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6개월
1990년 2월 강원도의 찬바람을 맞으며 학생으로 매지에 첫 발을 디뎠다. 2000년 9월 파란 하늘이 눈부신 가을 학기에 강사로 매지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석 달이 더 지났다. 예전같으면 이런 경우를 가리켜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들 했을 것이다. 10년 6개월 사이에 달라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떠들썩했던 2000년이 시작할 무렵 남해의 바닷가 진해에서 드넓은 바다를 보며 이 해의 후반기에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세상은 New Millenium이라고 떠들썩했지만 그것은 Y2K와 다를 바 없는 소란일 뿐이었다. 세상은 변한다. 하지만 그 변화의 속도는 우리의 인식 능력을 벗어난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과거를 추억할 때 가끔 우리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민감한 사람이라면 그 모든 것의 의미를 좀 더 빨리 이해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뭔가를 상상함으로써 시간의 빈 공간을 메우려한다. 미래는 그렇게 상상 속에만 존재하다가 정작 그 시간이 오면 나의 상상은 현실과 불일치를 일으킨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조건의 경계이다.
10여 년 전 아주 어리게 느껴지는 그때도 모든 것은 동일했다. 뭔가에 대해 상상을 하고, 그것을 현실에 실현하는 방법을 생각해보고, 방법을 알게 되면 행동했다. 하루 하루가 쌓이면서 부족했던 내 모습은 부족함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행동으로, 행동에서 고통으로, 고통에서 실현으로 이어지는 연쇄 속에 있었다. 지난 10년은 그렇게 지나온 하루 하루의 집적일 뿐이다. 정작 힘든 것은 언제나 오늘 하루였다. 그 하루들이 어제는 아름답게 느껴지고, 오늘은 무겁게 느껴지고, 내일은 때로 밝게 때로는 어둡게 그려질 뿐이다.
매지를 떠날 때 너무 바쁘게만 살아 온 나로서는 생활을 정리할 시간도 부족했던 기억이 난다. 매지를 떠난 것은 1997년 초였다. 그 때 진해로 내려가게 되었다. 석사과정을 갖 졸업하고 약속되어 있었던 해군 사관학교로 향하던 심정은 고향을 떠나 타지로 나가는 그것이었다. 매지에 3년을 더 머물렀던 것이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운전을 하고 서울에서 수업을 들었다. 번잡한 서울의 생활 속에서는 하루의 나를 추스르기에 부족한 여건이라는 핑계였을까? 대학을 졸업하던 시점에 느꼈던 가슴 아픈 기억들은 꽃다운 20대의 전반이 지나가는 고통이었다. 대학원을 진학하면서 느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은 이미 익숙해진 모양의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 대학원에 입학할 때, 그리고 진해로 내려갈 때 느꼈던 것들은 모두 같은 모양을 한 미래였다. 진해를 떠날 때 나에게 다가온 것 역시 변함 없는 그 모양이었다. 다시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은 변해 있었다.
나의 신분이 달라졌고, 사람들이 달라졌고, 문화가 달랐다. 몹시 낯설게 느껴지는 후배들의 문화는 나의 몸에 맞지 않았다. 이미 3년의 강단 경험을 가진 나로서도 이 낯선 문화는 의외의 문제가 되었다. 대학원 과정이나 진해에서의 시간들이 나를 변화시킨 것일까? 돌아보니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처음 대학에 올 때 내 머리 속에는 하나의 질문이 던져져 있었다. “사람이 뭘까?” 대학 면접에서 왜 사학과에 왔느냐는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 말을 듣고 교수님께서는 “자네, NL, PD가 뭔지 알어?”라고 다시 물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교수님으로부터 대학 4년 간 “난 자네만 믿네”라는 말씀을 3번 정도 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그 말을 결코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이런 부담을 주실까? 아는 것도 없고, 게으르고, 고집은 센, 약간은 돈키호테 기질까지 가진 나를 믿으시면 어쩌나?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에게는 좋은 시간이 주어졌었다. 1년 간 책들과의 끈질긴 씨름 끝에, 대학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읽어댄 그 가운데 역사 공부를 선택하기를 잘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 뒤로 나의 진로는 변하지 않았다. 누가 물어 보아도 아주 쉽게 “대학원 가야지”라는 말이 나왔다. 4학년 때까지 그 말을 믿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는 선배 하나 없는 1회였기 때문이었다. 나도 남들도 대학원이 뭔지 잘 몰랐다. 그런 곳에 가겠다고 말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대학원 과정이 끝나갈 때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이 나의 새로운 기회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좋은 기회를 맞게 된 것은 성실한 노력의 결과라고 말들을 했고, 부족하지만 노력의 대가라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대학원 3년은 가장 가파른 비탈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환경의 결과이다.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길을 걸을 때는 그 경사가 너무나도 가파러서 뒤로 밀리기도 한다. 하루 평균 2시간 밖에는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은 부족한 실력, 부족한 경제력, 부족한 젊음 때문이었다. 91학번 후배는 논문을 쓰다가 과로사로 죽었다. 진해에서 그 소식을 들은 날 나의 눈가도 갑자기 불거졌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과 밝아오는 동쪽을 볼 때마다 이런 기억들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나는 기억 속에서 살며, 기억 속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내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삶을 쉽게 말할 수는 없겠으나 감히 이렇게 정의해 본다. 내일이면 나의 눈을 들여다 볼 학생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이런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나이 서른까지는 뭐든 배운다 생각하고 사십시오. 무엇에도 얽매이지 마십시오. 젊음은 무한한 특권이며 가혹한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