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비공개 입니다
2022년 2월 2일 화요일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주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한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수도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한편 한국 교회는 ‘Vita Consecrata’를 ‘축성 생활’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봉헌 생활의 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바꾸었다(주교회의 상임위원회 2019년 12월 2일).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2022년 축성 생활의 날 담화
+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 받으소서
하느님께 불림을 받고 교회를 통하여 축성된 이 땅의 모든 축성생활자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997년에 축성생활의 날을 주님 봉헌 축일에 지내도록 제정하신 이래 오늘날까지 교회는 이날을 기념하면서 축성생활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그러면 축성생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고 지구 곳곳에서 환경 및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각종 무서운 범죄와 정치적, 군사적 충돌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어 미래의 희망을 상실한 이 세상에 축성생활은 과연 희망의 징표가 되며 실제적으로 위로와 기쁨의 메시지를 이 세상에 줄 수 있나요?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축성생활은 현재에는 기쁨과 위로가 되고 미래에는 희망이 됩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뜬구름같은 소리입니까?
그 대답을 지금부터 찾아보겠습니다. 늘 불안한 세상은 항상 곁에 있어주며 지켜주는 살아있는 신을 필요로 하고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신도 그렇게 해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하십니까? 진짜로 살아계시며 우리를 지켜주고 계신가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주위엔 왜? 이렇게 많은 불행과 고통이 존재할까요? 대답은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며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이 대답만으론 참으로 답답하니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십시요!
이제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훌륭하시고 죄를 없애주시려 우리 대신 죽으셨다 해도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과거의 사건에 불과합니다. 죽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바로 축성생활자들의 존재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살아계시지 않다면 누가 2,000년 동안 수많은 남자와 여자를 불러 교황, 주교, 사제, 수도자, 봉헌자, 선교사, 재속수도자, 동정으로 살게 했을까요? 부르신 분도 없는데 그들이 환청을 듣고 축성생활의 삶을 선택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한두 명이 그랬다면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하겠지만 2,000년 전 사도들부터 지금까지 수천만 명의 젊은이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축성생활의 삶을 선택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축성생활자의 존재는 세상을 향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이시다”라고 외치는 천둥소리입니다. 고통과 좌절이 넘치고 불안과 불신이 만연한 이 세상에 축성생활자들의 존재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밝히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지금 코로나가 아무리 맹위를 떨치고 있어도 결국 지나가는 한 사건일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축성생활자들은 바로 그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존재이므로 하느님의 소유가 된 사람답게 그 어떤 중요한 일과 사명보다 앞서 먼저 잘 존재(웰빙 Well-Being)해야 합니다. 육신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잘 존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슬픈 모습이 아니라 희망찬 얼굴로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밝게 긍정적으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존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축성생활자들은 영원히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존재이고 살아있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힘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축성생활자들을 보며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다시 기쁨과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니 축성생활자들은 모든 일에 앞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잘 존재(신앙적이고 영적인 웰빙 Well-Being)해야 합니다. 한국의 모든 착한 목자이신 주교님들께 강복을 청하며 오늘 우리 축성생활자들은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잘 존재(영적, 신앙적 웰빙)하기를 다짐합시다.
2022년 2월 2일
축성생활의 날에
한국천주교남자수도회 ·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20015?gb=K1200 ]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축일2월 2일 성 고르넬리오 (Cornelius)
신분 : 백부장, 베드로의 제자, 주교
활동 연도 : +1세기
같은 이름 :고르넬리우스, 꼬르넬리오, 꼬르넬리우스, 코르넬리오, 코르넬리우스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Caesarea) 주재 로마군 보병대의 백인대장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또는 고르넬리오)는 하느님께서 신비로운 영상 가운데 당신 천사를 통해 요빠에 있던 사도 베드로(Petrus)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오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사도 베드로를 모셔왔고, 그로부터 자신은 물론 온 집안사람들 모두 세례를 받았다(사도 10,1-48). 그때부터 성 코르넬리우스는 사도 베드로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성 코르넬리우스는 카이사레아의 첫 주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축일2월 2일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 (Jane de Lestonnac)
신분 : 과부, 설립자
활동 연도 : 1556-1640년
같은 이름 : 레토냑,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Joanna de Lestonnac)은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에서 저명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인문주의 철학자였던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의 조카이다. 당시 프랑스는 국가의 분열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분열을 가져온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혼란을 겪고 있었다. 성녀 요안나의 어머니는 칼뱅주의(Calvinism)에 빠져 그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았다. 다행히도 성녀 요안나는 아버지와 삼촌 덕분에 자기 종교로 이끌고자 했던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녀 요안나는 17살에 가스통 드 몽페랑(Gaston de Montferrant)과 결혼하여 여덟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그녀는 1597년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41살에 과부가 되었고 네 아이도 어려서 잃었다. 그녀는 나머지 네 자녀가 모두 자라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돌보았다. 그녀의 두 딸인 마르타(Martha)와 막달레나(Magdalena)는 보르도에 있는 수도원에서 서원을 했고 아들 프란치스코(Franciscus)는 결혼을 했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막내딸을 아들에게 맡기고 성녀 요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온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1603년 툴루즈(Toulouse)의 개혁 시토회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은 그녀의 건강을 해쳤고 그녀는 서원을 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툴루즈 수도원에서 지냈던 마지막 밤에 성녀 요안나는 하느님의 특별한 비추임을 체험하였다. 그것은 설립자로서의 소명과 마리아 영성에 대한 직관이었다.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려는 그녀의 계획은 몇 년에 걸쳐 조금씩 윤곽이 드러났다. 즉 청소년 교육이라는 과제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마음을 써야 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정리되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젊은 소녀들을 모아 라 모드(La Mothe)에 있는 자신의 땅에서 2년 동안 준비의 시간을 가졌고, 보르도에 극심한 역병이 발생했을 때 용감하게 시민들을 간호하였다. 그러던 중 1605년에 새로 부임한 예수회의 요한 드 보르드(Joannes de Bordes) 신부와 라이문두스(Raymundus) 신부를 비롯한 몇 명의 사제들이 영적으로 그녀의 헌신을 알아보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었다.
당시 보르도에서는 특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이 큰 문제였다. 대부분 칼뱅주의에 빠진 여교사들이 소녀들의 교육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예수회가 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것처럼 가톨릭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던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맡아줄 여성 수도회의 설립이 절실하던 때였다. 요한 신부와 성녀 요안나는 이런 점에서 서로 뜻을 같이 하고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곧바로 수도회 설립 작업에 들어갔다. 1606년 3월 6일 성녀 요안나는 요한 신부의 도움으로 보르도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특별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적인 사도직으로 하는 여성 수도회인 마리아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1607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610년 마침내 보르도에 마리아회의 첫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수도회의 사도직을 실현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한때 그녀는 다른 수녀들의 음모에 휘말려 희생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모진 시련을 인내로써 극복하였다. 1640년 2월 2일 96세의 일기로 선종하여 보르도에 묻힌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프랑스 전역뿐만 아니라 에스파냐를 비롯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9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고르넬리오 (Cornelius) 형제들과요안나 드 레토낙 (Jane de Lestonnac)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
출처: 비공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