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외 1편) 유희경 어젯밤에는 부고를 접했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동생 둘과 함께 어두운 도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우리는, 누구나 죽는 법이지요 시간은 애틋하고 고인과는 별다른 추억이 없더라도 시 외곽 장례식장에 닿을 때까지 각자의 상념에 빠져 있었습니다 조수석에서 나는 궁금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참 유별나구나 우리는 오래전부터 불현듯 말을 잊곤 했지요 늦고 느린 저녁 식탁처럼 턱을 괸 채 서로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견디지 못하고 매어놓은 넥타이를 조금 풀면서 침묵에 균열을 내어보려고 어떤 말이라도 해보려고 이상한 요즘 날씨에 대한 걱정일 수도 있고 고인에 대한 농담일 수도 있는 그러나 말하지 못했습니다 한밤에는 어디든 가까운 법이군요 장례식장도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도 준비한 음식이 모두 떨어졌다고 미안해하던 고인의 딸 머리에는 하얀 리본이 꽂혀 있었습니다 나비 같았어 나는 나비가 날아가버릴까 걱정했는데 리본이 나비가 아니듯 사물은 당장을 넘어서지 못하지요 그러니 우리가 모여 있을 수 있는 거고요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 길게 기지개 켜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리하여 멀뚱히 앉아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는 중인데 나는 우리가 다 같이 검정 옷을 차려입었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 느닷없이 지난 나의 잘못을 저지른 과오들을 떠올렸습니다 도망을 치고 싶었습니다 부의함을 훔치려는 도둑처럼 장례식장을 가로질러 내달리며 괴성을 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사과라도 해야겠다 모두 나의 죄라고 고백하고 무릎 꿇고 납작 엎드려 눈물을 흘려야겠다 괴로움에 빠져 있는데, 사는 것은 꿈같은 일이로구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동생 둘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나는, 풀어놓은 넥타이를 조여 매면서 컵에 따른 사이다를 조금 마셨습니다 이야기 ―차선 긋는 사람들
내가 없어도 된다 미래는 차선 긋는 사람들에게 배웠지 지금처럼 미래는 작은 집에서 큰 집을 상상하고 끼니를 때우고 빨래를 개고 저녁이 오면 몰래 슬펴하면서 긴 밤이 오길 기다리듯 그래도 된다 미래는 어쩜 저리 반듯하게 선을 그을 수 있을까 나는 부럽다 요란하게 도로 위에 선을 긋는 사람들이 그들의 점거와 그 뒤로 밀려 있는 차량들이 미래는 아니고 그보다 착각에 가깝지 않나 미래는 새로 덧칠한 오래된 선이나 밀려 있는 차량의 운전자들 멀거니 내다보는 차창 밖 노을이 미래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없어도 된다 미래는 몸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거나 주린 배를 견디며 침대에 누워보듯 내가 없어도 된다 미래는 하루를 거의 다 보냈다 차선 긋기는 곧 끝날 것이다 ―계간 《청색종이》 2024 봄호, 시:인 자선시 ---------------------- 유희경 / 1980년 서울 출생.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시 등단.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이다음 봄에 우리는』 『겨울밤 토끼 걱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