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횡성군에는 태기산(泰岐山)이 있다. 진한의 마지막 왕이었던 태기왕이 신라의 박혁거세에게 패해 북쪽으로 가던 중 덕고산에 이르러서 신라와 대항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현재의 태기산성이라고 한다. 태기왕은 산성을 쌓고 정예병을 훈련시켰다. 산성 안 평지를 개간해서 군량미를 보충하고, 산채를 채취해 부식물로 이용하였다. 군사들을 최강의 병사로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태기왕은 신라군이 올 수 있는 남쪽을 주로 경계하였다. 그러나 신라군은 남쪽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고 반대편으로 공격해 결국 태기왕은 참패한다.
강원도 횡성군에 있는 태기산
강원도 횡성군에는 태기산(泰岐山)이 있다. 인근 평창군과 홍천군과의 경계에 있으며, 1.261m로 횡성군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태기산의 원래 이름은 덕고산(德高山)이다. 덕고산이 태기산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문헌에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설화를 통해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맥국의 마지막 왕, 태기왕
예전 진한[한반도 중부 이남에 있던 삼한 가운데 한 곳]의 마지막 왕이었던 태기왕이 신라의 박혁거세에게 패해 북쪽으로 가던 중 덕고산에 이르러서 신라와 대항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현재의 태기산성이라고 한다. 신라군에게 패해 태기왕이 도주할 때 왕비였던 아라 왕비는 미처 피하지 못하여 신라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신라군이 범하려 하자 왕비는 칼을 꺼내 자결하려 하자 신라군이 왕비를 풀어주고 태기왕을 따라서 북쪽으로 함께 올라갈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한다.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은 박혁거세에게 삼랑진[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에서 대패하였다. 그래서 소수의 친위병만 이끌고 태백산맥에서 다시 재기의 터전으로 삼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먼 길을 달려왔다. 한 달 동안의 강행군으로 태기왕의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있었다. 횡성군에 이르러 갑옷을 벗어 강물에 빨아 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들이 갑옷을 빨아서 널었던 곳을 ‘갑천(甲川)’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갑천에서 더 북쪽으로 옮겨 마침내 덕고산에 이르게 되었다. 덕고산이 요새라서 태기왕이 터를 잡고 산성을 쌓기 시작했다. 덕고산은 여름이면 숲이 많이 우거지고, 산 정상에는 구름이 항상 있었다. 산의 남쪽은 절벽이고, 나머지 삼면도 깊은 계곡이 있어서 신라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태기왕은 덕고산에 산성을 쌓고 정예병을 훈련시켰다. 산성 안 평지를 개간해서 군량미를 보충하고, 산채를 채취해 부식물로 이용하였다. 군사들을 최강의 병사로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태기왕은 신라군이 올 수 있는 남쪽을 주로 경계하였다. 한편 신라군은 염탐꾼을 보내어 덕고산의 지형을 살피고, 남쪽 방향으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반대편인 지금의 홍천군 서석면 생곡리 방향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다. 덕고산의 남쪽으로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남쪽 경계에 주력했는데, 신라군이 반대편 방향으로 올라오자 태기왕과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신라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태기왕은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서문을 통해서 ‘지르매재’를 넘어 인근 속실리 율무산성으로 도주를 하였다. 그래서 횡성에서는 덕고산을 태기산으로 부른다.
맥국의 멸망을 보여주는 설화
그 후 태기왕의 생사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평창군 일대에서는 봉평면 멸운리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태기왕이 죽자, 진한의 군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마을을 개척해 살게 되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신대리’라고 한다. 또한 태기산 입구에는 망을 보던 군사가 신라군의 기습으로 패망을 하자 굳어서 촛대 모양의 바위가 되었다는 ‘촛대바위’가 있고, 당시의 성터와 우물, 곡식창고 등의 흔적 등이 남아 있다. 설화에서 쫓기는 왕이지만, 횡성 사람들은 태기왕에 대해서 특별하게 생각한다. 쫓기는 과정과 죽음과 관련해서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있다.
첫댓글 강원도 설화 " 진한의 태기왕이 쌓은 태기산성"
잘 읽었습니다.
진한태기왕 이야기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