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서평 외 4편
송문희
초록 서고에 빼곡히 꽂힌 붉은 양장본
저 책은 먼저
노랑 꽃술의 표사를 읽고
심해처럼 깊은 초록을 따라 차례를 읽고
붉은 본문 한 겹씩 넘겨 읽다가
해설로 마쳐야 해
발췌독법은 동백에 대한 예의가 아니어서
갯바람 한 장도 섣불리 넘기지 말고
낱장에 스며든 이른 봄의 말을 심장으로 읽어
처음부터 끝까지 파고들지
자간 행간은 동박새처럼 달게 읽고
핏빛 줄거리는 뜻을 밝혀가며 읽으면
추위에도 떨지 않는 푸르른 문장이
눈 속에서 더욱 선명해질 거야
한겨울에 던지는 불꽃 같은 화두
완독이란 이생에 멀겠으나
천년의 묵상에 잠기게 하는
완벽한 서책 한 그루
동굴의 시간
어둠의 농도는 몇 단계일까
어둠 속에 오래 서 있으니
어슴푸레 열리는 눈
층층이 절벽이다
어둠을 먹고 자란 기괴한 형상들
석순 종유석을 보려는 바깥세상이
속살을 헤집고 있는데
심해 물고기처럼
눈과 귀가 퇴화했을지도 모를
동굴에 갇힌 더딘 시간
태양이 비추는 세상은 밝기만 한가
풀리지 않는 질문을 퇴고 중이다
푸른 요양원
새는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
푸른 하늘의 화룡점정, 가벼워지려고 땅의 기억을 버리네 흙을 콕콕 찍다가 마지막으로 울고 힘차게 날아가네 쭉 뻗은 두 다리 사이 무차별 배설을 난사하며 비워내는
뼛속까지 비워내고 있는 요양원의 새들
노을을 배경으로 둥지로 돌아가네 오리무중을 견디는 한 무리 한 방향으로 조문 행렬 같은 군무가 하늘을 덮어버리네 비상을 위한 마지막 리허설인 것처럼
단봉낙타의 기도
미끄러운 눈길에 쏟아붓는 연탄재들
서로를 위로하는 이웃들 같다
뜨거운 생을 달구고 식어버린 연탄도
누군가의 발밑을 지킬 수 있다는 거다
백발의 굽은 등으로
연탄을 갈던 아버지도 저와 같았으리라
겨울이 닥치기 전 온 힘을 다해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더미들
매운 눈물 흘리며 불구멍을 맞추거나
꺼진 불의 맥을 뛰게 하다가
허공으로 던져진 아버지
우리의 밑불이었다
돌카의 등굣길
아들아, 얼음강을 건너자
못 배워 얼음장 같은 일생 사느니
이깟 열흘 고난 열흘 사투가 대수랴
집채만 한 짐도
가난 대물림의 무게에 비하면 깃털 같단다
너의 찬란한 등굣길
아버지, 얼음강을 건너 주세요
추위에 후들거리는 두 다리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어깨
하늘 같은 그 무게 그 떨림
평생 기억할 겁니다
나의 찬란한 아버지
아버지 장화의 얼음을 털어주는 돌카
속울음의 온기가
꽁꽁 얼어 빳빳한 아버지를 껴입는다
살을 에는 강바람 흔들리는 눈빛 다독이며
가까스로 걸어 학교에 닿으면
그제야 얼었던 눈물과 웃음이 녹아내린다
*차다Chaddar는 겨울 동안 히말라야 오지 잔스카 지역 차Cha 마을과 밖을 잇는 유일한 통로이다. 아이들은 레Leh까지 일 년에 단 한 번, 얼음길이 열리는 때를 기다려 아버지를 따라 학교에 간다. 영하 20도의 길을 책과 옷, 약간의 식량과 썰매를 메고 열흘 동안 얼음강을 건너기도 하는 죽음을 무릅쓴 험난한 대장정이다.
송문희 시인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계간 《시와 비평》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시집 『나는 점점 왼편으로 기울어진다』 『고흐의 마을』 『돌카의 등굣길』을 냈다.
제26호 두레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 밀양지부 편집장,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