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본을 ‘마라톤 선진국’으로 주저 없이 인정하면서도 막상 그들의 마라톤 문화와 현황에 대해서는 매우 어둡다. 보통 동호인들이 알고 있는 것이래야 선수층이 두텁고, 동호인 수가 어마어마하며, 동경마라톤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는 정도다. 일본대중문화가 전면 개방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임을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묵은 감정을 잠시 내려놓고 들여다보면 일본 마라톤은 퍽 흥미롭다. 남녀 선수가 세계기록을 4번이나 작성했고, 여자는 올림픽을 2연패하는 대단한 업적을 이뤄냈다. 동호인 문화 역시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역동적이고 활발하게 꽃피우고 있다. 지금까지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일본 마라톤의 과거와 현재를 본지가 정리해보았다.
단순히 올림픽 우승 횟수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가 남자 금메달 2개(손기정, 황영조) 일본이 여자 금메달 2개(다카하시 나오코, 노구치 미즈키)로 동률이지만 세계 정상급 기량을 보유했던 선수들 면면을 꼽아보면 일본이 크게 앞서는 게 사실이다.
신체적으로 우수한 유럽과 아프리카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치주법을 개발하고 식이요법을 고안하는 등 끊임없이 경주해온 것이 일본 러너들이다. 그 결과 올림픽과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물론 세계 마라톤 역사의 곳곳에 그들의 족적이 남아있다.
‘별똥별처럼 사라진 비운의 천재’
스즈키 후사시게(1914~1940)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35년 세운 준우승 기록이 ‘무슨 이유에선지’ 세계기록으로 둔갑하면서 본의 아니게 명예가 실추된 인물이다. 일본 내에서조차 그 기록에 대해선 ‘알 수 없는 오류’로 본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따져볼 때 그가 당대 일본 최고의 러너였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이 없다.
대학시절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하코네역전경기에 참가해 4년간 전승을 거뒀으며 마라톤으로 전향한 뒤에는 손기정에 필적할 만큼 우수한 기록을 보유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 10000m와 마라톤 종목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현지에서 열병에 걸리는 바람에 경기에 참가하기는커녕 독방에 격리수용 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선수생활을 접고 군대에 들어가 2차대전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고, 중국 남부의 망망대해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마라토너로서 한창 성장할 수 있는 20대 중반 나이에 명분 없는 전쟁에 의해 희생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워낙 짧은 생을 살다 간 탓인지 일본 내에도 그와 관련된 자료가 별로 없다.
‘동메달 바치고 할복한 주로의 무사’
츠부라야 고키치(1940~1968)
공교롭게도 후사시게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에 태어났고, 그와 마찬가지로 요절한 마라톤 스타다. 자위대 입대 후 육상을 시작한 고키치는 장거리 선수로 활동하다가 오다 미키오(아시아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세단뛰기)의 권유로 올림픽이 열리기 7개월 전에 마라톤에 입문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그는 10000m에서 6위에 올랐지만 마라톤에서는 별로 기대를 받지 못했다. 키미하라 켄지와 1963년 세계기록(2:15:16)을 작성한테라사와 토루가 유력한 메달 후보였다. 그러나 둘은 선두 경쟁에서 밀렸고(각각 8위와 15위) 고키치만 남아 우승을 다퉜다. 경기장으로 들어갈 때까지 2위를 달리던 그는 뒤따르는 영국 선수에게 막판 추격을 허용하며 동메달에 그쳤다. ‘남자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아버지의 격언에 따라 앞만 보고 달린 것이 아쉬운 결과를 낳은 것이었다.
비록 은메달을 아깝게 놓치긴 했지만 일본인 최초로 따낸 역사적인 올림픽 마라톤 메달이며 도쿄올림픽에서 일본이 따낸 유일한 메달이다. 당시 ‘언론은 고키치가 일본을 구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키치는 다음 멕시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겠다고 호언했지만 1967년 허리디스크가 수술을 받으면서 선수생명의 위기를 맞았고, 1968년 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에 면도칼로 경동맥을 잘라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서에는 ‘이제 완전히 지쳤고 더는 달릴 수가 없다’고 쓰여 있어 주위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츠부라야 고치키‘日 육상 황금기의 대표 마라토너’
키미하라 켄지(1941~)1960~70년대 일본 남자 육상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3번의 올림픽 마라톤에 참가하여 모두 8위 안에 드는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츠부라야 고치기와 절친한 사이였던 그는 1968년 도쿄올림픽 당시 가장 촉망받는 기대주였지만 부담이 컸던 탓인지 기대에 못 미치는 8위에 머물렀다. 그 충격으로 육상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1966년 보스턴마라톤(2:16:33)우승과 방콕아시아경기대회(2:33:22)에서 우승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을 앞두고 친구이자 전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고키치가 갑자기 자살하자 그는 영전에 메달 획득을 약속하는 조문을 보내며 결의를 다졌다. 후반까지 선두다툼을 벌인 그는 전 대회 고키치와 마찬가지로 막판에 이르러 2위로 달리면서 3위 주자 마이클 라이언의 맹추격을 받게 되었다. 그 역시 레이스 중 좀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선수였지만 그날만큼은 고개를 돌려 뒤따르는 선수를 확인했고, 안전하게 은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켄지는 경기 후 ‘친구인 고키치가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친구와 달리 1973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35번의 마라톤 레이스를 완주했다. 올림픽 은메달, 아시아경기대회 2연패(1966, 1970), 최고 권위를 자랑 보스턴마라톤 우승까지 경험했으니 선수로서 거의 모든 것을 이뤘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은퇴 후에도 매년 한 번씩 마라톤을 완주하고 있으며, 오는 2016년에는 보스턴 제패 50주년을 기념하여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출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키미하라 켄지 (좌측 끝)여자마라톤 강대국 이끈 선구자
아리모리 유코(1966~)일본 여자마라톤 1세대인 아리모리 유코는 일본 마라톤을 일약 세계적인 수준으로 견인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학창시절에는 순간 스피다가 좋을 뿐 거의 무명이었다가 마라톤 데뷔무대인 1990년 오사카국제여자마라톤에서 2시간 32분 51초를 기록하며 6위에 올라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당시 데뷔전 기록으로는 가장 우수). 이듬해 1월에는 오사카국제여자마라톤에서 준우승(2:28:01)을 차지하며 일본기록을 갈아치워 8월 도쿄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최고 기대주로 떠올랐다.
그러나 결과는 1989년 나고야국제여자마라톤에서 4위(2:34:59)로 데뷔한 야마시타 사치고의 승리였다. 25도가 넘는 무더위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가운데 브라질 선수와 경합을 벌인 사치코는 2시간 29분 57초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선두와 불과 4초 차이였으며, 일본 최초의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메달이었다. 유코 역시 2시간 31분 8초를 기록하며 당당히 4위에 올랐지만 메달을 획득한 사치코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두 선수의 성적은 불과 1년 뒤 정 반대가 됐다. 무려 30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서 30km 이후 스퍼트한 아리모리 유코는 일본 여자마라톤 첫 올림픽 은메달(2:32:49)을 목에 걸었고, 사치코는 4위에 올랐다.
유코는 이후 족저근막염이 발병하고 팀 감독 및 동료들과의 갈등을 겪으며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 괴로워했고, 자신이 딴 은메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울기도 했다. 이를 극복한 데는 놀랍게도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역할이 컸다. 수술을 위해 간 병원에서 바르셀로나올림픽 우승 이후 족저근막염이 생긴 황영조도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함께 지내는 동안 금메달 도전 의욕을 북돋워주었다.
수술 성공 후 훗카이도마라톤에서 우승하며 재기한 유코는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서 접전 끝에 동메달(2:28:39)을 획득하며 2회 연속 메달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후에도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다가 2007년 도쿄마라톤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아리모리 유코선수와 지도자로 세계를 호령한 러너
모리시타 코이치(1967~)모리시타 코이치는 우리에게 황영조가 올림픽을 제패할 당시 패배한 일본 선수로 기억되고 있지만, 일본 마라톤계에는 혁혁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학창시절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선수였지만 고교 졸업 후 재능을 발휘하여 역전경주 핵심 맴버로 활약하게 됐고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10000m 금메달과 5000m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중장거리 스타로 떠올랐다.
이 때까지는 장거리 선수로만 알려졌지만 이듬해 풀코스 데뷔전인 벳푸-오이타 마이니치마라톤에서 2시간 8분 53초를 찍고 우승하며 일본의 차세대 마라톤 스타로 부각되었다(은퇴할 때까지 이 기록을 깨지 못했다). 당시 8살 많은 나카야마 타케유키(서울마라톤 4위, 서울아시안게임 금)가 같은 대회에 참가해 접전을 벌였는데, 그가 39km 지점에서 어깨를 건드리며 자극하자 모리시타는 단번에 앞으로 치고나가 승부를 결정지었다고 한다. 1년 뒤 1992년 도쿄국제마라톤에서도 모리시타와 나카야마가 정면대결을 벌였는데, 6초 차 접전 끝에 모리시타가 다시 승리를 거뒀다(우승 2:10:19).
단 2번의 마라톤을 모두 우승으로 장식한 모리시타와 백전노장이지만 새까만 신인에게 2연패를 당한 나카야마는 나란히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출발선에 섰다. 그러나 승부는 둘의 경쟁과 무관하게 흘러갔다. 그해 벳부-오이타 마이니치마라톤에서 2시간 8분 47초로 한국기록을 작성한 황영조가 경기를 주도했다. 나카야마가 선두에서 떨어진 가운데 모리시타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몬주익 언덕에서 거리를 허용하며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다(나카야마는 4위). 그러나 1968년 키미하라 켄지가 은메달을 획득한 이후 일본 마라토너가 거둔 최고의 성적이었기에 일본 국민들은 열광했다.
아쉽게도 선수로서의 생명은 여기까지였다. 이후 부상에 시달리던 모리시타는 조기 은퇴하여 1999년부터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사실 그의 은퇴 후 삶은 현역 시절의 성취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중장거리 국가대표선수를 길러냈고 게브르셀라시에에 가장 근접한 선수로 평가받는 사무엘 완지루(하프 세계기록 작성, 베이징올림픽 금)를 발굴해 조련했다.
모리시타 코이치
일본 육상선수 최초 올림픽 금메달
다카하시 나오코(1972~)일본 육상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육상 영웅이며, 여성 마라토너 최초로 2시간 20분 벽을 깬 세계기록작성자다. 세계최고기록, 올림픽 우승, 아시안게임 우승, 메이저대회(베를린) 2연패, 6개 국제대회 연속우승 등 마라토너로서 모든 것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오직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인연이 없었을 뿐이다.
중학교 때부터 육상을 시작했으며 고교시절까지는 현 대표로 선정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가 대학 진학 후에야 중장거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원래 교사가 되려고 하다가 육상에 미련이 남아 실업팀 계약직 선수가 됐다. 1997년 스즈키 히로미가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 금메달을 거머쥘 당시 훈련 파트너였는데, 그녀의 우승 장면에 자극받아 본격적인 훈련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나고야국제마라톤에서 30km 이후 무서운 스퍼트로 첫 우승(2:25:48)을 거머쥔 뒤, 같은 해 방콕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 30도에 이르는 무더위를 뚫고 2시간 21분 47초의 아시아기록을 작성하며 우승했다. 일약 일본 여자마라톤의 에이스로 떠오르며 1999년 세비야세계육상선수권대회 대표가 되었지만 경기 직전 왼쪽 무릎을 다치는 불운을 겪었다. 이듬해 2월까지 왼팔 골절과 복통으로 인한 입원 등 악재가 잇따랐다.
다행히 2000년 3월 나고야국제마라톤에서 우승하여 올림픽 대표 자격을 얻은 그녀는 대망의 시드니올림픽 여자마라톤에서 중반부터 레이스를 리드하다가 34km 지점부터 폭풍같은 스피드로 롱스퍼트했다. 루마니아 선수가 경기장으로 들어설 때까지 바짝 추격했지만 추월을 허용하지 않고 올림픽 최고기록(2:23:14)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듬해에는 베를린마라톤에 출전하여 2시간 20분 벽을 깨고 세계최고기록(2:19:46)으로 우승했다. 2년간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모든 선수들의 견제를 받는 처지가 되었지만 다음 베를린마라톤에서도 챔피언 자리를 지키며 2연패 위업을 달성했다.
남은 도전 과제는 생애 두 번째로 맞는 파리세계육상선수권대회(2003)에서 금메달과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2002년 도쿄마라톤을 앞두고 늑골 피로골절이 발생하면서 두 가지 계획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2005년 도쿄국제여자마라톤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대회 7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은 그녀는 2008년 나고야국제마라톤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비록 은퇴했지만 지금도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마라토너로 꼽힌다.
다카하시 나오코
*****************************************************************************************
러닝 라이프에서 옮겨왔습니다. 천클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