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16일자...
젊음의 표상인 대학학보사에 실리다...
신문 한면을 완전히 네멋으로 도배했군요...
역시 네멋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네멋폐인인거 알고 이거 받아보는 직장 동료가 바로 들고 왔더라구요...^^
즐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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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중분석-네 멋대로 해라 >>>
지난 5일, 20회를 끝으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가 종영되었다. 시청률 순위 1위 한번 오르지 못한 드라마이지만 이 전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거짓말'과 같은 드라마처럼 두꺼운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위 두 드라마와는 달리, 이 시대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한 드라마의 매력을 분석해본다.
편집자주
*** 어느 날 행성에서, 똥폼이 똥폼에게 ***
그대들을 본 적이 있다. 버스 정류장, 지하철 역, 술집 골목, 또는 번잡한 시장에서 그대들을 본 적이 있다. 할 일없이 앉아 있거나, 길거리를 배회하거나, 이유도 없이 뜀박질을 하거나, 그대들은 언제나 무엇에겐가 떠밀려서 흘러 다니고 있었다. 자신들의 언어가 번역되기를 기대하지 않는, 아니 차라리 번역되기를 거부하는 듯이 철저하게 외계인으로 살고 있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어?”하며 의기양양하던 신구 아저씨가 결국 아들 고복수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했지만, 복수, 경, 미래, 그대들은 아주 낯선 방식으로, 마치 어른들의 인생관을 조롱하듯이, 복수의 죽음을 경쾌하게 받아들인다.
어른들이 각자 삶의 그림자를 청승맞게 질질 끌고 다닐 때, 그대들은 그러한 지지리 궁상의 삶을 족구 하듯이 가지고 논다. 마치 “아저씨, 아줌마, 당신들이 인생을 알어?”하면서 비아냥거리듯이.
참을 수 없는 삶의 가벼움
우리 같은 세대는 그대들의 삶이 위태롭게 보인다. 아니다, 실은 한없이 부럽다. 삶의 무게를 새털처럼 가볍게 여기는 그대들의 희한한 처세술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대들은 죽음 앞에서 농담 따먹기나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의미 없는 헛소리와 욕설로 분위기를 산만하게 흔든다.
미래와 현지 자매의 싸가지 없는 언어 폭력, 복수와 경의 유치한 연애 놀음, 한동진과 전강의 느끼하면서 뻔뻔한 짓거리는 어른들의 엄숙함과 비장미를 단칼에 날려버린다. 말하자면 어른들이 인생을 다 안다는 표정으로 짐짓 사려 깊은 척 연극을 하고 있다면, 그대들은 ‘쓰레기 냄새가 나는’ 인생을 그 자체로 정직하게 뒤집어쓰고 있다. 그렇다. 그대들은 철없고 경박하고 유치하고 무책임하고 아무 생각도 없지만, 적어도 솔직하다.
‘미완성’ 밴드가 내건 ‘모기 박멸을 위한 투사들의 밤’이란 연주 슬로건처럼, 그대들은 이 세상의 모든 ‘똥폼과 속물 박멸을 위한 투사들의 밤’을 외친다. 불쌍한 형사 정달이가 왜 매일같이 지하철을 헤매고 다니는지 아는가. 그것은 복수나 미래처럼 싸가지 없는 또라이 때문에 잃어버린 자신의 손가락, 자신의 똥폼과 속물근성을 되찾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이 도시는 분주하다. 문화부 기자 한동진, 중고차 사장 전강, 호텔 사장인 경의 아버지, 스턴트맨 팀장, 이들은 한여름에도 똥폼이라는 가죽장갑을 끼고 잃어버린 손가락을 찾아 도시를 헤맨다. 그 손가락은 이미 똥개가 물어갔다는 것, 그래서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사실 인생이 징그럽도록 서늘해진다. 그러나 복수, 경, 미래, 그대들은 지나칠 정도로 뻔뻔하고 막무가내고 유치하다. 적어도 똥폼은 잡지 않는다. 그대들의 키치적 힘은 슈퍼 울트라 캡숑 짱이다.
세상의 모든 서사구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 <앵무새 죽이기>나 이창동의 <오아시스>에서 우리는 소통을 향한 인간들의 외롭지만 아름다운 노력들을 훔쳐본다. 이 지구에는 지구인들 숫자만큼의 행성들이 떠돌고 있고, 이 행성들은 수십억 개의 노선으로 각자 자전하거나 공전하고 있다.
각기 다른 색깔과 냄새로 쓸쓸하게 떠다니지만, 엉뚱하게 복수나 경처럼 행복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작지만 예쁜 충돌음과 불꽃을 남겨둔다. 이러한 의외의 기적은, 서로 외계인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세상을 따뜻하게 데운다. 비록 거창하거나 의미심장한 만남이 아닐지라도.
아찔한 소통 방식
그러나 우리 같은 노땅들은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 그대들의 삶의 방식, 그대들의 소통 방식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아찔하게 보인다. 역겹고 지긋지긋한 이 삶의 쓰레기더미를 무의미한 농담과 치기 어린 장난으로, 그리고 멋대로 살아감으로 쓸어버리려 하지만, 그대들도 알아두어야 한다. 삶이 그리 만만한 것이던가?
그래서 복수와 경의 아버지가 택해야만 했던 삶의 방식, 끝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찾아 지하철을 헤매는 정달이 형사의 허무한 몸짓에게도 눈길을 주어야 한다. 어쩌면 그대들은 그대들 행성의 문법에 맞는 어투만을 고집함으로써 다른 행성의 어두운 그림자 옆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대의 삶, 새로운 똥폼
그대들의 삶은 위악(僞惡)으로 포장된 또 하나의 동화(童話)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동화(童話)의 이름표를 단 또 하나의 새로운 똥폼이 아니겠는가. 위선(僞善)과 위악(僞惡)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 그래서 그대들과 우리들은 쿨하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것일 터. 우리들이 위선의 두꺼운 가면을 반성하듯이 그대들도 위악의 가벼운 포즈를 신중하게 반성해 주기를. 복수, 경, 미래, 그대들은 내 말이 재수 없다고 다시 낄낄대며 비웃을지 모르지만(특히 미래의 이빨이 무섭다), 자비심을 가지고 들어주기를.
“사유를 극단으로 밀어붙여라”(루이 알튀세르) 그러면 최소한 우리도 다음과 같이 말해줄 수 있다. ‘복수는 너희의 것’이기도 하지만 ‘복수는 우리들의 것’이기도 하다고. 경과 미래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도 복수를 사랑할 수 있다고.
박명진 영화평론가
*** 네 멋대로 해라 VS 순수의 시대 ***
지금 이 시간에도 당나귀라는 공유프로그램에는 ‘네 멋대로 해라’ VHS-rip 파일을 다운받는 유저들로 북적인다. 그리고 이 드라마 하나를 통해 뭉친 카페와 커뮤니티가 우후죽순이다. 가입자도 5만명에 달한다. 편집자는 이렇게 ‘네 멋대로 해라’에 열광하는 세대들을 분석해달라고 했다.
열광하는 세대라…. 글쎄,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느 특정 세대가 이 드라마에 열광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같은 세대라도 각자의 취향에 따라 드라마를 선택하는 것이지, n세대여서 이 드라마를 택한다거나 W세대여서 저 드라마를 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세대라는 틀 속에서 다양다기한 문화수용자들을 표상하려고 한다.
어쨌든 드라마 같은 문화텍스트를 수용할 때, 관건은 세대나 계급 같은 문제가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오히려 취향, 경험, 지향과 같이 감수성의 문제가 더욱 결정적이다. 예컨대 10대와 20대의 절반이 ‘순수의 시대’를 보고, 나머지는 ‘네 멋대로 해라’를 봤다고 치자. 10대가 ‘순수의 시대’를, 20대가 ‘네 멋대로 해라’를 봤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세대라는 잣대는 그래서 무기력하다. 또한 중산층 이상의 청(소)년들이 ‘순수의 시대’를 보고, 노동자 계급 청(소)년들이 ‘네 멋대로 해라’를 봤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계급이라는 잣대 역시 그 하나만으로는 불충분하긴 마찬가지다.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면서 어떤 사람은 복수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미래를, 또 어떤 사람은 경이를 좋아한다. 심지어 한기자나 강이를 맘에 들어하는 사람도 있다. 한 드라마 안에서도 시청자들이 이렇게 다양한 차이를 보이면서 자기 감수성을 드러내는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
요는 사람들이 자신이 욕망하고 지향하는 것을 따라 시청한다는 것이다.
다른 트렌디 드라마들과 달리, ‘네 멋대로 해라’의 캐릭터들은 시청자들의 ‘욕망’과 ‘지향’을 강력하게 서사화해냈다. 욕지거리를 내뱉고 조금 상스러워 보이더라도, 전경 같은 애들에게서 ‘멋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들은 미래를 좋아할 것이다.
이들은 날라리를 지향하며 그러한 욕망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같았으면, 즉 노동과 놀이가 일치하길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전경을 좋아할 것이다. 중산층 범생이로서 그런 대로 폼나게 살지 않던가. 좀 느끼하고 ‘싸가지’ 없더라도 거칠게 살고 싶은 사람은 강이를, 왕 느끼하지만 룸펜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한기자를…, 그런 식으로 시청자들은 캐릭터 속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시킨다.
물론 점잖은 양반들은 욕설이 난무하는 이 드라마를 안 보려 한다. ‘별 고민 없이’ 범생이와 중산층을 지향하는 사람들도 이 드라마보다는 좀 더 편하고 익숙한 멜로드라마(‘순수의 시대’는 정말 좋은 비교가 된다)를 찾는다. ‘네 멋대로 해라’를 택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나름의 취향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무리 위압적이더라도 할 말 다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또 그런 욕망과 지향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복수/전경/미래 모두를 좋아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지 멋대로’ 할 줄 아는 캐릭터들이기 때문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그런 식으로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며 시청자들의 욕망/취향과 소통한다. 물론 이 과정은 신자유주의 체제로 대중이 포섭되는 매우 위험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멋대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아직 불명확한 일상과 문화 속에서, 이 드라마의 매니아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취향을 보다 명확하고 체계화하게 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성윤 서문연 연구원
*** 보고 또 보고, '네멋폐인' 되다 ***
일반 독자가 본, 네 멋대로 해라
수많은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에서 느낌있는 드라마를 찾기란 쉽지 않다. 비슷한 인물설정, 비슷한 이야기 구조, 비슷한 배우들 때문에 서로 닮은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종영된 네 멋대로 해라(이하 네멋)는 식상한 요소들을 벗어남으로써 나를 네멋 폐인이 되게 하였다.
네멋의 가장 큰 매력은 신선함이다. 네멋에는 다른 드라마에는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우선 주인공들의 직업부터 살피면, 소매치기, 스턴트맨, 인디 밴드의 키보디스트, 치어리더 등등. 다양한 직업들을 소재로 청각적인 즐거움과 시각적인 즐거움을 모두 주고 있다. 그리고 욕설과 반말투의 대사들이 미사어구의 대사보다 더 큰 감동을 가져다주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어린아이 같은 아버지, 어른스러운 어린 동생과 같은 뒤틀린 설정도 여느 드라마에서는 보기 힘들다. 하지만 네멋에서는 이런 뒤틀기를 통해서 사회를 다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점을 제시하는 것 같다. 네멋의 또 다른 매력은 현실성이다. 네멋의 주인공 복수, 경이, 미래, 동진을 보면 왕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도 아니며, 백마 탄 왕자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삶과 꿈을 위해 세상에 발을 딛고 있는 젊은이들일 뿐이다. 그들 중 누구하나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동화 속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였다. 그 이유는 동화 속 주인공들의 화려함을 버리고 소박한 현실의 모습을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순히 현실 비추기가 아니라 현실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순수, 열정, 용기 같은 요소들을 보여주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해볼 꺼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꺼리가 생각이날 때마다 나처럼 새벽까지 네멋 다시보기를 클릭하는 폐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중간 중간에도 네멋 녀석들의 생각에 다시 네멋이 보고 싶어졌다. 이처럼 좋은 드라마도 좋은 책이나 영화처럼 사람들의 행동에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네멋처럼 신선하고 느낌있는 드라마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며, 오늘도 네멋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