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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신라 1.혁거세 고구려 중국 周 -1134~-250 일본
-57~4 1.동명(성)왕 秦 -250~-207 야요이(彌生) 문화
1.온조왕 -37~-19 前漢 -206~25 -250~250
-18~28 2.남해 AD. 後漢 25~220
4~24 2.유리왕
-19~18
3.대무신왕
3.유리 18~44
2.다루왕 24~57
28~77 4.민중왕
44~48
5.모본왕
4.탈해 48~53
57~80 6.태조왕
3.기루왕 53~146
77~128 5.파사 100
80~112
6.지마
4.개루왕 112~134
128~166 7.일성
134~154 7.차대왕
8.아달라 146~165
5.초고왕 154~184 8.신대왕
166~214 165~179
9.고국천왕
9.벌휴 179~197
184~196
10.내해 10.산상왕
6.구수왕 196~230 197~227 200 三國 220~280
214~234 11.동천왕 魏蜀吳
11.조분 227~248
7.사반왕 230~247
234
8.고이왕
234~286 12.첨해 12.중천왕 西晋 265~316
247~261 248~270
13.미추
261~284 13.서천왕
270~292
9.책계왕 14.유례
286~298 284~298 14.봉상왕
10.분서왕 15.기림 292~300 300
298~304 298~310 15.미천왕
300~331 東晉 317~420
11.비류왕 五胡十六國 302~439
304~344 16.홀해 갈 - 後趙 前燕 後燕
310~356 16.고국원왕 강 - 後秦
12.계왕 331~371 선비 - 西秦 南凉 南燕 成:漢
344~346 저 - 前秦 後凉
13.근초고왕 한족 - 前凉 西凉 北燕
346~375 17.내물 흉노 - 漢:前趙 北凉 夏
356~402 17.소수림왕
14.근구수왕 371~384
375~384
15.침류왕 384~385
16.진사왕 18.고국양왕
385~392 384~391
17.아산왕 19.광개토대왕 야마토 정권
392~405 18.실성 391~413 400
18.전지왕 402~417
405~420 南北朝 420~589
20.장수왕 宋 齊 梁 陳
19.눌지 413~491 北魏 西魏 東魏
19.구이신왕 417~458 北齊 北周
420~427
20.비유왕
427~455
21.개로왕
455~475 20.자비
22.문주왕 458~479
475~477
23.삼근왕
477~479
24.동성왕 21.소지
479~501 479~500 21.문자(명)왕 500
25.무령왕 22.지증왕 491~519
501~523 500~514
23.법흥왕
514~540 22.안장왕
26.성왕 519~531
523~554 23.안원왕
24.진흥왕 531~545
540~576 24.양원왕
27.위덕왕 545~559
554~598 25.평원왕
25.진지왕 559~590
576~579
26.진평왕
579~632 26.영양왕 隋 581~618
28.혜왕 590~618
598~599
29.법왕 600
599~600
30.무왕
600~641 27.영류왕 唐 618~907
27.선덕왕 618~642 다이카 개신
632~647 645
28.진덕왕
647~654
31.의자왕 29.태종무열왕 28.보장왕
641~660 654~661 642~668
30.문무왕
661~681
31.신문왕
681~692
32.효소왕 발해
692~702 1.고왕 700
33.성덕왕 698~719
702~737 2.무왕 나라 시대
719~737 710~784
34.효성왕 3.문왕
737~742 737~793
35.경덕왕
742~765
36.혜공왕
765~780
37.선덕왕
780~785
38.원성왕
785~798 4.원의
793~794
5.성왕
794~795 헤이안 시대
6.강왕 794~1185
39.소성왕 795~809 800
798~800
40.애장왕
800~809
41.헌덕왕 7.정왕
809~826 809~813
8.희왕
813~817
9.간왕
817~818
10.선왕
42.흥덕왕 818~830
826~836 11.이진
43.희강왕 830~858
836~838
44.민애왕
836~839
45.신문왕
839
46.문성왕
839~857
47.현안왕 12.건황
857~861 858~871
48.경문왕
861~875 13.현석
49.헌강왕 871~893
875~886
50.정강왕
886~887
51.진성왕
887~897 14.위해
52.효광왕 893~906 900
897~912 15.인선 五代 907~960
53.신덕왕 906~926 後粱 後唐 後晋 後漢 後周
912~917 遼 916~1125
54.경명왕 고려
917~924 1.태조
55.경애왕 918~943
924~927
56.경순왕 927~935
2.혜종 943~945
3.정종 945~949
4.광종 949~975 北宋 960~1127
5.경종 975~981
6.성종 981~997
7.목종 997~1009 1000
8.현종 1009~1031
9.덕종 1031~1034
10.정종 1034~1046
11.문종 1046~1083
12.순종 1083
13.선종 1083~1094
14.헌종 1094~1095
15.숙종 1095~1105 1100
16.예종 1105~1122 金 1115~1234 가마쿠라 막부
17.인종 1122~1146 南宋 1127~1279 1192~1333
18.의종 1146~1170
19.명종 1170~1197
20.신종 1197~1204 1200
21.희종 1204~1211 元 1206~1368
22.강종 1211~1213
23.고종 1213~1259
24.원종 1259~1274
25.충렬왕 1274~1308 1300
26.충선왕 1308~1313
27.충숙왕 1313~1330 무로마치 막부
1332~1339 1338~1573
28.충혜왕 1330~1332
1339~1344
29.충목왕 1344~1348
30.충정왕 1348~1351
31.공민왕 1351~1374 明 1368~1644
32.우왕 1374~1388
33.창왕 1388~1389
조선 1.태조 1392~98
2.정종 1398~1400 1400
3.태종 1400~18
4.세종 1418~50
5.문종 1450~52
6.단종 1452~55
7.세조 1455~68
8.예종 1468~69
9.성종 1469~94
10.연산군 1494~1506 1500
11.중종 1506~44
12.인종 1544~45
13.명종 1545~67
14.선조 1567~1608 1600 에도(江戶) 막부
15.광해군 1608~23 淸 1616~1912 1603~1867
16.인조 1623~49
17.효종 1649~59
18.현종 1659~74
19.숙종 1674~1720 1700
20.경종 1720~24
21.영종 1724~76
22.정조 1776~1800 1800
23.순조 1800~34
24.헌종 1834~49
25.철종 1849~63
26.고종 1863~1907 1900 메이지(明治) 1867~
27.순종 1907~10 다이쇼오(大正)
1912 중화민국 쇼와(昭和)
신석기 앙소문화 c. 5000-3000 B.C. 신석기 홍산문화 4-3000/6-5000 B.C. 청동기 문화 2200-500 夏2200-1766 商1766-1122 周1122-256 燕나라 c.1027?-222 스키타이 1000년경 알타이 천산 산맥 출현 8세기. 흉노 켈트로 이동 700년경. 한반도 청동기시대 시작. 중국본토 철기. 600-500 400년경. 한반도 철기시대. 진시황. 247-210 |
[황허] 황허의 중·하류와 그 지류유역에서 발생한 문명을 황허 문명이라 하는데, 황허의 본류 유역은 잦은 홍수로 거주가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처음 문명이 일어난 곳은 황허의 지류에 임한 구릉지였다. ① 현재 중국의 최고 인류로 알려진 란톈원인[藍田原人]은 웨이허 강의 남쪽, 산시 성[陝西省] 란톈 현에서 발견되었다. ② 구석기시대 초기의 유적은 주로 시안[西安] 동쪽, 뤄양의 서쪽에 있는 웨이허 강으로부터 황허 강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있고, ③ 중기의 유적은 펀허 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④ 후기의 유적은 윈난[雲南], 광시[廣西]에 비교적 많으나 웨이허 강 유역과 황허 본류로부터 산둥의 구릉에 걸친 지역에서도 함께 발견된다. ⑤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허난 성의 페이리강[裴李崗] 문화와 허베이 성[河北省]의 츠산[磁山] 문화가 있었고 ⑥ 후기에는 황허 강 중류역을 중심으로 양사오[仰韶] 문화가 일어났다. 이 문화는 BC 5000~BC 2500년에 걸쳐 있으며 산시 성[陝西省]의 반포[半坡] 유적과 허난 성의 먀오디거우[廟低溝] 유적이 대표적이다. ⑦ BC 2500~1700년에는 양사오 문화를 대신해 룽산 문화가 번성했고 그 후 룽산 문화에서 ⑧ 하(夏)문화가 나타나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 ⑨ 17대 걸(桀) 왕에서 끝난 하왕조는 은(殷)나라가 이어받았으며 뒤이어 주(周),진(秦),한(漢) 등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황허 유역은 중국문명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
[홍산문화 - 훙산] 紅山文化
중국 신석기시대 후기(약 7,000~8,000년 전)의 문화. 훙산 문화는 경제적인 면에서 농업과 목축업의 중간지대에 속한다. 갈아 만든 돌보습과 돌칼뿐만 아니라 화살촉이나 깎는 도구, 가는 도구, 자르는 도구 등의 잔석기도 있어, 목축과 수렵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견된 동물뼈 중에는 돼지·양·사슴의 뼈가 있는데, 이것은 농업과 목축이 병행되었음을 설명해준다. 토기는 크게 2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진흙으로 빚은 홍도(紅陶)로, 위에는 검은색의 무늬가 있는데, 발(鉢 : 밥그릇 종류)·분(盆 : 물·술을 담는 그릇)·우(盂 : 사발 종류)·관(罐 : 물 긷는 도구) 등의 기명(器皿)이 발견되었다. 발은 언제나 넓은 띠 모양의 채색무늬로 장식했으며,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초기의 기명들과 매우 비슷하다. 분과 관에는 평행사선과 구엽문(鉤葉紋) 등으로 꾸몄는데, 채색토기문화의 계통상 짙은 지방색을 지니고 있다. 또다른 한 종류는 사질(砂質)의 거친 토기(夾砂褐陶)이다. 주요한 것은 관과 발인데, 위에는 그림무늬나 빗무늬[
紋]가 있으며, 아래에는 자리무늬[席紋]가 있어 몽골 초원지대에서 출토된 잔석기문화[細石器文化]의 빗무늬토기와 유사하다. 진흙으로 빚은 홍도의 관에 장식된 글자 가운데 빗무늬가 나타나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2가지 문화요소가 이미 훙산 문화 시기에 융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① 서아시아에서는 농경·가축사육의 역사가 1만 5,000년 전. (①, ⑤ 신석기, ②~④ 청동기) ② 동부 아나톨리아에서는 BC 6500년경 구리가 알려지게 되면서 곧 널리 확산되었다. ③ BC 3000년 무렵 구리는 중동지방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지중해지역까지 퍼져나갔고 유럽에도 전파되기 시작했다. ④ 그리스에서는 BC 3000년 이전에 시작되었으나 중국에서는 BC 1800년경부터 시작. ⑤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 분지에서는 3,000~4,000년 전에 청동기시대가 시작. |
[일본사] 日本史 history of Japan ① 조몬 문화 - 1만년 전. 신석기 ② 야요이 문화 - BC 3세기. 청동·철기 ③ 야마토 정권, 아스카 시대 - 6세기 ④ 다이카 개신 - 645 ⑤ 나라 시대 - 710-784 ⑥ 헤이안 시대 - 794-1185 ⑦ 가마쿠라 막부 - 1192-1333 ⑧ 무로마치 막부 - 138-1573 ⑨ 에도 막부 - 1603-1867 ⑩ 메이지 - 1867 |
조몬문화
일본열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① 대략 10만 년 전인 홍적세(洪積世) 말기로서 고고학적으로는 구석기시대에 속한다. ② 빙하가 녹고 충적세(沖積世)로 접어들 즈음 일본에 신석기문화가 나타났다. 약 1만년 전 육교가 사라지고 일본열도는 지금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1만 2,700년 전의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일본의 토기문화는 세계 최초의 것으로 간주된다. 기본적으로 새끼 모양의 무늬를 지녔기 때문에 이때 토기를 조몬[繩文] 토기, 즉 새끼무늬토기로 부르며, 이 신석기문화를 조몬 문화라 한다. 유례없이 빨리 발생하여 오래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몬 사회는 생산이나 기술의 근본적인 발전 없이 8,000년 가까이 지속하다가 BC 3~2세기에 다음의 발전 단계(야요이 시대)로 이행했다.
[황허]
황허의 중·하류와 그 지류유역에서 발생한 문명을 황허 문명이라 하는데, 황허의 본류 유역은 잦은 홍수로 거주가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처음 문명이 일어난 곳은 황허의 지류에 임한 구릉지였다.
① 현재 중국의 최고 인류로 알려진 란톈원인[藍田原人]은 웨이허 강의 남쪽, 산시 성[陝西省] 란톈 현에서 발견되었다.
② 구석기시대 초기의 유적은 주로 시안[西安]의 동쪽, 뤄양의 서쪽에 있는 웨이허 강으로부터 황허 강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있고,
③ 중기의 유적은 펀허 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④ 후기의 유적은 윈난[雲南], 광시[廣西]에 비교적 많으나 웨이허 강 유역과 황허 본류로부터 산둥의 구릉에 걸친 지역에서도 함께 발견된다.
⑤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허난 성의 페이리강[裴李崗] 문화와 허베이 성[河北省]의 츠산[磁山] 문화가 있었고
⑥ 후기에는 황허 강 중류역을 중심으로 양사오[仰韶] 문화가 일어났다. 이 문화는 BC 5000~BC 2500년에 걸쳐 있으며 산시 성[陝西省]의 반포[半坡] 유적과 허난 성의 먀오디거우[廟低溝] 유적이 대표적이다.
⑦ BC 2500~1700년에는 양사오 문화를 대신해 룽산 문화가 번성했고 그 후 룽산 문화에서
⑧ 하(夏)문화가 나타나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
⑨ 17대 걸(桀) 왕에서 끝난 하왕조는 은(殷)나라가 이어받았으며 뒤이어 주(周),진(秦),한(漢) 등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황허 유역은 중국문명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홍산문화 - 훙산] 紅山文化 (병)Hongshan (웨)Hungshan culture.
중국 신석기시대 후기(약 7,000~8,000년 전)의 문화.
훙산 문화는 경제적인 면에서 농업과 목축업의 중간지대에 속한다. 갈아 만든 돌보습과 돌칼뿐만 아니라 화살촉이나 깎는 도구, 가는 도구, 자르는 도구 등의 잔석기도 있어, 목축과 수렵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견된 동물뼈 중에는 돼지·양·사슴의 뼈가 있는데, 이것은 농업과 목축이 병행되었음을 설명해준다. 토기는 크게 2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진흙으로 빚은 홍도(紅陶)로, 위에는 검은색의 무늬가 있는데, 발(鉢 : 밥그릇 종류)·분(盆 : 물·술을 담는 그릇)·우(盂 : 사발 종류)·관(罐 : 물 긷는 도구) 등의 기명(器皿)이 발견되었다. 발은 언제나 넓은 띠 모양의 채색무늬로 장식했으며,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초기의 기명들과 매우 비슷하다. 분과 관에는 평행사선과 구엽문(鉤葉紋) 등으로 꾸몄는데, 채색토기문화의 계통상 짙은 지방색을 지니고 있다. 또다른 한 종류는 사질(砂質)의 거친 토기(夾砂褐陶)이다. 주요한 것은 관과 발인데, 위에는 그림무늬나 빗무늬[
紋]가 있으며, 아래에는 자리무늬[席紋]가 있어 몽골 초원지대에서 출토된 잔석기문화[細石器文化]의 빗무늬토기와 유사하다. 진흙으로 빚은 홍도의 관에 장식된 글자 가운데 빗무늬가 나타나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2가지 문화요소가 이미 훙산 문화 시기에 융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사] 日本史 history of Japan
① 조몬 문화 - 1만년 전. 신석기
② 야요이 문화 - BC 3세기. 청동·철기
③ 야마토 정권, 아스카 시대 - 6세기
④ 다이카 개신 - 645
⑤ 나라 시대 - 710-784
⑥ 헤이안 시대 - 794-1185
⑦ 가마쿠라 막부 - 1192-1333
⑧ 무로마치 막부 - 138-1573
⑨ 에도 막부 - 1603-1867
⑩ 메이지 - 1867
조몬문화
일본열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① 대략 10만 년 전인 홍적세(洪積世) 말기로서 고고학적으로는 구석기시대에 속한다. ② 빙하가 녹고 충적세(沖積世)로 접어들 즈음 일본에 신석기문화가 나타났다. 약 1만년 전 육교가 사라지고 일본열도는 지금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1만 2,700년 전의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일본의 토기문화는 세계 최초의 것으로 간주된다. 기본적으로 새끼 모양의 무늬를 지녔기 때문에 이때 토기를 조몬[繩文] 토기, 즉 새끼무늬토기로 부르며, 이 신석기문화를 조몬 문화라 한다. 유례없이 빨리 발생하여 오래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몬 사회는 생산이나 기술의 근본적인 발전 없이 8,000년 가까이 지속하다가 BC 3~2세기에 다음의 발전 단계(야요이 시대)로 이행했다.
야요이 문화
대륙에서는 청동기문화가 마감되고 본격적인 철기시대로 들어섰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막을 내릴 무렵이었다.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조몬 토기는 급속히 사라지고 벼 재배와 청동기, 그리고 철기를 동반한 새로운 문화가 규슈 섬의 북쪽에서부터 급속히 전파되었다. 토기도 조몬과 비교해 꾸밈은 단조롭지만 전보다 높은 온도로 구워 훨씬 얇고 단단해졌으며, 바다 건너 가야(加耶)토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형질이다. 이 토기가 처음 발견된 도쿄[東京]의 거리 이름을 따서 이때를 야요이 시대[彌生時代]라고 한다. 이 야요이 문화가 불과 반세기 만에 일본 주요지역에 퍼진 점과 야요이인들의 체질적 특성이 조몬인보다는 한반도 남부 고대인에 더 가깝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새로운 문화에 능숙한 대륙인들이 일본열도로 들어와 낡은 조몬 문화를 삽시간에 대체시킨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의 폐막과 한반도의 세력다툼 과정에서 탈락한 무리가 열도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 시대의 일본인을 대륙에서는 왜(倭)라고 불렀다. 고대 중국의 사서에 "왜의 땅에 100여 개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은 수많은 소국이 형성되고 있는 사정을 알려준다.
고분문화
4세기 전후의 동아시아는 정치적 통합과 팽창의 시대였다. 3~4세기경에는 앞쪽은 모나고 뒤쪽은 둥글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열쇠구멍 같은 이른바 전방후원(前方後圓) 고분이 나타나기 시작해 5세기에는 호(濠)까지 두른 거대한 고분이 평지에 자리잡는다. 가장 큰 것은 부피가 피라미드보다 크고 장변(長邊)이 약 470m에 이른다. 축조하는 데 약 140만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었으리라 추산되며, 정치 권력 집중의 증거가 된다.
고대사
고대국가의 성립
6세기에 들어서면서 완성도 높은 대륙의 고급 문물과 지적 체계가 일본 사회에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인구 약 400만~500만 명의 일본 사회는 조상신 우지가미[氏神]를 모시는 우지[氏]로 불리는 의제(擬制) 혈연적 상하조직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우두머리인 우지노카미[氏上]는 다도코로[田莊 : 사유지]나 가키베[部曲 : 사유민]를 거느렸다(→ 색인 : 베). 최고 권력자는 가장 강력한 우지가미였으며 오미[臣]·무라지[連] 등의 가바네[姓]를 내려주면서 중앙인 야마토[大和]의 정치를 주도했고, 지방의 호족들에게는 구니노미야쓰코[國造] 등의 직함을 주어 상하관계를 규정했다. 최고의 우지가미 오키미[大王]가 바로 일본 천황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작은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진 커다란 피라미드 구조를 닮은 일본사회의 기본적 성격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의 고대국가로의 추진력은 주로 백제인들이 제공해주었다.
6세기 후반 불교의 수용 여부를 명분으로 하여 일어난 심각한 세력다툼은 친백제파 소가 우마코[蘇我馬子]의 승리로 돌아갔다. 소가가 592년 조카딸을 스이코[推古]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 색인 : 아스카 시대). 스이코의 조카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는 소가의 절대적 협력 아래 체제 구축에 나섰다.〈천황기 天皇記〉·〈국기 國記〉 등 일본 최초의 역사서를 편찬한 것도 중국을 본뜬 정통성 부여가 그 목적이었다. 정치이념의 이식과 더불어 종교적 카리스마도 활용했다. 쇼토쿠 자신이 〈삼경의소 三經義疏〉라는 불경 주석을 짓고 호류 사[法隆寺]를 세우는 등 불교를 일으킴으로써 아스카[飛鳥] 문화라고 불리는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를 남겼다.
다이카 개신과 율령제도
이 집단에 속한 황자(皇子) 나카노 오에[中大兄]와 나카토미 가마타리[中臣鎌足]가 645년 쿠데타를 일으켜 소가 씨를 타도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좌우대신을 두는 등 정부의 직제를 개편하고 귀국한 학승들을 정치고문으로 앉혔으며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難波]로 옮겼다. 일본 사상 최초로 독자적인 연호를 지어 다이카[大化]라고 하고 4개조의 '개신(改新)의 조(詔)'를 냈으며 철저히 당의 제도 문물과 신라에서의 적용례를 따랐다. 공지공민(公地公民)의 원칙으로 토지를 천황 직속으로 삼으며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조직하려 했다. 이것이 곧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으로 그 모제(母制)는 당나라의 율령제도였다. 일본은 다이카 개신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이나 국호인 '일본'(日本)도 이때 확정된 것으로 보이며 당의 장안(長安)을 크기만 1/4로 축소한 새 수도 헤이조쿄[平城京]를 새로 건설했다. 660년에 신라와 당의 공격으로 백제가, 8년 뒤에는 고구려 또한 나·당 연합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색인 : 한국사). 이때 백제에 구원 병력을 파견했으나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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