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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에페 4,7-16
복 음 : 루카 13,1-9
1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회개와 구원의 더불어 여정
-천국입장은 단체입장만 허용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회개가 구원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이자 구원의 여정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회개의 자리이자 구원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희망으로 열려 있는 회개의 기회이자 구원의 기회입니다.
앞으로 하루, 한 달, 몇 년을 살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시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만이 고려 대상입니다.
우리가 ‘지금NOW’ 그분과 함께 있는 한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회개와 구원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답입니다.
얼마 전 잠시 배밭에서 일하면서 자매와 나눈 대화가 생각납니다.
'사는 것이 모두 죄'라는 말에 즉시
“사는 것이 죄이지만 동시에 보속도 됩니다. 좌우가 끝까지 함께 살면 구원입니다.” 대답했습니다.
또 얼마 전 예수님 앞에서 울려고 수도원에 왔다는 어느 자매와 면담성사 시
주고받은 대화도 생각납니다. 자살에 대해 물었고 말문이 막혔지만 잠시 후 대답했습니다.
“죽으면 모두 끝입니다. 사랑도, 회개도, 감사도, 찬미도, 기도도 못합니다.
주님 앞에 무슨 면목으로 갑니까?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 너무 억울하고 허망하고 아깝지 않습니까?
그림으로 말하면 거의 완성 단계로 가고 있는 데 지금 그리다 말면 어떻게 됩니까?
자살하려는 마음은 유혹입니다. 찾아보면 감사할 일은 무수합니다.
끝까지 살아야 구원입니다. 바로 지금이 회개의 기회입니다.”
이어 ‘항상 기뻐하라, 늘 기도하라,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는
한 달 치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에 이어 기도문도 드리고
함께 십자성호를 그은 다음 '십자가 예수님'아래서 기념 촬영도 했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미안하다는 말에 드린 덕담입니다.
“자매님 자체가 참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 앞에 갈 때도 빈손입니다.
단 하나 주님과 맺었던, 이웃과 맺었던 ‘사랑의 관계’ 하나만 갖고 갑니다.
그러니 주님을, 가까이 있는 분들을 많이 사랑하세요.”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살다보면 복음의 사람들처럼 ‘왜? 이런 일이!’묻게 되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왜?’의 물음만 있지 답은 없습니다.
오늘 주님은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주변 사람들이나 우리가 당한 불행을 죄의 결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회개의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의 변고나, 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들의 예로 들면서 주님은 답을 주십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죄의 유무를 물을 것이 아니라 즉각 회개의 표징으로 삼아 회개하여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씀에 즉시 이어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회개의 절박성을 말해 줍니다.
삼년이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 버리겠다는 주인에게
포도 재배인은 일 년 간의 유예기간을 간청합니다.
흡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간청하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무슨 열매입니까? 회개를 통한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날들은 ‘날마다’ 회개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 연장되는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수확이 끝난 배나무들은 얼마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지요.
바로 하루하루 힘껏 회개의 노력을 통해 무수한 사랑의 열매들을 맺었던
‘노년의 가을 인생들’을 상징합니다.
죄로부터 떠나 주님안 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죄로부터 떠남만 있고 주님께 가지 않으면 반쪽의 회개입니다.
죄로부터 떠나 주님 안 내 제자리,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에 머물러야
비로소 온전한 회개요 구원입니다.
교황님께서 누누이 강조하는 바가 누구든 혼자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며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구원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얼마전 읽은 ‘천국입장은 단체입장만 허용된다!’라는 재미난 말마디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혼자 1등으로 천국입장이 아니라, 공동체 형제들이 다 와야 비로소 허락되는 단체 천국입장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구체적 실천은 각자 교회 공동체 안에 주어진
섬김의 직무에 책임을 다하는 충실함으로, 또 경쟁이 아닌 상호보완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킬 때 비로소 이루어지며, 바로 이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이처럼 회개에 이어 구원의 완성은 공동체 안에서 이뤄짐을
바오로 사도는 두 부분에 걸쳐 참 깊고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니 혼자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더불어 성숙한 사람이 됨으로 구원입니다.
형제들에도 ‘불구하고’의 구원이 아니라,
형제들 ‘덕분에’, ‘때문에’ 구원이니 서로 고마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을 통한 구원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실천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는 그대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 성장 성숙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회개의 궁극지점이자 구원의 자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들로서의 더불어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그리스도의 얼굴도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 어머니 손을 잡고서 처음으로 전철을 탔을 때가 기억납니다.
그 첫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의자에 거꾸로 앉아서 창밖만을 바라봤습니다.
넓은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깥의 풍경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어머니, 바깥 풍경이 너무 빨리 움직여요.”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지금이야 풍경이 움직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풍경은 고정된 것이고 다만 전철이 빠르게 움직여서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움직이는 것은 제가 타고 있는 전철이었던 것입니다.
세상 삶도 그렇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외부에서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일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어서 그랬던 적이 더 많았습니다.
‘누구 때문에’가 아니라 ‘나’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바른 시선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정반대의 생각이 오히려 진리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무고해 보이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빌라도가 죽인 갈릴래아 사람들, 또 실로암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지어서 그런 죽음을 겪게 되었냐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더 큰 죄인이어서가 아님을 분명히 하시면서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회개의 삶은 바로 제대로 바라보는 삶을 의미합니다.
제대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잘못된 길에서 다시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늘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저 사람이 더 많은 죄를 지었어.’, ‘저런 사람은 벌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
‘왜 하느님께서는 저런 사람을 가만히 두는 거야?’ 등등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끊임없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곧바로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주인은 잘라 버리라고 하지만,
포도 재배인은 자신의 노력을 기울일 삼 년의 시간을 청합니다.
이 정성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 잘라 버리라고 말합니다.
포도 재배인이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사랑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잘못된 판단으로 주님 사랑은 보지 못하고 내 욕심만을 채우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마지막 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채 넘어진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넘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기에 뉘우치는 것이요,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임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반성이 아니며,
또한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한편,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오,
또한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십니다,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고,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삶을 살면서 ‘변곡점’을 한두 번은 맞이하게 됩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운명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박해하였던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초대교회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신앙인이 아니었던 방송인이 우연한 기회에 이태석 신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을 알기 전에는 사회고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10년 정도 했는데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도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왜 항상 얼굴이 어둡고, 화난 사람 같죠?’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히고자 했지만, 어두운 면을 보면서 본인도 정서가 메말라갔다고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을 알게 되었고 ‘울지만 톤즈와 부활’을 제작했습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작품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친구들도, 가족들도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얼굴이 행복해 보입니다.’
저의 사제생활에도 몇 번의 변곡점이 있었습니다.
25년 전입니다. 주교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도 하고, 사목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인정해주신 주교님께 감사했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학원에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차분하게 준비하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생각이 짧았습니다.
송별회를 핑계로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했습니다. 1달 정도 지났는데 주교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저의 근황을 들으셨는지 저의 생활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미국 가는 일은 없던 일로 하셨습니다.
제가 가고 싶어 한 것도 아니었기에 주교님 말씀에 순명하였습니다.
저의 부덕함을 인정하면서도 주교님께 저의 생활을 알린 분에게 서운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성당에 돌아와서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2번 성경책을 펼쳤는데 같은 말씀이 나왔습니다.
욥기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드린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감사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에 올 때 빈 몸으로 왔으니 세상을 떠날 때도 빈 몸으로 가는 것을
감사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주교님 덕분에 제게는 좋은 습관이 생겼습니다.
사람을 좋아하기에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지만
아무리 늦어도 10시 이전에는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10잔을 마실 수 있다면 5잔만 마시려고 했습니다.
본당 신부가 일찍 자리를 마치니 교우들도 좋아했습니다. 특히 자매님들이 좋아하였습니다.
과하게 마시지 않고, 일찍 들어오니 자연스럽게 일찍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5시에 일어나다가 요즘에는 4시에 일어납니다. 일찍 일어나니 새벽에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이 생겨서 좋았습니다.
본당에서도 새벽에 강론을 준비하고, 본당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평일미사에 오지 못하였던 분들이 강론을 읽으면서 묵상할 수 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이곳 뉴욕에서도 변함없이 새벽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문사 홈페이지에도 강론을 올리고 있습니다.
25년 전에 주교님께 견책을 받지 않았다면 이렇게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기쁨과 행복도 오지만 아픔과 시련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기쁨과 행복에 감사드릴 겁니다.
아픔과 시련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길 겁니다. 천국에 계시는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우리가 회개한다면 어떤 시련과 아픔이 찾아와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단순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회개는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 5)
한상우 바오로 신부
회개는 실천이다.
올바른 사랑을 빛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알고 있다.
모든 회개는
하느님 사랑이다.
교회 공동체의 역사는
다름 아닌 회개의 역사였다.
회개가
세상을 밝히는 빛이었다.
사랑과 회개는 함께 존재한다.
회개의 숨결이
참된 기도의 숨결이다.
회개를 색채로 표현한다면
아마 겸허한
가을의 색채일 듯 하다.
포도나무에겐
포도열매가 열려야하듯
우리에게는
회개의 열매가 맺어져야 한다.
우리 삶의 빈자리는
회개의 자리이다.
회개로 채워져야 한다.
우리 삶의 중심을 잡아주고
모두를 살게 하는 회개다.
회개로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 안에서 맺는
회개의 열매이다.
사람 속에서 맺는 회개이다.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회개이다.
회개를 따라가는 생명의 길이다.
가장 아름다운 빛
가장 잘 익은 열매가
바로 회개의 빛이다.
나와 너의 회개가
모두를 살게 하는 하느님 사랑임을.
우리의 모습 우리의 열매는
실천하는 은총의 회개뿐임을.
십일조는 교만도 꺾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창조된 목적대로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창조자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보답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법칙이기 때문에 요행이나 예외규정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믿지 못하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만 특별하여 예외규정이나 요행을 따르려는 마음인 ‘교만’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 비유를 드십니다.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자신만 특별하다고 믿는 교만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적게 던, 많게 던 매를 맞습니다.
‘교만’은 성경에서 ‘도시’나 성곽의 ‘탑’으로 상징됩니다. 바벨탑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탑이 허물어져야 교만이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복음에서 숫자 ‘18’은 ‘힘을 잃게 만드는 영’과 관련이 있습니다. 13장에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루카 13,11)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병마”의 희랍어는 “병(힘이 빠진)의 영”입니다.
‘18’년은 분명 참 능력이요 힘인 성령을 잃게 만드는 마이너스 에너지와 관련됩니다.
자아가 품어내는 병의 영에 사로잡히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힘을 잃습니다.
하느님 영과 육체의 에너지는 서로 반대됩니다.
저는 ‘18’을 ‘6+6+6’으로 봅니다. ‘6’은 동물의 본성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것은 ‘세속+육신+마귀’인 것입니다.
제물이란 이 삼구(三仇)를 죽여 그 피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되지 않으면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의 완성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어떤 누구도 사랑의 계명으로 파견될 수 없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인데, 교만이 죽어야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기에
하느님 자녀로의 소명으로 파견될 수가 있습니다.
꽃이 떨어지지 않으면 열매가 맺힐 수 없듯, 삼구를 죽이지 않으면 깨어있지 못하게 되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길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엔 ‘호크 아이’와 ‘블랙 위도우’가
서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겠다고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주 절반의 생명을 날려버린 ‘타노스’를 이기는 방법은
6개의 ‘인피니티 스톤’을 다 모으는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의 인피니티 스톤은 누군가의 피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대신 절벽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희생만이
인피니티 스톤을 차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 나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또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언 맨이 타노스의 손에 있는
인피니티 스톤이 박힌 장갑을 빼앗아 타노스를 칩니다.
그러면 타노스가 죽지만 자신도 죽을 것을 압니다.
자신이 죽어야 모든 죽었던 생명이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아이언 맨은 자신이 죽고 많은 이들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패러디 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영화에 이런 설정이 들어있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 그래서 뭔지 모를 이 법칙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오고 사람들은 이것에 감동합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어떠한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을 죽여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첫 행위가 봉헌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의 삶은 봉헌으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제물에 피가 섞이게 하는 것’이 회개의 행위입니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피가 섞인 제물’이란 ‘나의 죽음을 위한 봉헌’이란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은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제물 봉헌과 선교 소명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봉헌이 없으면 선교의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봉헌으로 나의 교만의 탑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이도 손쉽게 오를 낮은 산도 힘들어서 오르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 동기들과 놀러 가서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특별하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끝까지 남아 누구보다 많은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약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버텨 2시간 자고 산을 오르는데 땀에서도 술 냄새가 났습니다.
더 오르면 토할 것 같아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어떤 좋은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어떤 목적이든 그것을 이루려면 자기를 포기하는 제물 봉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입니다. 오류가 없고 예외도 없습니다.
자신만 특별하다고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자신을 죽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포도밭의 한 무화과나무’처럼 잘리게 될 것입니다.
자아를 죽여 그 피를 선악과와 섞어 주님께 봉헌해야만
자신 안에 들어오시는 성령의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를 뱀으로 보고 그 피를 선악과에 섞어 봉헌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선악과는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십일조로 이어져야 하고 그 십일조에 반드시 자기를 죽이려는 의도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할 줄 안다면 열매 맺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피가 섞인 제물을 봉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 봉헌해야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그래야 그분 뜻이 내 안에서 실현될 준비가 됩니다.
주님은 뱀과 같은 방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15)
‘십일조’를 자신을 죽이는 회개의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 피가 빠져나간 만큼 주님의 뜻이 머물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오늘 복음은 끔찍한 뉴스로 시작해서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지 않도록 설득하는 말로 끝난다.
겅중 겅중 뛰어 건너는 징검다리처럼 화제가 비약한다.
화제의 방향을 트는 사람은 예수님이다.
어떤 사람들이 전하는 유혈 낭자한 뉴스에
예수님은 논평을 하면서 함께 동참하지 않으신다.
대신 그 뉴스에서 실마리를 잡아
그 뉴스를 전하는 사람들의 회개 여부를 문제 삼으신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뉴스를 좋아하는, 입담 좋은 호사가들이 있다.
세상 온갖 크고 작은 뉴스와 시시콜콜한 남의 이야기,
남 잘되는 꼴, 못되는 꼴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자신의 내적 상태에 대해서는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무화과나무는 포도밭에 심어져 있다.
그러나 무화과로서 자신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만일 무화과나무가 주위의 포도나무들을 돌아보며
포도나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열매를 맺는지 자신과 비교하며
그들을 바라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다면
자신의 열매를 영글게 할 시간이 있을까?
뉴스를 전하는 이들에게 회개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포도재배인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버지, 이들을 잠시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들을 일깨우고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할 수 있도록 계속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그러면 곧 회개 하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그들에 대한 자비를 거두십시오."
예수님, 저희가
보고 듣는 모든 일들과 경험을
흥미로운 소식이나 타인에 대한 뒷 담화거리로 삼아버리지 않고
먼저 저희 자신을 성찰하는 데에 유익한 재료로 삼을 수 있도록
저희의 관심을 저희 내면으로 돌려주소서.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