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벌린 마지막 사업이 술을 파는 주점酒店이었다, 그 술집도 결국 외상장부만 두둑하게 불린 채 막을 내렸다. 모르긴 몰라도 주조장 집에서 집을 비우라고 해서 그랬을 것인데, 느닷없이 점촌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예전에 사기그릇을 구웠던 곳이라 마을 이름이 점촌이었는데, 그곳은 내가 살았던 진안군 백운면 소재지인 원촌에서 1키로 미터도 되지 않았다. 이사를 가서 보니 어린 내가 보아도 참으로 한심하게 생긴 초라한 집이었다. “아침결에 책보만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 손수건만해지면서 나가버린다.” 이상의 소설 <날개>속에서 금홍이가 나간 그 방을 묘사한 그 방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집이었다. 움막처럼 지어진 그 집을 들어서면 먼저 부엌이 나오고 부엌을 지나면 대낮에도 항상 캄캄한 방안이었다. 서쪽에 나 있는 작은 창을 통해서 오후 늦게나 손수건보다 작은 햇살이 한 번 비칠 뿐이고 하루 종일 햇빛이 비치지 않는 집, 그 집에선 낮에도 호롱불을 밝혀야 책을 읽을 수 있는 방이었다. 그렇잖아도 우울한 성격인 나로서도 감당하기가 힘들어 말을 잃어갔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집에 가서 아버지가 몸져눕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턱이 돌아가는 병에 걸렸다. 불과 1년 쯤 살았던 그 방, 결국 어머니는 점집을 찾았고, 이사를 가야 아버지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아버지 병도 낮게 하고 동생들 학교도 보내야 한다는 명목하에 우리의 고향이 아닌 타향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지금은 치즈마을로 이름난 임실읍 금성리 중화성마을로 이사를 갔던 그 때가 내 나이 열 여섯 살 시월 중순쯤이었다.
그 집을 떠올리게 하는 집이 임하댐 상류인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의 용전천 변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72호인 성천댁이다. 정면 5칸에 측면 4칸으로 지어진 ㅁ자형의 이 집은 허식이 없는 절제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필자가 2003년 여름 ‘주왕산과 청송일대‘를 답사 차 갔을 때 그 집은 굳게 잠겨 있었다. 마을 사람의 도움으로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문 바로 옆에 외양간이 있었는데 그런 구조는 강원도 산간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랑방에서 안채 쪽으로 나오면 바로 대청마루로 연결되고 그 옆에는 남향으로 지어진 큰방이 있었다. 그리고 방 앞에는 멍석 한 장을 겨우 깔 수 있을 만큼 작은 안마당이 자리해 있었고, 대청마루에 앉아서 올려다보자 이상이 <날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오전 한 때 햇살이 들어왔다가 금세 그늘이 내릴 듯싶은 이 집의 작은 방에는 문틀도 없이 문종이로만 바른 작은 창문이 있었다. 나라 안에 사대부 집에서 마당이 가장 작은 집, 성천댁은 찾아갈 때마다 많은 상념을 내게 전해준다, 그 당시 땅이 귀하지 않았을 것인데, 이 집을 처음 지은 사람은 무슨 연유로 이렇게 작은 마당이 있는 집을 지었을까? 알 수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의 꿈속에도 들어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오래전에 집을 지은 사람의 마음 속 픙경을 엿볼 수 있겠는가?
‘집은 영혼의 한 상태.’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성천댁에 대해 느끼는 나의 감정처럼 책만 켜켜이 쌓여 있는 지금의 나의 집은 어떤 풍경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