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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오이(惟守吾耳)
지켜야 할 것은 오직 나뿐이다는 뜻으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나를 지켜내는 일일 뿐이다는 의미를 지닌다. 세상에서 가장 지켜내기 어려운 것은 돈도 아니고 명에도 아니고 오직 자기를 지켜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惟 : 생각할 유(忄/8)
守 : 지킬 수(宀/3)
吾 : 나 오(口/4)
耳 : 귀 이(耳/0)
1. 나는 어디에 있는가?
유명했던 시인 고은은 한때 우리나라 민족 시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유명했다. 문단의 거묵(巨木)이라 칭할 만큼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과 명성 이면의 세계는 최영미 시인의 시에 밝혀진 것처럼 <괴물>이었다. 그는 성추행과 괴물 같은 행동의 문제로 문단에서 거의 추방되다시피 하였다.
그는 최근에 시집 『무의 노래』(실천문학사)와 대담집 『고은과의 대화』을 내며 문단에 복귀하려 했으나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시집을 낸 실천문학사의 윤한룡 대표는 ‘깊이 사과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시집 공급을 중단했다.
전 박원순 서울 시장은 한때 매우 잘 나갔다. 그는 지지자들이 많았고 서민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민의 인권과 서민의 삶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매우 자상한 사람이었으며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소탈했다. 이런 수식어가 그를 장식하는 문구였다. 그러나 그는 여직원에 대한 성추행 사건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왜 죽었을까? 그동안 알려진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상반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이 발동해서였을까? 어쨌든 그렇게 믿고 싶다.
자청타청으로 한때 충정의 기수를 내세우며 대권 주자의 반열에 올랐던 안희정 전 충청남도지사 역시 진보계열에서는 박원순 서울 시장과 평판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역시 매우 친화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화도 소탈하였고 업무 추진력도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여비서와 성추행과 성폭력으로 옥살이를 하고 정계에서 영원히 떠났다.
뒷날 밝혀진 것이지만 위의 세 사람에 대한 미스터리는 많다. 고은 시인의 경우 그의 성장과 시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 그의 삶의 스트레스와 시인으로 성장 후의 신화 이면에는 시와 삶만큼 미스터리가 많다. 시적 감성의 이면에는 야수적 속성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을 다스리지 못했던 것 같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자살 후 빚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가정생활에는 미스터리가 많았다. 안희정 전 충남 지사는 부부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오랜 시간 별거한 것을 알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겉으로는 화려했으나 내부적으로는 화려하지 않았다. 세상을 다스리는 일(세상 정치)에는 노력하여 지지자들의 인정을 받았으나 자신을 다스리는 일(자기 정치)에는 소흘했던 것 같다. 셋 다 모두 나 아닌 타인, 나 아닌 세상의 여러 사건, 이를테면 외물(外物)에는 몰입하였으나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을 성찰하며 자신을 지키는 일에는 노력하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어디에 있는가’ ‘남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매우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말할 줄 아는데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에는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세상일에는 관심이 많다. 연일 날아드는 카톡 문자와 각종 메시지를 보면 좋은 말들도 많지만 우울한 이야기들도 많다. 대부분은 퍼 날라 오는 것들인데 그 내용을 읽어보고 보내는지 읽지도 않고 보내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특히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냉혹하리만큼 날카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면 가차 없이 고기 다지듯 난도질하는 이들도 있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에는 관심이 하늘을 찌르는데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 같다.
현대 한국인들은 상당수가 타인 지향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남에게는 관심이 많은데 정작 자신에게는 관심이 적다. 돈과 권력에는 관심이 많은데 정작 자신의 마음 수양과 참된 행복에는 관심이 적은 것 같다. 연일 욕망에 목숨을 걸며 더 큰 욕망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 욕망의 덩어리가 무엇인지, 그 안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 욕망의 덩어리가 정말 자신에게 가치가 있으며 이로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매일 거울을 본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기의 겉모습을 다듬는 일에는 매진하는데 얼굴에 비춰오는 자신의 내면은 들여다보지 않는 것 같다. 상당수의 사람이 확실히 자기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 타인 지향성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2. 유수오이(惟守吾耳)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수오재기(守吾齋記)
벤처 신화를 창조하였던 스티브 잡스는 50대의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죽었다. 그가 병마와 싸우다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사랑하라, 가족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그의 수많은 어록 중에서 인생에 대한 후회와 성찰이 이 말에 집약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나를 사랑하라”는 말에 모든 것이 집약된다. 가족을 사랑하는 일, 이웃을 사랑하는 일 모두 나를 사랑하는 일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삶의 당위적 본분과 자기 성찰과 올바른 자기 가꿈’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외물에 대한 욕망 충족에 매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가치 전도인 것 같기도 하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자기 내면의 올바른 자아와 자기 존재를 지켜내는 일이다. 앞의 세 사람은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뿐만 아니라 평생 가꾸어 온 외부적 명성까지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건강할 때는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가 건강을 잃고 난 후에 건강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자신을 지키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스티브 잡스가 임종 전에 말했던 ‘나를 사랑하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나를 지켜내는 일이다. 그것을 한자 성어로 유수오이(惟守吾耳)라 한다. 이는 ‘지켜내야 할 것은 오직 나뿐이다. 즉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나를 지켜내는 일일 뿐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세상에서 가장 지켜내기 어려운 것은 돈도 아니고 명에도 아니고 오직 자기를 지켜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의 수필 수오재기(守吾齋記)에서 ‘나를 지키는 일의 중요성’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다.
수오재(守吾齋)라는 것은 큰형님이 자신의 거실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 그 이름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며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는 나[吾]보다 절실한 것이 없는데, 비록 지키지 않더라도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상한 이름이다’라고 생각했다.
내가 장기로 귀양 온 이후 홀로 지내면서 그 이름을 정밀하게 생각해 보던 어느 날 갑자기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환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만물에는 지켜야 할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지켜야 할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자가 있는가? 그러니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그러니 집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나의 정원의 꽃과 과실나무 등 나무들을 뽑아갈 자가 있는가? 그 뿌리가 땅에 깊이 박혀 있다. 나의 책을 훔쳐 없애버릴 자가 있는가? 성현의 경전은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물이나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 있겠는가? 나의 옷과 식량을 도둑질하여 나를 궁색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지금 천하의 실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 될 수 있고, 천하의 곡식은 모두 내가 먹을 양식이 될 수 있다. 도둑이 비록 한두 개를 훔쳐 가더라도, 천하의 모든 옷과 곡식을 모두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런즉 천하 만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
그러나 오직 ‘나’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에 일정함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과 작록(爵祿)으로 유인하면 떠나가고, 위엄과 재화(災禍)가 겁을 주면 떠나가며,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만 들려도 가버리고, 미인의 새까만 눈썹에 흰 이빨의 요염한 모습만 보아도 가버린다. 그런데, 한 번 떠나가면 돌아올 줄을 모르니 붙잡아 둘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 만물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으로는 ‘나’보다 더한 것은 없다. 그러니 실과 끈으로 잡아매고 빗장과 걸쇠로 잠가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를 잘못 간직했다가 ‘나’를 잃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과거 급제하는 명예가 좋게 보여서 과거 공부에 빠진 것이 10년이었다. 마침내 조정에 나아가 검은 사모관대에 비단 도포를 입고, 백주 대로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12년을 보냈다. 그러나 갑자기 처지가 바뀌어(유배의 몸이 되어) 한강을 건너고 문경새재를 넘어, 친척들과 멀어지고 조상의 묘소를 버린 채 아득한 바닷가의 대나무 숲(첫 유배지인 포항의 장기)에 달려와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때에는 ‘나’도 땀이 흐르고 두려워 숨을 죽이면서, 허둥지둥 내 발뒤꿈치를 쫓아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내가 ‘나’에게 말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가 끌어서 온 것인가? 또는 해신(海神)이 불러서 온 것인가? 그대의 가족과 이웃은 모두 소천(苕川)에 있는데, 어찌 그 본향(本鄕)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멍한 채로 움직이지 않으며 끝내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얼굴빛을 보니 마치 얽매인 것이 있어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끝내 ‘나’를 붙잡아서 함께 머물렀다.
이 무렵 나의 둘째 형님 좌랑공(佐郞公)도 그의 나를 잃고 나를 따라 남해로 가셨으니, 역시 자신을 붙잡아서 그곳(유배지)에 머물렀다. 유독 나의 큰 형님만은 그 ‘나’를 잃지 않고 편안하고 단정하게 수오재(守吾齋)에 앉아 계시니, 어찌 본디부터 지키는 것이 있어 ‘나’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큰형님께서 그의 거실에 이름을 ‘수오(守吾)’라고 붙인 까닭일 것이다.
일직이 큰형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의 자(字)를 태현(太玄)이라고 지어주셨다. 나는 오로지 나의 태현을 지키고자 나의 서재 이름을 ‘수오(守吾)’라 붙였다” 이는 이름 지은 뜻을 밝힌 것이다.
맹자께서 “지켜야 할 것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대한가? 자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대하다”라고 말씀하였으는데 그 말씀이 참으로 진실하다.
드디어 내 생각을 써서 큰형님께 보여 드리고 수오재의 기문(記文)으로 삼는다.
- <정약용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수오재기(守吾齋記)> -
다산 정액용 선생의 집안은 신유박해(1801)로 풍비박산이 났다. 이때 다산 선생은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으로 유배되었다. 다산 선생은 장기에서 그해 3월부터 10월까지 유배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산 선생의 집안은 건재했다. 자신과 집안을 잘 지켜 낸 다산 선생의 큰형님인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산 선생은 장기로 유배되었을 때 전에는 의아하게 여겼던 큰형님이 서재에 수오재(守吾齋)라고 쓴 글귀가 가슴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 의미를 깊이 깨달았다.
다산 선생은 위인지학(爲人之學) 즉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고 경세를 논하는 경세의 학을 하였으나 큰형님인 정약현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기를 수양하고 자기와 집안을 다스리는 수기(修己)의 학에 매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다산 선생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는다.
다산 선생의 벼슬살이는 12년이었다. 다산 선생은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멋진 관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신유박해는 다산의 이러한 벼슬살이의 꿈을 모두 앗아갔다. 신유박해는 다산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다산 선생은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 귀양살이를 했다. 다산 선생의 둘째 형 정약전도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어류 연구에 매진하여 <자산어보>를 썼다.
다산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된 때는 그의 나이 40세였다. 어쩌면 다산 선생의 강진 유배는 꿈의 좌절이며 인생의 끝일 수도 있었다. 다산 선생은 위의 수오재기(守吾齋記)에서 밝히듯이 나이 40에 인생의 중대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 전환점은 인생관의 전환점이며 삶의 전환점이었다. 다산 선생은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성찰한다.
그리고 지나간 40년이란 삶은 자신을 잃어버린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산 선생은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하루하루를 성찰하면서 자신과 싸웠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참된 나를 이룰 것인가? 다산 선생은 그 답을 찾기 위해 담대한 출발을 하며 학문과 수행에 매진하였다.
이제 다산 선생의 주된 관심사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리하여 뒷날 다산 선생은 위기지학뿐 아니라 위인지학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남긴다. 다산 선생의 학문과 인격의 세계는 빛이 난다. 참된 ‘나’를 지키고 참된 ‘나’를 찾아 나선 학문의 결과였다.
3. 유수오이(惟守吾耳) 즉 오직 나를 지키기 위하여
무엇이 나를 지키는 일을 방해하는가? 그것은 다산 선생이 수오재기(守吾齋記)에서 말했다. 그것을 요약하면,
첫째, 물욕(物慾)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극복하기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범죄와 죄악이 물욕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치에서의 정경 유착이니 하는 말도 물욕의 소산이다. 관리가 뇌물을 받는 것도 물욕의 소산이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은 천박한 세상이다.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많은 사회가 바른 사회이다. 특히 운리와 도덕, 인간적 가치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세상이라야 바른 세상이다. 물욕이 ‘나’를 유혹하면 나는 그것에 이끌려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옛말에 ‘돈이면 귀신도 조종할 수 있으며 돈이면 죽은 시신도 벌떡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돈의 위력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돈 전쟁이다.
둘째는 권력욕(權力慾)이다. 권력욕 또한 물욕만큼이나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임과 동시에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욕망이다.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죽이기도 한다. 정치적 온갖 권모와 술수는 권력욕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권력욕은 몰욕과 형제지간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 돈이 있고 돈이 있는 곳에 권력이 있다. 지금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대장동 사건이나 50억 클럽 사건, 등등도 모두 권력욕과 몰욕의 융합체이다. 어떤 이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돈을 뿌린다. 또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끌어모은다. 그러다가 더 큰 것을 잃기도 한다.
셋째는 색욕(色慾)이다. 색욕은 성욕(性慾)이다. 성욕은 인간의 무의식적인 근원적인 욕망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다움과 창조를 향한 근본적인 에너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악마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잘못 발휘되면 인간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그런데 그 성욕은 인간을 은밀하게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유혹하는 욕망이다. 고은 시인, 박원순 시장, 안희정 지사 등 모두 그 성욕을 다스리지 못하여 발생한 일이었다. 다산 선생이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만 들려도 가버리고, 미인의 새까만 눈썹에 흰 이빨의 요염한 모습만 보아도 가 버린다.”는 것도 사람은 성욕을 이겨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말해 준다.
넷째, 향락욕(享樂慾)이다. 사람들은 향락을 추구한다. 그리고 누구나 향락에 빠지기 쉽다. 그 향락의 중심에 성욕이 있고 유희가 있다. 권력과 돈은 그것을 해결해주는 중요한 도구이다. 사람들이 권력과 돈을 획득하려고 매진하는 것도 어쩌면 향락욕(享樂慾)을 채우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향락은 허무함을 남긴다. 향락에는 음탕함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공자도 낙이물음(樂而不淫) 즉 즐기되 음탕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던 것 같다.
다섯째, 태만(怠慢)이다. 이는 게으름과 귀찮음이다. 태만은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태만(怠慢)을 이겨내야 규칙적인 생활도 가능하고 규칙적인 운동도 가능하다. 그래야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 생활을 규칙적으로 한다는 것은 대단한 자기관리이며 성찰의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태만(怠慢)을 이겨내야 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 다섯 가지는 가장 이겨내기가 어려운 것들이다. 그리고 앞의 네 가지 욕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이며 삶의 촉매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결핍되어도 살아가기 어려우며 지나치게 충족되어도 문제가 발생한다. 중요한 것은 공자가 낙이물음(樂而不淫)이라 했듯이 충족하되 넘치지 말아야 하며 음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매우 어렵다. 아무리 총명한 사람도 색욕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그러기에 수행으로 득도(得道)하였다고 자랑하던 지족선사도 황진이의 아름다운 자태에 빠지지 않았던가?
자신을 지키는 일은 천명장복(天命長福)의 길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이 준 명이 있으며 그 명대로 오랫동안 건강하게 탈 없이 복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하려면 수오(守吾) 즉 나를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선 매일 관심을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돌리며 자신을 가꾸고 성찰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가꾸고 성찰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가꾸는 일이며 생활 습관을 가꾸는 일이다. 그리고 자기를 지키는 학문인 수기(修己)의 학문 즉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써야 한다. 여기에는 겸허와 절제와 인내가 필요하며 매사에 확증편견과 치우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수오이(惟守吾耳) 즉 지켜야 할 것은 오직 나뿐이다. 다산 선생은 평생 ‘나는 나를 지키기 어려운 병에 걸려 있다’고 하면서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평생 나를 지키는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과 생활에 늘 새기기 위하여 귀양살이가 끝나고 고향인 소내로 돌아와 자기 집의 현판을 여유당(與猶堂)이라 짓고 그렇게 이름 지은 이유를 써서 아이들에게도 보냈다.
다산 선생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노자(老子)에는 ‘겨울 시내를 건너듯 머뭇머뭇하노라(與) 사방을 두려워하듯 조심조심하노라(猶)’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은 내 병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겠는가?”<여유당기(與猶堂記)> 타인 지향성의 시대에 사는 우리, 세상적인 성공을 위한 공부에만 매진하는 현대인들, 이제 자신에게로 관심을 돌려 유수오이(惟守吾耳)에 힘쓸 일이다.
▶️ 惟(생각할 유)는 ❶형성문자로 唯(유)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묻다, 알아보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隹(추, 유)로 이루어졌다. 마음에 묻다, 전(轉)하여 생각하다의 뜻이 있다. 또 음(音)을 빌어 발어(發語)의 어조사로 쓰인다. ❷형성문자로 惟자는 '생각하다'나 '사려하다', '오직'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惟자는 心(마음 심)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隹자는 꽁지가 짧은 새를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추→유'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惟자는 단순히 '생각하다'나 '사려하다'를 뜻하기 위해 心자가 의미요소로 쓰인 글자이지만 실제로는 '오직'이나 '오로지'라는 뜻으로 쓰이는 편이다. 그래서 惟(유)는 ①생각하다, 사려(思慮)하다 ②늘어 세우다 ③마땅하다, 들어맞다 ④~이 되다 ⑤오직, 오로지 ⑥오직, 홀로 ⑦생각컨대 ⑧이(어조사; 伊, 是) ⑨~와(접속사) ⑩~으로써, 때문에 ⑪예, 대답(對答)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만 단(但), 다만 지(只), 생각 념(念), 생각 사(思), 생각 상(想), 생각할 임(恁), 생각할 륜(侖), 생각할 억(憶), 생각할 려(慮), 생각할 고(考)이다. 용례로는 마음으로 생각함을 사유(思惟), 삼가 생각함을 공유(恭惟), 삼가 생각하건대를 복유(伏惟), 삼가 생각함을 앙유(仰惟), 다시 생각해 봄을 고유(姑惟), 두루 생각컨대를 통유(統惟), 공경히 생각함을 장유(莊惟), 매 위에 장사 있나는 속담으로 매질하는 데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를 이르는 말을 유장무장(惟杖無將), 의리의 유무는 따지지 않고 이해 관계에만 관심을 가진다를 이르는 말을 유리시시(惟利是視), 분주하고 다사多事하여 날짜가 모자란다를 이르는 말을 유일부족(惟日不足), 먹는 것을 백성들은 하늘과 같이 여긴다를 이르는 말을 식유민천(食惟民天), 옷은 새 옷이 좋고 사람은 옛 사람이 좋다를 이르는 말을 인유구구(人惟求舊), 죄상이 분명하지 않아 경중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가볍게 처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죄의유경(罪疑惟輕) 등에 쓰인다.
▶️ 守(지킬 수)는 ❶회의문자로 垨(수)는 동자(同字)이다. 갓머리(宀; 집, 집 안)部의 관청에서 법도(寸; 손, 손으로 꽉 잡는 일, 또는 치수, 규칙)에 따라 일을 한다는 뜻이 합(合)하여 직무를 지킨다는 데서 지키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守자는 '지키다'나 '다스리다' 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守자는 宀(집 면)자와 寸(마디 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寸자는 又(또 우)자에 점을 찍은 것으로 ‘법도’라는 뜻을 갖고 있다. 금문에 나온 守자를 보면 집안에 寸자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손톱을 날카롭게 세운 듯한 모습이다. 이것은 집을 '지킨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守자는 본래 '보호하다'나 '지키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寸자가 가지고 있는 '법도'라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다스리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守(수)는 (1)조선시대 때 관계(官階)가 낮은 사람을 높은 직위에 앉혔을 경우에 관계와 관직 사이에 넣어서 부르던 말. 가령 종2품(從二品)인 가선 대부다 정2품(正二品)직인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된다고 하면 가선대부 수 이조판서(嘉善大夫守吏曹判書)라고 서칭(書稱) (2)조선시대 종친부(宗親府)에 두었던 정4품(正四品) 벼슬. 왕자군(王子君)의 증손(曾孫)들에게 주었음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지키다, 다스리다 ②머무르다 ③기다리다 ④거두다, 손에 넣다 ⑤청하다, 요구하다 ⑥지키는 사람 ⑦직무, 직책(職責), 임무(任務) ⑧벼슬의 지위는 낮고 관직은 높음을 나타내는 말 ⑨지방 장관(지방에 파견되어 그 곳을 지키는 일이나 사람) ⑩정조(貞操), 지조, 절개(節槪) ⑪임시, 가짜 ⑫벼슬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지킬 보(保), 막을 방(防), 좇을 준(遵), 지킬 위(衛),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칠 격(擊), 칠 공(攻)이다. 용례로는 지키고 보호함을 수호(守護), 절개를 지킴을 수절(守節), 일정한 지역이나 진지 등을 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키어 방비함을 수비(守備), 적을 맞아 지키는 형세 또는 힘이 부쳐서 밀리는 형세를 수세(守勢), 진보적인 것을 따르지 않고 예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따름을 수구(守舊), 건물이나 물건 등을 맡아서 지킴을 수직(守直), 행동이나 절차에 관하여 지켜야 할 사항을 정한 규칙을 수칙(守則), 법을 준수함을 수법(守法), 보기 위하여 지킴으로 관청이나 회사 등의 경비를 맡아 봄 또는 맡아보는 사람을 수위(守衛), 적의 공격 등을 막기 위하여 산성을 지킴을 수성(守城), 그대로 좇아 지킴을 준수(遵守), 보전하여 지킴을 보수(保守), 굳게 지킴을 고수(固守),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을 사수(死守), 공격과 수비를 공수(攻守), 후퇴하여 수비함을 퇴수(退守), 망을 봄으로 또는 그런 사람으로 교도소에서 죄수의 감독과 사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간수(看守), 경계하여 지키는 것 또는 그 사람을 파수(把守), 완강하게 지킴을 완수(頑守), 튼튼하게 지킴을 견수(堅守), 감독하고 지킴 또는 그런 사람을 감수(監守), 규칙이나 명령 등을 그대로 좇아서 지킴을 순수(循守), 중요한 곳을 굳게 지킴을 액수(扼守), 혼자서 지킴으로 과부로 지냄을 독수(獨守), 엄하게 지킴으로 어기지 않고 꼭 지킴을 엄수(嚴守), 행실이나 말을 제 스스로 조심하여 지킴을 자수(自守), 그루터기를 지켜 토끼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구습과 전례만 고집함을 일컫는 말을 수주대토(守株待兔), 입 다물기를 병마개 막듯이 하라는 뜻으로 비밀을 남에게 말하지 말라는 말을 수구여병(守口如甁), 사람의 도리를 지키면 뜻이 가득 차고 군자의 도를 지키면 뜻이 편안함을 일컫는 말을 수진지만(守眞志滿), 묵적의 지킴이라는 뜻으로 성의 수비가 굳세고 튼튼함을 이르는 말 또는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굳이 지킴을 일컫는 말을 묵적지수(墨翟之守), 빈방에서 혼자 잠이란 뜻으로 부부가 서로 별거하여 여자가 남편 없이 혼자 지냄을 뜻하는 말을 독수공방(獨守空房),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나라를 세우는 일과 나라를 지켜 나가는 일이라는 뜻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룬 것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창업수성(創業守成),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로 빼앗고 도리에 순종하여 지킴을 일컫는 말을 역취순수(逆取順守) 등에 쓰인다.
▶️ 吾(나 오, 친하지 않을 어, 땅 이름 아)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五(오)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형성문자로 吾자는 '나'나 '우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吾자는 五(다섯 오)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五자는 숫자 '다섯'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吾자는 본래 '글 읽는 소리'나 '나의 말'이라는 뜻으로 쓰였던 글자였다. 그러나 후에 吾자가 자신을 지칭하는 '나'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言자를 더한 語자가 '말씀'이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吾(오, 어, 아)는 ①나 ②그대 ③우리 ④글 읽는 소리 ⑤짐승의 이름 ⑥막다, 멈추게 하다 그리고 ⓐ친하지 않다(어) ⓑ친하려고 하지 않다(어) ⓒ소원(疏遠)한 모양(어) ⓓ땅의 이름(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글 읽는 소리 오(唔), 나 아(我)이다. 용례로는 우리들을 오등(吾等), 우리네를 오제(吾儕), 나 또는 우리 인류를 오인(吾人), 우리의 무리를 오배(吾輩), 나의 집을 오가(吾家), 우리 임금을 오군(吾君), 우리 문중을 오문(吾門), 우리 당을 오당(吾黨), 옛날에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일컫던 말을 오동(吾東), 나의 형이라는 뜻으로 정다운 벗 사이의 편지에서 쓰는 말을 오형(吾兄), 맞서 겨우 버티어 나감을 지오(枝吾), 참된 자기를 진오(眞吾), 나는 그 일에 상관하지 아니함 또는 그런 태도를 이르는 말을 오불관언(吾不關焉), 우리 집의 기린이라는 뜻으로 부모가 자기 자식의 준수함을 칭찬하여 이르는 말을 오가기린(吾家麒麟), 자기가 도와서 출세시켜 준 사람을 일컫는 말을 오가소립(吾家所立), 내 집의 걸출한 자식을 이르는 말을 오문표수(吾門標秀), 나도 또한 모른다를 이르는 말을 오역부지(吾亦不知), 나의 혀는 아직 살아 있오라는 뜻으로 몸이 망가졌어도 혀만 살아 있으면 천하를 움질일 수 있는 힘이 있다를 이르는 말을 오설상재(吾舌尙在), 맞부딪치기를 꺼리어 자기가 스스로 슬그머니 피함을 이르는 말을 오근피지(吾謹避之) 등에 쓰인다.
▶️ 耳(귀 이, 팔대째 손자 잉)는 ❶상형문자로 귀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한문에서는 귀라는 뜻 이외에도 ~할 뿐이다, 혹은 ~할 따름이다 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耳자는 '귀'나 '듣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耳자는 오른쪽 귀의 귓바퀴와 귓불을 그린 것이다. 耳자는 사람의 귀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귀의 기능인 '듣다'와 관련된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일부 글자에서는 항아리나 솥과 같이 단순히 물체의 '손잡이'를 뜻할 때도 있다. 참고로 중국 고문(古文)에서는 耳자가 종종 '~일 뿐이다'나 '~일 따름'과 같은 어조사로 가차(假借)되어 쓰이곤 했다. 그래서 耳(이)는 ①귀, 오관(五官)의 하나 ②성(盛)한 모양 ③뿐 ④귀에 익다, 듣다 ⑤곡식이 싹나다 그리고 ⓐ팔대째 손자(孫子)(잉)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귀와 눈 또는 남들의 주의를 이목(耳目), 겉귀의 드러난 가장자리 부분을 이개(耳介), 귀와 코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이비(耳鼻), 귀에 생기는 병을 진찰 치료하는 의술의 한 분과를 이과(耳科), 귓바퀴를 이각(耳殼), 귀동냥으로 얻은 학문을 이표(耳剽), 몹시 떠들어서 귀가 먹먹함을 이괄(耳聒), 귀로 들음을 이령(耳聆), 귀가 먹음을 이색(耳塞), 귓바퀴가 뺨에 붙은 부분을 이근(耳根), 귀로 소리를 듣는 능력을 이력(耳力), 귀에 입을 대고 하는 말을 이어(耳語), 듣기만 하여서 알게된 학문을 이학(耳學), 귓속이 곪아 앓는 병을 이통(耳痛), 귀가 먹어 들리지 않음을 이롱(耳聾), 나이 60세를 이르는 이순(耳順), 참맛을 모른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단지 귀로 듣기만 하고 넘겨짚어 관찰을 할 줄 모름을 이식(耳食), 귀와 눈과 입과 코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이목구비(耳目口鼻), 귀로 듣고 눈으로 봄을 이르는 말을 이문목견(耳聞目見),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다는 뜻으로 눈치가 매우 빠른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이시목청(耳視目聽), 담에도 귀가 달렸다는 뜻으로 남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말을 삼가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을 이속우원(耳屬于垣), 귀로 듣고 눈으로 봄으로써 일어나는 욕심 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욕망을 일컫는 말을 이목지욕(耳目之欲), 귀로 듣고 눈으로 봄 즉 틀림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이이목지(耳而目之), 귀를 잡아당겨 얼굴을 마주하고 가르친다는 뜻으로 친절히 가르침을 이르는 말을 이제면명(耳提面命), 말의 귀에 동풍이라는 뜻으로 남의 비평이나 의견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흘려 버림을 이르는 말을 마이동풍(馬耳東風), 쇠귀에 경 읽기라는 뜻으로 우둔한 사람은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우이독경(牛耳讀經), 바람이 귀를 통과하는 듯 여긴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태도를 일컫는 말을 여풍과이(如風過耳), 제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친다는 뜻으로 얕은 꾀로 남을 속이려 하나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엄이도령(掩耳盜鈴),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뜻으로 바르게 타이르는 말일수록 듣기 싫어함을 이르는 말로 충언역이(忠言逆耳), 귀로 들어온 것을 마음속에 붙인다는 뜻으로 들은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잊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입이저심(入耳著心), 귀를 귀하게 여기고 눈을 천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먼 곳에 있는 것을 괜찮게 여기고, 가까운 것을 나쁘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귀이천목(貴耳賤目), 남에게 들은 것을 그대로 남에게 전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천박한 학문을 일컫는 말을 구이지학(口耳之學), 들은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는 뜻으로 들은 말을 귓속에 담아 두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언유재이(言猶在耳), 머리를 수그리고 귀를 드리워 엎드린다는 뜻으로 온순하게 맹종하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면수첩이(俛首帖耳), 콩알 두 개로 귀를 막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소한 것이 큰 지장을 초래함을 이르는 말을 양두색이(兩豆塞耳)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