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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닐 생명말씀(2017.12.31. 말씀 / 창세기 2:15-17
선한 욕망을 가지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happy new year! 어느새 2017년 한 해도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아쉬움도 많이 있지만 또한 새 날을 기다리는 설레임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지난 날의 아쉬움 보다는 새 해 새 날의 꿈과 비존을 붙드시기를 기도 합니다. 누구던지 새 날을 맞이하게 되면 지난 해 보다 더 나은 새로운 꿈을 꾸기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꿈이 있습니까? 그런데 꿈을 꾼다고 됩니까? 꿈이란 꾼다고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로 꿈에 대한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꿈이 자라고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꿈을 욕망’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죽음에 이를 때 까지 욕망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ㅇ르 보면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욕망으로 시작해서 죄를 짓고 추방당하는 비극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16-17)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여자를 시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였는가? 사실은 그것을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먹는 날에게는 하나님같이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키하면서도 따먹도록 종용하였습니다. 사단의 시험을 받은 여자의 마음은 먹지 말라고 금한 선악과를 따먹고자 하는 욕망으로 변했습니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결국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막히고,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여 고통하며 해산을 하고, 평생 땀흘려 수고하다가 죽어야 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후에 아담과 이브는 가인가 아벨을 낳았는데... 욕망은 더욱 커지면서 죄에 죄ㅐ를 더하였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돌로쳐 죽였고, 라멕 때에는 죄의 욕망이 자라서 죄의 벌이 77배로 자랐습니다. 바벨탑 사건을 보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욕망이 하늘 끝까지 다았고, 하나님의 그들의 언어를 흐트러트리는 사건도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바르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 욕망은 오늘도 쉬지 않고 자라고 있습니다. 달나라 금성 목성까지 도달하고자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있습니다. 부패한 정치지도자들을 보면 과관 입니다. 국민 세금 빼돌리는 것은 기본이고, 자격 없는 자식들 명문대 들여보내고, 대기업과 짜고 고스도하고, 심지어 국정까지 농단하다 법정에 끌려갑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속에 욕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처음에는 돈, 그 다음에는 권력, 명예...그리고 자식들에 이르기까지 욕망이란 쉬는 법이 없습니다. 왜 이런 욕망을 놓지 않을까요? 욕망이 주는 쾌락 때문입니다. 그런 욕망과 쾌락은 영원하지 않고 도달하는 순간 곧바로 권태와 무기력에 빠지게 되지만 또 다른 욕망에 손을 뻗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 철학자들은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같은 경우 욕망을 필요한 욕망과 불필요한 욕망으로 나눈 뒤 불필요한 욕망을 절제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운명에 대한 순응과 이성의 힘으로 극복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욕망을 충족하면 또 다른 욕망이 고개를 들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고통과 불행의 연속이라고 말했습니다. 홉스는 욕망의 진정한 목표는 미래에 욕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라며 권력에 대한 욕망을 주장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세계의 질서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바꾸도록 힘써라고 말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철학자들 이외에도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은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정의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더욱이 욕망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터부시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정의한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대표가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좋은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기 때문에 그 대상이 좋은 것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욕망의 긍정성을 설파했습니다. 들뢰즈는 욕망이야 말로 건설적, 생산적 창조성의 원천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컨대 인간의 현재 보다 더 성장 하고 싶은 욕망으로 사회가 만들어 졌고 문화가 생겨났고 문명이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피노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이런 말을 처음 일 것입니다. 과거 같았으면 저도 욕망이라는 것을 부정적 말로 봤겠지만 지금은 신선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욕망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며 그 끝없는 욕망 때문에 망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 욕망이란 것이 선하거나 악하다고 단정하기 앞서 욕망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자연만물에는 따르는 동일한 자연 법칙이 있는데 ... 신체에서 일어난 충동이나 정신 의지 모두가 그 법칙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힘' '능력' 이고, 그 힘의 원천이 바로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자연도, 우리 몸도, 정신도 정지 상태에 들어갑니다. 무기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힘 이 없다" "귀찮다" "일어나기 싫다" "일하기 싫다 "....그 이유는 힘이 없다기보다 근본 힘을 움직일 수 있는 욕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욕망이 없으면 존재가 다 귀찮아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욕망이란 것을 선과 악으로 단정 짓기 전에 자연만물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 정신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 이라는 것을 이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욕망이란 단어를 열망, 소망, 사랑, 열심 등으로 달리 표현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가끔 저는 생각 합니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날마다 성경을 읽고, 추운 새벽 마다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산기슭에 무릎 꿇는지.. 어제도 9시 넘어들어와 사진 좀 정리하고, 또 새벽에 일어나 따듯한 물마시고, 산을 올랐습니다. 또 하루 빠져도 될 것 같은데 또 12시까지 글을 써서 올리고, UJJall 형제 오라고해서 창세기 말씀 공부를 하였습니다. 무슨 힘으로 이렇게 성경을 가르치는지, 무슨 힘으로 삼치인 내가 날마다 색소폰을 부는지, 무슨 힘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지, 무슨 힘으로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도 멈춰서 사진을 찍는지... 어떤 고상한 목표를 향한 욕망이 없다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보이지 않는 힘의 원천 욕망이 내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욕망이 없다면 안에 힘이 있어도 힘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가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이브가 욕망을 선악과로 향하지 않고 생명나무로 향하였더라면 어떠하였겠습니까? 만일에 욕망이 없었더라면 선악과도 생나무 열매도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욕망이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사단에 시험을 받아 욕망이 나쁜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하는 것이 바를 것입니다. 이도저도 아무런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욕망이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선한 것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것 없고 그 분을 향한 사랑을 놓지 않고 꽉 붙들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의 내면의 욕망을 선으로 이끌어주는 또 하나의 나침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을 바탕으로 한 욕망의 결과는 반드시 행복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없는 욕망은 결국 탐욕으로 빠질 수밖에 없고 결과는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늘 두 가지 앞에 놓여 있습니다. 선악과인가 생명 나무 열매 인가? 에피쿠로스 학파처럼 욕망을 절제하지 않으면 불행해지기 때문에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들뢰즈의 말처럼 건설적인 욕망을 최대한 발동시켜 사회와 문명을 발전 시켜야하는지까? 개인적으로 저는 들뢰즈의 주장에 찬성을 합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욕망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식욕, 수면욕, 성욕만 충족되면 만족감을 느끼며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을 때 음식의 질을 고려하고 수면의 질을 고려합니다. 가지고 있음에도 더 나은 것을 생각하며 끊임 없이 연구하고 벌전 시킵니다. 핸펀도 보십시오. 노트 8가지 나왔습니다. 항상 업그레이드 됩니다. 자동차도 자동주행... 이렇게 현재 머물러 있지 않고 더 나은 것을 생각하고 기대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만족도 더 큰 만족, 행복도 더 큰 행복, 편리함도 더 큰 편리함. 서울에 올라가서 박중용 목사님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습니다. 집에 가보니 탄산수를 만들어 먹는 기계가 있습니다. 그냥 물도 만족이 안 되서 좀 더 좋은 탄산수를 만들어 먹도록 기계가 나온 것입니다. 운동기계도 있었습니다. 거꾸리도 있지만 다리 벌리고 몸 위장 흔들어주는 운동기구도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사용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올라가서 흔들면 잠이 확 달아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큰 만족을 느낄까? 어떻게 하면 더 큰 편안함을 느낄까? 그렇게 멈추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라는 것은 인간성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있고, 입을 것 있으면 동물처럼 스톱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스피노자는 말한 것입니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책을 몇 권만 읽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계속 발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만일에 나이가 좀 들어서 이제 60이 넘었으니 하면서 욕망을 멈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늙는 것입니다. 이번에 한 고우에 가서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었네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책을 읽는 사람 늙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매일 새벽 뜨듯한 물 마시기. 운동하지 등산하지 낡은 공기마시며 기도하지, 젊은이들과 같이 성경공부하며 놀지... 젊다는 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좋은 욕망에도 위험성이 따릅니다. 하늘을 날기 위해 비행체를 만들려 시도하다가 많은 과학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과거 보다 발전했고 성취를 이루었으며 지금의 항공 산업에 초석을 놓게 되었고 앞으로는 달나라 여행을 눈앞에 두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을 포기하고 욕망에 몰두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많습니다. 즉 이들이 욕구 충족에 만족하지 않고 욕망에 집중했기 때문에 큰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뿐 아니라 정신 사상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상의 역사라는 책을 읽다보니 우리가 지금 누리는 종교 사상의 자유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피를 흘리며 싸웠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할 정도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으로서 인격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면 그냥 시키는 대로 노예처럼 사는 존재가 되던지 동물 같은 존재가되던지 할 것입니다. 북한을 보십시오. 그들이 하고 싶은 말, 생각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삽니까? 그들은 자유를 찾아 계속 탈북하고 있습니다. .독재자의 권력 아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이들이 2000만이 됩니다. 인간이 아니라면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면 되겠지만 저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종교도 선택하고, 자유롭게 남한 노래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니 인간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번 공동 경비구역을 넘어온 병사가 병원에서 “남한 노래를 듣고 싶네다”고 한 것은 인간의 욕망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살았으면 감사하고 족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살았기에 또 욕망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 학파처럼 불필요한 욕망들 사치, 도박, 유흥 음란등 소모적인 욕망들을 절제하고 건설적인 욕망을 감별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나의 이 욕망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지, 사회에 혼란을 주지 않을지도 생각하며 사고 고민해야 합니다. 또한 이 욕망이 어디서 왔는지도 찾아야 합니다. 나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 거울 앞에서 자신에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내일 죽는다 해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것인지?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면서 자신에게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길을 기쁘게 걸어갔고,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서 나온 욕망 우리도 세상을 바꾸워 놓을 수 있습니다. 결론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욕망이 있습니다. 잘 살고자 하는 욕망,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 자유하고자 하는 욕망,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자식들 잘 키워보고자 하는 욕망, 당당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등..이런 욕망이 없으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제대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보람 있고 행복한 결과를 나타내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우리가 바라는 2017년도 꿈들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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