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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수요일
수요 밤별 기도회 때,
중세 역사와 교리 부분을 나누었다.
담임 전도사님이 조금 어려웠을 것 같다고 했는데, 내 느낌은 다들 잘 경청하는 듯했다.
내일 화성신철 때,
중세 신학과 철학을 다루는데, 아마 중세 역사와 교리까지는 다루지 못할 듯하다. 전체 내용 중 일부를 나누면 이렇다.
이 내용은 사실 종교 개혁 주일에 나누어도 좋을 듯하기도 하다.
...
중세는 카톨릭의 타락으로 종교 개혁이 있었는데요.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되었을까요?
카톨릭에는 과거에도 오늘날 지금도 여전히 비성경적인 사상이 있습니다.
최근 <교부들의 신앙>이라는 책을 읽고, 카톨릭을 대변한다고 했는데, 카톨릭의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크게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 교황의 신격화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최고 통치자이고, 교황은 오류가 없다는 교황무오설은 1870년 바티칸회의에서 선언 되었습니다. 이 회의를 통해 죄에 대한 형벌까지 면제해줄 수 있는 권리인 교황면제권까지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죄사함의 권세가 교황에게 있다는 말씀은 없죠. 반대로 교황이든 베드로든 모든 인간은 부패하고, 거짓을 말하는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렘17:9, 시14:2-3). 또한 역사적 사실들이 교황무오설이 오류투성이임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교황들 중 여럿이 부도덕하여 간음, 남색, 성직매매, 강간, 살인을 일삼고 술에 취해 지냈었어요. 심지어 2015년 교황 프란체스코는 동성애를 옹호하고, 낙태를 찬성해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2) 마리아 숭배
a) 마리아 종신 처녀설
b) 마리아 무죄 잉태설
c) 마리아 평생 무죄설
d) 마리아 부활 승천설
카톨릭은 마리아가 평생 처녀였다는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는 정말 믿지 못할 말을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였다고 공포하였습니다. 1854년 교황 피어스 9세는 마리아가 원죄에 물들지 않고 태어났다는‘마리아 무죄 잉태설’을 선포했습니다. 더 나아가 마리아는 죄 없는 삶을 살았다는 ‘마리아 평생 무죄설’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1950년 교황 피어스 12세는 마리아가 죽은 후 부활 승천했다는 ‘마리아 부활 승천설’을 선언했습니다.
이상의 내용들은 성경에 기반을 두지 않고 근거 없이 카톨릭이 조작하여 만들어낸 것이에요. 예수님이 우리의 완전한 중보자이신데 마리아가 필요할 만큼 부족한 것일까요? 그리고 마리아가 어떻게 죄가 없는 존재일까요?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고 예수님의 동생들이 있었는데 ‘마리아 종신 처녀설’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마태복음 13장 55절은 예수님의 형제들을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고 열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마13:55)
3) 연옥설을 주장
카톨릭은 천국와 지옥 외에 그 사이에 연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죄가 없는 깨끗한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큰 죄를 지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과 영영 등을 진 사람은 지옥으로 가는 거죠. 그런데 작은 죄나 죄에 대한 적당한 보속을 완료하지 않은 영혼들이 곧 연옥을 간다는 것이죠.
연옥설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비성경적인 주장이에요. 성경에 연옥이란 말도 나오지 않으며, 이 연옥설은 공로사상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연옥설은 교황의 면죄권, 면죄부판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헌금, 자선 등의 비성경적인 교리를 만들어냈어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연옥설의 치명적인 결함은 ‘사후구원기회설(사후에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주장)’이라는 거예요.
그들이 연옥에 있을 때 땅에 있는 사람들이 대신 미사와 기도를 하고 헌금과 그밖에 경건한 행위를 하나님께 드리면 연옥에 머무르는 기간이 단축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로 외경 마카비하 12:43-46을 제시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을 이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죽은 자들을 위한 속죄를 행하셨다”
마카비하 12:46
그러나 노만 게이슬러와 랄프 메켄지는 <로마카톨릭주의와 복음주의>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외경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1) 외경책들은 영감 되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2) 유대 공동체조차도 영감 받지 않았다고 한다.
3) 신약성경에서 성경으로서 인용되지 않았다.
4) 로마 카톨릭 성경 대학자인 제롬과 교부들도 외경을 거부했다.
5) 정경 66권 정경책 어느 곳에서도 외경의 내용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
이렇게 정경의 참된 증거를 만족시키는 내용들이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외경을 정경으로 수용하게 되면, 다른 비정경들도 같은 이유로 수용해야 합니다.
4) 성인 숭배와 미신적 의식
2017년 500주년 종교개혁 기념해 유럽을 갔었습니다.
종교개혁 기념 교회들을 갔었어요. 커다란 성당은 정말 압도적인 위엄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 안에서 본 것은 마리아 상과 성인 상, 그리고 태양을 상징하는 상이었어요. 이렇게 카톨릭은 우상숭배와 미신적 의식들을 많이 하는데 이는 마리아 숭배, 성인들의 화상 숭배, 유골 숭배, 성체 숭배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마리아와 성인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때로는 죽은 자의 유골과 유품을 보관하고 숭배합니다.
미신적 의식인 성수뿌리기, 묵주 기도,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도 행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들은 모두 십계명을 위배한 것이에요. 성경은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초대교회의 순수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이방종교와 풍습, 인간적인 생각을 너무 많이 첨가했습니다.
이들이 하는 성인숭배는 신앙과 덕이 뛰어난 사람은 죽은 후에도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므로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거나 우리를 위해 기적을 행할 수도 있다고 믿어요. 그 성인들의 공덕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죠. 이는 명백히 십계명의 1,2계명을 어기고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이에요.
- <청년상담 Q&A> 책 중 일부, 김영한 공저
그렇다면 교회 안에도 카톨릭적 요소가 있을까요? 카톨릭적 요소가 아니더라도 어떤 비성경적인 부분이 있을까요?
① 한국 교회 안에는 유교적인 요소(교회 안에 교역자, 장로, 권사, 집사 계급 및 서열화)가 다분히 많습니다. 여전히 성직자가 계급화된 카톨릭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② 담임 목사님을 신격화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③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해에 여러 중대형 교회 세습이 있을 있었고, 지금도 진행 되고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할 때 21세기 한국교회를 보면 교회를 신뢰하고 믿기가 힘듭니다. 어떤 문제로 세상이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나요?
① 교회 매매,
② 성적타락,
③ 세습,
④ 지나치게 전통적 그리고 유교적 문화와 사상
⑤ 폐쇄적인 교회 문화,
⑥ 지나치게 화려한 건물 건축, 등등
각 교회는 각 지역에 있습니다. 각 교회는 그 지역을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게 지역을 섬기면서 주님을 증거해야 할까요?
① 교회 공간 오픈,
② 양로원, 고아원 섬김,
③ 소년소녀 가장 돕기,
④ 김장, 연탄, 반찬 나눔,
⑤ 새터민 섬김,
⑥ 외국인 노동자,
⑦ 다문화 가정 케어
⑧ 독거노인 케어
⑨ 가정 상담
⑩ 장학금과 구제 사역, 등등
중세 교리 문제와 종교 개혁
<종교개혁 이야기>, 이성덕,
저자는 종교 개혁이 일어날 시기 상황이 어떠했는지,
저자 시오노 나나미가 쓴 <신의 대리인>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해 들려 줍니다.
“교황님은 로마 황제도 아닌데 마치 옛날 황제처럼 돈을 쓴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나는 로마에서 돈 쓰는 법을 배웠다고. 그리고 종교란 것은 은행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돈을 모으기에 적당해……. 하지만 이런 일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을 거야.”
“그 독일 수도사 얘기를 들으셨군요.”
“루터 말인가? 아무래도 수입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야…….”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당시 사제들은 상당히 타락해 있었습니다.
사제의 혼외 관계는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제의 자녀’라는 것은 당연시 되었고, 수도원과 교회는 귀족 자제들의 부양기관이었습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의 경제적인 이윤 도구가 되었고요. 죽은 기부자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침묵 미사가 드려졌습니다. 사제들 중 신학 수업을 받지 않은 채 사제가 되었습니다. 사제들 중 자신의 일을 대신 일하게 하려고 적은 돈으로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대행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는 아이슬레벤에서 성공을 하지 못하고, 만스펠트로 이사와 갱부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른 사람과 함께 제련소를 임대해 성공했습니다. 재산을 모으고, 루터를 성당학교에 들여보냈습니다.
나중 루터는 아버지 뜻대로 법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505년 6월 2일, 그는 만스펠트에 있는 부모를 방문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요. 스토테른하임에서 커다란 폭우를 만났습니다. 번개가 그의 옆 숲을 때렸고요. 루터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채 땅에 납작 엎드려 자신도 모르게 광부들의 수호성인 안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誓願)하였습니다.
루터는 스콜라 신학자들의 ‘영광의 신학’과 달리, ‘십자가의 신학’을 추구했습니다.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이 없으면, 인간은 스스로 가장 선한 것을 가장 나쁘게 오용한다고 여겼습니다.
나중 도미니크파 회원들은 루터에게 이단 혐의를 씌워 로마에 고소했는데요. 도미니크파 수도원은 청빈, 가난을 추구한 곳이었는데요. 이런 수도원도 타락해 있었습니다.
루터는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기독교회의 개선에 관하여」 문서에서 교회가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없을 때, 황제와 귀족들이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의 자격으로 교회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로마 교황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세 가지 장벽을 통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개혁할 수 없도록 자신들의 방패막이로 삼아왔다. 1) 첫째로 만약 세속적인 권력으로 그들을 억누르면 그들은 “세속권력은 우리들을 다스릴 권리가 없으며, 오히려 영적인 힘이 세속적인 힘보다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2) 둘째로 성서를 통해 그들을 비판하려고 하면 그들은 “교황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성서를 해석할 권한이 없다”고 대응하였다. 3) 마지막으로 공의회를 통해 그들을 비판하면 그들은 “교황 외에는 어느 누구도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없다”고 꾸며댔다.”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 문서에서 로마 교회의 성례전을 비판하였습니다. 로마 교회는 성례전의 효력을 객관적인 거룩한 교회와 사제의 권위에 두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루터는 “성례를 성례답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신자 개개인의 믿음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1520년 말에 쓴 이 문서에서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신 자유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다루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더 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으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지만,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종교 개혁을 한 루터에게 부족한 면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몇 가지 살펴봐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1) 토머스 뮌처와 농민전쟁
루터의 종교개혁을 ‘제후들에 의한 개혁’이라고 부르며 그 개혁의 보수성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는 토머스 뮌처와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태도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루터는 로마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적과 상대하기도 힘겨운 상황에 있어서인지, 자신에게 우호적인 제후들을 적으로 돌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농민전쟁 당시, 농민들 편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제후들 중심으로 전개되어 갔습니다.
실제로 루터는 농민들의 폭력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러한 루터의 입장은 1525년 5월에 출판된 「강도와 도적 같은 폭동에 반대하여」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기도 합니다.
2)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결별
루터의 종교개혁은 에라스무스로 대변되는 인문주의의 전제 없이는 시작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에어푸르트 대학 시절, 루터는 성서인문주의를 통해 성서해석의 주요한 방법들을 배웠고요. 루터의 독일어 성서번역 역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서』 제2판을 사용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초기에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서로 호감을 가졌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두 사람 사이에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해,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가 인간이 구원으로 이끄는 그 무엇에게로 자신을 향하게 할 수도 있고,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은 은총과 그 은총을 얻게 된 자유의지와의 협력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루터는 인간의 편에서 보면 아무리 은총 하에 있다고 하더라도 ‘노예의지’만 있다고 보았습니다.
3) 루터와 츠빙글리와의 결별
츠빙글리는 1518년 12월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성당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심한 병을 앓고 난 후 인생의 허무함과 무능함을 절실히 깨달았고, 죄와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성서를 집중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초기 따랐던 에라스무스적인 사상에서 멀어지게 되었고요.
츠빙글리는 성화 사용을 금지하고, 미사를 희생 제사로 보는 것은 성서와 모순된다고 보았습니다. 츠빙글리는 사제들의 결혼을 용인하였고, 기도 행진, 의전 행렬 그리고 순례를 폐지하였는데요.
성만찬에 있어, 루터와 견해를 달리 했습니다.
카톨릭은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화체설을 주장했고요. 루터는 이런 생각에 반대해 그리스도가 함께 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했는데요. 츠빙글리는 카톨릭의 화체설을 부인했으나, 루터의 공재설도 카톨릭의 잔재라고 비판했습니다.
루터는 그런 츠빙글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나중 루터가 츠빙글리를 만났을 때, 손도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4) 루터와 칼빈의 신학적 차이와 간극
성찬에 공재설을 주장한 루터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 칼빈과 대립되었는데요. 그뿐만 아니라, 1553년 이후 예정론 논쟁에서도 그 차이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칼빈은 선택받은 자는 구원으로, 선택받지 못한 자는 영원한 죽음으로 확정된다는 이중예정론을 주장하였는데요. 이에 반해 루터는 1525년 「노예의지론」에서 예정론적 사고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향을 견지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택과 작정의 비밀을 캐물으려는 시도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즉, 루터는 이런 선택과 작정이 하나님의 비밀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루터는 그당시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과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진 자를 품지는 못했습니다.
분명, 타락한 로마 카톨릭을 개혁할 필요는 있었지만, 같은 개혁의 노선에 사람들까지 다 배격해야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종교 개혁: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 크리스탱,
1503년, 바젤의 주교는 종교개혁 전 자신의 교구 사제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머리를 파마하지 말고,
교회 안에서 상거래를 하지 말며,
주류를 판매하지 말라”
뭐 이런 내용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유럽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변혁 속에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백년 전쟁은 1450년에 마쳤고,
장미 전쟁은 1455년 초 영국을 양분해 놓았고,
1347~1358년에 페스트가 유럽을 덮었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로마 카톨릭의 타락이었습니다.
1) 너무 많은 성인들을 숭배하였고,
2) 신앙과 미신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3) 공로 사상에 찌들어 있었고,
4) 죽음에 대한 불안감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더 많고, 큰 미사를 드리게 했고,
5) 면죄부로 돈을 벌어 들였고,
6) 교황은 정치적으로 왕들과 갈등을 초래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성경보다 교황의 권위가 더 높았고, 일반 성도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 에라스무스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등장하였고, 라틴어뿐만 아니라, 헬라어, 히브리어 성경 원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성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정립 되고, 믿음을 통해 구원 받게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1545년 쓰여진 <선집> 에서 이런 내용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고 받아들이셨다. 내가 밤낮으로 명상하며,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동안 나는 하느님의 정의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정의를 의미함을 깨달았다.”
루터는 카톨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게재하였는데요.
카톨릭 역시 루터의 견해를 41항으로 정죄하고, 루터에 대해 60일간의 근신을 명하였습니다. 1520년 11월에는 교황의 파문 교서가 전달되었고, 공포 되었습니다.
루터는 카를 5세의 명으로 1521년 봄에 보름스 의회에 소환된 루터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 만큼, 내 신앙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올바르거나 유익하다고 증명되지 않는 한, 결코 내 견해를 철회하지 않겠거니와 또 철회할 의사도 없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1520년 루터는 자신의 교리와 설교의 토대를 다시 정리한 일련의 저서들을 발표했습니다.
6월에는 그의 강론집 《선행에 관하여》를 출간했고,
8월에는 《독일 귀족에게 고함》,
10월에는 《교회의 바빌로니아 유수》,
11월에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차례로 출판했습니다.
내용과 논조는 조금씩 달라도 이 저서들은 성례와 위계적인 사제단 등에 대해 로마 교회를 총체적이면서도 일괄되게 비판하였습니다.
루터는
1) 카톨릭의 종신 서원제 비판,
2) 독신 생활 폐지 주장,
3) 고인에 대한 미사 금지,
4) 면죄부 판매 중지 등을 개혁 프로젝트로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은 루터를 이단시 하였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루터의 책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독일 귀족에게 고함>은 초판만 4,000권이 1주일 안에 다 나갔습니다. 그해에만 13판 이상이 찍혔습니다.
루터는 죽음의 공포 가운데, 바르트부르크에 은거해, 독일어 성경을 출간하였습니다. 그 당시 인쇄술의 발명으로 성경은 전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일반인들을 위해서 음악과 상징적인 그림들도 사용 되었습니다. 다방면으로 루터와 개혁자들은 움직였습니다.
1521년 5월 추기경 울지는 루터의 서적을 불태우도록 지시했고,
1525년 종교개혁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루터보다 26년 뒤에 1509년에 칼빈이 태어났고,
종교개혁 2세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칼빈은 개신교를 옹호하기 위해 1536년 <기독교 강요>를 출간하였습니다. 칼빈은 1564년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금욕적이고, 학구적인 삶을 영위했습니다.
다행히도, 1545년 12월 13이 이탈리아의 트렌토에서 공의회가 열려, 개신교에 대한 단순한 대응의 수준을 넘어 진정한 ‘카톨릭 개혁’의 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개혁이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교와 마녀 숭배에 대처, 문답식 교리교육을 개선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긴 카톨릭과 개신교의 투쟁은 앙리 4세가 1598년 4월 13일, 발표한 낭트 칙령으로, 긴 싸움을 매듭지어졌습니다. 앙리 4세는 개신교에 신앙의 자유를 주고, 30년간 있었던 프랑스 내 개신교 위그노와의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전쟁이라기보다는 개신교 탄압을 멈추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개신교 신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개신교 목사들도 국가에서 주는 급료를 받게 되었고, 일정한 의무가 면제되었습니다.
- 김영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