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까지 죽 이야기 해온 것은 한국교회가 약간의 문제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신앙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데 예수를 믿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교회의 점검을 받으라는 식으로 가르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보이는 중보자를 신부로 내세웁니다. 신부는 독신이고 다른사람보다 영적으로 말씀을 더 잘 알기에 신부의 점검과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혼자 믿다가 어그러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신부의 허락하에 신앙의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신부가 중개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성령님은 요한복음의 말씀에 있는대로 바람같이 역사하기에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눈에 보이는 신부가 중보자를 대신할수 없고, 나아가 성령님의 일이란 신부와 결탁해서 하지 않고 십자가 중심으로 인간의 모든 판단을 반대하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신부의 간섭이란 도리어 성령님의 일을 훼방하는 훼방꾼 노릇이 될뿐인데 신부가 자체적인 검열과 반성이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한통속이기에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부와 목사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고 신부와 목사는 기준이 아니고 기준은 신부나 목사대신 성령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만인제사장설”이라고 합니다. 만인제사장설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심사할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요한일서 2장 20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일반민중들이 성경을 문자로 대하면서 해독하는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쿠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서 성경을 찍어 내면서 오늘날처럼 몇장 몇절 이렇게 성경을 읽게 되었지만 옛날에 일반민중들이 문자를 몰랐던 시대에는 성당의 유리벽에 모자이크로 그림을 그려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가르쳤습니다. 옛 성당의 특징은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 성경을 요약해서 가르친겁니다.
루터가 등장하는 시기는 특정계층만 이해했던 문자의 해독이 비로서 민중들에게도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성경이 특정계층만 이해했던 라틴어로 되어 있던 것이 각민족의 토속언어로 번역이 되어나갑니다. 예를 들어 보헤미아어, 혹은 프랑스어 등등 각 종족들의 언어로 번역이 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게 되니 신부들만의 일방적인 성경해석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진것입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성경은 누가 따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 성경을 읽게 되면 성령에 의해서 성경이 해석이 되는데 그 해석은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해석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십자가로 끝나게 되는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만이 성도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는 피가 들어 있고 그 피는 醍?인간이 죄인임을 고발합니다.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월등한 것이 없고 예수님만 의인인데 그 의인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유일하게 인정받습니다. 예수님의 소망,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의 사랑만 유일하게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이근호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은 완벽합니다.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이 그 행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지심으로 예수님의 그 공로가 예수믿는 사람에게 넘어와서 예수님 때문에 의인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윤리 도덕개념하고 너무나 다릅니다. 도덕이나 윤리는 자기가 행하는 것에 따라서 착한 사람도 되고 나쁜 사람도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모든 아담은 죄인이기에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 한분 의인이신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 은혜가 넘치게 온다고 하는데 어느정도로 넘치게 오는가 하면 죄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만한 은혜라고 합니다. 그것을 은혜의 왕노릇이라 합니다. 왕이라는 것은 최고라는 뜻입니다. 행위가 왕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왕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죄가 많다 할지라도 그 죄보다 은혜가 월등하게 많다는 뜻입니다. 탕감 안되는 죄는 없고 죄가 그대로 남아 있게 하는 그런 은혜는 없다는 말입니다. 은혜가 오게 되면 어떤 죄라고 해도 다 날아가 버립니다.
왜냐하면 한사람이 범죄해서 아담이 범죄하고 우리가 죄인된 것처럼, 같은 원리로서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예수믿는 자에게 은혜로 의인되는 것입니다. 그 원리와 법칙에 의해서 루터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십자가가 신앙인 속에 그대로 들어와 버릴때 그 모임, 모임을 가지고 결과론 적으로 교회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그렇다고 십자가와 신앙인 사이에 교회가 놓여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없다고 오해하면 안됩니다. 교회도 없는데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십자가와 신앙인 사이에 들어가서 신앙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성령의 선물로 신앙이 오게 되고 성령의 선물로 ‘십자가 믿음으로 내가 의인된다’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된 교회라면 반드시 예수님에게만 공로를 다 돌리는 그 점이 교회의 특징이 되는 겁니다. 교회란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서열을 따져서 누가 더 높으냐를 정하는 계급사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루터는 “만인제사장설”, “성경중심”, “믿음중심” 이 세가지를 가지고 1517년에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칼빈의 신앙관을 일컬어서 “개혁주의”라고 하는데 실상 칼빈은 루터에게서 배운 사람입니다. “루터주의”라는 말은 없고 다만 루터는 종교를 개혁한 개혁자인데 그것을 “개혁주의”라는 식으로 교리를 만들어낸 사람은 칼빈입니다. 칼빈의 “개혁주의”를 가진 교회를 다른 말로 “장로교회”라고 합니다. 루터에게는 특정교리란 없습니다만 교회가 중간에서 신앙을 심사할 수는 없다, 보이는 인간이 신앙을 심사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보이지 않는 분이 주었고 심사도 보이지 않는 분이 하며 다만 보이는 우리는 서로 모여서 우리 가운데 믿음주신 그리스도를 섬기면 이것이 참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경애씨가 오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이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 혹시 아실런지요? 송목사님은 아마 아실 것 같은데 젊은 분들은 이것을 잘 모릅니다. 힌트를 드린다면 여기는 조각목이고, 여기는 대나무를 묶어 놓은 것인데 일제시대때부터 쓰던 것인데 이것을 크게 만들면 목욕통이 되고, 작게 하면 똥푸는 통이 됩니다.
(여기 저기서) “아--아--!” (아마 알아 듣겠다는 소리)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여기 있는 이 끈 만 풀어 내면 나머지 조각들이 다 풀어 집니다. 여기에 구멍을 뚫어서 단단한 넝쿨 같은 것으로 긴 나무 조각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중앙에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주님만 계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재산을 팔아서 줄때 교회안에 아무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땅판 값을 속여서 얼마를 감춘채 사도들에게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부분(그림에서 끈으로 묶여 있는 부분을 가리키는 것인 듯) 에 이렇게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와 함께 얼싸안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안에 있는 이 공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공간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인간들만 있는줄 아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꾸짖기를 “네가 나를 속임이거나 옆사람을 속임이 아니고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을 속임이라”고 하자 그 두사람이 즉사해 버립니다. 이 내용이 사도행전 5장에 나옵니다.
이것은 ?냠링各繭?목사나 사도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믿게 하신 보이지 않는 분의 묶음 속에서, 곧 이것이 성령의 하나됨인데요, 보이지 않는분의 주도하심 속에서 되어진 것이 교회’라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사람들이 심심해 한다고 해서 목사가 중간에 뛰어들고 장로가 뛰어들면 교회라고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교회를 루터가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인간이든 다 같은 입장에 있는데 다만 여기서 어떤 사람은 키가 크고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데 이것은 은사입니다. 어떤 이는 장로의 은사, 어떤 이는 집사의 은사가 있는데 이것은 높은 자리가 아니라 이 그림처럼 서로 서로 손잡고 있으면 누가 높다 낮다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주님이 높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부름받아 나온 입장에서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식사때는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혹시 교회 청소를 제가 하면 안될까요? 청소는 제가 전공인데요” 이렇게 섬기는 것이지 “나는 음식 잘하는데 당신은 걸레질밖에 못한다고? 그럼 내가 더 높은거네!” 라는 식의 계급을 정한다든지 조직화 계급화하는 것은 세상 정치에서나 있는 것이지 교회에서는 이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죽자 말자 이것이 다 깨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사람이 누가 하나 뜨면 그것을 등쳐먹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배용준이가 뜨면 배용준이는 그때부터 자기맘대로 못합니다. 밑에서 배용준을 가지고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노무현도 제맘대로 못합니다. 박근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예인이 자기맘대로 스케줄을 못짜고 기획사의 메니저가 다 합니다. 김종국의 한달 스케줄을 보면 프로그램이 1000회나 나왔다고 합니다. 사람이 할짓이 못되잖아요. 바짝 뜰때 벌어 먹고, 밑천 뽑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영웅시 함으로써 후차적인 이익을 얻는 집단들이 있습니다. 만일 유명하고 입담좋은 설교자가 있어서 그 입담으로 사람들이 모인다면 그 설교자에게 약간의 봉급을 주고, 그 교회에서 재산권을 형성해서 그 교회의 장로행세하는 사람들이 쫙 깔립니다.
루터가 그당시 중산층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오해, 농민들을 대변한다는 식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사실 루터는 농민운동과 관계가 없었습니다.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가지고 천주교의 정치조직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루터가 전하는 복음과종교개혁에는 관심없고, 루터를 이용해서 잃어버린 농토나 찾고 영주들이 자기 권리를 찾으려고 한겁니다. 그 당시 자영업자 그러니까 매뉴팩쳐지요, 그 당시가 중세사회, 봉건사회가 막 변화하기 시작한 시대거든요. 자영업자라든지 무역업자, 중개무역하는 상인들 중심의 금융자본주가들에 의한 도시문화가 막 꽃피울때입니다. 농토를 가진 영주들이 농노들을 거느리는 봉건사회에서 이제는 도시문화로 점차 넘어가는 그런 시대라는 거죠. 그때 부르조아라는 말이 처음 나온것입니다. 이거 역사시간에 다 배웠잖아요. 부르조아들이 도시를 형성하고 이제는 자본이 자본을 낳는 시대로, 산업자본주의까지는 아직 안되지만 금융이 자본을 낳는 금융자본주의가 그때 성립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본가들은 토지는 없지만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천주교가 돈을 내라고 할때 내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자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자를 먹고 사는 일이 그 당시 천주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자라는 것은 시간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것인데, 시간이란 하나님의 것이기에 시간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일이 결국 하나님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것이 되기에 이자받아먹는 것을 철저히 이단적인 요소로 규정하면서 금하고 방해를 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23:19-20) 네가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지 말찌니 곧 돈의 이식, 식물의 이식, 무릇 이식을 낼 만한 것의 이식을 취하지 말것이라19 타국인에게 네가 꾸이면 이식을 취하여도 가하거니와 너의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얻을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20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시간 따라서 돈 백만원이 저절로 백십만원이 되는 것은 반칙이다’고 하면서 막았는데 평소에 이것에 반발심을 갖고 있던 도시 자본가들 입장에서 보기에 루터가 - 외쳤던 복음이나 성경지식같은 것은 관심밖이지만 어쨌든 - 기존의 막강한 교회세력을 공격했잖아요. 데모할 때 앞에 한 사람 세워놓고 뒤에서 군중들이 으샤 으샤 하는 것과 같이 루터 하나 순교시켜서 우리 덕보자는 식으로 나간것입니다. 그래서 네델란드의 국가자체의 종교를 바꾸게 됩니다. 네델란드는 국가 전체가 개신교입니다. 프랑스나 스위스 같은 곳에서는 천주교국가대 기독교국가, 즉 복음과 비복음의 싸움이 아니고 국가 令뎠퓰恝遲?벌어지게 된것입니다.
그때 등장한 개신교국가를 옹호해 주기 위해서 나온 교회가 개혁주의 교회입니다. 오늘날의 장로교회입니다. 죽 들어 보니 벌써 장로교회가 순수하지 않지요. 대표적인 것이 영국혁명가인 크롬웰의 청교도입니다. 요새 교회에서 청교도라 하면 경건하기 짝이 없지요? 그거요. 정치적인 겁니다. 청교도란 종교를 정치적인 힘으로 변화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힘을 모아서 정치적인 힘을 발휘해 보자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크롬웰이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켜서 약간 떳다 싶으니까, 영국국교회 세력에 밀려나게 되자 필그림이라고 해서 순례자란 이름을 걸고 신개척지로 가는데 그곳에 이미 주인공이 있었고 그 주인공이 인디언입니다. 아메리카인디언은 기원전 500년 경에 알래스카를 건너온 몽골리안입니다. 이 것은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알래스카로부터 현재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가 수십차례에 걸쳐서 현재의 카나다와 북미를 거쳐 남미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미국의 고고학계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인디언들의 사상은 모든 대지는 지붕이고 그 대지위에 사는 사람들은 다 한 형제라고 보았습니다. 청교도는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이땅은 그냥 약속의 땅이고 자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는 선택된 백성으로 보았습니다. 흡사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서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것과도 같이 여겼습니다. 선택된 백성들을 가로막는 인디언들은 아말렉이 되고 이방민족이 되니 성경대로 하면 이방민족은 쳐도 그것이 정당화 됩니다. 대학살이 시작되었고 그 일을 한 것이 미국의 기병대입니다. 주로 동부에서 살고 있던 미국이 처음부터 서부로 간 것이 아니고, 담배조세가 발단이 되어서 프랑스와 협력해서 영국과 대판 싸우게 되는데 그 싸움에서 승리해서 생긴 나라가 아메리카입니다. 13개주의 최초의 대통령은 워싱턴대통령입니다. 이들이 기치로 내건 사상은 청교도정신입니다. 청교도 정신이 교회가 아니고 국가의 정체입니다. 현재 부시정권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청교도정신에 의해서 국가가 세워졌으니 이제는 종교가 드디어 국가화 된것입니다. 종교가 국가화 되어 버리면 이제는 폭력이 정당화되는 겁니다. 청교도의 힘으로 폭력이 정당화됩니다. 아랍은 이스마엘족속이고 비약속이며 이삭은 약속이기에 구약대로 하면 그리스도인이 알라신을 믿는 이스마엘인들인 아랍을 쳐도 신께서 도와준다는 정당성이 성립됩니다. 그 전쟁이 이라크전쟁으로 그대로 나타났지요?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서 독립을 한 뒤에 남북전쟁이 있게 됩니다. 남부의 흑인들이 있던 목화 면화지대의 흑인들을 영국에서 제일 먼저 수입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미국이 수입하게 됩니다. 그들을 수입해서 농노로 삼으면서 목화나 면화농장들이 발달하고, 북부 디트로이트 지방에는 경공업과 중공업이 발달하게 되니까 남부의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하루에 열대여섯시간씩의 노동을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흑인들은 남부에서 그렇게 노동을 해도 임금을 주지 않습니다. 노예이기 때문이죠. 북쪽에 가면 노예가 노동자로 변합니다. 노동자는 노동하면서 고생을 해도 임금을 받아서 자기돈을 가지고 자기생활이라는 것을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쪽에 있는 노예들을 북쪽에 빼앗기게 되면서 남쪽의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니까 남쪽에서 북쪽에 대해 시비를 걸게 됩니다. 이것이 남북전쟁입니다.
전쟁이 있으면서 도로와 특히 철도가 놓이기 시작하고 눈길을 서쪽으로 돌리게 되는데 이것이 서부개척시대입니다. 이런식으로 철도망이 뚫리면서 서서히 미국이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를 가지고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부각되게 됩니다. 제가 긴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보니 개혁주의라는 것, 혹은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내가 지금보다 더 세지고, 발언권이 높아지고, 내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남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욕망이 예수 믿는 참된 신앙과 결탁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제가 지금 여러분께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교회는 예수님께서 순수하게 거저주시는 영생 복음으로 감사하는 모임이 되어야 하는데 감사하는 모임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끼리 모였으니 이 지역 사회에서 발언권을 높여보자는 식으로 갈수 있다는 겁니다. 의사, 변호사 같은 유력한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힘을 결집하고, 우리 교회오면 취직도 되고, 유능하고 유력한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우리 교회오면 삶에 도움을 준다는 식으로, 더 나아가서 세상에 대해서 우리 교회를 함부로 깔보지 말라는 식으로 힘의 중심체가 되려는 유혹을 늘 받습니다.
그런 교회는 돈많은 사람을 장管?세웁니다. 기부를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생전 가도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가진자는 대환영을 하고 없는 자는 뒷자석에서 보내는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따르면(약 2:3,4)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말씀에 따르면 그런식의 교회에 대한 문제성을 발생시키게 됩니다.
그 교회의 목사는 장로가 뽑고, 장로들이 자신들을 부자라고 인정해주는 같은 유의 목사를 뽑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기득권세력을 가진 보수집단을 옹호하는 목사만 계속해서 줄을 잇게 되고, 만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같으면 교회에 발을 붙일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큰 교회가 등장하게 되면 그 옆에 있는 작은 교회가 은근히 무엇을 희망하겠습니까? 그 큰교회처럼 되기를 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크게 된 정치적인 기술과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갑자기 그 옆의 교회도 “이렇게 하니까 교회가 커지더라”는 정치적인 기술과 방법을 배워서 복음을 포기하고 사업성이 농후한 교회가 세워집니다. 새로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 어디로 가냐하면 방금 그런 큰 교회에 가서 또 교회가 어떻게 하면 커지는가 하는 교회 키우는 기술을 배웁니다. 교회다니던 청년들이 신학교를 갈 때 모델이란 애초부터 사도바울이나 스데반을 본받겠다는 것도, 예수님을 본받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저 큰 교회 어느 목사도 어느 대학 나와서 어느 신학교 나와서 저렇게 당회장이 되었으니 나도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저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되는 교회를 해서, 장차 저 큰 교회 목사처럼 큰 교회에서 자가용을 굴리고 여유로운 노후까지 내다보는 그런 것을 기대하면서 신학교를 가게 되고, 그런 신학생들이 모이는 신학교에서는 그런 신학생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는 교수가 되어야지 만일 거기다가 복음을 전한다면 복음전하는 교수가 쫒겨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분위기가 그렇게 되니 복음을 아는 신학생, 복음을 아는 목사, 교수는 다 쫒겨나 버리고 점점 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논리에 의해서 한국교회 전체가 그 모양으로 되어 갑니다. 그런 판국에 헌신예배를 드린다고 이 목사 저목사를 부르다 보니 교인들의 의식이 “아 교회는 원래 그렇구나. 이 목사가 와도 같은 소리, 저 목사가 와도 같은 소리, 다 같은 소리를 해 대니까, 원래 교회는 그런가 보다”라는 것이 인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복음의 정신은 어디서 찾습니까? 못찾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복음 아는 교인이 교회에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 “어 저 청년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빌어야 복받고, 바쳐야 복받는 줄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우리는 죄인이며 하늘나라 바라보고 살아야 하며 이미 십자가의 피로 받을 복 다 받았다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하면서 그 다음에는 심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심사는 누가 합니까? 이미 기존의 교회에 익숙한 사람이 심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천주교에서 나와서 개혁되었다고 자처한 교회들입니다. 도로 뭐가 되었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확보한 교회되기 위해서 자본위주로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한 교회운영을 하다 보니, 복음을 아는 교인을 추방시키는 작업을 지금도 감시체제를 가동시키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교회들만 있다고 해서, 이 세상에 저런 교회들만 있으니 신앙생활을 못하겠다는 이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핑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런 교회를 만들었다고 여기자는 것입니다.
(어서 오세요! 저분은 김00성도님입니다. 안양의 매인교회에 출석하고 계신데 얼마전에 칠곡에 계시다가 얼마전에 수원에 오셨는데 “수원에 오신지 몇 개월 되었습니까? 한 일년? 아 6개월 퓬甄鳴諮? 여기 오시는데 오래 걸리지요? 지금 우리 모임을 보고 이렇게 오신 것입니다. 같이 오신분은 근처에 사시는 분입니까? 아아 같이 매인교회 나가시는 분이군요. 박기삼사장님은 잘 계십니까? 안부좀 잘 전해주세요. 지금까지 두분이 오실때를 기다리면서 종교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드렸고요. 이제 오셨으니 지금부터 요한복음을 강의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입니다.
17장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셨다고만 되어 있고 실제로 예수님이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이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이고! 많이들 피곤하시죠)
일단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이 될까요, 안될까요? 예수님의 기도가 어떤 것은 응답되고 어떤 것은 응답 안되고 그런 일이 있을수 있을까요? 그런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창세전부터 예수님과 하나님사이에 의논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논한 것을 우리는 몰라요, 성부와 성자께서 어떤식으로 세상을 꾸려나가는지 그런 사항에 대해서 우리는 몰랐는데, 그걸 대변해서 하늘의 뜻을 우리에게 쏟아 내시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바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아는자가 아버지를 아는 자이기에 나를 우회해서 따로 아버지를 알겠다는 생각은 할 필요도 없고 또 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창세전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지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했습니다(요 10:30).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모호하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면 그 전부를 아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산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고 그 산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나오잖아요. 그때 구름위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데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 “너희는 예수님 말만 들으면 된다”는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재가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크신 하나님 전부를 어떻게 알아’ 하면서 너무 소극적으로 낙담할 것이 아니라, ‘아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된 말씀이다’고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야기를 좀더 전개해 봅시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예수님의 기도에 응축되겠지요. 왜냐하면 기도란 장차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을 미리 다 땡겨서 이야기했으니까, 예수님의 기도를 파악하면 장차 예수님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을 다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다 응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지금부터 분석해 보면, 이 긴긴 기도를 할수 없고 중요한 것을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한꺼번에 한말로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아들로 되어 있는데요. 그러니까 아들이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간단하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들에게만 영생을 준다는 것이 요한복음 17장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묻습니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영생얻는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이 원리에 의해서 그렇습니다. 또 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긴 한데 영생 못얻을 자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반드시 영생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데 영생 못얻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공식대로 하면 굉장히 간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고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영생입니다” 이것은 초등학생도 이해할수 있는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을 방해하는 이 세력의 수풀을 헤치고 그때에도 예수를 믿겠습니까” 하는 이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예수 믿으면 영생 얻는데, 예수만 믿기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믿음이란 예수외에 다른 대상은 믿음의 대상이 아님을 인정하고 믿을 때, 그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 외에 다른 대상은 믿음의 대상이 아님을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믿을때 그래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출 20:3 너는 나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듯이, 예수님을 믿을때도 예수님 외에는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데 방해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는 아내죠. 남편이고 자식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일을 제일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방해합니다. 사람은 나를 믿습니다. 태어날때부터. 아담의 후손으로서 모든 자손은 출생할때부터 누굴 믿는가? 태어나면서부터 아무것도 안믿는데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에게로 돌아간다는 식으로 이미 나에 대한 신앙이 확고한 채로 어린애로 “응애”하고 태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믿는 것을 끊어 버리고 나 자리에 예수님을 집어 넣고, 예수 믿는 나가 된다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가능치 않습니다.
가능치 않은데 “목사님! 어떻게 하면 가능하겠습니까?” 라고는 묻지 마세요. 가능치 않으니까 가능치 않은 것입니다. 가능치 않으니까 가능치 않은 것으로 그냥 내버려두시기 바랍니다. 가능치 않은 것을 자꾸 가능한 것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여전히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서 예수 믿는다는 일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바다가 저절로 자크가 열리듯이 갈라지는것도 있을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도 있을수 없고, 갑자기 요단강물이 흐르다가 중간에 끊어져서 흐르는 것도 있을수 없어요. 그리고 산에 있는 나무가 뽑혀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바다에 풍덩 빠지는 것 있을수 없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있을수 없는 것입니다. 예상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내 힘으로 어떤 트릭을 쓰는 식으로 하나님을 속여보려고 해도 하나님은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 예수 믿는 나를 또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아 내가 예수 믿다니 내가 얼마나 훌륭하냐’하는 식으로 결국은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내용이 되고, 실제로 마지막 그 내용의 끝은 예수 믿는 나를 믿는 식이 되어 버리는데 이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지요. 자기를 위장하는 거죠. 스스로 자기를 종교적인 행색으로 포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러한 우리의 진실성까지 그냥 수용하세요. ‘아 내 힘으로 예수 믿는 것은 있을수 없구나’하는 점을 분명하게 실제 상황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아 잘만 하면, 어떤 마음가짐, 아예 나를 쳐버릴까? 아니면 내가 금식을 할까? 철야를 할까? 아니면 내 재산을 전부 팔아서 주님께, 교회에 가져다 바쳐버릴까? 내가 어떤식으로든 믿고 성령을 받아야 할텐데 내가 어떤 수단을 쓰면 됩니까? 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바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불멸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불멸적인 존재로 살아 남으려고, 지금도 살아 있지만 천국가서 또 살려고. 불멸적인 존재로 살겠다는 이것은 인간적인 이기적인 욕심이죠. 이것을 “포이에르 바하”라는 철학자가 철저히 지적했습니다. “주님이 사랑이라고 웃기지 말라 놀고있네. 사랑이 주님이겠지. 저희들이 대충 사랑이라 해서 기독교를 만들어 놓고 저희들끼리 천당간다고 우기고 있는데 귀신을 속여라 나는 못속인다”라는 식으로 했습니다. 맞는 이야기죠.
그런데 요한복음 17장에 보니까, 오늘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아까 한 것.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 됩니까 안됩니까? 되죠. 여기에 바로 희망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내가 말한 내용을 못알아 듣는 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너희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말의 연결이 아주 재미나고 낯설고 희한하죠. 지금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예수 믿어서 천당가서 불멸의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이것이 평생을 짓누르는 무거운 쇳덩어리 같은 것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천당가서 여기서도 살고 또 가서 살려고 하는 것, 이것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볍게 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알아서 아주 착하게 되어서 순종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만, 창세전에 예정된 자만,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되죠.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가 납득이 되는 사람에 한해서만 그야말로 무거운 짐은 다 떨어져 나간다는 거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의논한대로 자기 기도의 응답의 열매로서 여기 맺히고 저기 맺히고, 맺히는 그 포도송이 봉지 안에 여러분이 들었고 나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나됨은, 성도의 성도됨은 마치 요새 포도송이에 종이 싸서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것 있죠. 요한복음 15장에 분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맙게도 포도원의 농사꾼이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고, 원래 포도나무는 있어요 있는데, 그 포도나무에서 삐져나오는 가지와 열매들은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들일때, 그때 그 가지는 열매를 안맺힐수가 없고 그러한 열매들만 포도나무에 연결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때 제자들은 이런 이야기들이 납득이 제대로 되지를 않았어요. 베드로라는 인간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기껏 이런 것 밖에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어 주니까 “주님이여! 왜 제 발을 씻습니까? 아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시려고요? 그렇다면 저의 온몸을 씻어야죠”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기가차서 “발을 씻는다는 의미는 이미 너는 나로 인하여 깨끗하여졌음”을, 그때는 아니지만 장차 십자가를 지게 되면 그렇게 되죠. 그냥 전체의 달라짐을 부분을 가지고 표현한거예요. 이거 씻고 이거 씻고 이렇게 씻는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여러분이 요리 맛볼때 다 맛봅니까? 그러면 요리 다 없어지게요. 하나를 찍어서 맛보면 전체 요리의 맛을 다 아는 것이 되는 것처럼, 발을 씻으면 베드로는 이미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그냥 다 되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는 그것을 안믿습니다. 안믿으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때 닭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하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언제 아느냐 하면 장차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할때 무슨 이야기를 집어 넣는가 하면 닭이야기를 해놓았다고요. 닭이야기를. 베드로는 설마 내가 부인할 때 닭이 울줄 몰랐거든요. 그런데 베드로가 부인할 때 닭이 울었다는 말은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부인할 것까지 다 예상하고 다 알았다는 뜻입니다. 알고 닭과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늦게 온것도 다 주께서는 아시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다 주님의 응답입니다. 발걸음을 주께서 세시고.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무거운 짐이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이. 내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예정된 뜻만 자꾸 담다 보니까, 어떤 사람은 남자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대머리가 되어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머리숱이 많은 사람으로 태어나고. 이것은 주님의 뜻에 의해서 다 정보가 집어 넣어진 것입니다.
계속 이야기해 봅시다. 자 그러면 예수님의 기도의 응답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작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작업에. 작업이라 한다고 남여간에 연애하는 그것만 작업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작업에 들어가시는데 자! 어떻게 들어가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신앙인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많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하겠습니다. 제가 그냥 상투적으로 세속적으로 작업, 주님의 작업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작업이 어떤 사람속에 들어오게 되면 자기것은 이렇게 빠져 나갑니다. 공간의 교체입니다. 이것이 평생이 가는 데요. 평생갈 때 두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빠져나온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 들어온 것이 무엇인가? 이 두가지를 다 알아야 되겠지요. 빠져나온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힘으로 구원받기’입니다. 내가 기도해서 구원받기, 전도해서 구원받기, 헌금해서 구원받기, 봉사해서 구원받기 등등 내 힘으로 구원받기. 요것이 성령이 임하면 부정당하고 빠져 나갑니다. ‘아하 내가 아니고 인도하시는 분이 따로 있구나. 그 인도하심이 따로 있구나 하는 것은 주님의 작업이 들어오는 시점입니다. 그것이 평생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 구원받기’가 이것이 만만치 않거든요. 계속 속에서 샘물로 계속 올라옵니다. 우리의 욕망은 계속 올라온다고요. 계속 올라오기 때문에 올라오는 것 마다 되쳐버리는 것입니다. 올라오는 것 마다. 올라올때마다 쳐버립니다. ‘역시 내가 공부 잘하는 것도 내 힘이지’라고 하면 주님이 와가지고 성령으로서 쳐버리는 것입니다. 내 기도덕분이라든지. ‘역시 내가 40일 기도하니까 효험좀 봤지’ 이렇게 하면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지 너의 기도는 아니야’라고 주님의 기도를 새롭게 크게 부각시키는 쪽으로 내 기도는 잘라 버립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내가 저 수원에 가서 일해볼까’하면서 칠곡에 있다가 수원까지 오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동안의 모든 작업은 누가 했나. 본인이 했을 것이 아닙니까? 알아볼 것 알아보고 다 본인이 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만일에 수원에 온 것이 내힘으로 한것이라고 했다가 다시 용인으로 가야 한다고 하면, 내가 잘못한 것이 되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지요. 하나님은 네가 수원에 온 것이 네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고 잘라 냄으로 말미암아 이 무거운 쇠덩어리가 날아가 버려요. 날아가면서 앞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가벼운 마음으로 주님께 의지하게 되겠지요. 요거. 8분 갑니다. 요 기분. 요거 짧은 사람은 한 5초 가는가 몰라. 사람이라는 것은 은혜 받을때가 짧아요. 진짜 짧습니다. 이것이 오래 안가요. 주여 울면서, “나같은 죄인---” 부를때 이것이 405장인데 4절까지 다 부르기도 전에 은혜 다 날아갑니다. 1절부를때 감사하지 3절, 4절 부를때 쯤이면 ‘감사고 뭐고 빨리 끝내고 가자’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한번만 들어오시면 되고 계속해서 상주해 계시는 분으로 죽을때까지 가야 되요. 그래서 죽을때에도 십자가 붙들고 구원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한 것이 그 교체작업이 누구의 작업이기 때문에. 주님의 작업이지 내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끝까지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해서 구원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동네가 뭐냐? “교회” 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자랑하면 안되요? 전도를 자랑하면 안되고, 헌금을 자랑하면 안되고, 직분을 자랑하면 안되고, 성경을 많이 안다고 자랑하면 안되고, 나는 죄인이며 모든 공로는 주님께만 돌리는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겠지요. 그 교회상을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제가 지금 긴긴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 점이 약간 어렵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과 성경을 같이 보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 9절 그 대목이 상당히 좀 어려워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다시 묻습니다. 이 기도 응답 됩니까 안됩니까? 대답한번 해보세요. 그냥 쉽게 대답한번 해 보세요. 이 기도 응답 됩니까 안됩니까? 되죠. 그러면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은 내 뜻이 우선이었습니까? 주의 뜻이 우선이었습니까? “내게 주신 자”라고 아는 것은 주님이 먼저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이 먼저 있어서 그 결과로 ‘주님은 나에게 구세주’라는 믿음의 현상이, 반응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교회 앞에서 “당신 ale음 좋다”고 할때 뭐라고 솔직하게 고백하겠습니까? “제가 믿음 좋은 것이 아니고요 주께서 먼저 아셔서 제게 믿음 주셨습니다”라는 말을 하겠지요. 이게 정답 맞잖아요. 이게 정답이 맞게 되면 목사들은 여기서 긴장해야 합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동안 믿음없는 사람에 대한 목사들의 인간적인 작업이 다 깨져 버리잖아요. 거짓말이 되잖아요. 헌금 바치고 기도하면 믿음 생긴다는 이 말이 다 거짓말이고 사기가 되잖아요. 그러면 그 교인 쫒아 내야지요. 왜냐하면 목사 자기가 밥먹고 살려면 쫒아 내야지요. ‘목사의 기도로 믿음 얻습니다’ 하는 이 말을 왜 안집어 넣는냐는 것이거든요. 그쪽 동네사람들이. ‘우리 성도가 금요 철야 기도하는 덕분에 당신이 믿었습니다’ 하는 이 말을 왜 안하느냐 하는 이야기거든요. 그게 목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래 그럼 네 말은 목사 없이도 된다는 말이지. 그럼 네가 알아서 잘 해봐라”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거는 교회가 질서가 없어. 교회가 위 아래가 없어. 지 맘대로야”
순수한 고백을 해도 문제라. 다시 한번 정리 해봅시다. 이 9절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 위함이 아니요?” 무엇을 위함이 아니라고 했습니까? 거기 무슨 자가 들어가지요? 괄호에 무엇이 들어가지요? 절대로 주님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세상을 위하여는 기도하지 않는다. 이 소리를 기존교회에서 하다가는요 이단소리 듣습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세상 전부를 사랑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 17장 9절에 보니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때려죽여도 주님은 무엇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목표점이 따로 있어요. 세상 다가 아니라 세상 중에서도 누구를 위해서? 천당가고 싶은사람? 아닙니다. 죽어?천당은 다 가고 싶어요. 그럼 누구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미리 점지한 사람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겁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창녀촌에 가든지, 술을 먹든지 몰라. 무조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그가 어디로 빠지든지, 미국 가든지 말레이시아 가든지 어디 가든지 계속 기도해요. 그가 어디를 가도 주님의 기도를 피할 구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뜻에 의해서 주님께서 동원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너는 내거야 임마” 하고 찍었으면 그 사람은 평생 때려 죽여도 천당갈 사람이라. 예수님께서 천국을 가도록 찍었으면 그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지옥을 갈수 없는 아주 괜찮은 팔자가 되었어요.
그걸 가지고 세글자로 “예정론”이라 합니다. 요즘에 무슨 이상한 예정론이 많아서 탈이지만 “예정론”을 제대로 알면 무거운 짐이 날아갑니다. 왜냐하면 지금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다 예정되었기 때문에. 내가 주체가 아니고 누가 주체다? 날 위해서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응답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 오늘 하루 일과예요. 내 일기장에 쓰는 것이 전부다 기도 응답입니다. 그 기도 응답이 뭐냐 하면,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지금 사모님이 병들어서 몸이 아픈것이나 어떤 경우데도 무엇은 끊어지지 않는다고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그 앞의 로마서 8장 본문에서(롬 8:1) 이렇게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를 죄가 있다고 송사할 때 고소할 때 그런 송사마저 주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런 고발을 능가해서 주어진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너보고 고소하라고 해 걱정하지 마. 그렇게 고소한다고 해서 사랑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야”라는 쪽으로 주님께서 그렇게 설명합니다.
오늘 낮에도 서울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스가랴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니까 마귀가 와서
마귀 : 주님! 주님 : 왜 마귀 : 당신 종 꼴 좋습니다. 저 죄 때문에 얼마나 더러운지 주님 : 더럽지? 마귀 : 더럽지요. 저게 뭐 인간이 저렇게 더러운 것이 있습니까? 주님 : 어이! 천사! 옷 한 벌 가져오라
마귀가 보는 앞에서 여호수아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헌옷을 벗기고 새옷을 입혀 놓았습니다. 입혀 놓고서 하는 말이 “사탄아! 옷 더럽나”고 하니까 사탄이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피로서 힌옷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마귀가 그 사람의 평소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리 시비를 걸고 고발을 해도 주님께서 십자가로 입혀놓은 그 용서, 사랑을 어떤 것도 취소를 시킬수가 없습니다. 무효! 무효! 이거 게임무효! 라고 나설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세요. 마귀는 매일 같이 고소하고, 주님은 매일같이 용서하고. 그렇게 보면 됩니다. 마귀는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이 마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데도 예수를 믿나 이바보야”이렇게 나오는 것이 마귀입니다. “너 이번 시험에 또 떨어졌잖아. 그런데도 계속 교회 다닐래. 집어 치워라 예수 그만 믿어라” 이것이 마귀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어떤 것이 와도 주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보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극한 가운데 집어 넣어 버립니다. 낮은 곳으로 가는데 감사하게도 우리가 더 낮은 곳으로 낮은곳으로 갈수록 더 먼저 더 빨리 낮은 곳으로 먼저 가 계신 분이 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이 저 밑바닥 지하 2645미터, 저 낮고 낮은 밑바닥에서 처참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를 받아 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낮아져도 주님보다는 높아요. 그 높은 우리를 우리보다 낮은 주님이 우리를 받아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세리와 창기가 천당 먼저가는 그 용서를 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그 낮은 자리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지요. 그 작업을 하기 위한 기도가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주님이여 주께서 보낸자 제가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주께서 지정한자 내가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이 9절까지 인데 그 뒤에 약간 더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니 참 좋아. 무거운 짐이 다 날아가고. 현재 나에게 채우는 것은 나의 작업이 아니고 주님의 작업이 막 채워져서 어떤 경우에도 영생이 취소되는 법이 없고 심지어 마귀앞에서조차 고소하는데도 주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이것이 참 좋은데 문제는 내가 그렇게 선택받았는지는 어떻게 아는가 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님의 기도의 효력을 다시 한번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12을 봅시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뻐서 구원한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하다 보니까 성경대로 뽑혀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를 명단에 집어 넣어서 성경대로 우리에게 다 적용시켜 줍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모든 사람을 보전하지요. 보존하는데 한 사람 멸망의 자식은 절대로 보존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열두 제자가 어떻게 구원받았고 어떻게 탈락했으며 그것을 먼저 보자는 것입니다. 아까 제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알수 있습니까? 그 질문을 했잖아요. 그 질문에 앞서서 그 질문을 모델로 삼기 위해서 열두 제자의 운명과 한 제자의 운명이 어떻게 갈라 섰는가를 조사해 보자는 것입니다. 조사를 해 보니 열두제자 모두가 무엇을 했습니까? 기적을 일으켰고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가룟유다도 기적을 일으키고 다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니 열두제자 모두가 다 문제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이 서로 누가 제일 높으냐는 식으로 싸우기도 하고(눅 9:46, ), 야고보와 요한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해서 다른 제자들의 눈총을 받고 예수님께 책망을 많이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다고 할때 베드로가 그리 말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16:23).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뒤에 제자들이 어디로 갔습니까? 고기 잡으러 갔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열두제자의 특징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선택했는데, 이들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누가 누가 잘하나 하는 식으로 경쟁을 붙여서 건져내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아까 이야기 했듯이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지난시간에 한 것 같은데 참석을 안하신 분들도 있는 것 같으니 한번더 보기로 합시다. 요한복음 13장 27절을 봅시다. “조각을 받은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보세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기 전에 “열한”과 “일”을 분리 하는데 성령받은자 아니면 악령받은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구 대략 60억 인구중에서. 왜냐하면 여기서 열둘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두명과 관계있다는 말은 모든 인류를 열두명의 관계로 대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부터 처리해 들어갑니다. 하나에게 반드시 무엇이 들어갑니까? 사탄이 들어가지요. 사탄이 들어가고 나중에 요한복음에 계속해서 여러번 나옵니다만 나머지 열 한명한테는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이 옵니다.
이것이 하이라이트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룰때 성령도 안받고 악령도 안받고 그냥 두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받든지 악령받든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마지막에 천국과 지옥 둘로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고 제삼의 비무장지대에 두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결국은 갈라져요. 마지막때에 모든 사람을 부활시켜서 ?사람은 영광의 부활로 한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심판과 영광 둘중의 하나지 제삼의 중립지대에 따로 모여서 우리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고 우리는 모여서 예배한다는 식으로 이런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작업을 지금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다 의논해서 끝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오면 되지요. 이제 결론을 내겠습니다. “내가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뭔가 오시면 되는 겁니다. 악령이 오든지 성령이 오시면 되는데 이제 나머지 요한복음 성경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사탄아 들어가라 해서 보내버리고 그 나머지는 성령이 오게 되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서 내 힘으로 구원받을수 없는 나는 죄인이며 나의 영생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된다는 이 두가지 요소를 성령이 오신 사람에 한해서 이것이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악령을 받은 사람은 나는 죄인이 아니며 지금도 당당하고 예수 믿기 전에도 당당하고 의인인데 다만 예수 믿는 것으로 보태서 약간 더 의인되었다고 주장하고 그리고 예수 믿음으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모델로 삼아서 내가 착해지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영인 성령께서는 이런 고백을 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16:18 봅시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16장 8절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라”고 하지요? 이런 죄나 의에 대해서 책망 받아 본적이 없을때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너 말이야 너 죄인이야”라고 지적받은 적이 없을때. 성령은 우리를 십자가앞으로 데려가서, 주님의 십자가의 그 피흘리는 모습앞에서 ‘아 우리는 전적으로 죄인이구나. 그런데 내가 구원받는 것은 저 흘리는 피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이렇게 고백이 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예수를 주라고 할수 없고, 예수를 주라고 할수 없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의해서.
그러면 마지막으로, “목사님! 성령받은 사람이 너무나 적습니다”고 할 겁니다. 사실은 적은 것이 아니고 많은 것이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으로 해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을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전부다 태어날때부터 누구중심이다? 나 중심이기 때문에. 나 중심인 인간이 갑자기 자기를 죄로 규정하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의지한다는 것 자체가 성령받은 사람만의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은 로또 당첨보다 더 큰 기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고마워 해야 하지 “다른 사람은요” 하고 나올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래 이방인은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인데 이만큼 있는 것도 다행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원래 티오가 생겨서 들어간 것이지 그냥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빈자리가 생겨나니까 들어간것입니다. 그런데 적다고 하지만 사실은 여러분들이 증거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혹시 증거해 보세요. 예상치도 않은 사람이, 술꾼이 혹시 또 예수 믿을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술 안끊고 담배 안끊어도, 자기가 죄인인줄 알고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의 피만 의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술끊고 담배끊는 윤리는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쁜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인이며, 이 해결점은 나의 착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이 해결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어떤 목사, 장로, 어떤 교인앞에서도 예수님만 쳐다 볼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예수님 하신 일을 다시 한번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우리 잘난 것 가지고 남 잘난 것 비교하지 말고, 기죽지 말고, 기죽을 필요도 없이,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정말 무거운 짐지지 말고 주님께서 작정한 대로 가고 있다는 이 즐거움에 가벼운 마음으로 동참하면서 주님의 은혜만 감사할수 있는 저희들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