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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아가의 말씀 2,8-14>
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9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10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1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13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4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오늘 말씀 전례는 오시는 분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 간절함으로 마음 설레어 있고, 오신 분에 대한 기쁨과 반가움으로 벅차올라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가는 노래합니다.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아가 2,8)
또 복음 환호송에서는 “어서 오소서. 주 하느님”하고 환호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하고, ‘이미 오신 그분’을 맞이하여 뱃속에서 즐거워 뛰는 아기와 함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마리아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이는 “말씀”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안에 행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말씀이 왜 행복이 되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이루기에 행복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또 하나의 복을 노래합니다.
“당신의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루카 1,42)
그러니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녀의 태중의 아기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 아기가 구세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두를 믿으셨으니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이미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이를 두고 성 암브오시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사벳은 잉태한 후에 성령으로 충만했고, 마리아는 잉태하기 전에 충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믿고 품으면 진정 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 모후”가 되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얼마나 벅찬 일인지요!
그렇습니다.
말씀이 잉태되면, 뱃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오히려 품고 있는 우리를 양육할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산골을 찾아가는 노고가 되고, 섬김이 되고, 사랑이 되어 피어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노래가 되고, 기도가 되고, 삶이 되어 탄생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 요한이 동생인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닦겠지만, 분명 예수님이 먼저 요한을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나무 뒤에 숨은 아담을 하느님이 먼저 찾아와 부르시고, 미디안으로 도망가 있는 모세를 먼저 찾아와 부르시듯이,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방문하시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1)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십니다. ~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아가의 연인처럼>
오늘 독서는 아가이고 연인을 만나는 설렘을 묘사합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주님의 오심을 코앞에 둔 지금, 그리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복음을 듣는 오늘, 이 아가의 말씀을 듣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우리 전례는 왜 아가를 오늘 독서로 배치했을까요?
짐작컨대 그것은 주님께 대한 우리의 기다림과 주님과 우리의 만남이 이러해야 하지 않은지 일깨우기 위함이고, 우리의 기다림과 만남의 실제는 어떤지 성찰케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림은 주님을 사랑하는 기다림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다림은 연인의 기다림만큼 설레입니까?
저는 이 점에 있어서 열등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기다리고 만나는 것이 다른 아무 이유가 없고 오직 사랑하기에 만나고 싶고 기다리는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거나 저의 사랑이 뜨겁지 않고 미지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보고 하느님 사랑하지 않냐고 물으면, 단언컨대 지체함 없이 사랑한다고 그리고 모든 것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남자이기 때문인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사랑하는 것 같고, 마르타와 마리아 사이에서 저는 마르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열등감은 마리아에 대한 마르타의 열등감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감히 얘기한다면, 저의 열등감은 보통 사람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라 성인들에 대한 열등감이고 성령을 모시지 못한 자의 열등감입니다.
주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성인들은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느님의 일도 열정적으로 하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의 일이 별개가 아니고, 하느님 사랑에서 하느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일을 하게 합니다.
성탄을 앞두고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성인들, 성모 마리아도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충만한 분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 오심을 기다리다가 오시는 주님을 아가의 연인처럼 맞이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한 사람>
합동판공성사의 일정이 끝났지만 여전히 고해소를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맑고 밝은 영혼들을 만나게 되면 피로를 잊게 됩니다.
어둠을 벗어버리고 밝은 빛을 비출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도구 역할을 하면서 신부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무릎을 꿇고,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에 주님의 자비를 전달할 수 있음이 큰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이런 기쁨은 언제라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가 길을 떠납니다.
서둘러 떠났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되었으면 지체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루카 1,36)는 천사의 말 한마디가 그를 움직였습니다.
경청의 결과입니다.
손과 발을 서둘러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서둘러 떠나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곧바로 순종한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2-45)
마리아가 행복한 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는 행복합니다.
믿음은 곧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브 12,2).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고 하셨습니다.
결국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습니다. 그때에 하느님은 저를 위로해 주셨고, 제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른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믿고, 믿는 만큼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나는 어디서 행복을 찾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이 유혹하며 손짓하지만, 그것을 거절하며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며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품고 사셨던 성모마리아와 함께 주님만이 내 행복의 전부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 옛날 아인카림 엘리사벳 집의 마당에서 벌어진 일은 참으로 기구하고 혹독한 사건이었습니다.
고작 13~14살의 앳된 나자렛 산골 소녀,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사촌 마리아가 친척이라고 자신을 찾아왔는데, 아이를 가져 슬슬 배가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를 바라보는 엘리사벳의 상황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도 마리아보다 6개월 앞서 아기를 가졌는데,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 그리고 수군거림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엘리사벳 소식 들었는가?
노인네들이 참 대단하네 그려.
세상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저 연세에 임신을 하다니!
저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별 생각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기구한 만남, 난감한 만남, 정말 이해하지 못할 만남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슬픔과 서러움에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사람 사이에는 성령께서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기구한 만남이 즉시 기쁨과 축복의 만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순응한 두 사람이었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기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복음 1장 42~45절)
성령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종종 체험하는 결코 원치 않는 만남, 부담 백배인 만남, 호의적이지 않은 만남도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동반하시면 기쁨과 축복의 만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직면하는 기막히고 참담한 현실도 성령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견딜만한 현실, 이겨내고 극복할만한 현실로 변화되리라 확신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일은 ‘메시아 강생 소식’이 세상에 공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만 ‘기쁜 소식’을 알린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벳을 통해서 즈카르야에게도 알렸고,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를 통해서 그들의 가족들, 친지들, 이웃들에게도 알려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기쁜 소식의 첫 선포자’입니다.
만일에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믿었다면, 그래서 말을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가 ‘기쁜 소식의 첫 선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복음 선포의 첫 번째 필수 조건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려면 그 복음을 믿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복음을 선포할 자격이 없고, 혹시 그 사람이 선포하더라도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두 번째 필수 조건은 ‘기쁨’입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은 나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이고,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그러니 기쁜 소식을 전하려면 나 자신이 큰 기쁨에 가득 차 있어야 하고, ‘기쁨 속에서(기뻐하면서)’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만남입니다.
근심, 걱정, 불안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간 것은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출산을 도와주기 위해서, 메시아 강생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아 강생이 마리아 자신을 통해서 이미 실현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왜 엘리사벳이었을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일 텐데, 영적으로 생각하면 엘리사벳이 기쁜 소식을 첫 번째로 들을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로서 흠 없이 살아가는 신앙인이었고(루카 1,6),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는데,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성령 잉태’ 라는 놀라운 일을 ‘어려움 없이’ 이해하고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간 일 자체도 성령의 인도가 작용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라는 말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만 기쁜 소식을 알린 것이 아니라 즈카르야에게도 알렸음을 암시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에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1,28).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게 되면서 듣는 능력도 잃어버린 것 같은데(루카 1,62), 그렇지만 의사소통 자체를 못하거나 안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를 모두 전달받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인사할 때 의례적인 인사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메시아 강생 소식을 알렸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첫 반응은 ‘기쁨’입니다.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라는 말은 엘리사벳의 큰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넓은 뜻으로는, 메시아 강생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표현에 따라서(마르 16,15) ‘모든 사람의 큰 기쁨’을 ‘모든 피조물의 큰 기쁨’으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라는 말은 엘리사벳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그 모든 일이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해했고,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로봇처럼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말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습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라는 말은 마리아가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되신 일을 축하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복된 일’입니다.
마리아는 가장 중요한 협력자로 선택되신 분이기 때문에 가장 복되신 분입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는 뜻으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입니다.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구원을) 주시는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말은 아기를 위해서 복을 빌어주는 말이 아닙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 라는 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메시아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엘리사벳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첫 번째로 고백한 인물입니다.
“행복하십니다.”는 “복되십니다.”이고, 앞의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말은 마리아의 믿음과 응답과 순종 덕분에 ‘주님의 말씀’이, 즉 주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었음을 크게 기뻐한다는 고백입니다.
만일에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면, 또는 믿었더라도 응답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일이 생길 거라면, 처음부터 마리아를 선택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 예언자의 경우를 생각하면, 하느님의 일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다시 다른 사람을 선택해서 다른 방식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엘리사벳의 말은 마리아의 믿음과 응답과 순종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에 대한 증언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 우정 - 주님과 나, 나와 너>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시편 1과 3ㄱ)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다는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지론입니다.
따로와 함께의 여정이요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 생각납니다.
반가운 이들의 방문을 대할 때 드렸던 ‘오늘은 형제님(자매님)의 방문 축일입니다’라는 덕담이 생각납니다.
참 좋은 도반들의 방문은 빈손으로와도 구원의 방문처럼 반갑고 흡사 도반들의 방문 축일처럼 즐겁고 기쁩니다.
어제도 여러분의 방문을 받고 그랬습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 여정 후 참 많은 강론 주제로 사용한 말마디가 '삶의 여정'입니다.
짧기도 하지만 때로 길게 여겨지는 삶의 외롭고 쓸쓸한 여정에서 제가 특히 강조하는 것이 도반이요 도반과의 영적 우정입니다.
여기서 저는 두 도반의 예를 들곤 합니다.
눈에 보이는 영적 도반인 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영적 도반이 주님입니다.
언젠가 사라질 사람 도반과는 달리 인생 여정 다하는 날까지 영원히 함께 하는 동반자同伴者이자 반려자伴侶者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님과의 영적 우정이 참으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영적 우정의 도반 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제1독서는 애인의 창가에서 벌어지는 감미로운 에로스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성간의 열렬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교부들은 이런 사랑의 관계를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간의 사랑으로, 또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견주어 해석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 대 데레사, 이냐시오 로욜라 같은 신비가들은 주님과 우리의 사랑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영원한 연인처럼 마치 에로스적 사랑의 감미로 체험한 신비가들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사부 베네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성규 마리말 49)
참으로 잘 성숙한 사랑의 수도자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러면 정결 문제는 저절로 해소될 것입니다.
오늘 아가서 중 창가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은 얼마나 가슴 설레고 황홀해 보이는지요!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 본답니다.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요,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세상에 이런 이성간 연정戀情의 사랑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쓰다보면 오늘 제 1독서뿐 아니라 아가서 전체를 써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흡사 대림시기 우리 영혼들이 오매불망 그리워 찾아 오시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 주님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주님을 그리워하는 이상으로 우리 영혼이 그리워 보고 싶어 찾아 오시는 대림시기 우리 주님, 임마누엘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적 도반이자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과의 날로 깊어가는 영적 우정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영적 도반인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사랑의 만남은 얼마나 황홀한 아름다움인지요!
두 분간의 영적우정에 앞서 전제되는 주님과의 영적 우정입니다.
마리아가 곤궁중에 찾아 나선 영적 도반 엘리사벳입니다.
여러분도 마음 답답할 때 언제나 위로와 격려를 찾아 나설 도반은 있는지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동시에 영원한 영적 도반인 태중의 세례자 요한과 태중의 예수님과의 만남을 뜻합니다.
감격에 벅차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의 기쁨의 환호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의 십년 체증이 활 풀렸을 것입니다.
흡사 주님의 계약궤 앞에서 기쁨에 넘처 덩실덩실 춤추던 다윗이 생각납니다.
마리아야말로 주님을 모신 계약궤와 같습니다.
바로 이 앞에서 다윗처럼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 요한이 기쁨에 겨워 뛰놀았던 것입니다.
동병상련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도반인 주님 안에서 이렇게 만남으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 큰 위로와 격려의 구원을 받았을 것이며, 둘간의 영적 우정은 날로 깊어졌을 것이고, 동시에 예수님과 요한 세례자의 영적 우정도 깊어졌을 것입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간의 영적 우정도 잔잔한 감동입니다.
지난 토요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도 16세 교황 그분을 ‘성인’으로, ‘위대한 영성생활의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분을 자주 방문하여 만날 때마다 나는 그분의 투명한 시선에 의해 덕성이 함양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분은 좋은 유머 감각을 지닌 분이고 맑고 밝은 분이며 아주 살아 있는 분이다.
그분은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대화도 잘 따라 잡으신다.
나는 그분의 명석明晳함에 감동한다.
그분은 ‘큰 분(a great man)이시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은 물론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 도반들과의 영적 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대림 2부, 다섯 번째 12월21일 M후렴 “오! 샛별이여(O oriens)”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요, 정의의 태양이시요,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비추어 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의 장례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을 생전에 뵙지는 못했지만 뉴욕 맨허턴의 신자들과 따뜻한 사랑으로 함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부님의 장례미사에는 신부님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많은 교우들이 신부님께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배웅하였습니다.
천상에서 신부님의 가족들이 기뻐하며 환영할 것 같습니다.
한국 가톨릭 미술의 선구자였던 아버지 장발 루도비코, 한국의 정치인이었던 큰 아버지 장면 요한 총리, 춘천교구 교구장이었던 사촌 장익 십자가 요한 주교님이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을 기쁘게 맞이할 것 같습니다.
저도 언젠가 하느님 품으로 가면 어릴 때 사탕을 주셨던 할아버지, 휜 수염이 멋있으셨던 외할아버지, 용돈을 주셨던 외할머니, 그리운 부모님,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갔던 큰 누님, 작은 형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위안을 받는 것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지상교회, 정화교회, 천상교회가 있습니다.
장례미사에서 반가운 분들을 보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 성가대 단장을 만났습니다.
오랜 시간 평화신문에 글을 주셨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뉴욕에 처음 왔을 때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던 부부도 만났습니다.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께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 같았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치고 함께 식사하면서 신부님과의 인연을 들었습니다.
부부는 신부님께 혼배성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교리를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악은 피하고 선을 베풀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만남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고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의 상인들에게 팔았던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면서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평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만남을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동네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입니다.
몇 번 가보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마리아는 며칠을 걸어 아인카렘을 찾아갔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이 잉태했음을 알려 주었고, 마리아는 축하해 주기 위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도 아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몇 달 동안 아인카렘에 머물렀고, 엘리사벳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을 전하였을 겁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인도로 아이를 가지게 된 놀라움을 전하였을 겁니다.
오늘의 복음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응답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만대가 나를 복되다 할 겁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제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몇몇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고, 제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런 친구가 있기에 저는 더욱더 힘을 내서 사제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나의 모습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나의 길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물이 담긴 컵에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컵에 담긴 물이 빨간색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바다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바닷물이 빨간색이 변할까요?
아니었습니다.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양의 잉크를 섞어도 공간이나 부피에 따라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바다는 부피가 너무 커서 잉크를 섞었을 때의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마음의 크기가 적은 사람은 어떤 말과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크기가 큰 사람은 말과 행동에 어떤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마음의 크기는 주님과 함께 하면서 커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가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우리 마음의 크기가 커져서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기준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바다와 같은 큰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다가 모두를 포용하듯 사람들을 인정하고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바다와 같은 큰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셨던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분이 뱃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찾아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교통이나 치안이 좋은 시절이 아니었는데, 당신 아들의 날을 준비할 엘리사벳 뱃속의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가십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찾아가는 것, 그만큼 큰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엘리사벳도 놀라 말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루카 1,43)
이 넓은 마음은 엘리사벳의 말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라고 믿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마음의 크기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내 마음의 크기를 넓혀야 합니다.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바다와 같은 마음을 주님 안에서 키워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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