國)들은 그렇지 않았을까?
예(例)를 들어,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이라는 한문(漢文)을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 불상유통”이라고 말하거나 글(契; 書)로 쓰기 위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만들어졌을까?
그러한 방식(方式)이라면, 어리석은 백성(百姓)들이 새로운 문자(文字)를 이용(利用)하여 다른 백성(百姓)들에게 자기(自己)들의 뜻(語義)이 담긴 말(語音)을 제대로 전달(傳達)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모든 지방(地方)에서 소통(疏通)되는 언문일치(言文一致) 방식(方式)이었을까?
다른 예(例)를 들면, “國국之지語어音음 異이乎호中중國국 與여文문字자 不불相상流유通통”이라고 표현(表現)하기 위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만들어졌을까?
어리석은 백성(百姓)들이 실제(實際)로 그렇게 말하거나 글(契; 書)로 썼을까?
그리고, 그 뜻(語義)도 잘 이해(理解)할 수 있었을까?
또 다른 예(例)를 들면, “國之語音이 異乎中國야 與文字로 不相流通”라고 어리석은 백성(百姓)들이 실제(實際)로 표현(表現)하였을까?
이것은 유식(有識)한 선비들이 한문(漢文) 서적(書籍)을 낭독(朗讀)하는 방식(方式)이다.
더 나아가서, “나랏말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르 디 아니”라고 표현(表現)하였다면 어떨까?
이것이 바로 ‘국한문(國漢文) 혼용체(混用體)’의 초기(初期) 사례(事例)는 아닐까?
물론(勿論) 이에 앞서 열거(列擧)한 것들보다는 그 뜻(語義)을 이해(理解)하거나 그 말(語音)을 전달(傳達)하기에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혹시(或是) 어리석은 백성(百姓)들이 ‘中國’과 ‘文字’라는 한자(漢字)의 발음(發音)을 모르면, 자기(自己)들의 말(語音)을 그대로 전달(傳達)할 때에 약간(若干)의 문제(問題)가 발생(發生)할 수 있다.
생각건대,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이라는 한문(漢文)을 “나랏말미 듕귁에 달아 문와로 서르 디 아니”라는 언문(諺文)으로 표현(表現)한다면, 어리석은 백성(百姓)들이 한자(漢字)나 한문(漢文)을 모르더라도 그 뜻(語義)을 이해(理解)하거나 다른 백성(百姓)들에게 그 말(語音)을 그대로 전달(傳達)할 때에 매우 편리(便利)하였을 것이다.
완벽(完璧)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시범(示範) 사례(事例)라고 보인다.
이로써 “國之語音(국지어음) 與文字(여문자) 相流通(상유통)”이라는 표현(表現)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나라(國)의 말(語音; 口語)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새로운 문자(文字)와 서로 잘 맞게[통(通)하게] 된다는 뜻이다.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의 서문(序文)에 따르면, “智者不崇朝而會(지자불숭조이회), 愚者可浹旬而學(우자가협순이학)”이라고 한다.
슬기로운 사람(智者)은 아침(朝)나절이 다 지나가기 전(前)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이해(理解)할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愚者)도 열흘(旬; 十日)만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한편,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는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을까?
그 책(冊)이 한문(漢文)과 언문(諺文)을 함께 또는 언문(諺文)만으로 작성(作成)된 까닭은 무엇일까?
어리석은 백성(百姓)들이 한자(漢字)나 한문(漢文)을 모르더라도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를 읽어보면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원리(原理)을 이해(理解)할 수 있도록 조선(朝鮮)의 중앙조정(中央朝廷)에서 배려(配慮)한 것이라고 보인다.
오늘날의 한국어(韓國語)는, 일제시대(日帝時代)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정리(整理)하여 만든, 이른바 ‘한글’(韓契?)을 바탕으로 언문일치(言文一致)를 이루고 있다.
‘한글’ 전용(專用) 때문에 일반인(一般人)들이 한문(漢文) 고전(古典)을 해독(解讀)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主張)하는 학계(學界) 일각(一角)의 비판(批判)도 있지만, ‘한글’ 사용(使用)은 한반도(韓半島) 국가(國家)에 성공적(成功的)으로 정착(定着)되었다.
게다가, 고유(固有) 문자(文字)가 없는 외국(外國)에도 ‘한글’을 보급(普及)하는 수준(水準)에 이르렀다.
만약(萬若) 21세기(世紀) 현재(現在)까지도 한반도(韓半島)에서 종래(從來)의 한문(漢文)만이 사용(使用)되고 있다면 얼마나 불편(不便)하겠는가?
어리석은 백성(百姓)들에게는 언문불일치(言文不一致)로 인(因)한 고통(苦痛)이야말로 심각(深刻)한 것이다.
결론적(結論的)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낱말은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를 규명(糾明)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키워드(Keyword)라고 볼 수 있다.
(이하, 참고 자료)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序文)
번역문(飜譯文)
예조판서(禮曹判書) 정인지(鄭麟趾)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소리(聲)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天地自然)의 글(文)이 있기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聲)로 인하여 글자(字; 契字)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情)을 통(通)하였다. 이는 삼재(三才)의 도리(道理)를 기재(記載)하여 뒷세상(後世)에서 변경(變更)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그러나 사방(四方)의 풍토(風土)가 구별(區別)되므로 소리의 기운(氣運)도 또한 다르게 된다. 대개(大蓋) 외국(外國)의 말은 그 소리(聲)는 있어도 글자(字)가 없으므로 중국(中國)의 글자(字)를 빌어서 그 일용(日用)에 통(通)하게 되었다.
이는 둥근 것이 네모난 구멍에 들어가 서로 어긋남과 같으니, 어찌 능(能)히 통달(通達)하고 막힘(礙)이 없겠는가. 요(要)는 모두 각기(各其) 처지(處地)에 따라 편안(便安)하게 해야만 하고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吾) 동방(東方)의 예악문물(禮樂文物)이 화하(華夏)에 견주게 되었으나, 다만 방언(方言)과 이어(俚語; 통속 언어)만이 같지 않으므로, 글(書)을 배우는 사람은 그 취지(趣旨)의 이해(理解)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曲折)의 통(通)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하였다.
옛날에 신라(新羅)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民間)에서 지금(只今)까지 이를 행(行)하고 있지만, 모두 글자(字)를 빌어서 쓰는 까닭으로 난삽(難澁)하고 비루(鄙陋)하여 근거(根據)가 없을 뿐 아니라 언어(言語)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萬分)의 일(一)도 통(通)할 수 없었다.
계해년(癸亥年, 世宗 25年, 1443年) 겨울(冬)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二十八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簡略)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名稱)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물건(物件)의 형상(形象)을 본떠서 글자(契字)는 고전(古篆)을 모방(模倣)하고 소리(聲)에 인(因)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칠음(七音):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5음(五音)과 반치(半徵)-반상(半商) 2음(二音)]에 합하여 삼극(三極, 天地人)의 뜻과 이기(二氣, 陰陽)의 정묘(精妙)함이 구비(具備)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二十八字)로써 쓰지 못하는 소리가 없고 간략(簡略)하면서도 요령(要領)이 있고 자세(仔細)하면서도 통달(通達)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슬기로운 사람(智者)은 아침(朝)나절이 다 지나가기 전(前)에 이를 이해(理解)할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愚者)도 열흘(旬; 十日)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書)을 해석(解釋)하면 그 뜻(義)을 알 수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實情)을 알아낼 수 있게 된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能)히 분별(分別)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를 능(能)히 화합(和合)할 수 있으므로 사용(使用)하여 구비(具備)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통(通)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風) 소리(聲)와 학(鶴)의 울음(唳)이든지, 닭(雞)의 울음(鳴)이나 개(狗)의 짖음(吠)까지도 모두 표현(表現)해 쓸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해석(解釋)을 상세(詳細)히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이해(理解)하게 하라 명(命)하시니, 이에 신(臣)이 집현전(集賢殿) 응교(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 주부(敦寧府 注簿) 강희안 (姜希顔), 행 집현전 부수찬(行集賢殿 副修撰)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等)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解釋)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敍述)하여,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 연원(淵源)의 정밀(精密)한 뜻과 오묘(奧妙)한 것은 신(臣) 등(等)이 능(能)히 발휘(發揮)할 수 없는 바이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에서 나으신 성인(聖人)으로서 제도(制度)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帝王)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制作)은 조술(祖述)[=선인(先人)이 말한 바를 근본(根本)으로 하여 서술(敍述)하고 밝히는 것]한 바 없이 자연적(自然的)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至極)한 이치(理致)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행위(人間行爲)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대체(大體)로 동방(東方)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이 알지 못하는 도리(道理)를 깨달아 이것을 실제(實際)로 시행(施行)하여 성공(成功)시키는 큰 지혜(智慧)는 대개(大蓋) 오늘날(今日)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
[출처=http://blog.naver.com/jmh70id?Redirect=Log&logNo=150006387283]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序文)
원문(原文), 번역문(飜譯文)
禮曹判書 鄭麟趾 序曰,
예조판서 정인지(鄭麟趾)의 서문(序文)에,
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천지(天地) 자연(自然)의 소리(聲)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天地) 자연(自然)의 글(文; 契)이 있게 되니,
所以古人因聲制字, 以通萬物之情,
옛날 사람이 소리(聲)로 인하여 글자(字; 契字)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情)을 통(通)하여서,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
삼재(三才)의 도리(道理)를 기재(記載)하여 뒷세상(後世)에서 변경(變更)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그러나, 사방(四方)의 풍토(風土)가 구별(區別)되므로 소리(聲)의 기운(氣運) 또한 다르게 된다.
盖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대개 외국(外國)의 말(語)은 그 소리(聲)는 있어도 그 글자(契字)는 없으므로,
假中國之字, 以通其用,
중국(中國)의 글자(字)를 빌어서 그 일용(日用)에 통(通)하게 하니,
是猶柄鑿之鉏鋙也,
이는 둥근 것이 네모난 구멍에 들어가 서로 어긋남과 같으니,
豈能達而無礙乎.
어찌 능히 통달(通達)하여 막힘(礙)이 없겠는가.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
요(要)는 모두 각기(各其) 처지(處地)에 따라 편안(便安)하게 해야만 되고,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吾東方禮樂文物, 侔擬華夏,
우리 동방(東方)의 예악문물(禮樂文物)이 화하(華夏)에 견주게 되었으나
但方言俚語, 不與之同,
다만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만이 같지 않으므로,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
글(書)을 배우는 사람은 그 취지(趣旨)의 이해(理解)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曲折)의 통(通)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하였다.
昔新羅薛聰始作吏讀,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官府民間, 至今行之,
관부(官府)와 민간(民間)에서 지금(只今)까지 이를 행(行)하고 있지만,
然皆假字而用,
그러나 모두 글자(契字)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鄙陋)하여 근거(根據)가 없을 뿐만 아니라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
언어(言語)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萬分)의 일(一)도 통(通)할 수가 없었다.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계해년(癸亥年) 겨울(冬)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二十八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예의(例義)를 간략(簡略)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名稱)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象形而字倣古篆,
물건(物件)의 형상(形象)을 본떠서 글자(契字)는 고전(古篆)을 모방(模倣)하고,
因聲而音叶七調,
소리(聲)에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에 합하여
[칠음(七音)은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5음(五音)과 반치(半徵)-반상(半商) 2음(二音)이다.]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정묘(精妙)함이 구비(具備)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28자(二十八字)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簡略)하면서도 요령(要領)이 있고 자세(仔細)하면서도 통달(通達)하게 되었다.
故智者不崇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
그런 까닭으로 슬기로운 사람(智者)은 아침(朝)나절이 다 지나가기 전(前)에 이를 이해(理解)할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愚者)도 열흘(旬; 十日)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以是解書, 可以知其義,
이로써 글(書)을 해석(解釋)하면 그 뜻(義)을 알 수 있으며,
以是聽訟, 可以得其情.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實情)을 알아낼 수 있게 된다.
字韻則淸濁之能卞,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能)히 분별(分別)할 수 있고,
樂歌則律呂之克諧,
악가(樂歌)는 율려(律呂)를 능(能)히 화합(和合)할 수 있으므로
無所用而不備 無所徃而不達,
사용(使用)하여 구비(具備)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통(通)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雖風聲鶴唳雞鳴狗吠, 皆可得而書矣.
비록 바람(風) 소리(聲)와 학(鶴)의 울음(唳)이든지, 닭(雞)의 울음(鳴)이나 개(狗)의 짖음(吠)까지도 모두 표현(表現)해 쓸 수 있게 되었다.
遂命詳加解釋, 以喩諸人,
마침내 해석(解釋)을 상세(詳細)히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이해(理解)하게 하라 명(命)하시니,
於是, 臣與集賢殿應敎 崔恒, 副校理 朴彭年 申叔舟, 修撰 成三問, 敦寧注簿 姜希顔, 行集賢殿副修撰 李塏 李善老 等,
이에 신(臣)이 집현전 응교(集賢殿 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 주부(敦寧府 注簿) 강희안(姜希顔), 행 집현전 부수찬(行 集賢殿 副修撰)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等)과 더불어
謹作諸解及例, 以叙其梗槩,
삼가 모든 해석(解釋)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敍述)하여,
庶使觀者不師而自悟.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若其淵源精義之妙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
그 연원(淵源)의 정밀(精密)한 뜻의 오묘(奧妙)한 것은 신(臣) 등(等)이 능(能)히 발휘(發揮)할 수 없는 바이다.
恭惟我殿下天縱之聖, 制度施爲, 超越百王,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서 제도(制度)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帝王)보다 뛰어나시어,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정음(正音)의 제작(制作)은 조술(祖述)한 바 없이 자연적(自然的)으로 이루어졌으니,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而非人爲之私也.
그 지극(至極)한 이치(理致)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행위(人間行爲)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夫東方有國, 不爲不久,
대체(大體)로 동방(東方)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而開物成務之大智, 盖有待於今日也歟.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도리(道理)를 깨달아 이것을 실제(實際)로 시행(施行)하여 성공(成功)시키는 큰 지혜(智慧)는 대개(大蓋) 오늘날(今日)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
[출처=http://cafe.naver.com/natur33.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400]
皇城新聞 (황성신문)
1898년 9월 5일 (大韓 光武 二年 九月 五日 月曜日)
社說 (사설)
昔我東方에 檀君이 初降 人文이 未創야 其傳來 文獻이 足히 徵 無하더니 箕子셔 八條 設샤 人民을 敎育시니 可히 我東의 初出頭 第一個聖人이라 謂지라 其後에 人民이 開明고 書冊이 稍聚야 羅朝의 巨擘과 麗廷의 名士가 不多이아니로 固陋寡聞 歎이 尙多더니 太祖大王셔 艱大신 業을 定시고 右文 治 先샤 一世의 民을 敺야 文明의 域애 進케시니 百餘年間에 天下의 聖經賢傳과 遺文古事가 無不畢集지라 於是乎賢人이 輩出고 文章이 並世야 其作興 氣像이 可히 天下에 侔擬만나 然나 瓦金이 質이 異고 齒角이 俱키 難야 能히 人人마다 學業에 就키 難으로 惟我 世宗大王셔 別노 一種文字 創造샤 愚夫愚婦로 無不開明케시니 曰國文이라 其文이 克簡克易야 雖童穉兒女라도 時月의 工을 推면 可히 平生의 用이 足지라 是로 以야 一世에 傳習 者十에 五六에 至더니 欽惟 大皇帝陛下셔 甲午中興之會 適際샤 自主獨立시 基礎 確定시고 一新更張 政令을 頒布실 特이 箕聖의 遺傅신 文字와 先王의 創造신 文字로 並行코져샤 公私文牒을 國漢文으로 混用라신 勅敎 下시니 百揆가 職을 率야 奔走奉行니 近日에 官報와 各府郡의 訓令指令과 各郡에 請願書報告書가 是라 現今에 本社에셔도 新聞을 擴張몬져 國漢文을 交用거 尃혀 大皇帝陛下의 聖勅을 式遵 本意오 其次 古文과 今文을 幷傳코져이오 其次 僉君子의 供覽시 便易을 取이로라
[출처=http://www.mediagaon.or.kr/jsp/search/SearchGoDirMain.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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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내용 입니다 수고 에 감사 드립니다
최남석 선생님,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대원국에 복속됀 고려(탕구트+남송)를 뒤엎고...명(차가타이한국)계통의 민족들을 주축으로 원나라&고려(탕구트)를 제압한 이성계와 그 주축세력들은...원나라 지역인 탕구트(북송)과 남송의 공용 한자음관 너무 달라서...통치에 어려움을 격었기에...판이하게 다른 발음차를 극복하고자 한글이 필요했다.
고로 한글은 큰 의미에선 동이의 글은 맞겠으나...엄밀히 보면 동국(중화?)기준으로 서쪽 거란(글단)의 글인 것이며...이 표음문자를 이용해 동국의 한자음을 통일해 보고자 한게 훈민정음 창제 아닐지 싶고,,,역시 문자는 지배족속들의 발음을 반영해야 하니...지배족속들의 문자로 표기됐을 것이니...이성계 자손들의 고향 발음기호는...글안의 발음기호란 얘기며...그러기에 한자를 쓰던 동국의 중심에 있던 황궁에서도...궁에 입궐한 상궁이나 황후들은 거란문자인 한글을 배워야 했던 것이며...그러기에 동국 왕비들의 편지들이 한글이 많았던 이유일까 합니다.
한글의 그 문자 모냥도 고대 수메르문자와 유사하고...그 발음 및 문법도 많이 유사하단 학자들의 연구로 보아...한글은 무굴리스탄이 있던 차가타이한국&일한국의 발음기호를 발전시킨 것이고...그도 동북방 알타이 인근의 거란족들이..현제의 위그르문자&파스파문자 비슷한 본인들의 문자를 대륙 서남방(아랍권&인도)에 유입시킨 발음기호가 아닐지 싶습니다.
구한말에 일제가 보급시킨 한글은...일제 본인들의 필요도 있었겠으나...중원 동부와 만주&한반도의 토착세력인 청구조선(금고려)을 흡수하는 과정에서...중원 중동부의 중국(동국?)과도 다른 중원 서남부의 고종세력(남명?)의 판이하게 다른 발음으로 청구조선을 통치하기 어려워서의 임시방편였을지 싶고...그도 대한뎨국이 몰락한 나중엔 철저히 왜노들의 가다가나(?)로 대체한 것이라 사료됍니다.
그러하기에...말로 먹고살아야 하는 달변가들인 김구선생과 리승만이가...조선말을 떠듬~떠듬.... 더듬었던 이유같습니다...청구조선 발음이 아닌...중원 서남부의 남명발음였기 때문일까 진찰결과가 나오고여...
홍진영 선생님의 견해 제시에도 감사드립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에 대한 의문 해결에 참고하겠습니다.
박사급 논문입니다. 훈민정음서문이 이 창제 이후 처음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창섭 선생님, 과찬의 말씀입니다. 제 평소 의문과 기존의 자료를 다시 정리한 내용입니다. 관심을 보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발음하고 있는 한자음과 순우리말이 그대로 대륙의 상고음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놀라운 사실이 한분의 갑골문자 전문연구학자에 의해 이미 입증된지 오래되었어요.
하지만 그 학자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할수 없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만 그분이 대륙조선사를 미리 알았다면 아마 무룹을 치며 충격적인 발견을 했을겁니다.
또한 중국 공산당 1기 지도자들이 개국직후에 국어를 정함에 있어 토론을 했는데 그 중 한 지도자인 유소기가 세종대왕의 한글을 국어로 정하자고 제안하자 소국(한반도)이 사용하는 언어를 대국이 따라 사용할수 있겠냐는 다른 지도자들의 반론에 부딪쳐 소멸되었고 대신 정음한자중 상용한자를 선정하여 간자체를 만들어 국어로 채택하게 되어 현재의 한자가 사용되었으며 발음은 수도인 북경어를 정음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쓰기 불편한 한자를 어떻게 해서든 간단한 언어로 바꿔보려는 개국지도자들의 고심이 당시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중국 공산당에서도 "한글" 도입을 검토한 적이 있었군요... 그런데, "유소기"(劉少奇)라는 인물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대륙(大陸)의 문자(文字)이었는지 그 당시에 알고 있었나요? 궁금하군요...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유소기"(劉少奇; 리우샤오치)는 1966년 이래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과정에서 "반(反)마오쩌둥(毛澤東) 실권파의 수령", "중국의 흐루쇼프"로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1969년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정식으로 당에서 제명되고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다고 합니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같은데요...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역사(歷史)와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