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7,10-14>
그 무렵
10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13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6-38>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고합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이사 7,14)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의 예고대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잉태하게 된 경위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주님의 탄생 예고는 성전 ‘성소’에서 전해진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는 달리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작은 동네 나자렛의 시골 처녀의 ‘집’에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성전 안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됩니다.
그런데 천사의 인사말은 마리아가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였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믿음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즈카르야는 ‘의심’하여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었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말씀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또 즈카르야에게는 아기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17)이라는 ‘사명’이 예고되지만, 마리아에게는 아기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외아드님”(루카 1,35)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신원’이 예고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
(루카 1,38)
여기에서 드러나는 마리아의 ‘희망’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이는 마리아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그것을 저도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곧 그분의 희망을 희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희망과 하느님의 희망이 같아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그분의 뜻에 승복하는 일이요, 그분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품고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요, 당신의 사랑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고 수락하는 일이요,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고, 그분의 은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하시는 일에 함께 일하는 협조자가 되는 일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저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저희 안에서 사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지요!
내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놀이터요 일터라니!
이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Eureka!”, 그 깨달음의 외침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창세 28,17)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의 희망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희망이 진정,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은총에 관하여>
성탄이 가까워질수록 마리아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탄을 예고하는데, 성탄의 주인공이 되는 은총을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그런데 ‘은총이 가득한’이란 어떤 것, 어떤 상태입니까?
마리아에게는 은총에 부족함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마리아가 은총으로 가득하다는 뜻일까요?
우리에게는 은총에 부족함이 있지만 마리아에게는 부족함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마리아가 은총으로 가득하여 다른 것은 있을 자리가 없다는 뜻일까요?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부족할 리 없을 겁니다.
한 방울의 사랑이라도 우리를 채우고도 넘칠 겁니다.
그러니 은총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우리에 비해 마리아가 은총으로 가득하다는 뜻일 겁니다.
마리아가 출산을 위해 베틀레헴이 갔을 때 여관은 사람들로 만원이었던 데 비해 마구간은 텅텅 비어있어서 주님께서 여관이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던 것처럼, 우리는 종종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은총의 자리가 없을 때가 많지만 마리아는 은총으로 충만하여 다른 것이 있을 지리가 없다는 얘기일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을 모시기에 은총이 가득하다는 뜻일 겁니다.
주님이 은총이고, 최고의 은총이며, 충만한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에서 “당신은 선, 모든 선, 지상 선, 완전한 선, 충만한 선”이라고 하느님을 노래했는데, 은총도 마찬가지이고, 마리아에게도 우리에게도 주님만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은총일 겁니다.
그리고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주님을 모실 때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 대로 우리가 마리아처럼 성령으로 주님의 어머니가 된다면 우리도 은총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연말을 맞이하면서 나라의 안녕을 위해 기도합니다.
매스컴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의 탓만 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은 맑고 밝은 세상을 희망해야 합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우리의 빛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울타리를 고집하는 이들에게 성령의 역사를 이루시길 소망합니다.
제네시스 수도회 토마스 머튼의 평화를 묵상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당신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 생각에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보다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십시오!
그것들이 전쟁의 원인입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며 욕심을 미워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안에 있는 그것들을 먼저 미워하십시오."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일상 안에 주님의 뜻을 ‘종’으로써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종은 자기를 포기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순종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사실 믿는 이들은 서로에게 ‘종’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7-8)
그리고 사도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2고린 4,5)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주님의 종으로, 서로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많은 직책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감수하며 다 버리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하신 성모님처럼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님을 ‘경청의 달인’이라 칭하시며 성모님을 가득 채운 것은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곰곰이 되새기는 성모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내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지만 발견되느냐, 안 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종 여러분,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두려워하고 떨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현세의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섬기십시오.”(에페 6,6-7) 하고 권고합니다.
서로 섬기라는 간청입니다.
그러나 저는 대접받기 좋아하고 윗자리를 좋아합니다.
겸손하게 남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가르치려고 하는 마음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신자 한 분 한 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넉넉함과 하느님의 종으로서 행동하는 삶을 새롭게 다짐하며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삶을 살기를 원하오니, 몸으로 응답하는 오늘을 강복하소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이 말을 할 때마다 하느님을 부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잉태하십니다.
천사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이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성모 마리아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주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을 믿으면 우리 또한 우리 한계, 곧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정말 우리 주위에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인물들이 있고, 그들의 특징은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유튜브 채널 ‘비오는 날’에는 ‘장애를 이겨낸 다섯 명의 특별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중 가장 먼저 ‘젠 브리커’(Jen Bricker)는 태어날 때부터 양다리가 없는 여자입니다.
부모는 다리가 없는 아이를 버렸습니다.
루마니아에서 고아로 자라던 그녀는 미국 일리노이주의 작은 마을에서 온 부부에게 입양되어 세 아들과 함께 자랍니다.
그녀의 양부모는 그녀와 세 아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도록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집안에서는 단 하나의 규칙이 있었는데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규칙이었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야구, 농구, 체조 등의 스포츠를 즐겼고, 마당에서 트램펄린을 타고 곡예 동작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그녀는 전문적인 텀블링을 습득하며 일리노이주 챔피언 텀블러가 됩니다.
이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보고 체조에 큰 관심을 두게 된 그녀는 미국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도미니크 모체아누(Dominique Moceanu)를 동경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체아누는 자신의 친자매였습니다.
그녀는 모체아누에게 진심 어린 편지를 보내 그녀와 만날 수 있게 되었고, 패럴림픽에서 메달을 쟁취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월드투어를 하며 퍼포먼스 공연을 선보이고 있고, 최근에는 30m 높이의 실크 로프에 매달려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행위예술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상의 마지막 예로 카일 메이나드(Kyle Maynard)도 나옵니다.
카일은 세계적인 동기부여 강사이고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크로스핏 체육관장, 레슬링 선수권 대회 챔피언, 종합 격투기 선수, 역도 세계 기록 보유자이자 5,895m의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른 것도 모자라 1,000m 더 높은 아콩카과 산 정상에 오른 이 남자의 기록은 놀랍게도 팔다리가 없이 이루어낸 업적입니다.
그러면 그의 부모는 그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장애인으로 대했을까요?
당연히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믿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신체적 장애가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고 병원에서조차 낙태를 제안했으나 낙태는 선택 사항이 아니며 심지어 고려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카일의 생애 첫 해는 평범한 아이와 같이 자랐지만, 한 해가 지나며 카일의 삶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일은 설 수 없었고 걸을 수 없었으며 손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몇 년 동안이나 밥을 먹여줘야 했는데 언젠가는 아들이 스스로 살게 될 것을 미리 걱정한 그의 아버지는 더 이상 가족들에게 카일의 밥을 먹여주지 말자고 했고 카일은 살려면 스스로 밥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할머니와 부모는 그를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했습니다.
놀이터로 데리고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게 하였고 카일의 친구들은 카일에게 친절했습니다.
카일의 할머니는 카일이 손과 발이 없다는 것을 깜빡깜빡하며 설탕을 꺼내달라고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카일은 말합니다.
“수백, 수천 번을 실패하였습니다.
단지 꼭대기까지 설탕을 퍼 올릴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포기하려니까 지금까지 시도한 수백, 수천 번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딱 한 번만 성공하면 그다음부턴 식은 죽 먹기라는 생각이 들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카일은 결국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성공의 경험은 카일의 손재주와 집중력을 늘리는 데 놀라운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한 의지력까지 선물했습니다.
그는 유소년기에 미식축구에 도전했고 레슬링에 도전해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을 상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심지어 MMA 종합 격투기까지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카일의 아버지는 말합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제야 이 세상이 카일을 위한 세상이 아니란 걸 깨달았습니다.
‘너무 엄했던 날 용서해주렴. 하지만 네가 처한 상황에서 무엇인가 할 수 없을 때마다 포기한다면 앞으로도 네가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성공을 이뤄낸 사람들이 믿었던 것은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것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준 대상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그의 부모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젠 브리커의 양부모처럼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라는 규칙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면 그것 자체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은 불가능이 없다는 것이었고, 이 믿음이 수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유튜브 채널 ‘스터디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이것을 생각하세요’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일본의 한 초등학교에서 뜀틀 대회가 열렸습니다.
교사들은 엄청난 높이까지 뛰어오른 한 아이에게 가장 높은 10단 높이까지 시도해보라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뜀틀은 마치 높은 담장과도 같았습니다.
몇 번을 실패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교사들은 믿어주었습니다.
결국 포기하려 할 때 반 아이들이 나와서 그를 둘러싸고 응원을 해 주니 가뿐하게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종종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단 하나의 공통점은 자신의 입장을 무조건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댈 언덕을 제공한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의 인생은 180도 바뀔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이미 그것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 한계를 뛰어넘을 때 사람들은 우리만이 아닌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준 대상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표징이 없다면 아무리 주님을 믿으라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우리 한계를 뛰어넘도록 믿고 계십니다.
제발 믿음이 있다면 제발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하느님을 부정하는 말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공경한다면 우리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습성을 버리고 다 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말하면 믿게 됩니다.
믿어지면 결국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증명하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그저 일어서라면 일어서야겠습니다. 떠나라면 떠나야겠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인데, 대체 왜 그랬는지, 과거에 제가 그랬습니다.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취미가 뒷담화요 특기가 놀려먹기, 돌려까기였습니다.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왜 하필 나만?
왜 꼭 나야여만 하는가?
그런데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참 과묵한 사람이었는데, 가끔 입을 열면 그렇게 믿음직하고 듬직했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들 흉보지 않았습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 참 말을 이쁘게 하더군요.
그를 만나며,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내 모든 속사정을 털어놔도 아무 문제가 없겠구나...
그러면서 제 심각한 언어생활을 깊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그런 사람 한 사람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이런 면에서 나자렛의 마리아의 언어는 지나치게 말 많은 우리, 때로 천박한 언어로 가까운 이웃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사실 마리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구세사 안에서 큰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안에 나타난 마리아의 언어는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무척이나 과묵하고 진중했던 여인이었음을 반증하는 표시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다는 어마어마한 대사건 앞에서 두렵고 떨렸겠지요.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아직 어린 자신,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자신 앞에 펼쳐질 하느님 구원의 손길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고민 앞에 근심걱정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정되고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자 마리아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너무나 엄청난 초대인지라 큰 의구심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용감히 여쭙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루카 복음 1장 34절)
가브리엘 천사가 단칼에 해결해줍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루카 복음 1장 35절)
그러자 마리아는 지체하지 않고 호의적으로 능동적으로 즉각적인 응답을 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복음 1장 38절)
마리아의 신속하고 즉각적인 순명으로 인해 과분하게도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그저 일어서라면 일어서야겠습니다.
떠나라면 떠나야겠습니다.
받아들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탄생 예고>
‘여섯째 달에’ 라는 말은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고 나서 여섯 달 뒤에”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탄생 사이에 여섯 달의 시간 간격을 두셨을까?
하느님만 알고 계시는 어떤 시간표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 집안도 선택하셨고, 요셉도 선택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의 다윗 가문에서 태어나시는 것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창세 49,10-11; 미카 5,1).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때에, 당신이 정하신 일을 하시면서도, 인간들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어쩌면 그 ‘여섯 달’은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할 때까지 하느님께서 기다리신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간 시간이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또 어떤 모습으로 갔는지, 그런 세부사항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인사를 하는데도 마리아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즈카르야의 경우에는 천사를 보고 몹시 두려워했습니다(루카 1,11-12).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두려워하지는 않고, 천사가 한 인사말의 내용 때문에 놀라기만 했습니다.
마리아는 왜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하느님께 가까이 가 있는, 즉 늘 하느님과 함께 사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현존을 늘 의식하고, 체험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천사의 나타남 자체는 두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마리아는 기도하는 중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은 항상, 그리고 ‘지금’,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뜻인데, 마리아 쪽에서도 언제나 항상 주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라는 말은 신앙인의 모범이신 마리아의 신앙생활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기뻐하여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왔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말이 그저 평범한 시골 처녀일 뿐인 자기를 특별히 높이는 말이라서 놀랐고, 그래서 “왜 그런 인사를 할까?” 라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일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묵상하는 마리아의 성품과 신심을 나타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나의 인사말에 놀라지 마라.”이고,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는 “하느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인사했다.”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을 요약하면, “이제 너를 통해서 메시아께서 곧 강생하실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다. 또 그분은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실 분이다.”입니다.
‘다윗의 왕좌’는 메시아 왕국의 왕권을 뜻하고, ‘야곱 집안’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뜻합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마리아의 말은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믿음, 순종, 실행 의지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번역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인 것처럼 보여서 별로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런 일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천사의 대답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네가 따로 특별히 할 일은 없다.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다. 너는 모든 것을 성령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입니다.
천사는 그것을 설명하려고 엘리사벳의 임신을 언급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는 말은 여기서는 “하느님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시는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기꺼이 하느님의 협력자가 되겠다고 응답하는 순간, 잉태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하는 순간, 인류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초인(超人)이 아니라 보통 사람입니다.
우리도 누구나 마리아처럼 ‘믿음과 응답과 순종’의 신앙인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삶의 영원한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 - 성모 마리아 예찬禮讚>
오늘 12월20일은 대림2부 넷째 날입니다.
날마다의 M후렴이 참 아름답고 주님 오심에 대한 좋은 준비가 됩니다.
오늘 M후렴은 “오! 다윗의 열쇠여(O Clavis David)”로 시작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 알렐루야 환호송과 일치합니다.
“오 다윗의 열쇠여, 이스라엘 집안의 홀이시여,
주께서 여시면 아무도 닫지 못하고, 닫으시면 아무도 열지 못하오니,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결박에서 풀어 주소서.”
노래할 때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써보니 참 깊고 은혜롭습니다.
강론 쓰는 시간은 공부하는 시간, 회개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대림 제1주일부터 2월1일까지 끝기도후 라틴어로 부르는 성모 찬송가 역시 내용이 참 은혜롭습니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영원으로 트인 하늘의 문, 바다의 별이시여,
넘어지는 백성 도와 일으켜 세우소서.
당신의 창조자 주님 낳으시니, 온 누리 놀라나이다.
가브리엘의 인사받으신 그 후도 전과 같이 동정이신 이여.
죄인을 여여삐 여기소서.”
오늘 복음의 배치도 절묘합니다.
월요일 대림 제4주일 주인공은 성 요셉이었고, 어제 월요일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이 예고되며 주인공은 마리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의 순종으로 아기 예수가 잉태된 사실은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 세계에 들어오시기로 선택하신 장소는 로마도 아테네도 알렉산드리아도 즉 당시 세계의 권력, 문화, 학문의 중심지도 아닌 이름도 미미한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 나자렛입니다.
하느님의 한없는 겸손과 자기비움에 감격하게 됩니다.
시골 동네 처녀 마리아를 당신의 도구로 삼으실줄을 세상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새삼 깊이 묵상할 성탄의 신비 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천사인 가브리엘은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만나자 마자 축복의 인사를 바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바로 이 말씀은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 드리는 ‘말씀 처방전’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본 어느 수녀의 감동에 벅찬 환성歡聲도 잊지 못합니다.
“아, 신부님,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입니다. 살아 있는 보석같은 말씀입니다.”
도대체 성모 마리아의 위대한 점은 어디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도 은총 가득한 존재로 살 수 있을까요?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위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도 해당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또한 주님의 축복 받은 존귀한 존재로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까요?
성모 마리아의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양부 성 요셉과 흡사합니다.
첫째, 정주의 삶입니다.
안주가 아닌 늘 새롭게 시작하는 정주입니다.
밖으로는 님기다리는 산같은 정주에,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는 맑은 강같은 내적여정의 삶입니다.
안주로 녹슨 삶이 아니라 늘 정주 수행으로 반짝이는 영혼이요,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 아니라 늘 맑게 흐르는 삶입니다.
바로 나자렛 고을에서 마리아는 참된 정주의 삶중에 끊임없이 깨어 하느님을 찾으며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렸음이 분명합니다.
눈밝은 하느님이 이를 놓칠리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탓할 것이 아니라 부단히 정주의 삶에 충실한지 자성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은 당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이런 마리아를 찾아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지 확인시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둘째, 경청의 삶입니다.
마리아는 분명 침묵과 고독을 사랑했던 영혼이었을 것입니다.
침묵과 고독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생래적 영적 본능에 속합니다.
고립단절의 침묵과 고독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과 연대해 있는 사랑의 침묵, 사랑의 고독입니다.
얼마나 경청하는 관상가의 모습인지 특히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관상가의 진면목이 일정한 경지에 이른 렉시오 디비나의 수준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마리아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천사를 통해 하느님은 자기 속내를 다 드러냅니다.
도대체 마리아에게는 비밀이 없는 듯 투명하게 다 밝힙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모험입니다.
“보라, 이제 네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선물이기보다는 참 버거운 짐같은 느낌입니다만 이어지는 말씀들을 마리아는 충분히 경청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경청이요 ‘경청 훈련’ 또한 참으로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셋째, 순종의 삶입니다.
마리아는 충분히 경청한 후 제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물어봅니다.
결코 허술하지 않고 아주 야무진 마리아의 일면을 봅니다.
결코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주눅들지 않고 참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과 신뢰를 가득 담아 진심으로 묻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주님의 천사의 자상한 설명을 통해 마리아에게 지극 정성으로 배려하는 하느님의 친절이, 하느님의 겸손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필시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진실과 겸손에 감동한 마리아의 즉각적 순종임이 분명합니다.
그대로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담아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 이 말씀이, 마리아의 응답이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됩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으로 비로소 하느님은 세상에 들어오셔서 차질없이 구원역사를 펼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마리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온세상이 깊은 침묵중이었다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주석도 생각납니다.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조마조마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이 하느님께는 얼마나 고마웠겠는지요!
아마도 하느님께서도 성모님을 통한 우리의 전구를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침내 마리아의 순종으로 이사야의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예언도 실현됩니다.
이를 가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밝힙니다.
“신앙의 눈으로 계시 전체와 연관시켜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 계획에서 당신 아들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셨던 신비한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톨릭 교리서 502)
“마리아의 동정성은 강생에서 취하신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다.
그분께서 취하신 인간 본성 때문에 성부에게서 멀어지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 인성으로는 어머니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이러한 두 본성 안에서 그분은 바로 성부의 아들이시다.”
(가톨릭 교리서 503)
성모 마리아는 우리 삶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정주의 삶, 경청의 삶, 순종의 삶을 통해 날로 성모님을,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성탄의 신비에 점점 더 깊숙이 다가가는 중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나자렛의 평범한 처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이런 인사를 듣습니다.
이 짧은 인사말에 얼마나 많은 축복이 들어있는지요!
충만한 은총, 기쁨, 주님의 현존은 주님과 일치를 꿈꾸는 모든 신앙인의 바람입니다.
바로 성 삼위 하느님 안에 머무른다는 뜻이니까요.
마리아는 이 인사말에 곰곰이 머무릅니다.
혹 지금 누군가 우리에게 이런 인사를 한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에이, 무슨 말씀을... 전 아니에요."라고 짐짓 겸손한 태도로 물러날까요?
아니면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은총은 무슨 은총... 기쁨은 무슨..." 하며 억울해할까요?
아니면 "맞아요 전 이미 주님과 함께 은총 가득한 삶을 누리고 있어요 그래서 기쁘고 감사해요"라고 호응할까요?
"두려워하지 마라,
...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루카 1,30)
천사의 말은 점점 더 그녀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통상적으로 '총애'란 유달리 특별하게 받는 사랑을 의미하니, 나자렛의 평범한 소녀가 받아들이기엔 과할 수도 있는 표현입니다.
게다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총애라니, 이 사랑은 숨막히는 환희와 더불어 두려움까지 몰고 옵니다.
사실 그 총애는 보통의 인간이 감당하기엔 벅차고 버거운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
(이사 7,14)
이는 제1독서에서 선포된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로 복음서의 천사의 말을 요약합니다.
물론 마리아에게 당장은 당혹스럽게 들리지만, 사실 예언서를 듣고 자란 이스라엘 소녀라면 모르지 않았을 메시아 도래의 내용이지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루카 1,37)
임신과 출산의 생물학적 원리를 들어 의아해하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답합니다.
이 한 마디면 사실 모든 의문은 끝이 납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걱정과 불안, 의혹은 대부분 이를 믿지 못해서 일어나는 내적 소요들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이 얼마나 깔끔하고 간명한 답변인지요!
순결한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단순하고 용기있는 고백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주님의 계획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믿고 사랑하니 따르겠다는 의미지요.
마리아는 자기 앞날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이 답변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개의치 않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무지를 견인해 성큼 하느님 심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도 성큼 그녀 안에 들어가십니다.
"주님이 들어가신다.
영광의 임금이시다."
(화답송)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겸손되이 한 소녀에게 청하시고, 떨리는 마음으로 답을 들으시고, 마침내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안을 거처 삼아 들어가십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믿음과 용기로 담대히 협력합니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이사 7,12)
제1독서에서 표징을 청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아하즈가 답변합니다.
짐짓 겸손한 답변 같지만, 사실은 겸손을 가장해 자기 뜻을 내세우고 있지요.
하느님은 이미 표징을 준비하고 계셨고, 어느 경로든 누구의 협력이든 그 표징은 드러날 것입니다.
중요한 건 믿음과 용기로 촉발된 순종입니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인간적 논리로는 얼토당토 않은 일을 제안하시기도 합니다.
삶의 도전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시달리느라 미처 경청하지 못해 흘려보내기도 하고, 아하즈처럼 겸손 뒤로 숨어 거부할 수도 있지만, 마리아처럼 단순하고 진솔하게 용기내어 순종하기도 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은총을 충만히 누리며 주님 현존 안에 머무른다면, 그 믿음이 용기로, 그 용기가 순종으로 이어질 겁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누구를 통해서 오든, 깨어 기다리며 우리 안에 거하려 들어오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프로포즈를 놓치지 맙시다.
"Fiat"의 순간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 일치를 이룰 것입니다.
꼭 그리 될 겁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의 지문’으로 잘 알려진 그레이엄 헨콕은 넷플렉스를 통하여 ‘고대의 아포칼립스’를 제작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12,800년경에 지구에는 대재앙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구 곳곳에 ‘대홍수’에 대한 신화와 설화가 있는 것은 당시 대재앙에 대한 인류의 기억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문명이 있었는데, 대홍수와 해수면의 상승으로 그 문명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거나, 없어졌다고 합니다.
다만 대재앙의 혼란 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문명을 당시 신석기인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레이엄 헨콕은 고대의 아포칼립스를 통하여 당시 문명인들이 남긴 유적을 찾아서 보여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유적들은 “멕시코 촐룰라, 인도네시아 구눙 파당, 마이애미 대홍수 흔적, 고대의 거석문화, 튀르키예 지하 도시 데린쿠유, 괴베클레 테페’ 등이 있습니다.
그레이엄 헨콕은 고대 문명인들이 하늘을 관측하기 위해서 높은 사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인류의 문명이 직선으로만 발전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35억년 지구의 역사에 최소 5번의 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류의 문명 또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선형으로 발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고고학, 천문학, 유전공학은 고대의 문명을 찾는 학문이 되고 있습니다.
신화, 설화는 고대 문명이 우리에게 남겨준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또 다른 표징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여러 가지 이정표를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머물고 사는 지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정표입니다.
온 우주에 우리가 머무는 지구처럼 아름다운 별은 없습니다.
불, 땅, 공기, 물은 아름다운 자연에 생기를 넣어줍니다.
구름, 꽃, 새, 나무, 강, 바다, 산은 하느님의 엄위하심과 사랑을 느끼게 해 줍니다.
예술가들은 노래, 미술, 건축, 연극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였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빛이 여울지는 걸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산들바람에 단풍이 흔들리는 걸 보면 아이가 노래에 맞추어 춤추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은 도와주려고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신문의 내용을 보시고 많은 분이 후원해 주십니다.
지금 힘들고, 아프고, 외로운 이들의 이웃이 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능력을 드러내기보다는 숨어서 향기를 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좋지만, 넓은 바다처럼 모든 것을 품어주고 받아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양심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정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는 철학, 사상, 문학, 예술, 종교를 통해서 정의와 공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앞날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우리가 지구별에 왔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찰하게 해 줍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뒤를 따라가니 길이 되었습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조금씩 동이 트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스름하지만 칠흑 같은 밤은 지나가고, 여명이 시작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새벽을 밝히는 여명이었다면,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이정표를 약속하십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젠 이정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명은 사라지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천지 만물이 환하게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지금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드디어 복음(福音)의 시대가 열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참된 자유,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이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마리아의 응답으로 현실이 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능력, 업적, 재능, 권력, 재물, 명예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마리아처럼 우리가 응답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천사의 아룀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시어 성령의 빛으로 주님의 성전이 되셨으니 저희도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면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일도 사실은 예상할 수 있고,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황해하는 것은 아직 그 상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갑곶성지에서는 봉안당에 들어오실 때 사제가 직접 안치 예식을 합니다.
고인을 위한 마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 살아서 힘들어하는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유가족 중의 몇은 고인의 죽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분명 언젠가는 자기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의 죽음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상 밖의 일은 우리 인생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특히 예상 밖의 일도 또 예상하는 일도 모두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상 밖의 일이라고 불평불만 속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하느님과 함께 하는 희망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습니다.
예상했던 일이 아닌, 분명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 당시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했다고 공개 처형으로 돌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면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가브리엘 천사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라는 말에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7)라고 고백하십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예상 밖의 일에서도 하느님께서 계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이라는 옷으로 보이는 예상 밖의 일이 자주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주님을 찾고 또 주님을 믿고 있습니까?
주님을 찾고 믿기보다, 고통과 시련 자체에만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