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겨우 거기까지 말을 했는데 최고의 진리의 말이라고 볼 수가 없다. 가난하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니다. 그럼 부자는 아무 것도 아닌가 등등 이건 여러 가지로 시비가 따르게 되어 있다.
가난에 대해 동양의 조사스님은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去年貧未是貧) 금년의 가난이 진짜 가난일세. (今年貧始是貧)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去年無卓錐之地)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다네. (今年錐也無) 라고 했다. 이것이 진짜 가난한 사람을 드러낸 말이다.
기독교에서 가난한 것에 대해서 말한 차원을 훌쩍 뛰어나게 불교에서 말한 것이 ‘응무소주應無所住(머무는 바 없음)’이다. (예수의 차원은 초지보살 정도를 넘지 않음.)
◈ 기독교의 성인이라는 프란시스(1181~1226)가 말하길
“너희들이 그저 받은 것이니 그저 주어라. 값이 없이 받은 것이니 값이 없이 주라.” 라고 했다. 하느님이 너희에게 그냥 주었으니까 받은 대로 그냥 주라는 것이다.
이렇게 특정한 신이 있어서 만들어 내려준다는 건, 고대의 미몽(迷夢)의 어리석음에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지어놓은 대가에 의해서 받는다고 한다(自作自受). 깨달은 눈으로 이 세상을 보면 모든 만물은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절대자가 있어서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다. 모든 건 인연에 의해서 모여서 받는 것이다.(연기법) 현실에 받는 과보는 내가 전생에 지어놓은 결과를 받는 것이다.
서양에는 이런 교리가 들어가지 않았고 이걸 모른다.
◈ 프란시스 같은 이는 하느님이라는 대상을 놓고 자신이 수양하여 성숙되어갔지만, 그분이 말하는 최고 귀착점은 하나님이다. 죽을 때도 자신은 하느님한테 간다고 했다. 불교에서 죽을 때 아미타불 염불하여 극락세계에 간다는 거하고 다르지 않다.
이건 선(禪)의 세계에서 볼 때 천리나 거리가 먼 데서 하는 소리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 젖을 떼지 못한 차원에 있는 그런 말이다. 어쨌든 의지해서 가야하니까 그렇다.
조사스님들은 ‘부처님 경전은 고름 닦은 휴지조각이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 이런 말을 하였다. 깨치지 못한 중생들은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그랬다간 구업을 지어서 무간지옥을 간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그 사람은 자신이 있는 거다. 우주 천하에 어디 가도 걸림 없이 멋지게 산다. 화두를 일념으로 하고 있으면 세계가 물, 불로 멸망해도 아무 관계가 없다. (☞임진왜란때 사명대사는 왜구가 불로 죽이려 하니 아침에 고드름을 달고 나옴.)
(18.9.16 대원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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