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이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모범을 보여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를 실천하도록 일깨우고 촉구한다.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창조와 은총의 모든 복을 사람의 손에 맡기시어, 우리가 좋은 뜻을 세워 아버지의 섭리로 많은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돌아오실 아버지를 깨어 기다리는 충실한 종으로서,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을 누리도록 합시다.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1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토빗 4,7)
2023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올해로 일곱 번째를 맞이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풍성하게 드러내는 표징이며 우리 공동체 삶의 버팀목입니다. 이 거행이 교회의 사목 안에 점점 깊이 뿌리를 내릴수록 우리는 복음의 핵심을 날로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고자 일상에서 기울이는 노력으로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빈곤의 강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범람할 지경까지 불어나, 우리를 휩쓸어 갈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도움과 원조와 연대를 구하는 형제자매들의 요청이 너무도 큽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청빈의 삶을 살고 가난한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은총과 힘을 주님께 다시 한번 얻고자,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전 주일에 주님의 식탁 둘레에 모입니다.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토빗 4,7).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는 증언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구약성경 본문이지만 사로잡는 힘이 있고 지혜가 가득한 토빗기 묵상을 통하여 우리는 거룩한 저자의 메시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가정생활의 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아버지 토빗은 긴 여행을 앞둔 아들 토비야를 껴안습니다. 나이 든 토빗은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영적 유언’을 남깁니다. 토빗은 니네베로 유배를 왔고 이제는 눈까지 멀게 되어 가난의 이중고에 놓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는 늘 한 가지 확신이 있었으니, 바로 자기 이름의 뜻이 그러하듯이 ‘주님께서는 나에게 좋으신 분’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로 또 좋은 아버지로 아들에게 단순히 물질적인 부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따라야 하는 바른길을 증언하여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평생토록 늘 주님을 생각하고, 죄를 짓거나 주님의 계명을 어기려는 뜻을 품지 마라. 평생토록 선행을 하고 불의한 길은 걷지 마라”(토빗 4,5).
나이 든 토빗이 아들에게 하는 당부는 그저 하느님을 생각하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에 그치지 말라는 것임을 이 대목에서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선행을 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위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어서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의로운 일을 하는 모든 이에게 네가 가진 것에서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아까워하지 마라”(토빗 4,7).
이 현명한 노인의 말은 우리를 곰곰이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토빗이 자선을 베푼 다음에 눈이 멀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스스로도 말했다시피 토빗은 젊어서부터 자선을 베푸는 데에 온 삶을 바쳤습니다. “나는 나와 함께 아시아인들의 땅 니네베로 유배 온 친척들과 내 민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 배고픈 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는 입을 것을 주었으며, 내 백성 가운데 누가 죽어서 니네베 성밖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면 그를 묻어 주었다”(토빗 1,3.17).
이러한 자선 활동을 이유로 임금은 그에게서 모든 재산을 몰수하여 그를 극빈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전히 토빗을 필요로 하셨고, 토빗은 자기 직책을 되찾은 뒤에도 자신이 해왔던 일을 용감하게 이어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향한 말일 수도 있는 토빗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봅시다. “우리의 축제인 오순절 곧 주간절에 나를 위하여 잔치가 벌어져, 나는 음식을 먹으려고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 상이 놓이고 요리가 풍성하게 차려졌다. 그때에 내가 아들 토비야에게 말하였다. ‘얘야, 가서 니네베로 끌려온 우리 동포들 가운데에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잊지 않는 가난한 이들을 보는 대로 데려오너라. 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 그런다. 얘야,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마”(토빗 2,1-2). 가난한 이들의 날에 우리가 토빗의 이러한 관심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그 의미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성찬의 식탁에 함께한 뒤에 누군가를 초대하여 주일 만찬을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거행한 성찬례는 참으로 친교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제대에 모인 우리가 모두 형제자매임을 참으로 깨닫고 우리의 축제 음식을 곤궁한 이들과 나눈다면 우리의 형제애가 얼마나 더 잘 드러나겠습니까!
토비야는 아버지 분부대로 따랐으나, 한 가난한 이가 살해당하여 장터에 던져졌다는 소식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이 든 토빗은 잔칫상을 뒤로하고 주저 없이 일어나 그를 묻어 주려고 나갔습니다. 기진맥진해서 집에 돌아온 토빗은 마당에서 잠들었는데 참새 똥이 두 눈에 떨어져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토빗 2,1-10 참조). ‘선행을 하는데 벌이 따르다니 이 무슨 운명의 아이러니인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지지만, 신앙은 우리에게 더 깊이 들어가라고 가르칩니다. 토빗이 눈멀게 된 것은 주위에 있는 수많은 형태의 가난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그의 시력을 돌려주시고 아들 토비야를 다시 보게 되는 기쁨을 주십니다. 그날이 올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토빗이 아들의 목을 껴안고 울면서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 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 토비야를 볼 수 있게 되었다’”(토빗 11,13-14).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이민족 사이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용기와 내면의 힘을 토빗은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토빗의 이야기는 특별합니다. 충실한 남편이며 인자한 아버지인 토빗은 고향에서 멀리 추방되어 불의를 겪고 임금에게 박해당하며 이웃에게 냉대받았습니다. 그토록 착한 사람이었음에도 그는 시련에 놓였습니다. 성경에서 흔히 가르치듯이,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에게 시련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우리를 욕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우리 믿음을 굳건히 하려는 것입니다.
시련의 시기에 토빗은 자신의 가난을 발견하고는 가난한 다른 이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고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가난을 직접 느꼈기에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토빗 4,7) 하고 아들 토비야에게 전하는 말은 그의 참된 유언이 됩니다. 곧, 가난한 이를 만날 때마다 우리가 얼굴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주 예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가난한 이”라는 토빗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여 봅시다. 모든 이가 우리의 이웃입니다. 피부색도, 사회 계층도, 출신도 무관합니다. 나 자신이 가난할 때에 나의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허울뿐인 안녕을 지키려는 무관심과 빤한 핑계를 떨쳐버리고 모든 가난한 이와 모든 형태의 가난을 알아보라고 부름 받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특히 섬세하게 헤아리지 않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풍족한 생활양식을 택하라는 압박이 커져 가는 반면, 가난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는 무시당하곤 합니다. 우리는 젊은 세대를 위한 삶의 양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모두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문화적 변화에 가장 취약합니다. 우리는 불쾌하거나 고통을 초래하는 것은 모두 무시하는 반면, 신체적 특질을 삶의 우선 목표인 양 찬양합니다. 가상현실이 실제 삶의 자리를 차지하고 점점 더 쉽게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가난한 이들은 찰나의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 되지만, 우리는 살과 피를 지닌 그들을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성가셔하며 외면합니다. 이제 우리 삶에 날마다 동반자가 된 조급함은 우리가 멈추어 서서 다른 이를 돌보지 못하게 우리를 가로막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 참조)는 그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저마다에게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위탁하기는 쉽습니다. 다른 이들이 자선을 베풀도록 성금을 내는 것도 관대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선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많은 사람이 가난한 이들과 배척받는 이들을 돌보는 데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모든 연령대와 각계각층의 그들은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하고 기꺼이 도우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초인적 영웅이 아니라 ‘이웃집 사람’, 곧 스스로 묵묵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저 무엇을 주는 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경청하고, 관계를 맺으며,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원인을 이해하고 대처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들은 물질적 필요는 물론 영적인 필요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개개인의 온전한 발전을 위하여 힘씁니다. 이 관대하고 이타적인 봉사로 하느님 나라가 현존하고 드러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과도 같이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사람들의 삶에 뿌리내려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루카 8,4-15 참조). 이러한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증언이 더욱더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그들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기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6. 반포 60주년을 기념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 성하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의 다음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생존, 육신 전체, 생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절대적인 권리를 갖고 있으며, 특히 양식, 의복, 주거, 숙식 등에 관한 권리가 있으며 의사들의 치료와 그 외 정당한 사회적 봉사 등을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인간은 병고, 노동력의 결여, 과부 신분, 노환, 실업 등에 처했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존 방법을 상실하는 경우에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11항).
말씀이 실현되려면 여전히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특히 정치 지도자들과 입법자들의 진지하고 효과적인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공동선을 위하여 식별하고 봉사하는 데에 따르는 온갖 제약과 때로는 정치적 실패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자발적인 헌신의 가치를 믿는 시민들 사이에서 연대와 보조성의 정신이 꾸준히 길러지기를 바랍니다. 공적 제도가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도록 촉구하고 압력을 줄 필요도 물론 있습니다만, 모든 것을 ‘위로부터’ 받으려고 수동적으로 기다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빈곤 속에 살아가는 이들 또한 변화와 책임의 과정에 참여하고 동행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 앞서 언급한 가난의 형태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다시 한번 인식하여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전쟁의 상황에 휘말린 사람들, 특히 평온한 현재와 품위 있는 미래를 빼앗긴 어린이들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상황에 길들여져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이며 정의와 대화를 위한 헌신의 열매인 평화를 증진하고자 끈기 있게 모든 노력을 기울입시다.
또한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투기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많은 가정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극적인 물가 급등을 일으켜 왔습니다. 수입은 빠르게 바닥나고 모든 이의 존엄성을 위태롭게 하는 희생이 강요됩니다. 어떤 가정이 영양 섭취를 위한 음식과 병원 치료 사이에서 선택하여야 한다면, 이때 우리는 인간 존엄성이라는 이름으로 두 이익 모두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노동계 안에서 빚어지는 윤리적 혼란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노동자에게 가하는 비인간적 대우, 노동에 대한 부적합한 대가, 고용 불안이라는 참상, 그리고 때로는 안전한 일터보다 즉각적 이익을 선택하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과도한 재해 관련 사망자 수 등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강조하신 다음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노동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 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 아무리 인간이 일할 운명을 타고났고 소명을 받았다 하여도 우선적으로 노동이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노동하는 인간」, 6항).
그 자체로 심각한 괴로움인 이러한 형태의 가난들은 이제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빈곤의 실태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일 뿐입니다. 저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점점 더 두드러지는 가난의 형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낙오된 패배자’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부추기는 문화는 그들에게 허상을 만들어 내어 얼마나 많은 좌절과 얼마나 많은 자살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이러한 치명적 영향에 대항하도록 그리고 그들이 자기 확신을 가지고 너그러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젊은이들을 도웁시다.
가난한 이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수사적 과장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는 통계와 숫자라는 수준에 머물려는 교활한 유혹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는 인격체로서 얼굴, 이야기, 마음과 영혼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장단점을 지닌 우리의 형제자매이므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토빗기는,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현실적이고 실질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정의에 관한 문제입니다. 공동체가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느끼는 데 요구되는 화합을 촉진하려면 우리가 서로를 찾아내고 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본다는 것은 그저 재빨리 내미는 도움의 손길 이상입니다. 이는 가난이 훼손한 올바른 상호 인격적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자비와 애덕의 유익을 누리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이 언제나 복음의 현실주의로 특징지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나눔은 단지 남아도는 물건들을 처리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상대방의 구체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도 또한 성령께서 이끄시는 식별이 요구됩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희망과 열망이 아닌 우리 형제자매의 진정한 필요를 인식하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우리의 인류애, 사랑에 열려 있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결코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 주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신앙은, 모든 가난한 이가 하느님의 아들딸이며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올해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자서전 『한 영혼의 이야기』(L’Histoire d’une âme)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한 애덕은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참아 견디며, 그들의 약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들이 행하는 극히 조그만 덕행까지도 본보기로 삼는다는 것임을 나는 깨닫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은 마음 깊은 곳에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등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비추고 즐겁게 하여야 하는 애덕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Ms C, 12r°).
우리의 집인 이 세상에서는 모든 이가 애덕의 빛을 경험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빛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데레사 성녀의 굳건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이며 신적인 면모에 언제나 초점을 맞추도록 도와주기를 빕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3년 6월 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주님의 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5,1-6
1 형제 여러분,
그 시간과 그 때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3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4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6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축일 11월 19일 성녀 메히틸다 (Mechtilde)
신분 : 수녀, 신비가
활동 지역 : 하크본(Hackeborn)
활동 연도 : 1240/1-1298년
같은 이름 : 마띨다, 마띨디스, 마틸다, 마틸디스, 메크틸다, 메크틸드, 메히틸드, 메히틸디스, 메히틸트, 멕띨다, 멕틸다
성녀 메히틸다(Mechtildis)는 독일 중부 튀링겐(Thuringia) 지방에서 가장 유력한 귀족인 하크본 가문의 딸로 아이슬레벤(Eisleben) 인근 헬프타(Helfta)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7살 때 부모에게 이끌려 당시 로더스도르프(Rodersdorf)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수녀로 있던 언니 제르트루다(Gertrudis)를 방문하러 갔다. 이때 수도원 생활에 깊이 매료된 성녀 메히틸다는 수도원에 남겠다며 부모를 졸라, 결국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언니의 보살핌 속에서 성녀 메히틸다는 학업뿐만 아니라 수도 생활에 필요한 덕행과 기도에서도 탁월한 발전을 이뤘다. 18세에 종신서원을 한 그녀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여학교의 교사가 되어 어린이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그리고 천부적인 아름다운 목소리와 음악적 재능을 이용해 성가대와 성음악 분야에서 활약하면서, 나중에는 ‘헬프타의 나이팅게일’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1258년 수녀원장이 된 언니 제르트루다가 형제들에게 받은 작센(Sachsen) 지방 헬프타의 새 부지로 수도원을 옮길 때 성녀 메히틸다도 함께 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 마리아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3년 뒤 그 수도원 학교로 다섯 살밖에 안 된 성녀 제르트루다(Gertrudis the Great, 11월 16일)가 교육을 받으러 들어왔다. 성녀 메히틸다는 나이 어린 성녀 제르트루다가 장성할 때까지 돌봐주고 뛰어난 신비가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수많은 초자연적인 은총을 체험했다. 그녀의 제자인 성녀 제르트루다가 그리스도의 발현을 체험한 후 자신의 신비체험을 글로 쓰려고 할 때, 처음에는 쓰지 말도록 경고했으나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 위대한 신비가의 대표작인 “하느님 사랑의 사자(使者)”(Legatus Divinae Pietatis)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성녀 메히틸다도 1292년 그동안 자신이 경험한 초자연적 은총과 내적인 삶의 비밀을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기 시작하면서, 7년간 자신에게 계시된 내용을 기록했다. 그녀는 자신이 저술한 “특별한 은총에 관한 책”(Liber Specialis Gratiae)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사용하는 것을 논하고,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특별히 강조했다.
1290년경부터 심한 병고로 고통을 받던 성녀 메히틸다는 1298년 11월 19일 헬프타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예수 성심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비로우신 예수님!”을 부르며 눈을 감았다. 성녀 메히틸다는 공식적으로 시성식이 거행된 바는 없으나 그 때문에 그녀에 대한 공경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헬프타의 성녀 메히틸다 또는 마틸다(Mathildis)로도 불리는 그녀의 축일은 교황청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그녀가 속한 수도회 내에서 2월 26일 또는 27일에 기념해 왔다. 오늘날에는 베네딕토회와 시토회 그리고 트라피스트회 등에서 그녀의 선종일에 맞춰 11월 19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메히틸다 (Mechtilde)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